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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꿈을 생각하고
창 42:9-17 /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창 42:9-17 / 요셉은 이러한 형들을 바라보자 오래 전 가나안에서 살 때 형들에 대해서 자기가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다그쳤다. `너희는 정탐꾼임이 틀림없다. 너희가 우리 나라에 온 것은 이 나라의 어디가 허술한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알아보려고 온 것이지? 곡식을 사러 왔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그렇지, 응?' 10) `아닙니다. 총리 각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먹을 것이 없어 이곳까지 곡식을 사러 온 것입니다. 11) 우리 모두는 형제지간입니다. 총리 각하, 저희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고 형들이 애걸하였다. 12) `무슨 소리냐? 너희는 정탐꾼인 것이 분명해. 우리 나라에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알아보려고 온 것이 틀림없어' 하고 요셉이 소리쳤다. 13) `총리 각하, 우리는 가나안 땅에 살고 계신 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본디 우리는 열두 형제였습니다만 막내는 지금 가나안 땅에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동생은 죽었습니다' 하고 형들이 설명하였다. 14) 요셉은 계속해서 그들을 다그쳤다. `그래, 너희는 정탐꾼이 분명해. 내 말이 틀림 없어. 15) 내가 자꾸 다그치니까 너희가 아니라고 이런 저런 거짓말을 둘러대는구나. 바로께서 살아 계신 것을 두고 내가 맹세한다. 너희가 막냇 동생을 이리로 데려오지 않는 한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옮겨 놓지 못할 것이다. 16) 너희 형제 중 한 사람이 가서 너희 막냇 동생을 데려오너라. 그동안 나머지는 여기 감옥에 가두어 두겠다. 너희가 하는 말이 정말인지 내가 알아봐야겠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해 두지만 바로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막냇 동생을 이리로 데려오지 못하면 너희는 분명히 정탐꾼일 것이다.' 17) 그러고 나서 요셉은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지혜로운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여서 진실을 말하게 합니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라(9-11) 요셉은 두 아들을 낳고 살면서 지난날의 고난과 설움을 잊고 있었습니다(창 41:51-52). 그러다가 형들을 다시 보고 오래 전 꿈을 회상합니다. 그는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이는 형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즉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보다 형들과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요셉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알리기 전에 먼저 형들의 진심을 알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형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어 진실을 말하게 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형들은 부분적으로 진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단순히 곡물을 사러 온 사람들이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이 모두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열두 형제(12-13) 요셉은 형들을 계속 추궁하여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도록 유도합니다(12, 14, 15, 20). 형들은 자기들이 모두 열두 형제들인데 막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형들은 이 말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막내인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것은 요셉으로 인해 자신들을 불신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없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한 짓을 인정하는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형들이 완전한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요셉은 형들에게 진실을 직면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14-17) 형들이 막내를 언급하자 요셉은 이를 빌미로 막내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만 보내어 막내를 데려오고 그 동안 나머지는 인질로 잡아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정탐꾼이 확실하다고 엄하게 말합니다. 더욱이 요셉은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합니다.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한 것은 그만큼 진실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기에 형들의 당혹감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기근이 야곱의 아들들을 위협했지만, 지금은 이름도 모르는 애굽의 총리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삼 일 동안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요셉이 오랜 세월 동안 겪은 고난을 형들이 삼 일 동안에 모두 겪는 듯합니다. 이는 지난날 그들이 행한 죄를 대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적용: 오늘의 고난이 과거의 당신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아뢰고 용서받는 자는 사랑을 품은 자입니다. 그 사랑을 품은 자는 영육이 변화되고 생활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언제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열심을 내며 마치 사명감으로 사랑을 베풀며 기뻐합니다. 특히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더한 책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요셉의 정탐꾼 전략
창 42:9-17 / 대구아름다운교회 박기묵목사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 곡식을 위해 애굽에 와서 요셉에게 절하였다. 요셉은 형들이 그에게 절할 때 20년 전 가나안에서 형들에 대한 꿈을 기억하였다. 그는 꿈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이후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형들이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서 애굽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그들을 애굽으로 불러내려는 길을 찾는다. 그들을 애굽으로 불러내기 위해 먼저 자신이 애굽에 내려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요셉은 그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한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은 그 뜻을 성취하려는 본능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요셉은 바로 정탐꾼 전략을 생각해 낸다. 그의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고, 그들을 볼모로 잡아둘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내는 것임을 알았을 때 그 뜻이 성취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알면, 즉 깨달으면 본능적인 행동이 그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정탐꾼 전략은 그런 과정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로 요셉이 가나안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불러내기 위한 연결고리였다. 이 연결고리를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안 요셉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요셉은 또한 야곱의 막내아들, 즉 자신의 동생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이는 그 형제들뿐만 아니라 야곱까지 애굽으로 불러내려는 것이었다. 야곱은 가나안 땅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그곳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며 하나님이 아버지께 약속의 기업을 준 땅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의식을 가진 야곱을 애굽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탐꾼으로 몰린 요셉의 형제들은 억울할 수 있다.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님에도 그렇게 몰리니 억울한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육적 억울함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영적 사람은 그 육적 억울함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일찍이 예루살렘 입성하셔서 주무시기 위해 베다디로 나오셨다가 다음날 다시 들어가실 때 시장하여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열매를 찾으셨으나 그 나무는 무화과철이 아니라 열매가 없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너는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라고 하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다. 무화과나무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이 뜻을 몰라 쓰임을 받지 못하면 그 나무와 같이 말라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쓰시고자 할 때 그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이 복이 있는 자들인데 그 복이 있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자들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다. 야곱은 그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 형 에서를 속이기까지 했었던 땅이다. 그런 기업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래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훈련을 시키신다. 하나님은 약속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곳에서 큰 성공을 이루게 하신 다음, 환경을 통해 그곳을 떠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도 기근으로 인해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했고, 그랄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셨지만 그곳, 그 장소에 정착하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하셨지 정착하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사람은 세상의 한 장소에 정착하려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은 약속의 사람들에게 세상의 땅에 정착하지 말고, 그 장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라고 하셨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사는 그 장소에 세상적인 뿌리를 깊이 내릴 수도 있다. 그 장소는 과거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경험한 장소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본거지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그 장소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던 장소인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장소도 그와 같이 중시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장소에 정착하려는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의식은 그들이 앞을 향해 전진하는 삶을 붙잡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어떤 장소에 집착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서 머무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며, 그곳이 바로 능력의 장소인 것이다.
요셉의 형들에 대한 정탐꾼 전략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삶의 한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이 지혜이다. 이 정탐꾼 전략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보여주는 실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의 가족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요셉이 그것을 알았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를 그 하나님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삶의 상황 속에서 요셉에게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정탐꾼 전략이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지식과 지혜를 가진 자는 영적 세계의 일을 육적 세계에 나타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삶 가운데 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지혜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가운데서 성취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영적 세계의 계획이 세상에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난 결과물로 천국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다. 영적 세계의 일을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일로 드러내는 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이는 영적 세계로 변환시키는 Transformer와 같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만나 그물을 깊은 물에 내리라고 했을 때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천국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이는 영적 세계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이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이다.
같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 형제들은 뜻을 몰랐다. 즉 요셉은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고, 다른 형제들은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요셉은 그의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 분명한 삶의 푯대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지 못한 형제들은 삶의 향방이 없었다. 이는 성령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 즉 하나님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삶의 방향이 뚜렷하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삶을 살 때 삶의 중간중간에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영적 세계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영적 세계를 모르고 무지하면 영적 관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육적인 삶은 번창하면서 살고 있더라도 영적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영적 감옥에 갇혀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보고 죽을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영적 즐거움과 자유를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다. 비록 창고에 육적인 재물을 많이 쌓아둔 채 한 번도 못써보고 죽는 자들과 같이 허무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영적 관점에서 하나나님 아들들의 권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대하다. 그런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권세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일 것이다.
너희는 정탐꾼이라
창 42:9-17 / 구성교회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특별새벽예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새벽기간에는 설교 내용을 정리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원고가 없어서 전문을 올리지 못하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올리고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특새기간 외에는 '묵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로서의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교회의 현재 상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가 대표가 되었을 뿐, 우리 가정, 내 신앙 등 모든 것이 포함이 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방향을 전환합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97년에 개봉한 지아이제인(G.I.Jane)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여군이 남자들만 있는 ‘네이비 씰’에 지원하여 어렵게 훈련을 마친다는 내용입니다. 정치도 개입되어 있는 이 이야기는 훈련의 과정이 매우 어렵지만,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미국 영화를 통해 본 미국 군사 훈련의 특징중 하나는 훈련이 끝나면 반드시 '실전'에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실전에 배치되긴 하지만, 실제 전투 현장을 겪는것은 어렵죠. 하나님의 훈련도 같습니다. 요셉은 실전배치 받아 쓰임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 두 가지가 병행됩니다. 제 평생에 잊지 못할 '일출'장면이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2004년 '시내산'으로 알려진 산에 올라가서 일출을 본 장면입니다. 일출을 보기위해 4시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2시간을 기다린 후에 일출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360도 회전하면서 보니 왜 여기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으로 알려졌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2013년에 히말라야 산이 잘 보이는 곳에서의 일출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일출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지만, 이곳에서의 일출은 히말라야 산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히말라야 산 꼭대기부터 붉은 빛이 물들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너무 큰 감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 영광의 빛만 봐라봐야 할 것이 아니라 영광의 빛이 머무는 곳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속이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의 삶이 수술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을 쌓아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셉도 처음부터 큰 믿음이 없었을 수 있지만,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야곱과는 반대로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고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요셉은 "그들(형제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로 형제들과의 대면을 시작합니다. '생각하다'는 히브리어는 '자카르'입니다. 이 단어는 과거의 기억을 '생각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부탁을 잊고 있다가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자카르'입니다. 이 단어의 특징은 갑자기 생각난 기억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기억과는 약간 거리가 멉니다. 요셉은 자신이 20년 전에 꾸었던 꿈을 가지고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가 중요해서 지난 새벽시간에 이 단어에 동그라미를 많이 그려 넣으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요셉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잘못 배워온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장면입니다. 요셉의 나이가 현재 37살입니다. 30살에 총리가 되었고, 7년간의 풍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근이 시작되었으니 37~8살정도로 보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온지 20년이 지났습니다. 20년 동안 요셉이 자신이 꾼 꿈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05편 16~22절을 보세요. 특히 18~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발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고 말합니다. 보디발 장군 집에서 있었던 기간을 대략 3년 정도로 봅니다. 그럼 감옥에서 10년을 있으며 간수장의 지시로 다른 죄인들을 돌보며 편하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죄수들처럼 발에 쇠사슬을 차고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때까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입니다. 그냥 몸이 불편했다고요?(오늘 새벽에는 시간상 빠진 내용입니다. 내일 또 말씀드립니다) 아닙니다. 18절에 있는 '몸'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네피쉬'입니다. '혼'이라는 뜻이죠. 혼이 사슬에 묶여 있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얼빠진 상태로,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이 부분은 내일 계속...).
꿈을 지속적으로 가진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 순간 정신을 부여잡고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이러한 연단을 시키는지 질문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시며 연단과 훈련을 이길 힘을 주셨기에 요셉은 서서히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정탐꾼'이라는 말을 4번(9, 12, 14, 16절) 말합니다. 왜 이렇게 형제들을 의심할까요? 형제들을 향해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훈련되고 연단되어 잘못을 돌이켰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에게 "확실한 자(직역하면 '정직한 자')"라고 소개합니다(11절). 창세기 37장에서 보여주었던 담대한 거짓말이 떠오릅니다. 과연 형제들은 정직한 자가 되었을까요? 요셉은 확인해야 했습니다. 형제들은 계속해서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12형제가 있었던 이야기(13절), 막내를 놓고 온 이야기(13절),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확실히 고백하는 이야기(21~22절)가 등장하면서 지난 20년의 기간동안 형제들이 죄책감 속에 있었음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저도 자책, 자학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래야 남탓을 안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심한 성격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남탓 하는 것 보다 자책하는 편이 저에게는 편합니다. 저는 늘 저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숨은 고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협동목사님으로 계신 배원섭 목사님도 제가 참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뛰어난 분들이 많은 상황에서 무슨 자랑을 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이 쓰신 책이 하나 있습니다. "삶의 은밀한 대적 - 자기 자랑(나중에 독서모임에서 읽어볼까요? 얇은 책입니다)" 책의 중간에서 잠시 나오지만, 제가 생각하는 자랑의 핵심 중 하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거 있는데~ 너는 없지?!"라고 말하는 것이죠. 우리가 은혜를 나눌 때, 특히 간증을 할 때 조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셉과 같이 그저 현재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도 자랑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중요한 마음 밭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지금 연단과 훈련의 과정에 있는 것이 자책, 자학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너무 많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 연단과 훈련의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66:10절에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 같이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을 단련하는 이유는 멋진 걸작품을 만들기 위함이거나, 어떤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15절에 나오는 '증명'과 16절에 나오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바한'이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바한'의 의미는 "어떤 가치를 결정하거나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훈련)하는 이유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알게 해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세상으로 던져버립니다. "나이가 많아서..", "몸이 힘들어서...", "돈이 없어서..." 등등.. 하나님이 주신 사명 세상으로 던져버리지 말고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쳐 쓰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계속 흔들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광야의 막다른 골목, 홍해 앞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듯이 이리저리 피해가는 그 사람을 요셉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음 훈련시키실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마무리입니다. 쇠사슬에 제 영혼이 묶이고, 탄식과 괴로움에 제 삶이 묶이기 보다, 하나님의 손에 제 삶이 묶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왕 묶이는거 전능한 손이 저를 묶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많이 지쳐계십니다. 목사님들이 기도원에가면 잠부터 잡니다. 체력, 피곤을 회복한 후 또 다시 열심히 기도하죠. 그러니 목사님들 자는 모습보면서 시험들지 마세요. 체력 회중인겁니다. 성도님들이 그 동안 신앙생활 해오시면서 가져오셨던 피로감들 이제 다시 재충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재충전하기 위해 옆에서 많이 돕는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재충전 잘 하셔서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힘있게 달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준비만 해놓고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이라는 큰 숙제이자 감사한 일을 넘겼죠. 저와 성도님들에게 맡겨진 사명, 떠 넘기지 않고 다 이루어가고 싶습니다.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지금의 훈련과 연단의 기간 힘 있게 이겨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호크마주석
===42:9절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37:5-9에 기록된 꿈을 가리킨다. 당시 그는 그 꿈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 믿고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었다.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고(37:5) 급기야 애굽의 종으로 팔리기까지 하였었다(37:28).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이제 요셉의 꿈을 성취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면서 한순간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너희는 정탐들이라 - 당시 애굽은 아시아 계통의 민족들로부터 침략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애굽이 그들을 멀리한 탓도 있지만, 특히 당시는 애굽에만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 나그네들에 대하여 극히 예민하게 감시하였다. 때문에 요셉의 이와 같은 말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과 다름없는 선포였다. 요셉은 그들의 신변에 위협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지난 날을 반성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42:10절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그들이 애굽에 온목적에 대하여 거듭 밝힌다. 그러나 별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 상황까지 자세히 밝히면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노력하게 된다(11,13절).
====42:11절
독실한 자 - (* , 케님). 정직한 자들 (RSV;honest men) 혹은 진실한 자들 (KJV;ture men)이란 뜻이다. 특히 여기서 독실한 에 해당하는 켄 (* )은 옳은 (민 22:7), 마땅한 등의 뜻으로 행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말이다. 따라서 진실한 , 사심이 없는 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42:12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 요셉은 물론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재확인하려고 짐짓 억지를 부려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42:13절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의 총리에게 그들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낱낱이 고함으로써 정탐꾼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아들들임을 보이려고 했다. 한편 여기서 없어졌다 고 하는 말은 죽었다 란 뜻이다. Living Bible에는 우리들 형제 가운데 하나는 죽었나이다 (One of our brothers is dead)로 나와 있다. 요셉이 20여년 동안 가족과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42:15절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 후대의 히브리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생명으로 그들의 맹세를 확증하는 것과 같이(삼상 1:26;17:55) 요셉은 바로의 생명을 맹세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로 내세웠다. 이것은 가장 애굽적인 맹세의 전형이었다. 즉 요셉은 철저한 애굽인으로 행세하였던 것이다.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 요셉은 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베냐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형들의 입장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날 요셉에게 행했던 자신들의 행동을 기억하고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요셉이 개인적인 보복 감정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감정을 억제하는 냉청한 지도자로서의 요셉의 면모를 잘 볼 수 있다.
====42:17절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 이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제들의 진실성을 시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되었다. 요셉도 과거에는 이와 같이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였고(37:24), 3년간 옥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39:20).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기 시작
(9-17)
냉정한 듯 보이지만 사사로운 복수의 감정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드리기 위해 냉철한 판단을 한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하지만 분별없는 온정주의나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처리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자기 가족을 이 기근으로부터 살리는 것에서부터 가정의 영적 기근을 해결하는 데까지 요셉이 할 일이 많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엄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로 자신들의 죄와 허물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을 받고 그분을 따라야 했습니다.
(1) 형들을 정탐꾼으로 모는 요셉(9-13)
요셉은 자신의 꿈을 상기했습니다. 첫 아들의 이름을 과거를 잊었다는 의미인 므낫세로 지었지만, 상황은 그로 하여금 과거를 상기하게 만듭니다. 그가 집안의 왕으로 등극할 것을 암시한 두 개의 꿈 중 열한 명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했던 첫 번째 꿈이 일단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직 한 명이 빠진 열 명이며, 부모가 포함된 두 번째 꿈도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영민한 요셉은 현재의 상황에서 형들을 속여 자신의 목적을 이룰 계획을 즉시 구상해냈습니다. 그것은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 베냐민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들과 상봉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와 같이 신적 능력에 의한 순간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을 지닌 놀라운 지혜자입니다. 그는 대국을 이끌 총리의 자격을 지녔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애굽의 ‘틈’을 엿보도록 이웃 나라에서 보낸 밀정의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틈’의 히브리어 ‘에르봐’는 원래 은밀히 감추어진 신체(성기)를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애굽의 군사적 약점이나 요새들의 허술한 부분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르봐’가 이런 뜻으로 사용되는 사례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같이 신체의 노출과 성기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사용됩니다(다만 신 23:15에서는 진영의 ‘불결함’을 가리킨다). 해밀턴은 이에 대해 요셉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 유희를 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형제들이 자신을 벌거벗겨 구덩이에 내던진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형제들은 자신들을 적극 변호하기 시작합니다(10). 그들은 스스로를 ‘당신의 종’으로 낮추어 부릅니다. 이것은 당시에 상전 앞에서 사용하는 관행적 표현이기도 했지만, 흥미롭게도 요셉의 꿈이 성취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발언입니다. 요셉의 꿈대로 그들은 요셉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두 형제이기에 밀정이 아니라고 강력히 변증합니다. 형제가 한 패거리의 밀정이 되어 몰려다니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우리’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현장에 함께 있는 요셉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호히 그들이 간첩이라고 재차 못을 박습니다(12). 이후에도 두 차례, 도합 네 차례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웁니다(42:15, 20). 이에 형제들은 가족에 대한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합니다. 자신들은 열두 명의 형제인데, 막내아들은 현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하나는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었다는 뜻보다는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즉 형제들은 요셉의 부재를 실종으로 처리합니다.
형제들이 더 자세히 가족 관계를 설명한 이유는 자신들의 누명을 벗기 위함입니다. 특히 형제 중 하나가 없어졌다는 설명은 매우 특수한 가족 상황으로, 그들이 한 가족임을 변호하는 데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아버지 야곱의 생존과 동생 베냐민의 무고함이 확인되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도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어떤 해를 입지 않았을지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2) 결백에 대한 증명을 요구하는 요셉(14-17)
요셉은 오히려 가족 관계에 대한 그들의 설명이 그들이 밀정이라는 증거라고 받아친다(14). 말하자면, 바로 그들의 거짓된 가족 정보가 그들이 밀정이라는 증거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막냇동생을 데리고 와서 결백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확인이 될 때까지 그들은 모두 옥에 수감되어야 하며, 형제들 중 한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막냇동생을 데리고 와서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해야 합니다. 만일 막냇동생을 데려오지 못하면,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여’ 그들은 밀정으로 확정되고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또는 왕과 같은 권위자의 이름에 의한 약속과 보장은 이스라엘에서도 관례적이었습니다(삿 8:19; 룻 3:13; 삼상 14:39; 삼하 15:21).
고대에는 대체로 무죄 추정의 원칙보다 유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즉 어떤 의심스런 혐의가 있는 경우 당사자의 무고함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유죄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밀정의 혐의를 뒤집어씌워 검증하겠다고 말한 것은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3일 동안 옥에 가두었다. 개역개정에 ‘옥’을 가리키는 ‘미쉬마르’가 누락되어 있는데, 이것은 요셉이 갇혔던 옥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운명의 반전입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가두었던 형들이 이제 옥에 갇힙니다. ‘삼 일’은 충분한 기간의 관례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3일 수감은 요셉의 억울했던 12년 수감과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요셉의 이런 강경 조치는 형제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간첩 누명이 쉽게 벗겨질 수 없음을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근은 양식의 유무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분을 향한 경외, 형제를 향한 사랑이 있는지 여부가 결정합니다. 이 하나님의 꿈을 이뤄드리려는 요셉이 있는 애굽은 안전했지만, 그 꿈을 살해하려고 하였던 가나안은 위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