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어떻게 출세할 수 있었나 ? - 툴롱(Toulon) 포위전
나폴레옹이 초라한 포병 중위 신세에서 갑자기 젊은 나이에 장군으로 수직 상승한 계기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1793년 툴롱 포위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지요.
(툴롱 항구의 영길리-서반아 연합 함대)
툴롱 포위전투에서 젊은 포병 장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툴롱과 부근 요새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스페인 연합 함대를 무찔러 최초의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양측은 군대를 강화했고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여러 명의 프랑스 장군이 이 포위전을 지휘했으나 작전의 성공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명의 포병 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힘이 컸다. 몇 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혁명군은 대대적인 포격 지원을 받으며 툴롱을 지휘하는 연합군의 요새에 맹공격을 가했다. 12월 18일 오후 늦게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포병 중대가 영국 함선을 포격하기 시작하자 후드 경은 즉시 내항에서 함대를 철수시켰다.
영국-스페인 연합군은 그날 밤 병기창에 포격을 가하고 42척의 프랑스 선박을 불태운 뒤 왕당파 프랑스인들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고 툴롱을 떠났다. 12월 19일 도시를 점령한 혁명군은 수백 명의 왕당파들을 체포해 특별재판에 회부한
그나마 그 이후에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을 하느라 발랑스 포병 연대에는 장기 휴가를 제출한 상태였으므로, 실제 포병질을 했던 경력은 극히 짧은, 불량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제일 대포를 잘 쏘는 사람이었을까요 ?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당시 프랑스 국민공회는, 또 저 위의 백과사전에서는 왜 보나파르트의 포병술이 이 포위전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했을까요 ?
(당시 대포가 그렇게 쏘기 어려운 것이었나요 ? 그냥 대충 쑤셔넣고 대충 보고 쏘는 것 같은데...?)
1793년은 아시냐 지폐로 대표되는 극심한 경제적 혼란에 더하여 (재정 적자, 아시냐 지폐, 그리고 나폴레옹 편 참조), 로베스피에르와 단두대가 상징하는 공포정치가 맹위를 떨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는 당연히 수구파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고, 왕당파들의 반란은 마르세이유와 툴롱 등 남부 프랑스 해안지방에서 특히 심했습니다. (남부 프랑스의 이런 반혁명, 친왕당파 정서는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도 이어져서, 엘바섬으로 향하는 나폴레옹은 남부 프랑스를 통과할 때 군중들로부터 모욕과 신체적 협박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혹시 프랑스 해군은 그저 '영국 해군의 밥' 정도로 여기시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정말 큰 오해입니다. 오늘날 미합중국의 존재 자체가 바로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을 패배시킨 덕분일 정도로, 18세기 후반 프랑스 해군은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혁명 직전까지, 영국 해군은 평화 시기에 맞게 많이 축소되어 있어서, 1789년 영국이 캐나다 서부의 누트카(Nootka) 섬을 두고 스페인과 영토 분쟁을 벌였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할 정도로 영국 해군은 축소되었다가, 겨우 전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이 누트카 사태가 계기가 되어 영국 해군이 전비를 갖추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은 제1차 대불 동맹전쟁 때부터 강력한 해군으로 프랑스를 봉쇄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보케르에서의 저녁 식사'를 정말 보케르에서 썼다고 합니다.)
내용은 왕당파 인물 하나와 공화파 사람 하나가 서로의 체제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우수한 체제라고 결론이 나는, 정치적 팜플렛에 가까운 글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글에서 공화제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나타냈는데, 이것이 정말 본인의 진심인지 아니면 이런 '충성 고백'스러운 글로 당시 권력층의 눈에 들어보려 했던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단두대의 제왕'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의 동생 '오귀스틴 로베스피에르(Augustin Robespierre)'의 눈에 나폴레옹이 띈 것은 바로 이 글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확실한 것은 황제가 된 이후, 나폴레옹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자기가 예전에 썼던 이 책을 샅샅이 찾아내어 최후의 한부까지도 다 불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동생 로베스피에르는 이 글을 읽고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정치적 후원자가 됩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월급도 제대로 못받는 가난한 장교로서 (저나 여러분 대부분처럼)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전전긍긍하다가 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야. 동생 오귀스틴은 나처럼 유명하지가 않아서 초상화도 없어.)
마침 같은 코르시카 출신으로서, 전에도 알고 지내던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가 카르토 장군의 사령부에 일종의 정치 장교로서 와 있었고, 나폴레옹은 얼른 그쪽에 줄을 댔습니다. 마침 일이 잘 돌아가느라고, 카르토 휘하의 포병 지휘관이었던 동마르탱(Donmartin)이 부상을 당한 상태여서, 그 자리를 '빽이 있는' 나폴레옹이 꿰어차게 되었습니다.
(살리세티, 초창기 나폴레옹의 든든한 빽. 프랑스 역사에서의 그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
일단 사령관인 카르토 장군 자신이 군대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화가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카르토는 툴롱을 접수한 영국-스페인 함대를 몰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툴롱 서쪽의 고지대인 올리울(Ollioules) 공략에 열을 올려, 결국 이 고지를 손에 넣은 상태였습니다.
실은 나폴레옹의 전임인 동마르탱도 이 올리울 공략전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었지요. 카르토의 생각으로는 이 고지가 툴롱 공략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사실 이 생각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곳은 마르세이유로 통하는 도로를 제압할 수 있는 고지였고, 특히 (카르토의 생각으로는) 이 고지에 거포를 올려놓고 저 아래 항구의 영국 함대에 포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도 왼쪽 상단에 Ollioules이라는 지명이 보이시나요 ? K-9 자주포라면 모를까... 저기서 툴롱 항구를 포격하는 것은 좀... 아래 눈금은 1마일 단위입니다.)
카르토는 새로 부임한 시골뜨기 포병 대위 나폴레옹에게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올리울 고지에 설치한 24파운드포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직업적인 눈에는 이 모든 것이 기가 막혔지요. 나폴레옹이 한번 시범 사격을 해보시라고 권하여 발포해보니, 포탄은 원래 의도했던 거리의 절반조차도 날지 못했습니다. (결국 당시 거포라고 할 수 있는 24파운드 포의 최대 사정거리는 대략 2km 정도였다는 이야기지요.)
(24 파운드 포입니다. 누군가 그 크기를 보여주려고 자신의 모자를 점화구 위에 올려놓았네요.)
카르토는 루이 15세의 그저그런 초상화 제작에 참여했던 정도의 볼품없는 이류화가에서, 정치적 열정만으로 장군이 된 야망가였거든요. 카르토라면 나폴레옹의 아이디어가 자기 전략인 듯 가로채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런 카르토를 역으로 개무시하고 직접 '정치위원 동무들'에게 이야기하는 나폴레옹이 카르토의 눈에는 얼마나 얄밉게 보였겠습니까 ? 게다가 카르토 역시 툴롱 항구를 대항구와 소항구로 나누는 반도에 세워진 레귀예뜨 요새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만, 그 쪽은 지형이 너무 험하고 영국군의 방어가 너무 견고하여 감히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과 군사는 종이 한끝 차이 ? 나폴레옹 출세의 걸림돌 카르토 장군)
(나폴레옹과 카르토 장군의 언쟁 속에 끼어든 여자는 카르토의 부인입니다. 카르토와 나폴레옹 사이에 전술적 언쟁이 벌어지면 항상 카르토의 부인은 나폴레옹의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 속에서, 카르토 부인은 '이 사람 말대로 하세요. 이 젊은이가 당신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카르토에게조차 한자리 챙겨준 것은 그 부인에 대한 고마움에서인지도 모르지요.)
프랑스군은 이렇게 새로 강화된 영국군 진지를 '리틀 지브랄타 (Little Gibralta)'라고 불렀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부스럼이 커진 것이지요. 나폴레옹의 작전과 야망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도 중앙 아래 쪽에 레귀예뜨 요새 Ft de Eguillette 라는 지명이 보이시나요 ?)
나폴레옹이 '보케르에서의 저녁 식사'라는 글을 써서 획득한 '자코뱅 연줄' 아이템은 여기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카르토는 당장 모가지가 날아갔습니다. 실제로 단두대로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 파리로 소환된 후 책임을 추궁당해 잠깐 투옥되기는 했습니다. 후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은 승자의 아량을 베풀어 그를 지방 관리로 임용해줍니다.
나폴레옹은 이 작전의 관건이 툴롱시가 아닌 연합 함대라고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즉, 툴롱을 에워싼 요새들을 하나하나 피비린내나는 백병전을 통해 함락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고, 무엇보다 툴롱 항구에 정박해있는 영국-스페인 연합 함대를 쫓아내기만 하면 툴롱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했던 것입니다.
항구를 점령하지도 않고 적의 함대를 항구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포병 화력이 필요했고, 특히 멀그레이브 요새가 축성된 이래로는 그 제압을 위해서라도 강력한 포병 전력이 꼭 필요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몇 문 되지 않는 대포들에 만족하지 않고, 툴롱 인근 지역의 병기고를 샅샅이 뒤져 대포 및 탄약, 그리고 전직 포병 장교들을 징발/징집했습니다. 그 결과, 10월달에 이미 나폴레옹 수중에는 무려 300문의 포병 전력이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당시 하사관이었던 '폭풍우' 쥐노를 처음 만납니다. 이 그림은 쥐노의 유명한 일화, 즉 '덕분에 서류에 모래를 뿌리지 않아도 되겠네요'라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나폴레옹 시대의 복사기 편을 참조하세요.)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테란이 벙커를 지어가며 조금씩 압박해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전법이었습니다. 테란이 프로토스를 그런 식으로 압박하면 프로토스에서는 보통 질럿들이 쌍칼을 들고 뛰어나오지요. 영국군과 스페인군도 마찬가지로 돌격해 나왔습니다.
이 습격으로 포대 하나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뒤고미에 장군과 나폴레옹의 지휘한 반격으로 오히려 출격했던 영국군의 오하라(O'Hara) 장군을 사로잡고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격퇴해냈습니다. 마침내 12월 16일, 리틀 지브랄타에 대한 총공격이 감행되었고, 이 공격에서 나폴레옹은 영국군 하사관의 총검에 넓적다리를 찔리는 생애 최초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멀그레이브 요새를 포함한 리틀 지브랄타가 함락되어 마르몽(Marmont, 나중에 나폴레옹의 휘하 원수가 되는 마르몽 맞습니다)이 거기에 프랑스군의 대포를 설치하자, 영국군은 나폴레옹 최초의 타겟이었던 레귀예뜨 요새를 저항없이 포기했습니다.
연합함대는 프랑스 왕당파들 및 그 동조자들도 태울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을 태우려 노력했지만, 결국 많은 수의 왕당파들은 툴롱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뒤이어 입성한 프랑스 국민공회 군에게 처절한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 바라스(Paul Fran?ois, 나중에 나폴레옹의 후견인이 되었던 인물이지요)와 프레롱(Louis-Marie Stanislas Fr?ron)이 지휘한 이 '왕당파 학살' 사건에서,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툴롱시 연병장에서 무려 1천여명의 왕당파 및 그 동조자들이 총살되거나 총검에 찔려 살해되었습니다.
(툴롱에서의 학살극을 주도한 바라스.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과 내연의 관계였다가, 싫증이 나자 나폴레옹에게 조세핀을 넘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현대의 툴롱 항공 사진입니다. 누가 딱 봐도 어디에 대포를 설치해야 한다는 거 보이지 않나요 ?)
(나폴레옹이 이렇게 시키는 대로 대포만 쏘고 있었다면 결코 출세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나폴레옹도 테미르도르(Thermidor) 반동 때 로베스피에르 일당으로 찍혀 체포되었고,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지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이름을 날리지 않았다면, 방데미에르 사건 때 나폴레옹의 이름이 정치 위원들 머리 속에 떠오르지도 않았겠지요.
(나폴레옹의 든든한 빽,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모자를 벗어들고 춤을 추는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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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솔바람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구름에 달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