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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열여덟. 몸이 너무 아파 눈뜨는 것 조차도 힘겨웠던 날이 있었다. 하필이면 멍멍거리는 개마저도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 독감이었다. 필사적으로 학교를 보내려는 오빠 때문에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겨우 이끌고 학교로 등교해야 했던, 고역 같은 날이기도 했었다. 어떤 정신으로 학교에 도착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빨간 불에 길을 건넜는지, 파란 불에 건넜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무사히 온 걸 보니 파란 불에 건넜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수업 중 머리에 들어오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물스물 감겨가는 예월의 눈 만큼은 칠판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0교시 자습부터 3교시 영어시간까지 자리에 꼿꼿이 앉아 희미해 가는 정신을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예월이, 3교시가 끝날 무렵 즈음.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고 눈을 떴을 땐, 예월의 방 안이었다. 공기가 온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내 피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지?” 눈을 전부 다 뜨기도 전에 옆에서 강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뜬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강하가 보였다. 예월의 소식을 늦게 전해 듣고 달려 온 강하가 차오르는 숨을 몰아 쉬었다. 그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는, 이마에 맺힌 땀과 제멋대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예월은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워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예월의 오빠, 지월이 그녀의 발 끝 쪽에 서 있었다. 지월은 차마 예월의 눈 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겨우 붙어있던 입술을 떼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그랬어.” “하, 죽을래?” 무책임한 지월의 말에 식어가던 열기가 다시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냥 말 없이 넘어가려고 했더니, 제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지월이었다. “바보 같이 열 끓는 몸으로 학교를 왜 가?” “오늘은 나도 가기 싫었어.” “그럼 집에서 쉬지 뭐 하러 오냐고, 정말.” “오빠가 가라고 자꾸 등 떠밀었어.” 예월은 다시 생각하니 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지월을 흘겨봤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지월이 다시 푹 고래를 숙였다. 예월 때문이 아니었다. 옆에서 죽일 듯 노려보는 강하의 눈빛 때문이었다. 강하의 눈빛에 압도된 지월이 얼른 강하의 시야에서 벗어 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멋쩍게 웃었고, 자리를 피해 재빨리 밖으로 도망 나갔다. 지월이 밖으로 나가고 강하가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예월의 옆에 걸쳐 앉으면서 예월의 손을 잡았다. 학교부터 집까지 단번에 달려와서인지 강하의 손이 열기에 찬 예월의 손만큼이나 뜨거웠다. “내 목숨 한 개밖에 없어.” “나도 알아.” “알면 좀 잘 해. 내 심장 멎어버리는 줄 알았으니까.” 강하가 꿀밤을 때릴 것처럼 예월의 이마에 주먹 쥔 손을 가져갔다. 눈을 질끈 감았던 예월이, 이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예월의 눈까지 가려버릴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강하의 손이 열을 재고 있었다. “아직 열 있네.” “금방 내릴 거야. 병원 갔다가 해열제 맞고 왔으니까.” “아프지마.” 예월의 이마에 있던 강하의 손이 머리 위로 옮겨갔다. 강하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온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강하의 손등을 간질였다. “뽀뽀하고 싶다.” “안 돼. 너도 감기 옮아.” “꼭 입술에만 뽀뽀하나? 신예월 변태네.” 강하가 킥킥거리며 예월의 이마와 볼에 연거푸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강하의 닭살스런 행각에 부끄럽거나 황홀하기보다는 오히려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먼저 든 예월이 강하와 마주잡고 있던 손을 세게 꽉 쥐었다. 그러자 강하가 ‘아아-’하고 아픈 시늉을 냈다. “너 아픈 거 아니지? 왜 이렇게 힘이 세? “나만의 특별한 애정표현이야.” “바로 쌩쌩해지는 거 보니까 꾀병 맞고만? 형한테 다 일러야지. 꼼짝 말고 누워있어. 형한테 다 이르고 올 거니까.” 강하가 두고 보라는 식의 눈빛을 내보이며 지월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장난스런 강하의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사이, 밖에서는 방 문을 사이에 두고 강하와 지월이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 있는 예월이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프다는 애를 왜 억지로 학교를 보내는데! 왜 애를 저 지경까지 만들어?” “야, 야, 강하야! 잠깐만, 차강하!!” “뻔뻔하게 아프면 말하지 그랬냐고? 죽고싶어?!”
그저 착하디 착한 후배, 그리고 동생의 자상한 남자친구일 줄만 알았던 강하가 성난 사자마냥 지월에게 달려들었다. 그 날, 지월은 강하에게 미친 듯이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온갖 쌍시옷은 들어가는 말은 총 집합시킨 강하의 입에서 나오는 욕 짓거리를 들으며, 저승과 이승을 번갈아 구경한 지월이었다. 차강하. 그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 남자였다. 그런 그의 옆에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이 가득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ㅡ “가 율 지문만 잡히던데요?” 이른 새벽부터 검찰청으로 온 예월과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야근을 하며 밤을 꼬박 샌 수사관들이 출출한 배를 달래기 위해 컵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리고 먹는 동안 화젯거리는 자연스레 이번 홍룡파 마약 밀거래 사건이었다. “가 율만요?” “네. 아주 약간 다른 사람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있기는 한데 워낙 그 범위가 작아서 차강하인지 아니면 다른 유통업자 지문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예월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이상했다. 강하가 아닌 율의 지문만 잡혀있을 리가 없었다.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기억 속에 강하는 호텔 현관 앞에서 트렁크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강하의 지문이 잡히지 않았다는 건 상당한 모순이었다. “우선 증거물은 확실하니까, 검사님께서 수색영장 청구하시고 홍룡파가 운영하는 클럽들부터 수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클럽으로 흩어졌을 리가 없겠죠.” “차근차근 해가야죠. 클럽이 아니면 달리 조사할 곳도 없지 않습니까?” 예월의 말에 반박하는 수사관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예월이 입술을 질근 씹었다. 수사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예월이 먹다 말은 컵라면을 들고 일어나 싱크대에 쏟아 부었다. 권규현 수사관이 그 아까운 라면을 왜 버리냐며 울상을 지었지만, 예월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 지 그저 목도리를 칭칭 둘렀다. 가슴이 꽉 막힌 게 답답하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해 줄 담배와 커피가 필요했다. 하지만 주머니 속 담뱃갑에선 단 한 개피의 담배도 찾아볼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인스턴트 커피마저 다 떨어지고 없었다. “어디 가시게요?”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 건물 밖으로 나오자 살이 에일 듯한 바람이 꽁꽁 싸맨 예월의 옷 속으로도 침투했다. 살인적인 추위에도 불구하고, 예월의 발걸음은 가까운 검찰 매점을 젖혀두고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블랙데빌 세 개요.” 이 근방에 블랙데빌을 파는 곳은 이 편의점이 유일했다. 살이 에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편의점에 오기는 했지만, 이런 얼어붙을 강추위에 또 다시 오는 것은 내키지 않아 한 번에 담배 세 갑과 캔 커피 한 개를 사서 나왔다. 귀가 빨갛게 얼었고, 발 끝은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려왔지만, 예월은 편의점 바로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골목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몸 속으로 니코틴이 들어오자 그제야 정신이 깨는 기분이 든다. “아침부터 커피에, 담배에, 지극한 스트레스까지. 몸에 안 좋은 걸 달고 사는 게 취미인가 보지?” 일시적으로 담배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강하게 부는 바람이 빨리 그 연기를 걷어치워내자, 낮은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가 율. 그였다. 굳이 아는 척 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검사의 눈에 띄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며 피해가는 게 범죄인으로서 마땅하다. 하지만 율은 예월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게다가 건방지기까지 했다. 대체 어느 초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니 초등학교를 나오긴 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율의 반토막씩 잘려나간 말들은 무례했다. “괜한 곳에서 시비 걸지 말고 곱게 꺼져.” 꺼져……? 예월의 언어표현에 율이 코웃음을 쳤다. 문득 호텔에서도 강하에게 ‘개새끼’ 라고 욕을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곱상한 이미지와 달리 예월의 입은 비속어들과 친분이 두터운 모양이었다. 율이 코트 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총 한 개를 꺼냈다. “총을 들이대길래 지레 겁먹었었는데, 알고 보니 전기충격 총이더군.” 뻔한 거짓말이었다. 그 날 밤, 예월이 들이댄 총에 겁을 먹기는커녕 예월을 비웃었던 율의 웃음소리는 아직도 예월의 귓가에 생생했다. 율이 내버리듯이 예월에게 총을 던져주었다. 예월이 한 손에 아직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율이 던진 총을 받아냈다. “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주인을 만났으니 돌려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야.” 그거 참 더럽게 고맙네. 후한 인심을 쓰는 사람처럼 말하는 율이 맘에 들지 않았다. 예월이 주머니 속으로 총을 챙겼다. 예월은 손가락 사이에 걸어두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율을 지나쳐 걸었다. “이상하지? 나는 당신이 잡아야 할 범죄자인데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걸 보면.” 율의 말에 예월이 그 자리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떨어뜨려 발로 비벼 껐다. 아직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가 땅과 하나라도 된 듯 납작하게 짓눌렸다. 후……. 예월이 가던 길을 돌아 율의 앞으로 걸어갔다. “당신이 지능적으로 한 짓 덕분에 굳이 내가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거든.” 율이 무슨 뜻이냐는 말 대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쪽이 트렁크에 묻어있던 차강하 지문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당신 지문으로 문질러 버렸잖아.” “헛소리 하는 걸 좋아하나?” 정말로 못 알아 듣는 건지, 못 알아 듣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수 조차 없게 율의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능청스러웠다. “호텔에서 분명 차강하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지문 검사 결과 당신 지문밖에 발견되지 않았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거지?” “글쎄? 그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 지 나도 궁금하군.” 율은 입가에 싱글싱글 웃음을 띠웠다. 상대방의 허점을 모두 꾀고 있는 승자의 여유로운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지, 웃는 모습이 예월을 향해 조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율의 웃음마저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예월이 한 쪽 눈을 찌푸리며 율을 올려봤다. 율의 입에서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예월이 발걸음을 떼자, 율이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예월이 자신의 어깨를 잡은 율의 손을 싸늘하게 쳐냈다. 예월은 불쾌한 표정을 내보였고, 그녀를 붙잡은 율을 응시하며 그가 이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율은 예월을 붙잡아 세워놓고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싶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새낀 바보야.” 뭐? 뚱딴지 같은 소리에 예월이 율에게 되물었다. “얼마나 바보인지까지 알고 싶다면 직접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걸.”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예월의 말 끝에 짜증이 묻어났다. 예월은 농락시키기 위해서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적대감을 가진 상대에게 저런 쓸데없는 말들을 할 리가 없었다. 아니, 쓸데 없는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율이 골목 저 편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는 강하가 있었다. 율의 행방을 찾고 있는 모양인지 주변을 휘휘 돌아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강하는 시야에 율이 들어오지 않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확인해 필요도 없이 강하였다. “당신이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친구 편이라고 말하면 그 쪽이 알아들으려나?” 아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더 꺼내기도 전에, 율은 마지막 말과 함께 예월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횡단보도를 건너간 율이 강하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예월의 눈에 들어왔다. - 검은 코트에 옅은 회색 목도리를 두른 한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섰다. 세차게 부는 바람이 남자의 앞머리를 휘날리게 만들었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매혹적인 눈이 드러났다. 빨간색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자 인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건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반대편 무언가를 짙게 응시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길을 건너오면 한 청년이 남자의 어깨와 부딪치며 지나가고 나서야 파란불로 바뀐 것을 인식한 남자가 ‘아’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남자가 빠르게 횡단보도를 달려갔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넜을 때, 빨간 불로 바뀌는 바람에 차들이 빵빵거리며 남자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지만, 남자는 재주 좋게 차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젠장, 까딱하다간 바보 하나가 더 늘겠군.” 남자가 내뱉은 말은 바로 매서운 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졌다. 04. ‘그 새낀 바보야.’ 율이 하고 간 말을 그냥 흘려 듣기엔 너무 예월의 신경을 자극했다. 대체 어떤 의도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강하. 분명 그의 눈빛은 떨림도 없었고, 한치의 오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 틀림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율의 말은 그저 예월을 농락시키기 위해 내뱉은 거짓된 말 밖에 되지 않았다. 과연, 율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의 판단은 예월에게 달려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림이 느껴졌다. 예월은 옅은 한숨은 내쉬면서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똑똑ㅡ. “오빠 들어간다.” 방 문을 열고 빼꼼 고개만 들여 놓은 지월이 보였다. 예월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바빠?” “아니.” “그럼 뭐해? 간만에 집에 들어왔나 싶었더니 방 안에 꽁 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검사님이 대한민국 바로 잡으려면 어련하시겠어요.” 지월이 입술을 쌜쭉 거리면서 예월의 침대에 풀썩 걸쳐 앉았다. 오래된 침대의 매트리스가 삐그덕거렸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한지 정말 2달은 넘은 듯싶었다. 예월은 예월대로 바빴고, 지월은 지월대로 바빠서 한 사람이 쉬는 날이면 다른 한 사람은 야근이었다. 특히 사명감이 깊은 예월이 더욱 일에 매달려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적었다. 그래서인지 예월의 얼굴이 요전보다 더욱 야위어보였다. 지월은 살이 쪽 빠진 예월을 얼굴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너 밥은 제때 챙겨 먹는 거야?” “그럭저럭. 주변에서 다 챙겨줘.”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은 무슨. 그냥 피곤해서 그러지.” “휴우, 힘들어도 별 수 있겠냐? 네가 좋다고 택한 직업인데.” 좋다고 택한 직업. 그래, 그땐 검사란 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드라마를 통해서 본 검사는 강자 앞에서는 냉철하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약자 앞에서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온갖 정의롭다는 짓은 다 하면서 주변에는 멋진 남자들이 끊일 줄을 모르는 달콤한 직업 같았다. 아니, 그 드라마는 확실히 그렇다고 보여주었다. 그 때가 고등학생 일 때였나? 남들은 시험 공부하기 바쁠 때 밤 10시만 되면 꼭 챙겨 보았던, 지금은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는 그 드라마의 사기행각에 예월은 보기 좋게 넘어간 꼴이었다. 그래도 나름 검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지금껏 큰 후회 없이 잘 지내왔다.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이런 게 소명의식이라는 거구나,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암담한 현실이 눈 앞에 다가올 줄은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했었다. “오빠.” “왜?” “고등학교 때 나 아파서 쓰러졌던 거 기억나? 나 아픈데도 오빠가 자꾸 꾀병부리지 말라고 학교 보냈었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잊냐?” “하긴. 오빠는 강하 때문에 잊을 수가 없지?” 강하. 마치 금기어라도 되는 듯이 몇 년 동안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던 그의 이름에 지월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무엇보다도 예월이 먼저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 놀라웠다. 지월이 예월의 안색을 살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나지막이 웃고 있었다. “나 강하 만났어.” “……뭐?” “차강하 만났다고.” 방금 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더 큰 충격이 지월을 강타했다. 그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방금 네가 말한 그 차강하?’ 라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야?” “나도 그게 꿈이었나 싶었는데 정말이야.” “하……. 정은준도, 알고 있어?” 지월의 질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월의 웃음에서 대답을 찾아낸 지월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은준은 비록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월의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지만, 지금은 예월을 가장 가까운 데서 지켜주고 보필해주는 직장 동료이자 선배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어쩌면 예월의 친 오빠가 은준이라고 해도 모두가 믿을 판국이었다. 조금만 수그리면 예월의 마음까지 줄줄이 읽어낼 수 있는 은준이, 강하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월도 그런 은준을 깜박 잊었을 리 없을 텐데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냐?” “물어보면 너 힘들거 아니까.” “하. 웃겨, 정말.” 진지한 지월의 말투에 예월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지월을 비웃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예월의 반응에 지월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월이 여전히 입가에 조소를 띤 채로 지월에게 말했다. “발연기하지마. 날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은준 선배한테 다 물어볼 거잖아?” “아. 눈치는 더럽게 빨라. 뭐, 네 입을 통해서 듣는 것보단 은준이한테서 듣는 게 훨씬 얻는 게 더 많으니까.” “얍삽한 놈.” “뭐어? 오빠한테 뭔 놈? 너는 위 아래도 없어?” “나 오빠 닮아서 위 아래. 그런 거 없는 거 몰라?” “이게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네.” “할 말 없으면 빨리 나가. 나 피곤해.” 예월이 망설임도 없이 휙 뒤돌아 책상의 스탠드를 꺼버렸다. “진짜 이렇게 잘 거야?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 “이기적인 자식. 여태 지 할말만 잔뜩 해 놓고, 자기 할 말 다 끝나니까 잔다 그러고. 맨날 이런 식이지, 신예월. 정말 치사해서 오빠 해먹겠어? 에잇.” “시끄러우니까 징징거리지 말고 빨리 나가.” “아,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자기 말은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삐친 서른 두 살 먹은 사내의 한 마디였다. ㅡ 캄캄한 거실. 고요한 가운데 찬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지월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흔들리는 달빛을 받아 실루엣에 비쳐졌다. “정은준. 바쁘냐?” -전화 못 받을 정도는 아냐. “뭐 하나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시간이 늦었음에도, 은준은 아직 근무중인 모양인지, 지월의 전화너머로 종이가 팔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데, 하고 건성으로 묻는 은준의 대답이 들렸다. “예월이 강하 만났다며.” -응, 그래. “설마 그렇게 만난 건 아니지?” 전화 너머로 종이가 팔랑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제기랄.” 고등학교 때 국어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비언어적 표현을 너무 잘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은준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을 읽지 않아도 팔랑거리는 소리가 멈췄다는 사실 하나로 그들이 ‘그렇게’ 만난 게 맞다는 것을 감지해버렸다. “정은준. 나 웃어줘야 되냐, 울어줘야 되냐?” -무슨 말이야? “예월이 그 녀석이 차강하 못 잊어 하는 거 뻔히 아는데. 만나서 잘됐다고 웃어주는 게 맞는 거냐? 아니면 병신 같은 그 새끼가 하필이면 마약 수사부 검사인 내 동생 앞에, 마약 밀매자로 나타났으니 울어야 되냐?” 욕 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떡해야 거야? 7년 동안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꼭꼭 숨어서 머리카락 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가 나타났다. 지월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었다. 지금 눈 앞에 그가 있다면 무슨 깡으로 예월의 눈 앞에 나타난 건지 묻고 싶었다. 차강하란 남자 하나 때문에 예월이 숨 넘어가기 직전 상황까지 가는 것을 봐야 했던 그 때. 전국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그렇게 찾으려고 애쓸 때는 눈곱만큼도 보이지도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했을 때, 은준을 통해 그가 홍룡파 조직원이라는 걸 얼마 전에 전해 들었다. 게다가 마약 밀매자라니. 이제껏 이토록 아슬아슬한 관계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월과는 옷깃도 스치지 말아달라고 생각했더니, 그가 스물스물 나타났단다. 이건 사람 염장 지르려고 작정한 것이 아닌 이상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지월아. “이 상황 정말 뭐 같다. 대체 얼마나 더 괴롭히려고 이 지랄인 거냐고.” -야 신지월. 넌 이제 쪽 팔릴 준비나 해라. “뭐?”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네가 굳이 울고 웃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하거든요. 강하도 생각 없는 놈 아니고, 예월이도 어린 애 아냐. 너만 잘하면 돼.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이러겠어?” -이런 등신. 이번 현장에서 습득한 증거물에서, 가 율이란 다른 조직원 지문만 잡혔어. 그래서 지금 가 율한테로 수사망이 좁혀지고 있나 봐. 강하 이름은 현장 다녀온 후로 언급되지도 않아. 대충 분위기 보니까 이 방향으로 수사 진행할 거 같고 말이야. “…젠장. 그걸 왜 이제 말해?!” -네가 끼어들 틈이나 주긴 했어? 아무튼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소설 쓰는 거 좋아하더니 여전하네. 나름대로 동생 걱정한다고 여태껏 고뇌했던 것들이 전부 헛된 일이 돼버렸다. 내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시간도 낭비했다. 게다가 잠을 자야 하는데 잘 시간도 지나버렸다. 젠장. 창피함에 괜스레 짜증이 난 지월은 호탕한 은준의 웃음소리가 얄밉게 느껴졌다. “웃지마. 짜증나.” -그래도 예월인 아직 아무것도 몰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예월이도 이제 차차 알게 되겠지만, 강하가 먼저 말할 때까지 예월이한텐 아무것도 말하지마.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병신인 줄 아냐?” -병신이니까 하는 말이지. “아오, 이 새끼가 오랜만에 전화했더니 내 속만 뒤집고 앉았네. 너랑 더 이상 통화하고 싶은 맘도 없으니까 끊자.” 짜증이 치민 지월이 은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먼저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ㅡ 여전히 바람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차가웠다. 나뭇잎 하나 없이 벌거벗은 나뭇가지들도 12월의 추위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덜덜 떨었다. 예월은 나름대로 옷을 따뜻하게 입는다고 입고 나오긴 했는데, 코와 귀는 물론이고 옷에 쌓인 살들까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옷 단단히 입으랬지? 너 또 감기 걸려서 고생하면 어쩌려고 이래? 제발 말 좀 들어.’ 문득 겨울만 되면 강하의 입을 떠나지 않았던 잔소리가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내복만 입으면 까무러칠 정도로 예월은 두 겹 이상 옷을 겹쳐 입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얇은 옷 한 장에 외투 하나만 걸치고 나온 예월에게 강하는 오만상을 쓰며, 쓴 소리를 하곤 했었다. 그 때의 강하의 표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피식 웃음을 터뜨린 예월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아…….”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게 정말 우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도 그랬었다. “…….” “…….” 그의 생각이 날 때면, 강하는 항상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예월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나타난 것처럼. 방금 전 미소를 짓던 예월은 발과 함께 표정도 굳어버렸다. 강하도 마찬가지였다. 만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때 마주쳐 버린 건.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흔한 ‘안녕?’이란 말도 하지 못했고, 서로의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강하의 옆에 있던 율마저도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삐딱하게 그와 그녀를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었다. “젠장, 뭐 하자는 거야.” 율은 처음에는 흥미롭게 지켜보는 것 같더니, 하루고 한 달이고 망부석이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을 것 같은 두 사람을 보고 이내 지쳤는지 짜증스런 말투였다. 율이 옆에서 눈치를 주는데도, 예월과 강하는 서로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 미동조차 없었다. 이내 싫증을 느낀 율이 투덜거리며 먼저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강하의 발걸음도 율과 다리가 묶여있는 것처럼 함께 움직였다. “강하야.” 겨우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의 이름 하나에 또 다시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가지마.”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강하는 큰 보폭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녀가 다시 ‘차강하!’ 하고 소리쳤을 때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달렸다. 잠깐 동안에 너무나 많이 멀어진 강하를 향해서. “가지 말라고 했잖아.” “비켜.” “내가 너 붙잡았잖아.” “내 말 못 알아들었어? 이미 너에 대한 감정 끝났어. 네가 이렇게 붙잡고 늘어져도 소용 없는 짓이라고.” “그 말, 믿으라고?” “믿든지 말든지 네 멋대로 해. 용건 끝났으면 비켜. 여기서 너랑 떠들 만큼 한가롭지 않으니까.” 날카롭게 두 눈을 치켜 뜬 강하가 앞에 선 예월을 밀쳐냈다. 강하와 눈을 마주했던 예월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조금도 시간을 주지 않았다. 강하는 잠시 동안이라도 예월의 얼굴을 마주하기 싫은 사람처럼,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고 어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 하는 사람 같았다. ‘얼마나 바보인지까지 알고 싶다면 직접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걸.’ 이제야 알았다. 율이 했던 말의 의미를. 강하의 두 눈동자에 담겨 있었던 경멸, 환멸. 강하가 가진 특유의 진회색빛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그만 할게.” 가지 말라고 붙잡을 때도 멈추지 않았던 강하의 다리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세차게 부는 바람과 경쟁이라도 하듯 차도에선 차들이 빠르게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빨갛게 얼은 예월의 두 손이 야무지게 꽉 쥐어졌다. 손톱이 살을 짓눌러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흔들리는 듯, 강하가 몸을 돌려 예월을 쳐다봤다. “그런데 딱 한번만 해볼게.” “…….” “마지막으로 붙잡아볼게. 그래도 안 되면 놓을게.”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는 예월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강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릴 틈이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잡을 수가 없었다. 서로를 잡아 삼켜먹을 듯이 질주하는 차 속으로 휩쓸려 가는 그녀를 붙잡을 새도 없이,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차도로 뛰어들었다. 빠아아앙!! 빵!! 빠앙!! 어느 차에서 울리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여러 대의 크락션이 도심 한복판에 울려퍼졌다. 의도치않게 계속 연재텀이 길어져서..핫 죄송해요!
첫댓글 담편이 너무 궁금해요!!
재밌어요 ㅠㅠ 마지막 장면 이우의 상황을 생각하니 두근두근.. 긴장돼요! 강하랑 예월이가 잘되었으면~ 율이도 왠지 맘에들어요!
독!ㅎㅎ악 어뜩해 되는거죠?
독!! 으악!!너무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