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나 어찌 불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쓰임새가 없었다면 불교는 250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불교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먹구름처럼 어둡고 탁한 마음을 맑히는 데 가장 유용한 가르침입니다.
마음의 병은 자기와 세상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불교는 자기의 세상을 바로 보는 데 가장 지름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월정사 현판에는 ‘설청구민(說廳俱泯)’이란 어귀가 있습니다.
귀를 활짝 열고 너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너의 생각은 곧 나의 생각입니다.
나의 생각이 곧 너의 생각이면 나와 너라는 구분마저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 그 자리가 바로 깨끗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 그곳이 바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토이고 천상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마음에는 대립과 갈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진리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뿐이라는 역설이 있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려면 넓은 안목이 필요합니다.
넓은 안목이란 곧 공간적? 시간적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나’만 보지 말고 그 ‘나’를 지탱하고 있는 주변의 ‘너’까지 두루 살피고,
‘현재’만 보지 말고 이 현재를 만든 ‘과거’와 이 현재가 만들어가는 ‘미래’로 시야를 확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넓은 안목입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와 ‘나의 것’들은 몽땅 ‘너’와 ‘너의 것’에서 흘러온 것이 됩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의 ‘나’와 ‘나의 것’들은 몽땅 ‘너’와 ‘너의 것’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 이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변화의 흐름을 인정하는 사람은 놓아야 할 순간이 찾아왔을 때 감사함을 표합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몽땅 세상에서 빌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내 것이라며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집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흥망성쇠의 물결 따라 출렁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흥망성쇠의 물결 따라 기쁨과 슬픔을 끝없이 반복할 것입니다.
출처 ; 정념 스님 / 정념 스님이 오대산에서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