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典尙友(8) (親舊-4)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망형지교(忘形之交)
연암이 한양을 떠나 연암협으로 완전히 들어간 해는 그의 나이 42세(1778년)이었다. 벗 유언호(兪彦鎬)의 충고를 따라, 당시 정계의 실려자로 부상하여 국정을 좌우하던 홍국영의 화를 피하기로 하였다. 이즈음 장인이 별세하였고, 또 가난한 살림을 꾸리던 형수마저 병사하여 연암의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 졌다. 연암은 이전부터 물색해 둔 연암협으로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연암의 은둔을 권했던 벗 유언호가 개성유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왔다.
내가 어명을 받아 서도 개성에 왔는데, 나의 벗 박중미(朴仲美:박지원의 자)연암이 새로 지은 집이 그 거리가 30리를 넘지 않는 가까운 곳이었다. 중미가 출입할 때면 곧장 관부를 지나는데 그는 나에게 알리지 않고 나 역시 알리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 마침 홀로 앉아 있자니 어떤 객이 기쁜 낯으로 문을 들어서는데, 곧 중미었다. 서로 보니 기쁨이 넘쳤다. 이어서 화로를 놓고 둘러 앉아 고기를 구워먹는 자리를 가졌다. 술이 달아오르자 각각 자기가 쓴 시를 꺼내어 목청껏 높여 읊으니, 그 목소리가 우렁차고 시원 하였다. 얼마 뒤 또 종이를 주니 산수와 나무, 바위를 그리는데 시원스레 운치가 있어 흡사 예전에 함께 마하연에서 노닐던 때의 일 같았다. 이윽고 초승달이 막 떠올라 숲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서로 함께 일어나 마당을 거닐다가 문까지 나가 전송하였다.
바야흐로 우리가 만나 서로 마음이 합하였음에 가슴 떨리는 듯 통하였다가 스스로 격이 사라졌으니, 나는 알지 못하겠다. 누가 나인지? 누가 중미인지? 어디가 닭과 돼지가 뛰노는 연암 마을인지? 어디가 창이 늘어선 관사인지? 저 유수와 객이 거문고에 기댄 채 아무 말 없으니 어찌 신교(神交)가 아니겠는가?
유언호는 이런 광경을 망형지교, 신교(神交)의 정경을 글로 지어 연암에게 보냈다. 이에 연암도 화답하여 글을 보냈다.
연암협에 있는 나의 집은 개성과 불과 30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개성에서 묵으면서 놀았다. 올 겨울에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사경(士京, 유언호의 자)이 개성유수로 나왔다. 더러 객관에서 서로 만나 즐겁게 옛일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벼슬하지 않았을 때와 같았다. 이런 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득의하고 불우하고 영달하고 빈궁한 처지를 전연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는 것일까.
어느 날이었다. 사경이 시종들을 단출하게 하고 아들과 함께 금학동으로 나를 보러 왔다. 당시 나는 양씨의 별장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곧 술을 데워오게 하고 서로 그동안 저작한 글을 보이면서 비평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떤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밤을 지낼 때와는? 단지 백화암의 비구승 준대사가 참선하고 앉아 있는 것만 없다 뿐일세. 조촐하게 모여서 노는 것이 관천에 있을 때와 같건만 어느 틈에 우리의 머리가 모두 하얗게 세었네 그려”
관천이란 한양의 서소문에 있는 나의 옛집으로 금강산에서 돌아와서 거기 모여서 놀았던 곳이다. 당시 내 나이 스물아홉으로 사경보다 일곱 살이 적었지만 양편 귀밑머리에는 새치가 벌써 대여섯 가닥이 있어서 나는 시의 소재를 얻었다고 스스로 기뻐하기까지 하였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시의 소재라고 여겼던 새치가 거리낌 없이 어수선하게 섞였건만, 사경은 병권과 문임을 가지고 도성을 진무하고 있으니 지금 코수염, 턱수염이 다 희게 되어 마침내 이런 꼴이 된 것이다.
사경이 자기 귀밑머리 뒤의 금관자를 만지면서 말하기를
“제 눈으로 금관자를 본다 해도 그리 대단할 것은 못되지만 더구나 귀밑머리에 붙어 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랴!”
연암의 벗 유언호는 형편이 어려운 연암에게 개경에서 30리 되는 곳에 있는 연암협을 권하고 자기도 연암을 따라 규장각 직제학에서 개성 유수(오늘날 개성시장)로 나왔으니 이들의 교류는 망형지교요 신교가 아닌가? 오늘날에도 이런 친구가, 이와 같은 깊은 우정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 망형지교(忘形之交)
신분이나 학벌이나 용모 등에 구애되지 않는 친밀한 사귐. 격의 없는 교제. 忘形之友(망형지우).
박지원 열하일기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본관 반남(潘南), 자 중미(仲美), 호 연암(燕巖)이다.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라다가 16세에 조부가 죽자 결혼,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보고 귀국,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가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과농소초(課農小抄)》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서얼 출신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며 정경대부(正卿大夫)가 추증되었다.
마음 맞는 사람과 더불어 맑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눈 속이 어울리고
빗속이 어울리고
달빛 속이 어울린다.
비가 눈보다 낫고
달이 비보다 낫다.
-유만주-
첫댓글 앞을 내다보며 당대를 선도했던 연암에 대하여 새삼 더 깊이 있는 인식, 고맙소
행복한 분들이셨네요,
지금 시대의 박지원은 왜 그모양인지,,,,,,,감사,
우리의 힘들었던 시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셨다니 참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갑니다. 감사
'忘形之交' 그런 벗이 있으면 요즈음을 보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막걸리나 마시면서 한 세월 보냈으면
역사속에 멋있게 살다가간 그분들은 이름이라도 남기셨거늘 우린 아니 저는 무엇하면서 그 긴 긴시간들 허송세월로 보내 버렸을까?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