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
“하 일병, 천주교는 마리아교제?” 군 복무 중 고참병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런 질문을 가끔 받게 된다. 예배당 신자는 예수를 믿지 않고 마리아를 믿는다며 천주교 신자를 비방한다. 비방 정도가 아니라, 생트집을 잡는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 신자는 한 발짝 양보도 없이 성모상 앞에서 절도 하고 기도도 드린다.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사도 신경의 한 토막을 살펴봄으로써 이해의 실마리를 가져 보자.
천주의 모친
“두려워하지 마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두고 보시오.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오실 터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니,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루카 1,30-31.35). 천사 가브리엘이 나자렛의 순박한 한 처녀 마리아께 알려준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내용이다. 이제 마리아는 인성 안에 하느님의 신성이 깃든 하느님의 아들(콜로 2,9 참조)을 이 세상에 탄생하도록 초대받았다.
사실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부르는 것은 성자의 강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표현에서 끌어낸 교리이다.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표현은 예수께서는 온전한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음을 설명한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가 예수님의 신성을 확인한다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는 예수님은 유령이나 가공적인 인물이 아니라 어머니께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처럼 영혼과 육신을 갖춘 온전한 한 인간임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표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부들이 동정녀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이라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이시고 또 하느님이시라면,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Theotokos)이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다. 만일 성자께서 마리아께 태어나시지 않으셨다면, 다시 말해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그분과 우리의 합일은 하느님과의 참된 합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신경의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과, 마리아는 ‘천주의 모친’이시라는 신앙 표현은 상관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게 되고, 예배당 신자들이 말하는 비난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역사적으로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으로 선포했다).
마리아의 동정성 이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란 구절은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 참조)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의 성취로 들린다. ‘젊은 여인’이란 단어를 70인역 희랍어 성경에서는 신체적 처녀성을 더욱더 한정적으로 지시하는 단어(parthenou)를 사용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예수 탄생은 메시아의 탄생임을 선포하기 위해서이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 젊은 여인은 마리아이며 그녀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또 동정녀로 선포되셨다. 성경학자들이 비록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의 예수 탄생 기사 내용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마리아의 동정성은 성경적으로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경적 텍스트만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반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확실한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은 옛부터 그리스도교의 전승에서 성스럽고 고귀한 부분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비록 마리아의 신체적인 동정성은 주로 예수님의 유년기에 나오는 복음 기사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초세기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전례 기도문에서도 “동정녀 마리아”란 호칭으로 불렀으며 또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의 전승이나 가르침을 통하여 확고히 가르쳐 온 교리이다.
사실 예수 탄생이 누구와의 성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을 강조해 왔다. 그렇지만 동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도 우린 알아야겠다. 인간의 성을 원죄와 약간은 연관시키면서 성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성 신학이나, 대부분의 문화 속에 들어 있는 성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 때문에 마리아의 성적인 순결과 예수의 동정 잉태가 강조되었다는 사상은 언제나 배척을 받았다.
신학적으로 단순히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동정성이 소중히 여겨진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조건이 영혼의 조건을 나타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졌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이기 때문에 영적인 동정성과 육적인 동정성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또 선과 사랑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표시로서의 동정성이 신학적으로 소중히 여겨진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께 선택받은 처녀로 비유되고, 처녀인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느님만을 섬겨야지 다른 신에게 눈을 돌려서는 안되었다. 동정성 이해엔 이러한 성경적인 사상이 깔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 교부들은 마리아께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먼저 가슴으로 주님을 잉태하셨고 그다음에 그녀의 태중에 잉태하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마리아의 귀에 속삭이셨고, 마리아는 전적으로 받아들이셨다. 다른 신에게 몸을 내맡기는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마리아는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섬기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표상이 되셨고, 당신의 순명으로 새로운 하와,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다. 마리아는 당신의 “자유로운 믿음과 순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셨다”(교회 헌장, 56항).
여기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완전 무결성을 생각하게 된다. 마리아의 성성은 사실 그녀의 동정성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완전한 믿음에서 나온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마리아의 신체적 조건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것과 마리아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마리아의 동정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리아의 동정성이 하나의 신학적 표상으로서 은총의 충만함과 구원의 성취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완전 무결한 은총을 받은 이와 하느님께서 완전하고 깨끗한 결합을 이루심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유로 마리아는 우리의 구원에 미리 들어가셨다고 교회는 가르친다(1854년 교황 비오 9세께서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관한 교리를 선포하셨다). 그녀의 동정성과 완전 무결성은 같은 동전의 다른 두 면과 같이 이해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물음은 이어질 것이다. 마리아는 어쨌든 아이를 잉태하여 낳은 게 사실이라면, 그녀가 그 과정에서 경험한 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아니면 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로 돌릴 성질이 아니라 공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자연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을 수도 있다. 더구나 그 아이가 하느님으로 내세워질 때 그러한 물음이나 흥미를 막을 재주는 없다.
원죄 교리와 연결하여 마리아의 산고를 논할 필요는 없다. 분명한 것은 마구간에서 출산을 할 때 그녀는 육체의 허약함을 알았을 것이고, 건강한 아이를 낳았을 때 출산의 신비를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은 이러한 주변 문제들에 대해 별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신경에서 동정 잉태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개입을 설명하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
사도 신경의 세 번째 조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데,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이고, 또 그분은 하느님이셨다는 두 번째 조항의 맥락을 연장시켜 준다. 또한 신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마리아께 나셨는데, 그분은 온전한 사람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라는 표현은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가 있다.
사실 마리아가 동정녀라 해서 그것이 예수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마리아가 동정녀가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설사 예수가 다른 아이들처럼 태어났다 해서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입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도 신경이 “동정녀 마리아께 나시고”라고 신앙 고백을 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예수님의 신성 확인은 부활 사건이다).
니케아 신경은 이러한 하느님 아들의 육화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표현을 첨가한다.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악으로 떨어진 창조계의 복구나, 악으로 떨어진 모습에서의 구제를 위해서 창조계는 자신의 한정된 힘을 능가하는 분의 개입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하여 성자께서는 강생하셨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 3,16; 1요한 4,9 참조).
사도 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 마리아께 나시고”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은 육이 되신 하느님의 지고한 신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강생의 신비는 하느님의 내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법칙으로 논증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당신의 기원을 두신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구원은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으로 빚어졌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1코린 15,47).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