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서원
경기도 여주군 세종대왕면. 향토유적 제10호. 고려말의 학자이며 문신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을 제향하는 곳이다. 처음 조선 세조때 문익점만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되었으나 그후 목은 이색(1328~1396)과의 교우를 참작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이색도 함께 모시도록 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출생-사망 1329 ~ 1398
본관 남평(南平)
자 일신(日新)
호 삼우당(三憂堂)
시호 충선(忠宣)
출생지 강성현(江城縣:경남 산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때
목회씨를 몰래 가져와서 보급함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옴
1360년 계품사(啓稟使)로 원(元) 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緜) 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조 7년 6월 13일자에는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에도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 가지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수는 차이가 있지만 붓두껍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화재배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문익점은 1364년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장인인 정천익(鄭天益)과 씨앗을 나누어 목면나무의 재배를 시험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개의 씨앗을 얻었다.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서 1367년에는 향리(鄕里) 사람들에게 씨앗을 나누어주며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은 호승(胡僧)인 홍원(弘願)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 전체에 목면(木棉) 재배와 무명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인 1375년(우왕 1)에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정사품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첫댓글 장인 정천익이 심은 씨앗에서 꽃이피다
31세에 원나라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