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이야기 88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강을 수놓았던 나루들
마포나루지금은 포구의 흔적을 찾을 길 없이 오직 서울시의 한 구인 마포로만 기억되는 마포는 서해로 뱃길이 통하는 서울에서 가장 큰 포구로, 조선 초기에 형성되었다.
마포에서 서강까지를 보통 서호(西湖)라고 한다. 황해, 전라, 충청, 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마포마포라는 지명은 마포나루가 있었던 데서 연유한다. 강변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으며, 현재에도 수도 서울의 관문지역에 있어 통과인구가 많다.
마포에 관선(官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미곡을 잔뜩 실은 배와 소금배, 새우젓배, 조기배가 들어왔다. ‘마포 사람들은 맨밥만 먹어도 싱거운 줄 모른다’는 말이나 ‘마포 뱃사람들은 상(床) 돌도 핥아 먹어버린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흥청거리던 포구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세곡이 서해를 지나 마포로 들어와 광흥창(廣興倉)에 저장되었다가 녹봉(祿俸)으로 풀려나갔다. 그래서 이 근처에는 싸전(米廛)이 많이 생겨났다.마포는 객주와 여각이 자리를 잡고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거간꾼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장사 밑천을 빌려주기도 하는 대금업도 벌였던 큰 포구였다. 마포에 자리 잡은 도매상은 서울 시전에 상품을 공급하기도 하면서 보부상과 행상에게 쌀, 옷감, 소금, 새우젓 등을 공급하였다. 이곳을 통해 공급된 물건은 서울과 강원도 일대 그리고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해주와 평양에까지 상권의 영향이 미쳤다. 이 무렵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을 경강상인(京江商人)이라 불렀고, 배로 상품을 실어 날랐던 상인을 선상(船商)이라 하였다.마포를 옛날에는 삼개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목화로 실을 뽑아 만든 무명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라서 옷감으로는 삼베가 주로 교환 수단으로 쓰였다. 무명에게 삼베가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까닭으로 삼베가 소금과 새우젓을 제치고 포구의 이름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삼베를 생산하는 곳은 아니지만 삼베의 완제품이 모여드는 곳이 마포였다. 물론 마포에는 삼베 외에도 갖가지 물건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해와 서해에서 생산된 소금과 새우젓이 서울과 경기 동북부, 강원도, 경상도와 충청도 내륙지방으로 공급되는 전초기지였다.소금배들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마포 일대에 ‘염점머릿골’이 형성되기도 했는데, 경강상인의 배가 더욱 더 빈번하게 각 지방으로 오가면서 마포에는 화물 주인인 상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매매하기도 하고, 화물을 맡아두거나 화물주들을 재워주기도 하는 객주들이 들어섰다. 그 한편에는 초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파는 유랑창녀(流浪娼女)인 남사당패가 자리를 잡고서 객주들이나 보부상들의 시름을 달래주었는데,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다음과 같다.
한산세모 잔주름 곱게 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이 내 치마는 사공 막의 거적문인가, 이놈도 들춰보고 저놈도 들춰보네.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아보고 저놈도 빨아보네.이 내 배는 한강의 나룻배인가, 이놈도 올라타고 저놈도 올라타네.
『한경지략』 ‘산천’조에 “용산강이 도성 남쪽 10리에 있고 마포가 도성 서쪽 10리에 있으니 곧 용산강 하류다. 서강이 도성 서쪽 15리에 있어서 황해, 전라, 충청, 경기 등 하류 지역의 조선(漕船)이 모두 서강으로 모인다. 양화도도 도성 서쪽 15리에 있다. 곧 서강의 하류가 된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마포에 팔도의 조운이 몰려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삼남지방은 물론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이 대부분 배로 한강에 들어와 용산, 마포, 서강에 부려졌다. 그 무렵 용산, 서강, 마포항의 규모가 가장 컸고, 뚝섬은 목재의 집산지였으며, 강남 쪽에서는 송파가 나라 곳곳에서 올라오는 미곡, 목재, 토산품 등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세곡의 경우는 일시에 어떤 한 나루에만 무질서하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용산창에는 경상, 강원, 충청 및 경기 상류에서 올라온 세곡을 저장하였고, 서강변 광흥창과 농암창에는 전라, 충청 및 경기 하류의 것을 저장하였다.서강과 용산에 경창을 만들어 조세미를 저장하였는데, 용산과 서강을 중심에 두고 한강 위쪽으로는 송파나루와 광나루, 그 아래쪽으로는 노량진과 양화진이 번성했으며, 나루마다 상점과 주막이 들어서서 흥청거렸는데, 그 가운데에 자리한 포구가 바로 삼개라 불리는 마포였다.삼개 또는 마포라고 불린 마포에도 팔경이 있었다. 용호제월(龍虎霽月), 마포귀범(麻浦歸帆), 방학어화(放鶴漁火), 율도명사(栗島明沙), 농암모연(籠岩暮煙), 우산목적(牛山牧笛), 양진낙조(楊津落照), 관악청람(冠岳晴嵐)이 그것이다. 곧 용산강 위로 뜬 달, 마포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강 건너 방학(放鶴)언덕의 밤낚시, 밤섬의 깨끗한 모래벌판, 농바위 부근 마을의 저녁 짓는 연기, 와우산에서 들려오는 목동의 피리소리, 양화나루1)의 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 맑은 날 관악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등이다. 지금은 그 어느 것 하나 찾아볼 길이 없다.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얼굴만 보고도 마포 사람을 금방 알아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동명연혁고』의 「마포구」편에는 ‘마포 새우젓장수, 왕십리 미나리장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 구전하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장수라 하였고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장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등에 지고 와 목덜미가 햇볕에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볕을 앞으로 안고 와 얼굴이 햇볕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선, 새우젓, 소금, 바닷말, 땔감 등이 서해에서 마포로 올라와 남대문을 거쳐 서울 곳곳에 공급되었다. 동대문 밖 근교에서는 미나리, 한남동과 안암동 일대에서는 무와 배추, 자하문 밖에서는 능금과 복숭아, 감과 배가 들어왔다.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한강 하류를 가로막아 서해와 서울을 잇는 뱃길이 끊긴 뒤로 역사가 깊은 마포나루는 하루아침에 그 기능을 잃게 되었고, 마포 사람들도 더는 얼굴을 햇볕에 태울 일이 없게 되었다. 급속도로 진행된 변화의 물결 속에 한강에 밥줄을 걸고 마을을 이루며 살던 사람들, 이를테면 마포나루의 새우젓장수와 뚝섬나루의 쌀장수에게 이런 상황은 천지개벽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한강시민공원 © 유철상강변에 시민 휴식공원과 축구장, 농구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수상스키장, 낚시터, 주차장 등을 갖추어 시민들의 휴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대한제국 말의 문장가인 영재(寧齋) 이건창은 「서강」이라는 시를 남겼다.
용산, 삼개를 거쳐서 양화나루 길예로부터 유난히 밤섬 집에 마음이 갔지.있던 길 어이 일찍 고운 풀 메마른고산치고 푸른 강으로 비끼지 않은 데 없나니돛단배 올 때도 아스라이 멀리서 언덕인 줄 알겠고물이야 불거나 빠지거나 오랜 세월 모래톱인 줄 알겠네.난간에서 오래도록 서러워한다고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이,일찍부터 사공 따라 생애를 같이하였나니.
한편 을사조약 직후인 1905년 9월 6일에 식구들을 이끌고 중국 상해로 망명길에 오른 창강(滄江) 김택영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강 북녘 온 산에 날이 새는데가는 곳은 이국 만 리 강남이라오.길 떠나는 외마디 뱃고동 소리바람결에 혹시나 들리지 않을는지.동쪽에서 온 살기 음흉하고 간악하고 제멋대로인걸나라 생각 그 누가 이 어려움을 구제할는지.해는 지고 뜬 구름 천 리까지 아스라하여몇 번이나 고개 돌려 삼각산을 바라보았던가.
조선 초기에 형성된 ‘마포’는 조선시대만 해도 서해로 뱃길이 통하는 서울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관선(官船)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미곡을 실은 배와 소금배 등이 드나들어 흥청거렸다. 이곳을 통해 공급된 물건은 서울과 강원도 일대, 경상도 내륙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해주와 평양에까지 상권의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한강 하류를 가로막아 서해를 잇는 뱃길이 끊긴 뒤로 마포나루는 하루아침에 그 기능을 잃게 되었다.
공암나루공암나루는 한강의 하류, 곧 현재의 강서구 개화동 지역에 있었던 나루다. 한강변의 나루터 중 서울시계에서는 가장 아래쪽에 있는 나루인데, 강화도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 나루의 크기가 작아서 양화나루 밑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공암나루 근처에는 투금탄(投金灘) 전설이 전해지는데,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평민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를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속에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우애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형도 또한 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땅값이 뛰고 복권에 당첨되어 횡재를 하거나 느닷없이 돈이 생긴 사람들치고 의 상하지 않은 형제나 부부가 없다는데, 요즘 같은 물질만능시대에 투금탄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얼마나 신선한가.양화나루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좋은 경치 골라 지으니 물가에서 가깝네.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앞의 시는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예겸이 양화나루(양화진)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경기 지방의 경치로는 한강이 으뜸이다.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뜬 것 같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살이 번성하여 팔도의 물산을 모으고 나라의 빼어난 경치와 그 중요한 구실을 밝혀주며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 된다”라고 적혀 있다. 양화진의 경치를 서거정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양화도 어귀에서 뱃놀이하니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어찌 신선과 학을 타고 놀아야만 하는가.해가 서산마루에 지면서황금물결 이루노니흥이 절로 이는구나.
어린아이들이 여름이면 멱을 감고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던 양화진에서 서울을 감싸는 송파까지를 따로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경강의 주요 나루터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운수업자와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흥정 끝의 말다툼, 호주머니를 노리던 투전, 해 질 녘의 술주정 등은 이 무렵 나루터의 일상이었다. 그렇듯 평화로웠던 양화진에서 피비린내가 난 것은 1866년이다.옛 시절 양화진영이 있고 풍치가 아름답던 양화나루의 산마루에서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쳤다. 그로 말미암아 용머리 같다 하여 용두산, 누에머리 같다 하여 잠두산, 속칭으로는 덜머리라고 불리던 곳이 절두산, 곧 사람의 목을 자른 산이 되고 말았다.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정치를 폈던 대원군은 1866년에 병인박해, 곧 프랑스인 신부 아홉 명과 8천 명에 이르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를 죽이는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프랑스 병선 두 채가 양화나루까지 들어와 시위를 벌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바람에 더욱 적개심이 치솟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국토를 사교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라고 하여 천주교 신자 색출령을 내리고, 잡힌 신자들을 절두산에서 목을 잘라 한강으로 떨어뜨렸다. 한국 천주교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백 년째인 1966년에 그 자리에 순교자기념관과 기념성당을 세웠다.조선 중엽에는 이러저러한 역사를 지닌 이곳으로 고래가 올라오기도 했다. 선조 때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보면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 길이나 되는 이름 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양화진에서 돌고래가 붙잡혔음을 알 수 있다. 1925년에도 6척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에서 붙잡혀 화제가 되었다. 지금은 고래는커녕 멸치 한 마리 올라오지 않는다.
양재천과 타워팰리스양재천은 한때 죽음의 하천으로 불렸지만 현재는 250여 종 동식물의 보금자리다. 양재천변에는 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송파나루『여지도서』 「광주부」편에 “송파대로는 이천의 경계까지 가는데, 관아에서 동쪽으로 거리가 90리다”라고 실려 있는 송파는 물길과 육로 교통이 번잡한 곳이었다.송파나루 아래쪽에 서울 근교의 5진 중 하나였던 삼전도(三田渡)가 있었다. 삼전도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했다. 본래 조선 초기 이래로 삼전도가 나루터로 개설되어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쇠퇴하고 대신 송파진(松坡鎭)이 주된 나루가 되어 수어청에서 파견된 별장에 의해 관리되었다.
송파진은 관아의 서쪽 20리에 있다. 별장 한 명을 두었다. 수어청의 본진 및 삼전도, 광진, 신천 등의 진선(津船) 21척을 관할한다.
- 『여지도서』 ‘진보(鎭堡)’편
송파진은 하중도를 끼고 있어 삼전도보다 물이 풍부하여 좋은 포구 조건을 갖추었고, 맞은편의 뚝섬이 조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변성할 수 있었다. 서울과 광주를 잇는 요충지였던 이곳에서 땔나무와 담배 등을 서울로 공급하였다. 송파는 나루터보다 시장의 기능이 더 활발했는데, 상공업의 발달로 물화의 유통량이 대폭 증가한 조선 후기에는 원주, 춘천, 충주, 정성, 영월, 단양 등 한강 상류 지역에서 내려오는 각종 물화의 집산지가 되었다.강운(江運)뿐 아니라 서울에서 이곳을 지나 판교와 용인을 거쳐 충청, 강원도로 가는 길, 또 용인을 거치지 않고 광주와 이천을 거쳐 충주, 여주, 원주를 거쳐 대관령, 강릉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어 사람과 말의 통행이 번잡하였다. 게다가 도성까지 2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강상(江商)은 물론 이현, 칠패 등 각 시장의 상인과 중개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장에 나오기도 하였다. 여기에 강주인(江主人), 선주인(船主人)을 비롯해 성내의 배오개와 칠패의 좌고상인(坐賈商人), 가가상인(假家商人), 중도아(中都兒) 등이 모여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에 서던 송파장은 『만기요람』에서 전국 15대 시장의 하나로 꼽힐 만큼 거대한 시장이었다. 270여 호의 객줏집이 있을 만큼 규모가 컸으며 5일, 10일장이라고는 하지만 상설화된 시장이었다. 지리적 요건이 송파시장을 발달시킨 주된 이유였지만, 송파가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닌 광주유수부에 소속되어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하였던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시전상인들은 도성 안에서는 독점권을 철저하게 행사하였지만, 이곳은 그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한강의 사상도고(私商都賈)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서울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피하기 위해 삼남지방과 관동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 송파에서 먼저 사들여 도성의 성안을 거치지 않고 함경, 평안, 황해 등지의 향시로 보내는 도가상업(都家商業)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거래의 주도권은 강상 중에서도 송파 상인이 잡았다. 송파장의 번성으로 손해를 본 시전상인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광주유수가 이를 막아 송파시장은 그대로 존속되었다.송파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미곡, 잡곡, 소, 포목, 과실, 재목, 땔감, 연초, 잡화 등 다양했다. 노천의 가점포가 있던 장터에는 여각, 객주, 술집, 대장간 등 각종 수공업 점포가 즐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짐을 보관하는 창고와 10~20여개의 객실과 마방(馬房)을 갖춘 여각이 두 곳 있었고, 수십 칸의 객주 한옥이 있었다. 객주는 여각보다 건물의 규모가 작고 취급 물품도 부피가 작았다. 중개 상인에게 물품 판매를 위탁한 지방 상인은 대금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 유숙하였다. 한편 송파시장의 남쪽, 즉 광주와 판교 쪽에는 우시장이 있었는데, 특히 대구와 안동에서 많은 소장수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루터 오른편 버드내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이렇게 흥청거리는 시장에서 광대들은 「송파산대놀이」를 벌였다.그러나 개항 이후 교통과 산업이 발달하고 독점상업권이 해체되어 조선 상인이 몰락하는 등 경제계가 대폭 재편되자, 경제의 중심은 인천 쪽에서 들어오는 외국 수입품과 그것을 거래하는 상인들에게 치우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송파장은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에 다리가 개설되고 설상가상으로 을축년(1925) 대홍수로 마을 전체 273호가 유실되면서 그곳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가락동과 석촌동으로 마을 전체가 이전하면서 결국 송파장은 폐쇄되고 말았다. 하지만 2백여 년간 이어져 내려온 송파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남아 그 옛날의 번성했던 송파장을 일깨워주고 있다.
석촌호수석촌호수가 있는 이곳은 본래 송파나루터가 있던 한강의 본류였다. 송파나루터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뱃길의 요지였다.
노들나루옛사람들은 노들섬 일대 한강을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용산강 부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한양 남쪽 7리쯤에 용산호(龍山湖)가 있다. 옛날에 한강 본류는 남쪽 언덕 밑으로 흘러가고, 또 한 줄기는 북편 언덕 밑으로 둘러 들어와서 십 리나 되는 긴 호수를 이루었다. 서쪽에 염창 모래언덕이 막아서 물이 새지 아니하고 연이 그 안에 자라고 있다. 고려 때 가끔 임금의 행차가 이곳에 머물러 연꽃을 구경하였는데, 본조에서 한양에다 도읍을 정한 뒤에 조수가 갑자기 들이닥쳐 염창 모래언덕이 무너져버렸다. 그리하여 조수가 바로 용산까지 통하니 팔도의 화물을 수송하는 배는 모두 용산에 정박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백로가 노닐던 나루라서 노들나루(노량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한강진, 양화진과 더불어 서울 3진의 하나인 노량진은 진선 15척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나루가 만들어진 것은 태종 14년(1414)의 일이다. 『태종실록』 14년 9월 2일 조에 “처음으로 광진(廣津)과 노도(露渡)에 별감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실록』 8년(1426) 1월 20일 조에는 “임금께서 세자를 거느리고 노도강변에 납시어 방포(放砲)를 관병하고 내금, 내시위, 사복시의 관원과 상호군(上護軍) 중에서 말 타고 총을 세 번 쏘아 세 번을 다 맞힌 이에게 전통(箭筒)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900년에는 한강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가 이곳에 건설되었다. 이 길목은 시흥과 수원은 물론 충청, 전라도로 통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큰 다리가 놓이고 노들나루가 있던 지점에는 노량진수원지가 자리 잡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들나루정조가 수원에 있는 융건릉에 행차할 때 노들나루를 수시로 이용하였는데, 왕이 도강할 때는 배다리를 놓아 행차를 편리하게 하였다.
동재기나루동작진(銅雀津)이라고도 불리는 동재기나루는 조선시대에 서울과 수원 이남 지방을 연결하던 3대 나루 중 하나로, 당시에는 병선(兵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임금이 경기감사 노공필에게 “한강의 삼전, 노량, 양화도 등의 사공들이 관선(官船)은 숨겨두고 사선(私船)으로 건너게 하여 선가(船價)를 너무 비싸게 받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진작 건너지 못하고 강가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많으니, 경은 그것을 엄중히 고찰하여 길가는 사람들에게 강 건너는 불편을 주지 마라” 하는 명을 내려 나그네들의 불편을 덜어주게 한 내용이 나온다.영조 때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뒤에는 동재기나루로 죄인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부터 별장을 배치해 임검(臨檢)을 실시하였다. 1746년부터는 노들나루에 배치되어 있던 관선 15척 중 3척을 이곳에 배치해서 무료로 지나는 길손들을 실어 나르는 대신 임검을 한 것이다. 이어서 1785년(정조9)에는 “한강과 노량나루의 관선은 10척, 서빙고와 동재기나루에 5척을 배치한다”라고 하여 백성들의 통행에 편의를 주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즉 무료로 건네 주게 되어 있는 관선들이 운행을 기피하여 민간의 사선들이 비싼 도강료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나그네들이 골탕을 먹었다는 것이다.한편 이곳 동재기나루는 1857년 철종이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 참배를 가기 위해 배다리를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았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덕무가 동재기나루를 두고 시 한 편을 남겼다.
찬 강 나무에 서릿발이 무늬 졌는데,별안간 빈 배 노 젓는 소리 부지런도 하구나.때마침 오리들 헤엄에 물결 꽃무늬 같은데달려와 보니 산봉우리는 말 머리 위의 구름이네.비단 돌 밟는 신소리 언제나 그치려는지부채는 금모래를 치니 날이 다하도록 어수선하구나.물가 주막에서 옷 갈아입고 시골길 재촉하였건만오랜 나그넷길 돌아와서도 개운치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