(77)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글쎄, 아이를 가졌을 때 용이 개천에서 갑자기 하늘로 불을 뿜으면서 날아가는 꿈을 꾸었지요.” 흔히 들을 수 있는 태몽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아무리 용꿈을 꾸었더라도 그 아이가 자라나 별볼일 없으면, 그 태몽도 별볼일 없다. 태몽 이외에 건국 시조에 얽힌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단군 신화나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아리송하기도 하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도 신경의 세 번째 조항
우리가 바치는 사도 신경의 세 번째 조항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좀더 세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원래의 뜻을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이 세 번째 조항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와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라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조항이 안고 있는 신앙 고백의 핵심은 무엇인가? 흔히들 마리아의 동정 잉태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데, 과연 이 조항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동정 잉태의 교리는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요한 1,14). 요한 복음의 이해가 문제이다. 어떻게 영적 존재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셨는가를 말하는 데 교리의 핵심이 있다.
동시에 세 번째 조항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구조에서 우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전반부의 고백에선 삼위일체적인 맥락에서 성령의 역할을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개입의 현재를 확인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마리아란 이름으로 불리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한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 개입에 어떻게 협조했는가를 말함으로써 구원 역사에 있어서의 인간의 역할을 말한다. 세 번째 조항은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이 구원 역사 안에 함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구원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과 인간 중 어느 한편이라도 소홀히 여겨질 수 없다. 구원 역사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서도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도 간과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성령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라는 짧은 표현은 예수의 나자렛 출생과 근원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의 기원은 초대 교회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소”(요한 7,27). 여기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심지어는 마리아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는 로마의 한 군인이었다고까지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신앙의 고백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이 아이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셨던 말씀의 육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예수 탄생에 관한 신약 성경의 본문들은 풍부한 구약성경적인 신학을 담고 있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에서 주인공은 성령이시다. 다시 말해 예수 탄생에서도 성령의 역할의 주제가 뚜렷하게 부상한다. 성령께서는 창조의 힘이시고, 새 창조의 힘이시다. 그분께서 천지 창조 처음부터 물 위에 머무르심으로써 인류를 위한 땅은 창조되었는데, 같은 성령께서 이제 마리아 위에 머무르심으로써 그녀가 한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게 된다. 새로운 창조의 힘은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힘이다. 그 새로운 창조의 힘은 바로 성령이시다.
또한 창조와 성자의 관계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연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은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 ……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콜로 1,16; 요한 1,3 참조).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여, 또 그분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는데, 이제 바로 하느님의 아들께서 직접 인간이 되신다. 그러나 만일 주님이신 예수님이 우주의 주님이시고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라면, 그분의 육화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 번째 조항에서 성령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만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궁극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 자신의 변경할 수 없는 약속과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탄생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한 것임을 명백하게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다. 창조의 성령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말씀이 육화하심에 개입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린 고전적인 인간 출생에 관한 신학과 예수 출생에 관한 신학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인간 출생에 관한 고전적인 신학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의 육신을 만들고 그 몸 안에 하느님께서 불멸의 영혼을 주입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실 영원하신 분은 육신을 낳는 그 부모의 힘이 탄생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성령께서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 위에 머무신다. 잉태의 순간부터 하느님의 힘이 감싸셨다.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셨고, 또 하느님의 아들이 한 여인 마리아께 잉태되심으로써 그녀의 아이가 되었다.
마치 태초에 아담이 무(無)에서부터 나왔듯이 예수님은 죄 없으시고, 하느님께 순종하시고, 거룩한 동정녀이신 어머니께 나오신다. 마리아는 새로운 창조이시고 또 새로운 이스라엘이시다. 그녀는 새로운 하와이고 새로운 갈빗대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는 하나의 새로운 날의 시작이요,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이며, 새로운 아담이 탄생함을 암시한다.
“잉태되시고”
옛 로마 신경이나 니케아 신경과 비교해서 보면 사도 신경에만 “잉태되시고”란 표현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린 여기에서 사도 신경이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첨가시키고 있는가에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또 그 표현이 신학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옛 로마 신경에는 “잉태되시고”란 말이 없이 그저 “성령과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로 되어 있다. 이 표현은 예수의 탄생에서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 중에 그 어느 것도 간과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니케아 신경도 “잉태되시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니케아 신경은 영원부터 계시던 말씀의 육화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성령에 의해 그분은 마리아께 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다.” 그렇다면 왜 굳이 사도 신경에 “잉태되시어”란 표현을 삽입하였을까? 사도 신경에 “잉태되시어”란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에 나오는 주의 탄생 예고의 영향이라고 본다. “두고 보시오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루카 1,31). 이런 표현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 마태오나 루카 복음의 영향을 받은 사도 신경의 “잉태되시어”란 표현은 니케아 신경보다 더 직접적으로 요셉의 역할을 배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잉태되시어”란 말을 사도신경에서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는가? “새로운 창조”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잉태되시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은 육화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탄생 설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잉태되시어”란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성(性)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기적적인 임신이라는 것이다. 동정 마리아의 태는 하느님의 절대적 힘에 의해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선 생명을 만드는 인간의 힘은 무능할 뿐이다.
사라, 한나, 엘리사벳 같은 성경의 여인들도 너무 나이가 많다든지 수태 능력이 없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계시자 태동을 느꼈다. 하느님의 말씀의 힘은 언제나 창조적 힘을 지닌다.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태어나게 하실 아이를 위해 여인의 흠 없는 태를 이용하시고, 또 나이가 많다든지 수태 능력이 없다든지 하는 장애 요인을 제거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탄생 설화들에서는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배제되지는 않았는데 비해 예수님의 탄생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아예 배제되었다.
동정 출산은 성경에 있어서 유일한 경우이다. 고대 생물학적인 사고 방식에 따르면 남자는 생명을 뿌리는 종자와 같고 여자는 그것을 받아 키우는 땅과 같다고 여겼다. 예수 탄생에서 남자의 역할이 배제된다면, 태어날 그 아이를 위해 ‘마리아에게 생명의 종자를 누가 뿌렸는가?’라는 물음이 나올 만하다. 아니면 좀더 발전된 생물학에 따른다면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난자를 취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잉태를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염색체가 공급되었는지? 별의별 공상을 다 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한 물음에 성경은 해답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라는 교리는 예수님의 잉태에서 하느님이 마리아의 성관계의 상대자가 아니었다는 것과 동시에 마리아가 아이를 임신하는 데 요셉 역시 그녀의 성관계의 상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라는 교리 표현이 전혀 성적인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이전에 있었던 어떠한 우주의 창조보다도 더 위대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 이전에 있었거나 또 그 이후에 있을 모든 창조에 있어 중심점을 이루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가졌느냐 갖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라는 표현이 의도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동정 잉태를 믿지 못하겠다는 올가미에 걸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신앙의 시야는 생물학적 시야를 넘어서는 것임을 잊지 말자.
[경향잡지, 1994년 5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