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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자료방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38. ( 사성암. 차의 기원. 정신대. 세계 제 2 차 대전. )
lightinus(신연숙) 추천 0 조회 87 10.12.14 09: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오산(531m)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자라 모양 산세.

페러글라이딩 동호인들 점프장소로 각광.
죽연마을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오르는 산길

 

발아래로 감아도는 섬진강물에 눈이 부시고

더 높이 오르면 구례 일대 전경이 그럼 같다.

 

바위 사이에 자리한 사성암을 중심으로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비경 앞에서 선인의 경지가 느껴지는 산세.


사성암은 백제 성황 22년(544년)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

오산 주변에 기암괴석이 많아 소금강 이라 부르고 있으며

암벽에 서 있는 부처 조각이 있는데 마애여래입상이라 한다.

원래 오산암이라 불리다가 4 고승이 수도.

'의상대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선사'

하여, 오늘날 '사성암'이라 불리우고 있다.

 

 

 

사성암

 




<













<














산신각







우리나라 사찰터 풍수지리설의 뿌리인 사성암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결을 따라가면 구례
사성암은 구례에 우뚝 솟은 오산(鰲山)에 있다.

연기(緣起), 원효(元曉), 도선(道詵), 진각(眞覺)
4명의 성인이 수도한 사찰이라 하여 사성암(四聖庵)
2005년 4월 21일 신라대렴공차시배지 기념비 제막식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사성암 주위풍경은 아름답다.
60년간 사성암을 지켜온 김경례 보살은 7년전 돌아가셨다.
김보살은 100여 마리 고양이를 키웠던 보살로도 유명한 분

김보살이 운명 후 하나, 둘 떠나
지금은 고양이가 한 마리도 없다.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조성했다는 마애불.'

전각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유리창을 통해 환하게 미소로 반기는 듯한 마애불
마애불이 왼손에 든 찻잔이 방문객의 눈길을 이끈다.

"아, 저것은 혹시 찻잔이 아닐까!!?'

대개 약사여래불 입상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약병.
따라서 이 불상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약병'이 정설.
그러나 일각에서는 찻잔의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

보성에서는 해마다 다향제가 열린다,
원효가 손톱으로 조각 했다는 마애불.

'그렇다면, 상호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이곳 정상에 오르면 발 아래로 구례 오산과 사성암,
섬진강과 구례읍의 전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수십 개의 바위 기둥과 절벽들이 있어 소(小)금강산

사성암을 중심으로 풍원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비경이 자리하고 있다.

12비경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변 사이
구례읍에 잡힐 듯 시야에 다가오는 사도리촌
바로 여기서 한국 풍수의 시원을 연 도선국사

도선 국사가 만난 지리산 이인은 누구일까?

도선이 사성암에서 지리산 이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 풍수지리설은 어떠한 형태로서 변형되었을까?

도선은 오산 정상에서 지리산 이인과 교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지리산 이인은 도선에게 구례천 아래 구령을 손짓.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제게 조그만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께 바치려 합니다.
천한 술법이라 여기지 마시고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

지리산 이인은 도선에게 말하고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도선이 기이하게 여겨 남해 물가를 찾은 곳이 사도촌(沙圖村)

그처럼 구례는 한국풍수지리의 비원이 탄생한 곳이다.
연기 조사가 창건하고 도선이 머물렀던 오산의 사성암
원효가 찾아와 큰 암벽에 손톱으로 약사여래 입상을 조성.

이렇게 볼 때 사성암은 연기 조사가 맨 먼저 주석했고
그 뒤 원효와 도선 국사가 주석, 진감 국사 혜심이 안주.

차문화의 공간으로 볼 때 사성암은 도선국사가 주석
그 사성암에 원효대사가 찻잔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것이 찻잔이라면, 차문화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듯.


그동안 사성암을 욕심 낸 수십 명 스님이 다녀갔다.
하지만, 사성암은 속된 생각을 하루도 용납 않는 곳.
사성암 오산으로 줄이어 찾아오는 페러 글라이더 처럼.

백운산 지맥이 구례읍을 향해 북향으로 솟다가
섬진강 변에서 우뚝 솟아 멈추어 선 곳이 오산.
오산을 오르는 차량마다 허덕거릴 만큼 오르막길.

오산 사성암 곁에 있는 패러 글라이딩 활강장.
섬진강 위 허공을 향해 달려가는 패러 글라이더.
이륙 순간에 풍향이 바뀌면 구경꾼들 가슴도 철렁.

'삶과 죽음 사이를 활강하는 패러 글라이더.'

현실에서 미래의 내세를 추구하는 불교신자.
사성암 계단마다 불자들이 놓고 간 기왓장들.
수많은 기왓장마다 그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곳.

'패러 글라이더들과 불도들의 묘한 앙상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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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을 사수했던 김보살의 애잔했던 삶.
김경례 보살은 1915년 전북 남원군 운봉면
아영리 성니 마을 두메 산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부모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17살 꿈 많은 처녀 시절에 찾아온 불행.

1931년 일본은 조선인 장정의 강제징병과 정신대 모집
일제의 마수는 그녀가 살고 있는 두메산골에도 뻗쳤다.
그녀가 일본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피신한 화엄사

화엄사에서 2년간 스님들 빨래를 해주면서 지냈는데
그무렵 일제 하에서는 스님이 각시를 얻어도 되었다.
당시 그녀는 19 꽃다운 나이라 한창 어여쁠 때 였다.

노승은 그렇지 않았는데 젊은 중은 그녀를 추근 추근.
당시에는 각시를 2~3명씩 데리고 산 스님들도 있었다.
그녀는 49세 대처승 이용산 스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밥해주고 빨래해주다가 20세 되던 해에 사성암에 왔다.
한번은 부처님 앞에 푸짐하게 차려놓고 절하라던 대처승.
그날 그일이 김보살에게는 결혼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화엄사의 말사였던 사성암
마땅히 관리할 스님이 없어 폐허
종단에서 화엄사 스님 한 명을 파견.

그가 김보살이 모시던 이용산 스님.
그당시 다 쓰러져 갈 정도의 사성암.

53 부처를 모셔 혼자도 겨우 누울 비좁은 방.
그 방에서 그녀는 이용산 스님과 함께 지냈다.
53 부처를 모신 비좁은 법당 방에서의 신혼생활.

23세 되던 해 친정 논 5마지기 팔아 불사를 시작
그후 80세까지 고양이와 함께 사성암을 지킨 60년.

처음 사성암에는 불상이 35불 밖에 없었다.
나머지 불상들은 태안사에서 옮겨왔다 한다.
53불은 높이가 53m에서 작은 것은 36cm까지.
조성 연대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로 본다.

사성암은 544년(성왕 22년) 연기조사 창건
원래 오산암이었는데 네 명의 고승이 수도.
그리하여, 오성암에서 사성암으로 바뀌었다

김보살이 운명한 후 사성암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성암에 길이 놓이고 단번에 구례 제일의 기도 도량
오늘날 사성암은 참배 인파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사성암에서 특이한 점은 이름을 쓴 수많은 기와장.

지붕위에 있지 않고 발걸음 아래 곳곳에 널려있다
돌계단 곳곳의 기와들은 가족의 행복을 비는 바램들.
그 기와장 하나 마다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듯.

그 기와들은 탐방객에게 특이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다른 사찰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풍경이기도 하다.
불자가 아니라도 이곳에 서면 사라지는 마음속 시름.


 

 

 

차의 기원.

 

 

 

약 100만년전 중국 서남부 운귀고원의 야생 차나무

기후가 따뜻하고 습한 운남성 원시림이 원산지의 하나

그리고, 중국 남부 사천성에서 야생 차나무 발견

 

차나무는 남방지역 동백나무에서부터 진화

 

여러 품종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녹차(綠茶)

푸름을 죽이고 비비고 건조시켜 만든 것이 녹차

녹차 제조 온도가 낮아 검은 색을 띄면 흑차(黑茶)

 

당나라와 송나라때 흰 찻잎으로 만든 차가 백차.

차를 해볕에 말려 비벼 붉은색갈이면 홍차(紅茶)

최초의 홍차는 중국 남부의 복건에서 만들어졌다.

 

또 다른 품종인 우룡차 역시 복건에서 기원

 

"무이차 대나무 그릇에 펴서 해볕에 말린다.

푸름이 조금 죽은 후 가마에 넣어 찐다.

그러면 반은 푸르고 반은 붉은 우룡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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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를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준 사람은 신농씨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의학을 전해준 동이족 인물. 

몸소 70여 가지의 풀을 뜯어 먹어가며,

어떤 풀이 약이 되고,  독이 되는지 연구

훗날 신농본초경이란 책으로 편찬되었다.


그는  연구 도중에 독초에 중독되어 운명. 
 약초로 생명 연장의 꿈을 꾸게 했던 신농씨

신의 노여움을 받아 독초 때문에 괴롭게 운명.


오늘날 신농씨는 약초를 찾아낸 것보다는

차(茶)를 처음 발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차가 주는 육체의 휴식과 마음의 평화,

인간에게 상당히 고차원적인 휴식 문화


이후 6세기 경 달마에 의해 동쪽으로 전파된 불교.

차 문화는 구도자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차가 유입되었다는 기록

가락국 원년에  인도 공주 허왕옥이 들여온 것.

차는 중국보다 인도에서 앞서 유래된듯 보여진다.

 

 



정신대(挺身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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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일본인들은 노동력의 부족함을 채우려

근로 정신대란 이름으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일본과 한국 등 군수공장에서 일하였으나,

 전쟁터에서 사기가 떨어지고 향수병에 시달리는

일본 군인들의 성욕 돌파구로서 투입하기 시작

일부 기존 정신근로대 우리나라 여자들까지 투입

 

처음에는 자원 여자 기생등의 한정된 여자들이 모집 대상

군인들이 성병에 감염되는사례가 늘자 직업  여성은 배제

처녀 위주로 모집했으나 여의치 않자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

 

그 대상이 우리나라의 여자들에게로 집중되었다.

현재 정부차원에서 일본 정부에게 진상규명 해명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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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2차대전 당시 동원한 여성 종군 위안부.
1910년 한일합병 후 강간 대상이 된 이조 여인들
1932년 상하이 사변이후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빈발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나가사키 지사에게 위안부 요청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전쟁터에 위안부를 끌어들인 첫 시기
그후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시민을 강간

일본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종군 위안부 정책을 취한다.
특히 이조여성은 유교관념이 투철해 성병이 없으리라 판단
미혼의 이조 여성을 종군 위안부의 적당한 대상으로 정했다.

근로 정신대는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족하기 위한 정책
제사·방직공장의 이조 여성들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했다.


<모집과 동원>

중일전쟁이 확대된 후인 1937년 8월 24일 일본 각료회의
여성도 전쟁에 참여하는 '국민정신 총동원 실시 요강'가결
1941년 11월 '국민근로보국 협력령'에 따라 14~25세 여성들.

연간 30일 이내의 국민 근로보국 대협력 활동을 하도록 했다.
1942년 8월 국민징용령 제2차 재정에 따라 여성들 징용 가능.
자주적 참여를 원칙으로 이조 여성들의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1943년 9월 17개 직종에 관한 남자취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고
여성을 취업하게 하는 '여자 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결정
'여자근로정신대'를 자주적으로 편성시켜 여성들의 동원을 도모.

정신대는 1~2년간에 걸친 장기동원이었다.
1944년 8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이 공포
1년 동안의 정신 근로를 법으로 강제 동원

1941년 12월 이후 이조에서 여자몰이가 본격화되어
지원과 동원을 위한 강연회와 회의가 계속 이어졌다.

1942년 5월 발송된 '제2차 특별요원 진출에 관한 조회' 문서
병사 29~35명당 1명의 군대 위안부가 계획되어 그 수를 배당
군부는 필요한 인원수를 산출해 면사무소 등을 통해 동원령.

"군인들의 심부름하는 일"이란 말로 속여
10대 후반에서 20대 이조 여성들을 모집했다.

1937년 중일전쟁부터 본격적으로 끌려간 정신대.
모두 17만 ~ 20만명 가운데 80%가 이조 여성들.


< 정신대 활동.>]

정신대는 노동력을 주로 착취당한 근로정신대
성적인 착취를 당한 종군위안부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근로정신대로 차출된 이조의 여성들
강요에의해 위안부를 해야 했던 것으로 추정.

근로 정신대는 일본의 도야마 시즈오카 등지와
대구·부공장과 방직공장에서 하루 14시간 노동.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굶주리며 노동력만 뺏겼다.

종군위안부 경우는 중국·일본·동남아시아로 끌려가
군 감시와 통제 아래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역할

미얀마, 트랙 섬, 필리핀, 테니안 섬, 마리아 군도,
수마트라, 셀레베스, 인도네시아, 오키나와[沖] 등
각지마다 종군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위안부의 배치와 유지관리 막사 등도 군이 준비한 것
위안소의 규정을 보면, 30분 이상 머물 수 없다는 명시.
콘돔을 착용하지 않으면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명시

위안부들은 보통 하루 12시간 정도 군인을 받는데,
이른 시간에 병사 하사관, 밤엔 장교를 주로 받았다.

월 3회가량 성병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고
외출 등의 사적인 행동은 엄하게 규제했다.

전쟁에 지쳐 있는 군인들의 유일한 '놀이감' 위안부
일본인 매춘 여성도 있었으나 이들은 돈을 선불받고
그 돈을 갚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조건이었다.

반면 이조 여성 위안부는 달랐다.
그만 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조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곳.

"흰 쌀밥을 배불리 먹고 돈을 번다"

그 말에 속아 갔거나, 강제로 끌려가
하루 30~100명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

특히, 정절을 목숨처럼 여겼던 정조관념
남녀칠세부동석 전통적인 고루한 유교관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을 상대하는 일.

'수치심으로 자살한 위안부도 상당수.'


<패전 후 위안부의 처리와 생활>

종전 후 위안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일본.
군 내부의 공창단까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
일본은 위안부 증거 인멸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종군 위안부에 관한 각종 문서와 자료들의 인멸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 위안부들을 현지에다 방치.
또는 참호에 가둬놓고 폭파해 일본군과 함께 옥쇄.

중국은 각지의 징병 학도병 징용부 등과 함께
종군 위안부를 상하이에 집결시켜 귀국시켰다.

그러나, 일부 위안부는 비관 자살, 귀국 거부.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 현지에서 정착.

운이 좋아 살아 귀국한 경우에도 성병의 후유증
또는 대인관계 기피증, 불면증으로 시달린 위안부.
그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 고생도 많았다.

대부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잡일로 하루 하루 연명.
설령 결혼하더라도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었다.


<일본의 태도와 대응책>

정신대 배상요구에 일본은 방관하는 태도로 일관.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끝났다고 주장.
1965년 '김종필 오히라' 청구권 협정으로 완결 주장.

1992년 1월 일본 육군이 위안소 관리일지 발견.
일본이 위안소 감독과 통제에 관여한 증거 포착.
종전까지 일본은 정부와 군의 개입을 거부해왔다.

그리고, 위안소는 민간인의 상행위로 전가했다.
1992년 2월에 발견된 정신대 강제동원 관련문서.
일본 국왕이 재가해 공포한 '여자 정신대 근무령'

일본정부가 정신대 강제모집에 깊숙히 개입.
정신대를 모집하고 관리한 사실도 드러났다.

1988년 한국교회 여성 연합회 정신대 연구 팀

후쿠오카에서 오키나와까지 답사하며 표면화
1990년 발족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가
일본 정부에 보낸 공개서한 내용.

일본은 정신대 사실 인정과 사죄,
피해 유족과 생존자에 대한 배상,
역사 교과서에 정신대 사실 명기

일본 정부는 정신대에 관한 개입사실을 부정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씨
정신대 최초 증언자로
국내에서의 기자 회견

같은 해 9월 정신대 신고 전화 개설에 힘 입어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 신고가 들어오고 있다.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 반대
일본 정부의 정신대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
이를 계기로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정기 시위

1990년 7월 발족된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산하에 '정신대 연구회의'의 지속적인 연구활동
자료집 발간 사업으로 정신대 문제를 새롭게 조명

정신대 문제를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는 움직임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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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강제 동원을 피하려 사찰로 숨어든 당시 처녀들.
스님과 혼인해서라도 정신대 동원령을 모면하려 했던 듯. 





세계 제 2차 대전 


 


세계 경제공황 후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45).
전쟁을 일으킨 중요 주축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
그에 맞서 싸운 프랑스 영국 미국 소련 중국 연합국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남겨둔 분쟁의 씨앗.'

20년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로 확산

그 결과 소련은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세력을 확산.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고 세계 열강 판도의 변화.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

4,000만~5,000만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
인류 역사상 가장 최악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추축국 선제 공격과 연합군 대응으로 전쟁 발발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과 연합군의 이동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했다.

1933년 히틀러는 집권하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
히틀러는 1936년 3월에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1936년말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이탈리아와 동맹체제

독일 이탈리아는 반공 명목으로
1936년부터 스페인 내란에 개입.

1938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1939년초 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공격해올 경우
프랑스 영국의 군사원조를 보장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독일과 소련간 불가침조약을 체결.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1/3에 해당하는 서부는 독일이 갖고
나머지 2/3 동부는 소련이 갖기로 합의.

8월 25일 영국과 폴란드가 정식 상호원조 조약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며칠 연기했다가 공격.
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1939년 9월 무렵 연합국(영국 프랑스 폴란드)
산업 자원과 인구 및 병력 면에서 모두 우세,

독일군은 무기와 훈련, 작전이론, 규율 및 사기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전투적으로 강한 군대.
독일군 보병사단의 질적인 우세와 강력한 기갑사단.

독일 공군도 1939년 당시 세계 최고였다.
독일 해군은 연합국 해군보다 열세인 상황,

폴란드는 약 5,760km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국경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 육군은 100만 병력을 동원
그러나 폴란드는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없는 상태.

독일 공군은 폴란드 공군보다 10배나 전력이 막강.
9월 17일 소련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침공.
독일군은 민간인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비오듯 포격.

독일군은 총 7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폴란드 병사 8만 명이 국경을 넘어 탈출.
독일군은 4만 5천 사상자를 내고 폴란드 점령.


러시아-핀란드 전쟁

독일과 협정으로 짧은 기간에 큰 이익을 얻은 소련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를 공격했으나 격퇴 당했다.
핀란드의 많은 호수와 숲 천연장애물을 과소평가한 탓.

서구 열강은 소련이 맛본 굴욕을 공공연히 기뻐했다.
핀란드 승리로 서구 국가는 소련 군사적을 과소평가
그러나 소련은 1940년 3월 마침내 핀란드를 점령한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사상자,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폴란드 침공에 성공과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수립
노르웨이에 30만 주둔군을 배치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점령함으로써
스웨덴에서 독일로 오는 철광석을 보호
영국을 공격할 해군 및 공군 기지를 확보.

독일군은 노르웨이 진군과 동시에 덴마크를 점령.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대공세.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단숨에 휩쓴 뒤 프랑스로 진격.

80만 프랑스 상비군은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

그러나, 독일군의 적수가 못된 프랑스, 노르웨이.
히틀러의 빠른 공격으로 영국 원정군은 유럽에 고립.
19만 8,천 영국군과 14만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이 구조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
이후 연합국 전력에 귀중한 보탬.

무솔리니는 프랑스 붕괴를 보고,
독일과 맺은 협력 관계를 강화한다.
국익을 위해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

독일군은 1940년 6월 14일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의 휴전 요청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르통데에서 조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휴전협정은 6월 24일 조인.

독일군 점령 지역은 프랑스 북부지역 전체였다.
비점령지 남동부 지역은 프랑스 전 영토의 2/5

1940년 6월 프랑스의 붕괴는 영국 해군에 심각한 문제
막강한 프랑스 해군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탈리아 해군도 영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면 영국은 패배.
영국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프랑스 군함을 압류.

프랑스 점령으로 유일하게 남은 적은 영국뿐.
그러나 영국해협이 있어 접근조차 어려운 영국.
독일 공군과 영국의 공중전은 영국 공군의 승리

히틀러는 원래 1943년 소련을 기습할 작전계획
1940년 7월 영국이 저항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일에 대해 점점 더 비우호적인 태도

1941년 5월 독일은 소련의 유럽점령에 동참.

독일의 전력을 영국에게 과시해
미국이 유럽개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다시 한번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미국은 폭력과 맞서 싸우는 세력에 물자제공을 선언.
이 정책에 따라 미국은 독일과 싸우는 영국을 도왔다.

루스벨트는 낡은 구축함 50척을 영국 대서양 기지와 교환
미국의 잉여 전쟁물자를 영국에 넘겨주고 13조 달러를 지원.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영국의 상황은 당장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영국의 장래는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영국을 구해준 것은 히틀러였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을 도운 미국.

독일의 기습 공격에 소련은 완전히 허를 찔렸고
소련군은 후퇴하며 농작물을 불태우고 다리를 파괴
독일군은 소련의 철도망과 군수물자를 쓸 수 없었다.

독일군은 640km를 진격하여, 모스크바 320km에 육박.
10월과 11월 추위에 직면해 얼어죽는 동상자가 속출.
이미 프랑스 전투와 발칸 전투 사상자 수를 넘어섰다.

11월까지 독일군은 약 73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련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독일군에 반격을 개시.

한편, 중국에서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유럽 식민지를 강탈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이 차지한 말레이 반도는 주석·고무·석유의 생산지.
일본은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 항공기
그중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사망.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있어 피해를 모면

진주만 해안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모면.
일본은 필리핀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대부분 지역을 점령.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까지도 점령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일본이 참패.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세계 2차 대전은 종식된다.

전쟁 관련국이 쏟아부은 전비는 1,000조 달러
전쟁으로 인한 불행과 고통 및 혼란은 그 이상.
'제 2차 세계 대전' 여파로 일어났던 6.25 전쟁

1950년대 우리나라 정세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세계 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간 사상전.
특히, 지리산 일대는 치열한 사상전에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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