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제색도>와
<겸재>에 대하여
'이건희'가 국가에 헌납했다는 그림 중에 <겸재>가 그린 <인왕제색도>가 있다.
이 그림은 국보 216호이고 초대형 그림으로 가로가 138 cm이고, 세로가 79cm나 된다.
현재 홋가가 천억원을 넘는 단다. 국내 최고가이다. 이 그림 하나가 십억짜리 아파트 백채 값이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사전 예약제로 시민들에게 관람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예약이 하늘에 별따기라고 한다.
'진경산수화'인 <인왕제색도> 는 '겸재'가 수성동 남쪽 언덕에서 '인왕산'을 직접 보면서 그렸단다. <인왕제색도> 란 비가 갠 직후에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산수화는 대자연을 직접보면서 물아일체가 되어 그리는 그림이다. <진경산수화> 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풍경을 본 화가의 감흥과 정취를 구현한 그림이다. <인왕제색도> 는 인왕산의 실제 모습과 다르다.
일례를 들면 인왕산엔 폭포가 없는데, <인왕제색도>에는 버젓이 그려져 있다. 같은 시기에 '강세황'이 그린 인왕산 그림에도 폭포는 없다.
인왕산은 해발 338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다. 바로 옆에 있는 북악산 보다도 낮다.
그런데 <인왕제색도>는 웅장하게 그려져 있다.
'겸재'가 그 당시 인왕산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고 그런 느낌을 구현 하고 싶어서 그렇게 그렸을 것이다.
또한 <인왕제색도>는 '겸재' 정선이 1751년에 자신의 지기인 이병연의 쾌유를 빌기 위해서 그렸단다. 이병연은 당시에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당대 제일가는 詩人 묵객이었던 '이병연'은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나흘 후 숨졌다 두 사람은 인왕산 아래 수성동에서 나고 자랐다.
'이병연'이 다섯살 연상이지만, 두 사람은 동문수학하면서 평생을 지기지우로 지냈다.
뿐만 아니라 '병연'이 詩를 지어 보내면 '정선'이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정선'이 그림을 그려 보내면 '병연'이 그 그림에 시를 지어 쓰곤 했단다.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이었던 셈이다. <경교명승첩>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양천 현감시절, 한강 일대의 풍경을 '겸재'가 그리고 거기에 '병연'이 詩를 써서 만든게 <경교명승첩>이다.
그런 연유로 강서구에 '겸재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양천향교도 양천구가 아닌 강서구에 있다. 조선시대 양천현은 강서구가 중심이였던 것이다. <인왕제색도> 에는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다.
그 집이 '이병연'의 집이란 설이 있다. (물론 '겸재' 자신의 집 이라거나 '겸재'의 그림을 자주 사 주었던 재력가 '이춘재'의 집이란 설도 있다.)
벗의 쾌유를 기원하는 그림이라면 '병연'의 집이 맞을 것이다. <인왕제색도>에 두 사람의 지극한 우정이 입혀지면서 그림의 가치가 더 높아졌던 것이다.
'겸재'는 가난뱅이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겸재'는 산수화만 그린 건 아니다. 꽃과 동물은 물론 곤충도 잘 그렸다.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37세 때
'이병연'을 따라 금강산에 가서 <해악전신첩>을 그렸을 때 부터였다.
<인왕제색도>는 그의 나이 76세 때 그렸다. '겸재'는 50대 때엔 험준하고 힘찬 금강산의 산악미를 그렸고, 60대 때엔 부드럽고 서정적인 한강변의 아름다움을 그렸고, 70대 때엔 자유로운 필묵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그의 그림은 파격적인 구도와 생략적 묘사가 두드러 진다. 그는 84세까지 장수하며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전라도 풍경은 한 점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전라도엔 발을 드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주역에 관심이 많았는데 풍수쟁이들이 그의 전라도 행을 만류해서 그랬단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인왕제색도>는 '겸재' 사후 손자가 보관하고 있다가 당대 권력자 '심환지'에게 팔려 갔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개성과 서울 등지에 사는 일인들 손을 거친 다음 미술품 애호가 '손재형'씨에게 입수 되었다가 결국 '고 이병철' 삼성창업자가 손씨로 부터 이 그림을 사들였다.
이회장 사후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이번에 ' 이건희 회장'의 약속에 따라 '이재용'회장이 2020년 10월에 국가에 헌납하여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홍나희' 여사가 관리운영하는
'리움미술관'과 '호암박물관'엔 이번에 헌납된 미술품보다 더 값진 국보인 신라의 금관을 비롯한 진짜배기 미술품과 골동품 보물들이 수두룩하게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처럼 약간의 흠이 있다.
이 그림의 흠은 상단이 잘려져 나간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거기엔 사연이 있다. 원래 그 곳에 '심환지'의 친필 찬시가 적혀있었단다. 그걸 후손들이 제사에 사용하려고 잘라 내었단다. 이런 불학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구!
이제 이 그림이 왜 그 토록 값이 엄청나게 비싸고 미술 애호가들로 부터 명화라고 칭송받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자.
'겸재' 이전까지만해도 조선산수화는 중국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겸재'가 우리 강산의 특성에 맞는 우리식 산수화법을 창안해 내었다.
'겸재' 이전의 우리나라 화가들은 중국의 화풍을 따르고 있었다 중국의 산수화는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뉘는데 남종화는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북종화는 외면적 형사에 치중한다.
'겸재'는 남종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겸재'는 중국화풍을 그대로 따른게 아니라 우리나라 산수에 적합한 화풍을 개발해 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진경산수화> 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진경산수화>를 <신조선 산수화>라 부른다.
산수화를 그리는 기법을 준법이라 한다.
20여 가지나 되는 준법은 대부분 중국에서 개발한 것들이다. '겸재'가 개발한 준법은 단선 준법과
수직준법 등이다.
<인왕제색도>에는 피마준법, 쇄촬준법, 수직준법, 미점준법 등 네가지 준법이 쓰여졌다.
산수화는 이상산수화와 실경산수화, 그리고 진경산수화로 나뉘는데
'이상산수화'는 상상해서 그리고 '실경산수화'는 실제 모습대로 그리고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그리되 화가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여 그린 그림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이상산수화이고 '강세황'의 인왕산 그림은 <실경산수화> 이고 '겸재'가 그린 인왕제색도 는 <진경산수화> 이다. '겸재'의 유작은 400여 점이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 <인왕제색도>가 가장대표적인 걸작 이란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장마 철이라서 열흘간 소낙비가 계속 내렸었단다. '겸재'는 비가 그치자 마자 가장 큰 종이와 붓을 꺼내들고 옥인동 언덕에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보며 자신과 가장 친했던 지기지우인 '이병연'의 쾌유를 빌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이제 <인왕제색도>를 감상해 보자.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산아래 나무와 숲과 자욱한 안개는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선으로 그렸다 일명 俯瞰法이다. 산 위쪽 인왕산의 바위들은 멀리서 위를 올려다 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이른바 高遠法이다. 그렇게 해서 인왕산의 생생한 현장감을 살려낸 것이다.
뒤편의 범바위, 치마바위,
코끼리바위, 기차바위 등 인왕산의 여러 바위들은 큰 붓을 여러번 반복해서 아래로 대담하게 내려 긋는 피마준법 (묵찰법)으로 그렸다.
그래서 바위들이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이 든다.
벗이 사경을 헤메고 있었으니 '겸재'의 마음이 몹씨 무거웠을 것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정상 바로 아래쪽에 있는 치마바위는 중종비 신씨와 얽힌 슬픈 사연이 있다. 남편이 반정으로 갑짜기 왕이 되는 바람에 신씨도 본의 아니게 궁에 따라들어가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신씨의 아비 '신수근'이 연산군
시절 우이정이었다가 반정때 사사 되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형이자 중종의 장인이 된 것이다.
반정공신들은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며 왕비가 된지 7일만에 궁밖 사직동으로 내쫓았다.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덮어놓고 중종이 있는 궁을 바라보며 한을 달래었고 중종 또한 경회루에서 인왕산의 붉은 치마를 바라보며 눈물지었단다.
그 때 부터 그 바위를 치마 바위라 했단다. '겸재'는 어찌하여 치마바위를 중앙에 강조해서 그렸을까? 아마도 이 신씨를 연민하던 중종처럼 '겸재'도 사경을 헤메는 '이병연'을 연민 했던것 같다.그래서 치마바위를 중앙에 강조 하여 그렸지 않았나 싶다.
이 치마바위는 백색 화강암인데 '겸재'는 검게 그렸다. 평론가들은 비를 맞으면 백색바위가 검게 변해서 검게 그렸다고 하지만 내생각으론 벗이 사경을 헤메고 있어서 '겸재'의 마음도 어두어서 검게 그렸을 거라고 여겨진다.
<인왕제색도> 상단의 바위들은 적묵법 쇄찰준법, 수직준법 등으로 그렸다.
수직준법은 위에서 아래로 과감하게 여러번 내려 긋는 기법이다. 인왕산 같은 우리나라 골산의 암벽을 그리는데 적합한 화법이다.
적묵법은 물기가 남아 있는 암벽을 잘 표현 하고 있다.
쇄찰준법은 단단한 인왕산 바위의 괴량감 (질감)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중턱에 있는 우거진 노송은 평두점법으로 그렸다. 노송속에 있는 집한채는 직선으로만 간략하게 그렸다.
기와나 처마 등은 과감하게 생략해서 그린 것이다. 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인왕제색도>의 하단 앞쪽 능선과 나무는 섬세한 붓질로 그렸다. 짧게 끊어 찍어서 米占 (작은 점)으로 그렸다. 이른바 미점준법 또는 우점준법인데 서양의 화법 점묘법과 유사하다.
<인왕제색도>는 그림의 상단부와 중싱부와 하단부가 여러모로 대비된다. '겸재'는 세잔느 보다 먼저 화면 분할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건축거장 프랑크 게리는 <인왕제색도>의 사본을 거실에 걸어 두고 보며 영감을 얻곤 했단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세계가 알아주는 걸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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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봉우리 바위와 계곡
소나무 사이로 안개 자욱한
흑백의 화풍이 언뜻 봐도
인왕산의 역동성이 보이고
무게가 있네요
1000억 입이 딱 벌어집니다
이 가격이면 우리나라 회화
최고의 가격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