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대학교만 가면 걱정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도, 부모라는 천형(天刑)은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대학시절에 괜찮은 이성 친구를 만나서 공부와 정서면에서도 상승작용을 일으켜 풍성한 대학생활을 경험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연히 연애에 빠져 학업을 게을리 하거나 혹시 실연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그저 열심히 공부나 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미국 대학에 있는 아들아이는 학교 오케스트라 첼로 오디션에 갔다가 음악을 전공하라는 교수의 권유를 받아, 경제학(or 경영학)과 음악을 복수 전공할 것 같다. 늘 음악을 아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으니, 음악을 전공하면 혹시 배필을 찾는 것이 좀 쉬워질지도 모르겠다.
딸은 국문학과 심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싶어 한다. 남녀공학이라 해도 아직 한 번도 미팅을 못한(안한?) 딸이 좀 안쓰럽다. 피부도 하얗고 인물도 괜찮고 키도 큰데 좀 통통해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작업(?)을 걸어오는 남학생이 없다.
딸아이는 기형도를 참 좋아하는데, 중3때쯤 내가 읽어보라며 내민 이 시 ‘대학시절’을 통해서 기형도를 처음 알았다고 했다. 10여 년 전 모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내가 문학강좌를 들었을 때, 시인이었던 담당선생님께서 기형도의 이 '대학시절'을 텍스트로 수업하신 적이 있었다. 그 전에도 기형도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었지만, 이 시는 그의 다른 멋진 몇몇 시보다 크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텍스트로 받았을 때 좀 의외로 생각했었는데, 선생님께서 정말 좋은 시라고 거듭 강조하시던 기억이 나서인지 종종 이 시를 대하면 지그시 그 깊은 맛을 다시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학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 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이제 우리 대학의 모습은 시에 나타난 - 나 스스로 겪어 너무나도 잘 아는 - 그 시절의 대학은 아니지만, 최근세사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통해서 그 시절에 대한 짐작이 충분히 가는지 또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리얼하게 잘 투영되어 있어서인지 요즘 대학생들에게도 이 시는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참고로 이 시에 대한 몇몇 감상의 글을 소개해본다.
(퍼온 글)
“… … 기형도는 젊은 문학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들을 기형도의 시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기형도의 시는 20대의 감성, 열정, 허무의 태도를 지금의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감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기형도의 시에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삶의 고민들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기형도 시에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켜 자기의 설움, 괴로움을 대입시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 …”
(퍼온 글)
“… … ‘대학시절’이라는 시를 통해, 기형도 시인의 대학시절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대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특권으로 여겨졌고, 지식인층으로서 사회 문제에 대해 고뇌하고, 비합리적인 것에 맞섰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시의 화자는 대학생들에게서 ‘정의 실현’으로 여겨졌던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듯하다. 아마도, 사회 현실과 동 떨어진 ‘플라톤’ 등의 학문을 연구 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친구들에게서 외면과 독촉을 받으며, 그런 학생들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교수님 밑에서 수업을 받았을 것을 상상해 본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아서 소신을 갖고 동참하지 않은 것인지,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라는 표현을 보면, 자신의 소신껏 행동하지 못했던 아쉬움, 후회가 남았던 것 같다. 또는 생각이 변해서, 사회로부터 보호막이 쳐져 있는 대학을 벗어나기가 겁이 날 정도로 나약한 자신을 보게 된 것일지도……”
첫댓글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라는 첫 행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이 한 줄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도 그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교수님 한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갈등의 현장에는 피하라고.. 그 분은 페퍼포그 떨어지면 늘 그자리에 없었습니다.. 소팔아서 공부하시는 예비역 형님은 고향의 부모와 이상사이에서 고민하시고.. 현실참여와 미래와의 고민하던 저의 시대 모습을 다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