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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나진우(羅振宇)
서론
여러분을 1038년, 대송 보원원년, 대요 중희7년, 서하 천수예법연조 원년으로 시간여행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 서하의 연호는 왜 이렇게 길까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 여섯글자? 맞습니다. 이건 중국역사상 가장 긴 연호입니다. 이 해에는 왜 서하의 연호까지 언급했을까요? 왜냐하면 바로 이 해에 서하의 이원호가 칭제했기 때문입니다.
기실 이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전 몇년간 이원호는 계속 황제에 등극할 준비를 해왔습니다. 연호를 먼저 얘기해보겠습니다. 이치대로라면, 서하는 송나라에 칭신(稱臣)하고 있었으므로 송나라의 연호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6년전에 대송이 연호를 명도(明道)로 고쳤습니다. 그러자, 서하에서는 그걸 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서하의 이전 국왕은 이름이 이덕명(李德明)이기 때문에 피휘해야 하니 '명도'로 쓰지 않고, "현도(顯道)"로 쓰겠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이고 하나는 현이니 비슷하지 않습니까. 다시 2년이 지나서는 이원호가 아예 그런 구차한 설명도 붙이지 않고 아예 "현도"를 "광운(廣運)"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건 공개적으로 대송의 연호를 버린 것입니다. 그 시대에 이렇게 연호를 따르지 않는 행위는 "불봉정삭(不奉正朔)"으로 불리며 반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원호가 정식으로 황제를 칭한 것은 1038년 10월 11일의 일입니다. 그는 수도를 흥경부(興慶府)로 정합니다. 즉 오늘날의 영하(寧夏) 은천(銀川)입니다. 국호는 "대하(大夏)"로 정합니다. 그리고 자칭 "세조시문영무흥법건례인효황제(世祖始文英武興法建禮仁孝皇帝)"라 칭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계천(李繼遷)을 태조황제, 부친 이덕명을 태종황제에 추봉합니다. 이때부터, 서하의 황위는 꼬박 10대까지 전해집니다. 1227년에 몽골에 정복될 때까지. 계산해보면 거의 2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닙니다. 북송(北宋)보다도 깁니다.
그렇다면, 서하칭제가 당시 동아시아정치무대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북쪽의 대요는 심정이 비교적 복잡합니다. 한편으로 서하는 대요에서대송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키워준 나라입니다. 그래서 서하가 언제든지 대송에 골치거리를 만들어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서하가 칭제하게 되면, 대요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이 점에서는 대하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요가 보기에 이런 국면이 형성된 것은 양호위환(養虎爲患)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송은 어떨까요? 원래 대송의 서하에 대한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표면적으로 우리 송나라황제를 인정하면 된다. 그외에는 네가 하고싶은대로 해라.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 이것만 제외하면 너에게 관직을 주고, 돈을 주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나는 실질은 필요없고 체면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원호가 정식으로 황제에 올라버렸다. 대송은 즉시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싸우자니, 대송은 이미 30여년간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싸우지 않으려니, 이렇게 공공연한 반역에 대하여 보고도 못본 척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해인 1039년에 이르러, 이원호는 이 난제를 대송의 눈앞에 들이민다. 그는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낸다. 송나라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대송의 군신들은 곤란에 빠진다. 조정의 의견은 둘로 나뉜다. 매파 대신들 예를 들어 추밀원의 관리 왕덕용(王德用), 진집중(陳執中)은 서하의 사신을 죽여버리고 서하와 전쟁을 벌이자자고 주장한다. 비둘기파대신도 당연히 있다. 그들은 사신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다른 대신은 엉터리같은 아이디어도 내놓는다. 아예 사신이 머무는 건물을 무너뜨려서 그들을 압사시켜 버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 일은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최종적으로 대송이 선택한 처리방식은 아주 재미있다: 서하의 사자를 변경으로 되돌려보내고, 그가 가져온 서신, 가져온 선물을 모조리 돌려주는 것이다. 네가 황제에 오른 것에 대하여 내가 승인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고,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해도 좋다. 당연히 이는 모래에 고개를 박는 타조같은 정책이다.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다음 해인 1040년에 이르러, 송-서하전쟁이 발발한다.
송과 요의 반응은 모두 인지상정이고 이해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진정 재미있는 점은 서하의 이원호가 자신이 이전에 칭신했던 큰형님인 요와 송이 기분나빠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왜 굳이 칭제해야했을까이다. 그냥 혼자서 대왕으로 남아 있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핵심 제3자로서 송과 대요의 사이에서 모두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제의 기치를 내걸고 나면 대내적으로는 권력에 변화가 없지만, 대외적으로는 리스크가 크게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대송, 대요와 반목한 결과를 네가 감당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이 사건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럼 1038년의 이원호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보기로 하자. 그는 왜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건 성공했을까?
원호칭제(元昊稱帝)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건 당연히 개인의 야심이다. 이원호가 막 부친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당시 서하는 단지 대송의 번속국(藩屬國)이었다. 그는 대송의 사신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먼저 직접 나가서 영접하지 않으려 했고, 그후에는 대송황제의 조서를 무릎꿇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서하의 선왕들이 정말 크게 잘못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강성한데 왜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그의 이 말을 대송의 사신도 들을 수 있었다. 약간 미친 것이 아닐까? 그렇다. 이원호는 성격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당연하게 칭제의 중요한 원인이다.
다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서하의 국왕들은 이전부터 모두 야심이 있었다. 이원호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 이계천은 직접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현재 이 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격할 기지일 뿐이다. 나는 장래 패업을 이룰 것이다." 이원호의 부친 이덕명은 겉으로 대송에 공손했다. 그러나 실제로 국내에서 쓰는 기물이나 의장은 모두 황제급이었다. 한번은 송진종이 재위할 때인데, 이덕명이 대송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국내에 기근이 들었는데, 조정에서 약간의 식량을 지원해줄 수 있겠는지 물어본다. 당시 대송의 재상은 왕단(王旦)이었다. 왕단은 이렇게 대답한다. "좋다. 문제없다. 식량을 우리가 준비해 놓을 테니, 당신이 개봉으로 와서 가져가라." 그 회신을 보고, 이덕명은 말했다. "아..대송 조정에 고인(高人)이 있구나!" 보라. 이덕명은 대송에 칭신했지만, 그건 표면적이고 실제로는 어떠했는지 쌍방이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이원호가 야심이 있느냐 아니갸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 집안은 대대로 야심이 있었다. 다만 야심을 왜 지금 공개적으로 칭제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이다.
둘째, 황제가 되는 일은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댓가도 있다. 이원호의 입장에서 한번 계산해보도록 하자. 그러면 이익은 잠시 보이지 않는데, 댓가는 아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대송은 원래 매년 서하에 각종 상사(賞賜)를 주었다. 이건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 이때 대송황제가 서하에 주는 것은 대요에 주는 것처럼 명확하게 금액이 정해져 있는 세폐(歲幣)는 아니었지만, 수시로 돈을 보내고, 물건을 보내고, 이익을 주었다. 사서에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번은 이원호가 그의 부친 이덕명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했는데, 이덕명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안된다. 우리 당항인이 30년간 잘먹고 잘 입고 살았는데, 그건 대송천자가 보내준 덕분이다. 이원호는 말한다. 우리 유목민족은 원래 소,말을 키우면서, 가족과 풀을 입는데, 그런 비단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대화를 보면, 그들 부자가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덕명이 얘기한 것은 전체 민족의 현실적인 이익이다. 이원호가 얘기한 것은 개인의 소비취향이다. 이원호가 황제가 되면, 개인은 비단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전체이익에 손실이 있는 것이다. 이건 분명한 일이다.
또 다른 계산도 해야 한다. 서하는 무엇으로 나라를 세웠는가? 은천평원, 새하강남이라는 말도 있고, 양식도 생산된다. 그러나 서하는 전체적으로 무역으로 발전했다. 그들이 대송에 파는 것은 말도 있고, 소금도 있다. 이건 아주 돈이 되는 장사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하가 하서주랑(河西走廊)라는 상업로를 지배한 후에 어떤 사람이 농담처럼 하는 말에 따르면 서하는 그 시대에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좋다 만일 황제가 되면, 대송 및 대요와 전쟁을 해야 하고, 무역은 분명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 국가재정은 무엇을 가지고 지탱하는가. 이건 전쟁을 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이고, 전쟁을 벌이면 엄청난 군사비지출도 감당해야 한다.
여기까지 얘기해보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이원호가 칭제하려는 것은 개인야심이 폭발한 결과라면 아루미 야심이 크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이익앞에서는 쉽게 냉정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 야심의 배후에는 더욱 깊은 이해관계를 따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또 어떤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까?
과거, 중원왕조의 입장에서 왕왕 이런 문제는 고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오랑캐이니까, 그저 성격이 흉포하고 이성에 반하는 거동을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서 기본적인 논리는 같다. 모두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피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원호가 본 칭제의 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원시자료는 아주 적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원호가 대송황제에게 보낸 서신일 것이다. 서신의 내용에는 내가 왜 황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1,2,3,4, 아주 많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대송황제에게 이해해주고 인정해달라고 있다. 그중 한 구절이 아주 재미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주위에는 많은 형제국가들이 있다. 토번(吐蕃), 탑탑(塔塔), 장액(張掖), 교하(交河)같은 나라들인데, 모두 나를 숭배한다. 내가 왕이라고만 칭하면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황제를 칭하면 그들이 나의 통치에 복종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함께 뭉쳐서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문자를 보면, 당연히 이원호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층면도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이원호의 처지도 이해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제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아마도 서하영향력내에 있는 이들 부락을 억누를 수 없다. 이것이 아마 이원호가 칭제하게된 중요한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이건 서하라는 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하의 최초발원지는 섬북(陝北)이다. 대체로 오늘날의 연안(延安) 북쪽이다. 그곳은 황토고원이다. 당나라때 당항인들이 공로를 세웠으므로, 당나라황제는 이 토지를 당항인들에게 준다.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서하의 주요근거지는 지금의 영하가 아닌가? 앞에서 얘기했지만, 그들은 분명 지금의 은천에 도성을 세웠지 않느냐. 맞다. 다만 그 지방은 원래 영주(靈州)였다. 송나라에 이르러 서하가 차지한 땅이다. 보라. 섬북에서 영하로, 서하는 서쪽으로 발전한 것이다.
나중에 계속 서진하여, 2년전에는 서하가 전체 하서주랑을 차지한다. 무슨 금장액(金張掖), 은무위(銀武威)니 주천(酒泉), 돈황(敦煌)이 모두 서하에 귀속된 것이다.
서하의 무력은 확실히 대단하다. 계속하여 공성약지(攻城略地)하였으니, 문제도 있었다. 그것은 민족구성이 너무 복잡해진 것이다.
원래 하서주랑은 중원왕조에서 한무제때부터 경영하기 시작했고, 그때 명명된 장액, 무위, 주천, 돈황이라는 지명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대당성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모두 중원왕조의 영토였다. 다만 안사의 난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은 중화문명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대당제국 자체의 쇠락만이 아니라, 대당성세때의 중국북방, 서방의 영토가 갈라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수백년간 지연정치문제의 근원이 된다.
현재 서방이 통치하는 이 지역을 보면, 대당이 쇠락하면서 남겨진 거대한 진공이다. 8세기부터 토번인, 회흘인, 당항인 그리고 한인들이 이 지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각종 세력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어느 정도로 복잡했는가? 돈황이라는 작은 지역만 놓고 보기로 하자. 돈황은 당시에 사주(沙州)라고 불렸는데, 원래 대당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가 관할했다.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하서절도사는 변방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병력을 내지로 데려가서 반란을 평정한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공백으로 남게 되었고, 토번인이 청장고원에서 내려와 점령하고 60여년간 통치한다. 그후에 사주 현지의 호족인 한인 장의조(張議朝)가 토번인을 몰아내고 돈황을 차지한다. 그는 한인이므로 대당의 백성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대당의 지방정권이 되며 귀의군(歸義軍)이라 불린다. 다만, 실제로 쇠락한 대당은 이 땅을 신경쓸 수 없었다. 이때의 귀의군은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어떤 때는 강하다가 어떤 때는 쇠락한다. 독립적으로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회흘에 부용하기도 한다. 당나라이후의 오대십국시기에 귀의군은 한인내에서 정권이 바뀐다. 장씨는 쫓겨나고 조씨(曹氏)가 장악한다. 이 조씨는 한족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학자들은 소그드인(粟特人)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비단길에서 활약했고, 장사로 유명한 유라시아대륙의 민족이다. 마지막에 즉 2년전에 서하가 병합해버린다.
돈황이라는 한 곳만 해도 이렇게 혼란스러웠다.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지장의 갈등은 아주 복잡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당항인 자신만 하더라도 8개의 부락이 있었다. 그리고 토번인, 회흘인도 여러 소부락으로 나뉘어 있다. 각자의 이익이나 입장이 서로 불일치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점은 그 안에 한인도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하는 이 땅의 정복자로서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하나는 느슨한 부락연맹의 큰형님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도로 질서가 있는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북방유목민족정권은 왕왕 부락연맹이다. 부락간의 관계는 비교적 평등하다. 만일 너의 부락이 커지고 강성해지면 네가 맹주가 되는 것이다. 즉 초원의 선우(單于), 칸(可汗)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너늘 맹주로 존칭하지만, 너는 정말 연맹내부의 자원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는 없다. 부락연맹의 이런 우두머리는 왕왕 사람들을 이끌고 대외전쟁을 한 후에 전쟁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나눠주는 것이다. 일단 대외군사적 승리를 유지할 수 없으면, 전쟁의 이익도 사라지고, 부락연맹은 해체된다.
그러나 칭제를 하는 것은 다르다. 이건 부락을 초월한 정치공동체이다.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다. 중심은 주변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내부는 고도로 불평등하다.
여기까지 분석하면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원호가 왜 칭제하게 되었는지를. 만일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으로 보면, 서하의 상황은 대송, 심지어 대요보다 훨씬 복잡했다. 만일 자신의 기치를 세우지 않으면, 그들 당항인이 조상대대로 힘들게 얻어낸 70여만평방킬로미터의 영토가 내부의 원심력으로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원호는 대송황제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현재 "칭왕하면 좋아하지 않고, 칭제해야 따를 것이다." 내가 단순히 서하의 국왕으로 남으면 그들의 좋아하지 않고, 내가 황제에 올라야만 그들이 복종할 것이다. 이건 아마도 솔직한 말일 것이다.
다만, 황제가 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명칭의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서하국왕에서 대하황제가 되어 신분전환을 이루는 것은 높은 산을 올라가 구름 속에 들어가는 것에 난이도를 비유할 수 있다.
"황제"란 무엇인가?
이원호가 황제가 되려 한다. 각도를 바꾸어 이해하면, 이건 그 본인의 명칭을 황제로 바꾸는 것뿐만이 아니라, 더더욱 서하정권을 제국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무엇인가?
복단대학 정치학과 교수 바오강셩(包剛昇)이 쓴 <저달(抵達)>은 인류의 정치변화사를 얘기하는데, 책에는 하나의 장을 두어 '제국'이라는 현상을 설명한다.
제국은 전현대화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발명이다. 제국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핵심은 두 가지 역량이다. 하나는 군사정복, 이건 이해하기 쉽다. 주먹이 센 사람이 형님이 되는 것이니까. 다른 하나는 정치통제이다. 여기에는 관료체계, 법률체계등등 일련의 통치기술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문화교육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이 면에서 언어문자가 있어야 하고, 종교신앙 혹은 관방학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국내력의 전설이 있어야 하고, 무엇이 정당한 생활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영광이자 꿈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이념을 담은 이야기, 인물, 기물과 부호가 있어야 한다. 등등.
왜 반드시 문화교육시스템을 갖추어야 할까?
생각해보라. 하나의 왕국이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작은 정치공동체라면, 비교적 하기 쉽다. 모두 혈연이 가깝고, 문화도 같고, 같은 지방에서 생활하면 일부러 무슨 문화교육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없다. 그저 모든 것은 관습에 따라 하며 된다. 그러나 제국은 다르다. 제국은 클 뿐아니라 여러 문화와 민족이 속해 있다. 일단 내부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설사 무력적으로 정복을 완성하더라도 쉽게 와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제국을 보자. 제국은 통치비용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일련의 이야기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의 과거가 있고, 공동의 바램이 있다. 우리는 자랑할 만한 성현, 군왕과 도성이 있다. 우리는 휘황한 미래가 있다. 우리는 제국밖의 사람들보다 우월하다 등등.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화교육시스템이다.
우리는 오늘날 "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 눈을 부라리게 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하한 제국이든 전성에는 매력이 충만하다. 생각해보라. 로마제국의 전성기에 제국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로마를 그리워했는지; 만일 로마의 시민권을 얻어 평생 로마의 콜롯세움과 판테온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너는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성당시기에 보통사람들이 장안을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동시, 서시를 돌아다니며 운이 좋아서 대당천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일생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장안에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천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왕유(王維)의 시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가: "구천창개개궁전(九天閶闓開宮殿), 만국의관배면류(萬國衣冠拜冕旒)" 이런 자부심은 보는 사람의 눈조차 번쩍 뜨일 정도이다.
그럼 천애해각(天涯海角)에 사는 사람은? 장안을 생각하면 역시 무한한 그리움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두보(杜甫)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부고성낙일사(夔府孤城落日斜), 매의북두망경화(每依北斗望京華)", 그리고 "일와창강경세만(一臥滄江驚歲晩), 기회청쇄점조반(幾回靑瑣點朝班)" 보라 시인은 기주(夔州)에서 병들어 누워있으면서 눈을 들어보니 늦가을이고 홀로 외롭고 처량하다. 그러나 일단 황제의 곁에서 출근하던 때의 영광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이라면 이렇게 느낄 수 있다. 이건 중심과 주변의 불평등이 아닌가. 다만 역사현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제국의 매력포인트이다. 혹은 우리가 이런 의미를 좀더 철두철미하게 보자면, 제국의 근본특징은 무력을 보유한 것에 있지 않고, 일부러 만들어낸 그 공동의 정신공간에 있다. 무력은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천하를 계속 차지할 수는 없다. 공동의 정신공간은 대대로 전해질 수 있고, 자체적으로 강화되며 제국에 응집력을 계속하여 주입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하나의 제국에서 공동의 정신공간이 와해되어 버리면, 제국도 따라서 붕괴된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의 후기에 제국의 서부는 라틴어를 위주로 하고,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를 위주로 했다. 이런 언어문자의 분화는 로마제국을 분열시켜 서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으로 나뉘는 요소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아마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나의 제국을 창건하는 과정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은가?
통상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제국을 창건하려면, 쇠와 피로 충만한 군사정복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이원호가 서하제국을 건립하는 건을 빌어 얘기하다보면 여러분은 제국을 건립하는데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화가 있고, 매력이 있으며, 신성이 충만하고, 상상력과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원호는 1032년 왕위를 계승하고 황제를 칭하는 1038년까지 6년동안, 그가 힘들여 한 일은 주로 성씨를 고치고, 복식을 고치고, 머리형태를 고치고, 관제를 고치고, 서하문자를 창건하는 등등이었다. 이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별볼 일 없는 일들이 아니었다. 이런 동작은 미래 제국의 응집력을 증강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고, 제로부터 시작하여 문화교육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당연히, 이원호의 난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중국문화의 환경 속에서 황제를 칭했다는 것이다. 이웃 나라인 대송과 대요와 비교하면, 난이도가 더욱 높다. 왜 그런가? 중국의 황제제도는 아주 독특한 군주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라오셩원(饒勝文) 선생은 <진시황평전>에서 전문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황제의 몸에는 합법성 자원이 아주 풍부하고, 입체적이다. 그리고 아주 독특하다.
이와 비교하면 로마제국의 황제는 본질적으로 "제일시민"이다. 원로원과 시민대회에서 수여한 것이다. 나중에 원로원과 시민대회의 권위가 쇠락하면서, 로마황제의 합법성은 단순해진다. 단지 군대에 의지하면 된다. 그외에, 로마황제에게는 스스로 무슨 신성한 광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로마제국말기, 황제를 죽이는 것이 다반사가 되어버린다. 심지어 금위군이 황제의 보좌를 공개입찰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세계의 다른 곳의 군주도 어떤 경우는 신성한 광환을 아주 중시한다. 예를 들어 군권신수같은 것이다. 바오강셩 교수의 <저달>이라는 책의 서문에는 몇 편의 문헌을 볼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군주 함무라비 6세의 선언이 있고,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 1세의 명문이 있다. 거기에는 모두 내가 능력이 얼마나 많고, 하늘이 나를 보우하는지 등등이 실려 있다. 이것도 모두 합법성의 원천이다.
다만, 이와 비교하면, 중국의 황제제도의 합법성 요소는 훨씬 풍부하다. 최소한 6개의 차원이 있다.
첫째, 천명(天命)이다. 하늘이 돌봐주고 허락해야 내가 이 토지를 통치할 수있는 것이다.
둘째, 신성대지(神性大地)이다. 하늘뿐아니라, 삼산오악 대하대천의 신령도 나를 축복한다. 중국문화는 토지를 아주 중시한다. 그래서 왕조교체기에 심지어 오악의 위치를 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명말청초에 북악을 조정했다. 원래의 북악은 하북경내의 대무산(大茂山)인데 그것은 안된다고 생각하여 산서의 항산(恒山)으로 바꾼다. 왜 그랬는가? 수도 북경이 북악보다 이북에 있어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수도가 천하의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닌가. 그건 안될 말이다. 그래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전통"이다. 이 제국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상고의 심후한 심지어 신성이 있는 전통이 있다.
넷째, 나는 천남지북의 각종 서로 다른 사상문화전통을 용납할 수 있고, 나의 체계내에서 화이부동할 수 있다.
다섯째, 나는 천하백성들에게 영구한 평화를 약속하고, 창생의 복지를 창조할 것을 약속할 수 있다.
여섯째, 황제는 통치자일 뿐아니라, 도덕적으로 모범인 성인이다.
이 여섯 가지를 하나로 합치면 요승문 선생이 말한 하나의 중국황제의 합법성모델이 된다. 모두 6개의 차원이다. 숭고한 천명을 띄고, 신성을 가진 대지를 가지며, 뿌리깊고 심후한 역사가 있고, 서로 다른 사상문화전통을 하나러 버무리며, 영구한 평화와 창색복지를 부여할 청사진이 있고, 위대한 성군의 자아기대가 있다.
이 모델을 참조하면 진시황이 옛날에 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시황은 천하를 순행하였는데, 왜 매번 해변으로 갔을까? 그건 햇볕과 모래사장을 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신선을 만나기 위함도 아니며, 새로 합병한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를 향해 그들 지방의 문화에 대한 아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왔다. 나는 현지의 엘리트들에게 호의를 보인다. 진시황이 처음 동순하여 간 곳이 추봉산으로 이곳은 맹자의 고향이다. 거기에서 70명의 제로유생을 모아서 박사로 삼는다. 그리고 나는 현지의 신령에게도 제사지낼 수 있다고 표시한다. 예를 들어, 운몽택에서 순임금을 제사지내고, 회계산에서 대우를 제사지낸다. 이건 모두 현지문화를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진시황이 태산에 봉선(封禪)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진나라 통일이전에 태산에 봉선하는 것은 제(齊)나라의 전통이었다. 진나라군주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자신의 땅에서 했다. 함양에서 서쪽으로 가서 옹성(雍城)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지낸다. 현재 진시황은 동으로 갔고 옛 제나라땅인 태산으로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건 무슨 자태인가? 바로 나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같은 중요한 의식도 모두 너희 동방의 전통에 따라 거행하겠다. 나는 흉금이 넓다. 이후 모두 한 가족이다. 무슨 제나라, 진나라로 구분할 것이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이 있다. 과거에는 오해도 있었던 부분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천하의 병기를 모아서 12개의 거대한 금인(金人)으로 만들었다. 가의의 <과진론>에서는 이렇게 한 목적이 다른 사람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고 했고, 백성들이 진나라의 통치에 반항할 능력을 상실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다만, 논리적으로 그게 통한다고 생각하는가? 병기를 수거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만 해도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반항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녹인 후의 구리는 큰 자원이다. 동전으로 주조해도 되지 않는가? 사실상 동한말기의 동탁은 이 금인을 얻은 후, 그렇게 했었다. 그는 동전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진시황은 왜 다시 큰 비용을 들여 거대한 금인으로 만든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정치적 의사표시이다.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병기는 내가 필요없다. 나는 그것으로 예기를 만들겠다. 소위 "화간과위옥백(化干戈爲玉帛)"이다. 대화로 대항을 대체하겠다. 그럼 12개의 거대한 금인은 하나하나가 중량이 30톤에 이른다. 그것이 함양에 높에 서 있다. 백성들은 멀리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그들은 12개의 거대한 LOGO와 같다. 세상사람들에게 제국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진시황의 평화광고이다.
보라 우리는 과거에 진시황의 역사적 이미지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 우리는 왕왕 진시황을 그저 군사강자로만 인식한다. 기실, 그가 육국을 통일하는 전쟁은 겨우 9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건 파죽지세였다 그건 그의 조상대대로 노력하여 소위 "분육세지여열(奮六世之餘烈)"의 결과이다. 공을 진시황에게만 돌리기 어렵다. 전쟁이 끝난 후의 제도건설은 황제라는 새로운 역할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합법성의 겉옷이다. 즉 하나의 문화교육시스템을 건립한 것이다. 소위 "백대개행진정법(百代皆行秦政法)"은 진시황에 후세에 남긴 최대의 영향이다.
좋다. 진시황에서 이원호까지, 1천여년이 지났다. 진에서 한, 위진에서 남북조, 수에서 당, 중국의 황제제도는 갈수록 성숙해졌다. 현재 너 이원호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느냐. 좋다 네가 독특한 정신공간과 문화교육시스템을 만들어 진시황이 제시한 리스트의 합법성자원을 갖추면, 너 이원호는 황제가 될 수 있다.
너 이원호는 해낼 수 있는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 같다.
이원호는 매우 노력했다. 그는 황위를 승계받은 이후 황제에 오를 때까지, 짧은 6년의 기간동안 아주 많은 일을 했다.
한편으로, 그는 서하의 통치시스템을 다시 설계한다. 군사적으로 징병제를 하고,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을 꾀했다. 개혁의 방향은 아주 명확했다. 즉 부락연맹을 제국체제로 개조하는 것이다: 나는 화하제국처럼 내부에서 자원을 흡수하고, 구조를 형성하며, 역량을 응집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이원호는 독립된 문화교육시스템을 만드는데 쏟았다. 예를 들어, 성명을 고치고, 복식을 고치고, 머리형태를 고치고, 문자를 고치는 등등.
이렇게 많은 개혁을 시행하는데 논리의 메인스트림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황제제도의 합법성을 가진 전통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원호는 자신의 성을 고친다. 기실 엄격히 말해서, 우리가 이때는 그를 조원호(趙元昊)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조(趙)는 송나라천자가 그들 집안에 하사한 성이기 때문이다. 이(李)씨성은 당나라천자가 그들 집안에 하사한 성이다. 이원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둘 다 필요없다. 나의 성은 "외명(嵬名)"이다. 나는 조상이 다르다.
그럼, 이원호는 자신의 조상을 누구라고 인식했는가? 그가 대송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안은 원래 황제였고, 바로 북위(北魏)의 발씨(拓跋氏)이다. 그러나 나중의 역사학자들은 이 말 때문에 바빠진다. 이치대로라면 서하는 당항족이고, 그건 고대 강족(羗族)의 한 갈래이다. 중국서북부의 청해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북위의 탁발씨는 선비족이다. 고대 동호(東胡)의 한 갈래이며, 중국 동북부의 대흥안령에서 발원한다. 하나는 동쪽 하나는 서쪽에서 나온 두 갈래인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주류의 학설은 여전히 이렇게 본다. 당항족은 서쪽의 강족에 속한다. 그들과 선비와의 관계는 후세인들이 반부(攀附)한 것이다. 당연히 이 결론에 대하여 학술계에서는 논쟁이 있다.
우리는 일단 학술계의 논쟁은 접어두자. 이원호의 시대는 북위가 멸망한지 이미 500년이 지났다. 확실한 족보로 추적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원호의 조상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이때 돌연 그런 말이 나왔을까? 우리는 통상적이 이치로 추단해보면, 설사 약간의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원호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맞다. 내가 황제가 되려면 적어도 황제를 한 적이 있는 조상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당나라의 이씨는 황제가 된 후에 노자를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건 정상적인 수법이다.
좋다 나는 독립적인 영광스러운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을 어떻게 체현할 것인가? 이원호는 몇 가지 일을 한다: 먼저 자신의 머리를 깍는다. 완전히 깍는 것이 아니라, 정수리부분의 두말을 깍는 것이다. 그후 부하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머리모양을 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3일의 시간을 준다. 머리카락을 깍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버리겠다.
과거에 어떤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 추단했다. 이건 분명 자기 민족의 옛 풍속을 회복한 것이다. 다만 나중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한 민족이 자신의 옛 풍속을 회복한다면 왜 그렇게 어렵겠는가? 목을 자르겠다고까지 위협했을까? 그건 북위반부 하기 위하여 탁발선비의 머리모양을 본뜬 것이 아닐까? 다시 고증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탁발선비는 그런 머리모양이 없다. 그리고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북위의 효문제는 한화개혁을 통해 그런 머리모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찌감치 소실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지막에 추측한 것은 기실 대요의 거란인의 머리모양을 모방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원호가 머리모양을 고친 목적은 간단하다. 머리카락모양이 구체적으로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한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우리는 또 다른 우리만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다시 이어서 유명한 조치를 취한다: 서하문자를 창건한다. 이런 서하문자는 한자의 필획을 사용하여 창제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괴이하다. 나 자신은 매번 서하문자를 볼 때마다 경탄을 한다. 짧은 3년만에, 5천여개의 글자를 만들어 냈고, 이를 보급하고, 학습시키고, 운용했다. 그리고 대량의 한문저작과 불경을 번역까지 했다. 이건 얼마나 대규모 사업인가?
생각해보라.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변화발전한 것이다. 모든 글자는 원류가 있다. 상대적으로 배우기 쉽다. 그러나 서하문자는 새로 만든 것이다. 필획도 아주 복잡하다. 배우거나 보급하는데 난이도가 크다. 이런 숫자가 있다: 한족이 불경을 번역하는데 근 1천년에 걸쳐 6천여권의 <대장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서하는 겨우 53년 들여서 3000여권의 불경을 번역했다. 번역속도가 너무나 놀랍다. 이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하인들은 자신이 새로 창제한 서하문자를 이용하여 문화자산을 축적했고, 그건 아주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정치적 의지는 아주 굳건했던 것이다.
좋다. 그럼 문제가 있다. 이원호가 만든 문화교육시스템은 서하제국을 창건하는데 충분했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괜찮았다. 어쨌든 서하제국은 근 200년간 지탱했으니까. 마지막에 몽골인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몽골인들에게 멸망당한 것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당시 골은 천하무적으로 적수가 없었으니까.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원호가 6년의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낸 것들로 제국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탱하게 하다니, 보기에 하나의 정신공간을 만들어내고, 문화교육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것이 아닌가. 만일 그렇게 문제를 본다면 그건 이원호의 노력의 또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온갖 방법을 써서 화하문명을 벗어나고자 했다. 전통에서 머리모양 그리고 문자까지도 따로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가? 이원호는 중국에서 벗어나려고도 있는 힘을 다 해서 노력했지만, 따라하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의 관제는 기본적으로 송나라의 명칭을 그대로 따라했다. 중서, 추밀, 삼사, 어사대가 모두 있었다. 심지어 어떤 아문은 아예 "개봉부(開封府)"라고 불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서하의 경성은 분명히 "흥경부"라고 불리는데, 흥경부를 관리하는 기구는 "개봉부"라고 불렀던 것이다. 베끼는 것을 이렇게 자세히 베꼈던 것이다.
중원제도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이원호는 많은 한인을 거둔다. 그리고 큰 돈을 주고 여자들도 사온다. 송나라황궁에서 쫓겨난 궁녀도 사온다. 그리고 이들 여자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왜 그랬을까? 여색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송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고문으로 데려온 것이다. 어떤 일을 잘 모르겠으면 이들에게 물어본다. 조정의 일을 대송에서 배웠을 뿐아니라, 궁중의 일도 대송에서 배웠다. 이런 전통은 이원호의 후손들도 유지했다. 제3대 황제 병상(秉常)에 이르러, 매번 국경전쟁이 일어나서 한인을 포로로 잡으면 모두에게 중원제도를 물어보았고, 명을 내려 서하인의 예의를 버리게 하고, 한인의 예의를 배웠다.
다시 다른 점을 보면, 문자는 단기간내에 만들어 냈는데, 사상은 어떠한가? 그건 몇년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떡하는가? 상관없다. 가져와서 쓰면 된다. 유가경전을 모조리 서하문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공자도 모신다. 중원왕조는 공자를 추봉하면서 가장 높이 부여한 봉호가 당현종이 봉하 "문선왕(文宣王)"이었다. 서하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한 단계 격을 올려서 공자를 "문선제(文宣帝)"로 봉한다. 여기에서 공자는 가장 높은 등급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사상을 보면 현재 체계를 갖춘 것으로는 불교가 있다. 서하는 대량으로 고속으로 불경을 번역했을 뿐아니라, 또 한가지 일을 한다. 그것은 경내의 하란산(賀蘭山)을 오대산(五臺山)으로 개명한 것이다. 잘못들은 것이 아니다. 서하통치시기, 하란산은 오대산으로 불렸다. 왜 대송경내에만 오대산 불교성지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에게도 있다.
그래서 이원호의 일련의 조치는 곁으로 보기에는 서하문화와 한문화를 분리하는 것이지만, 결과는 오히려 한문화의 부본(副本)을 만든 셈이다.
이화서(李華瑞) 교수는 <송하사탐지집(宋夏史探知集)>에서 더욱 확실하게 설명한다: 서하건국은 실제로 일종의 자각적인 한문명재건의 노력이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이원호는 별도의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그가 노력할수록 새로운 체계는 한문명과 더욱 비슷해진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20세기에 발견된 문건이 있다. 제목은 <천성개구신정율렬(天盛改舊新定律令)>이다. 기실 서하문자로 제정된 법전이다. 규모는 아주 방대하다. 20권, 20여만자에 이른다. 만일 내용을 자세히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유가문화가 이처럼 깊이 서하제국의 법률에 융합되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죽은 후 자식은 3년상을 치러야 한다. 효도를 위반하면 엄벌에 처한다는등등이 있다. 이건 원래 농경사회에서 발육된 유가예교의 강상이다. 다만, 서하사회는 이미 전면적으로 이런 규칙을 채택한 것이다. 심지어 지나치면 지나치지 못하지는 않았다. 이원호는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일생동안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이 결국 거꾸로 그 안에 융합되어 들어왔을 줄은.
이건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세계에서 경쟁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권투이고, 하나는 선발대회이다. 권투경기는 승패를 가리는 것이고, 선발대회는 고하를 가리는 것이다.
다시 2년이 지나서, 서하와 대송은 확실히 한바탕 권투시합을 벌인다. 전투하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후 200년간 서하와 대송은 본질적으로 문화상의 선발대회를 벌인 셈이다. 최소한 서하쪽을 보면 문화적으로 대송과의 사이에 고하가 결정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선발대회의 결과는 왕왕 그러하다: 쌍방이 계속하여 비교하다보면 마지막에는 서로 같아지며, 갈수록 비슷해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 떠오른다: "인생에 적은 없어도 되지만, 경쟁자는 없어서는 안된다."
적과 싸우면 아마도 양패구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자와 다투면 나는 상대방에 의해 자극받고, 상대방으로 인해 발전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경쟁상대와 서로 그리워하고 아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1038년 이원호가 칭제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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