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부자가 되어
우수 이후 닥친 추위가 조금 누그러진 이월 넷째 목요일이다. 새벽녘 글을 몇 줄 남기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마저 읽었다. 암 투병 중에도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였다. 그 책 속에 내 고향 친구로 중학교 동기가 쓴 책의 인용구가 나와 반가웠다. 친구는 서울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해서 홍익대학에서 미술평론으로 전향한 중견 평론가 황인이다.
아침나절 내가 사는 동네 이웃에게 보낼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한 분은 문학 동인회 회원이고 다른 한 분은 이십 년 전 근무지 교장이었다. 문학 동인 오라비는 폐암으로 투병하고, 퇴직 교장도 고령이라 몸의 이곳저곳에서 탈이 났다고 들은 바 있다. 그래서 내가 다른 도움이 못 되어도 여름 산에서 채집해 말려둔 영지버섯이 있어 적은 량이나마 보낼 수 있기에 마음이 편했다.
도서관에 빌린 책을 안고 한 손에 영지버섯을 두 봉지에 담은 종이봉투를 들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차도 건너 이웃 아파트로 가 문학 동인 회원을 만나 영지를 건네니 무척 고마워했다. 누구나 가족 중 암 환자가 있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잘 안다. 영지는 면역력 증진과 성인병 예방에 좋을 거라는 최면효과도 있을 듯했다. 지기와 헤어져 인접한 아파트로 향했다.
은퇴 교장은 칠십대로 코로나가 아니라면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뵈었을 텐데 그럴 사정이 못 되어 그간 전화로만 안부를 나누었다. 교장의 댁에서 가까운 용호 어울림동산 정자에서 만났더니 반가웠다. 코로나 발생으로 자리를 못한 햇수가 어언 삼 년째다. 퇴직 교장 연세는 고향의 내 큰형님과 동갑인데 더 쇠약해 보였다. 볕바른 자리에서 안부를 나누고 영지버섯을 건네 드렸다.
퇴직한 교장과는 후일 식사를 함께 들기로 하고 나는 용지호수 작은어울림도서관으로 갔다. 사랑방처럼 아늑한 공간에는 젊은 엄마와 함께 온 꼬마가 동화책을 펼쳐 읽었다. 책을 반납하고 오늘자 지방지 신문을 펼쳤더니 ‘시가 있는 간이역’에 내가 익히 아는 시인의 작품이 실려 눈여겨 봤다. ‘벚꽃고뿔’이라는 시를 음미해 행복했다. 시인은 올봄부터 경남문학관 관장을 맡는 분이다.
나는 사서로부터 모바일 도서 대출증을 업그레이드시켰다. 창원시 공공도서관을 벗어난 전국의 도서 대출이 가능한 ‘책이음’ 회원증이었다. 내가 가끔 산책을 나가는 사림동 경남대표도서관이나 교육단지 도교육청 산하 도서관 이용도 가능했다. 드물긴 하겠지만 서울이나 경주의 공공 도서관은 물론 낙동강 하구 을숙도 생태도서관 책들도 열람과 대출이 가능하니 마음 부자가 되었다.
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세 권 골라 귀로에 농협 마트를 들려 시장을 몇 가지 봤더니 짐꾼이나 마찬가지였다. 집에다 책과 봉다리(?)를 내려놓고 곧바로 현관을 나서 못다 다녀온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와 인접한 반송공원으로 오르니 주차장 언덕 볕바른 자리는 봄까치꽃이 피어 화사해 허리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에어건이 설치된 언덕을 넘어 이웃한 아트단지 남향 공원에 올랐다.
설 쇠고 봤던 매화망울은 꽃이 반쯤 피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어제 창원의집에서 본 홍매화와 달리 분홍매와 백매였는데 자잘한 꽃잎을 한꺼번에 펼치고 있었다. 문득 십여 년 전 한 줌 재로 흩어진 법정스님의 얘기가 떠올랐다. 스님은 매화는 반쯤 피었을 때가 향기롭고 벚꽃은 만개해야 운치가 있다고 했다. 비록 육성 설법이 아닌 문자로 만난 법문이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나무 숲길을 올라 정상으로 가볼까 싶었는데 지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방금 봤던 매화를 사진에 담아 전송했더니 어디냐고 물어와 집 근처 공원이라니 반송시장에서 칼국수를 같이 들자고 했다. 나아갈 행선지를 바꾸어 공원에서 멀지 않은 저자거리로 내려가 지기와 칼국수 먹었다. 멸치로 맛국물을 우려낸 칼국수는 청양고추에 감자 조각이 수저에 잡혀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22.02.24
첫댓글 벚꽃고뿔을 다른 장소에서 같이 읽었네요
반송시장 칼국수 가성비 갑이죠..정겨움은 덤이구요
지면으로 나마 이 시인을 만나 반가웠습니다.
옥 시인도 거기 칼국수집을 잘 아시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