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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원 시집, <다시 첫사랑을 노래하다>, 푸른사상, 2019. 3.
단재(丹齋)의 시학
맹문재
1.
신동원 시인이 추구하는 민주와 자유와 평화의 세계는 단재가 민족 해방으로 이루고자 한 공간이자 시간이다. 단재는 상해 임시정부가 외교론과 준비론에 치중하며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해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투쟁론을 내세웠다. 비밀 결사대인 동방청년당을 조직했고, 군자금을 모았으며,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한 뒤 많은 논설을 통해 무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선의 생존권을 박탈해간 일제는 강도이기 때문에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이 직접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단재의 투쟁론은 준비론이나 외교론에 비해 논리적이지 않고 감정에 치우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재는 그와 같은 우려를 분명히 인식했다. 조국 현실을 감정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헌신적으로 투쟁해야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한다고 판단하고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칼을 들었다.
내가 나니 저도 나고
제가 나니 나의 대적(大敵)이라.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
대적이 살면 내가 죽나니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대적아 대적아
네 칼이 세던가
내 칼이 센가
싸워를 보자.
앓다 죽은 넋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싸우다 죽은 넋은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이 멀다 마라
이 길로 가면
한 뼘뿐이니라.
하늘이 가깝다 마라
땅길로 가면 만리나 된다.
아가 아가 한 놈 두 놈 아가
우리 대적이 여기 있다.
해 넘었다 눕지 말며
밤들었다 자지 마라.
이 칼이 성공하기 전에는
우리 너의 쉴 짬이 없다.
― 신채호, 「칼 부름」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인 “나”와 “대적” 사이는 곧 자아와 비아(非我)의 관계이다. 주체적인 위치에 있는 자신이 자아이고, 그 외의 대상들이 비아인 것이다. “나”는 그 “대적”에게 맞서 투쟁하고 있다. 설령 승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내가 살면 대적이 죽고/대적이 살면 내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 칼이 세던가/내 칼이 센가” 싸워보자고 맞서고 있다. 그와 같은 대결의식은 매우 강해 “앓다 죽은 넋은/땅 속으로 들어가고/싸우다 죽은 넋은/하늘로 올라간다”는 배수진을 치고 있다. 승리하는 순간까지 “해 넘었다 눕지 말며/밤들었다 자지 마라”며 경계도 하고 있다. 자신의 “칼이 성공하기 전에는” “쉴 짬이 없다”는 각오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신동원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
한동안 시를 잊었다
그리고 칼 같은 말들만 쏟아냈다
꽃같이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
밥같이 따뜻한 시를 쓰고 싶었는데
눈앞의 불의와 거짓과 싸우기엔
시는 너무 약했다
그래서 칼을 들고 싸웠다
험악하고 분노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그것이 저들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가 되길 바라며
그리고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썩고 병든 자리에
다시 희망이 싹트고
꽃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밥 같은 따뜻한 세상이 올 것을 믿으며
나는 기꺼이 칼을 들고 싸우는 시인이고자 한다.
―「꽃과 밥과 칼」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한동안 시를 잊었다/그리고 칼 같은 말들만 쏟아냈다”고 토로한다. 그 이유는 “꽃같이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었는데/밥같이 따뜻한 시를 쓰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앞의 불의와 거짓과 싸우기엔/시는 너무 약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화자는 “시”를 버리고 “칼을 들고 싸웠”고 “험악하고 분노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그 말들이 “저들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가 되길 바라며” 맞선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칼”을 쓰느라고 “시”를 버리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썩고 병든 자리에/다시 희망이 싹트고/꽃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밥 같은 따뜻한 세상이 올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기꺼이 칼을 들고 싸우는 시인이고자” 한다. 시만 쓰는 존재가 아니라 싸우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잘 싸우는 존재가 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싸우고자 하는 상대는 누구인가? 목표는 무엇인가?
2.
목련이 지고
벚꽃이 지고
해맑던 아이들의 미소도 꽃잎처럼 지고
슬픈 4월의 봄
웃으며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아이들이 마지막 남긴 영상만 돌아왔구나
그들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신호
살고 싶어…… 난 아직 꿈이 있는데……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
바보 같은 어른들은
그 간절한 손길조차 잡지 못하고
너희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냈구나
꽃보다 어여쁜 300의 천사들
채 피지도 못하고 진 너희들의 꿈과 미소가
노란 리본처럼 흩날리는 슬픈 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이 땅도 침몰했고
너희들이 죽었을 때 희망과 믿음도 죽었다
열일곱 살 너희들의 너무 짧은 봄,
너희들의 봄을 앗아간 자들 용서하지 말거라
눈물이 분노의 파도가 되고
노란 리본이 깃발이 되어 흩날리는
다시 꽃처럼 웃는 그날까지,
―「다시 꽃처럼 웃는 그날까지― 세월호 아이들 영혼 앞에」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4월의 봄”이 그지없이 슬프다고 토로한다. 그 이유는 “목련이 지고/벚꽃이” 졌을 뿐만 아니라 “해맑던 아이들의 미소도 꽃잎처럼 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웃으며 수학여행 길에 올랐던/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아이들이 마지막 남긴 영상만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들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신호”인 “살고 싶어…… 난 아직 꿈이 있는데……”라는 말을 가슴속에 새긴다. 그리고 “그 간절한 손길조차 잡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나보”낸 자신이 “바보 같”다며 아이들에게 사죄한다.
화자는 “채 피지도 못하고 진” “꽃보다 어여쁜 300의 천사들”의 “꿈과 미소가/노란 리본처럼 흩날리는 슬픈 봄”날을 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이 땅도 침몰했고/너희들이 죽었을 때 희망과 믿음도 죽”게 한 세력과 맞서고자 한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 너희들의 너무 짧은 봄,/너희들의 봄을 앗아간 자들 용서하지 말거라”라고 제시하며 “눈물이 분노의 파도가 되고/노란 리본이 깃발이 되어 흩날리”기를 응원한다. 자신도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다시 꽃처럼 웃는 그날까지” 투쟁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인해 304명의 국민들이 희생되었다. 그중에서도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해 큰 충격을 주었다.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구조단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생방을 통해 속수무책으로 침몰하는 세월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슬픔을 넘어 분노했다. 국민을 지켜주는 국가가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면서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가졌다.
세월호 참사는 국민의 안전조차 무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한 자본주의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덧 국가는 자본주의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 채 동업자 내지 하청업자가 되고 있다. 2009년 해운법 시행 규칙을 개정해 그동안 20년으로 제한되었던 여객선 선령을 30년으로 완화한 일이 그 단적인 면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보다 자본주의가 제시한 이익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국민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느라 과적은 물론 노후되고 비정규직 선원으로 운영되어온 세월호에 희생된 것이다. 심각한 자본주의의 상황은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
아는 지인한테서
일간지에 시 한 편 올렸다고 읽어보라고 연락이 왔다
인터넷으로 들어가
일간지 검색하고 문화연예면 검색해서 들어가니
요란스런 연예 기사 속에 얼핏 보이는 이름
반가운 마음에 클릭을 하니
시보다 먼저 광고들이 튀어나온다!
위아래 오른쪽 왼쪽 온통 빼곡히 들어차
어지럽게 손짓하는 몇 십 개의 광고들
성형, 다이어트, 치과, 보험, 정력, 대출
저마다 아우성치는 광고의 숲을 헤치고
간신히 시를 읽어보려는데
어느새 정중앙에 버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시 한 줄 읽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광고
그 사이사이에 낑겨
시들이 신음한다
나도 봐달라고 소리치는 듯
초라하게 외롭게 한구석에 밀려 있는
시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돈과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 안 되는 시를 쓰며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문득 슬퍼지는 하루다.
―「시를 읽으며」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아는 지인한테서/일간지에 시 한 편 올렸다고 읽어보라고 연락이” 와 “인터넷으로 들어가/일간지 검색하고 문화연예면 검색해서 들어가” 찾아본다. 마침내 “요란스런 연예 기사 속에 얼핏 보이는 이름”을 발견해 “반가운 마음에 클릭”한다. 그런데 “시보다 먼저 광고들이 튀어나”오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위아래 오른쪽 왼쪽 온통 빼곡히 들어차/어지럽게 손짓하는 몇 십 개의 광고들/성형, 다이어트, 치과, 보험, 정력, 대출/저마다 아우성치는 광고의 숲”에 지인의 시는 덮어지고 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고들은 “간신히 시를 읽어보려는데/어느새 정중앙에 버티고 있는 것도 모자라/시 한 줄 읽을 때마다 따라다니”기까지 한다.
화자는 행동을 멈추고 광고 “사이사이에 낑겨/시들이 신음”하는 상황을 바라본다. “나도 봐달라고 소리치는 듯/초라하게 외롭게 한구석에 밀려 있는/시들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를 쓰는 시인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한다. “돈과 물질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돈 안 되는 시를 쓰며/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럽고도 슬퍼지는 것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마치 공기를 마시듯 따르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기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시장이나 회사는 물론 대학이나 병원같이 공익을 추구하는 곳이나 교회나 사찰같이 세속적 이익을 거부하는 곳조차 파고들어 그곳의 제도며 법률이며 관습을 바꾼 뒤 구성원들을 종속시킨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가치를 진리로 여기고 그 이상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한다. 따라서 위의 작품의 화자가 자본주의 양상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의 유혹에 몸을 맡기는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3.
하늘의 별이 내려온 듯
아름다운 백만 촛불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촛불
이 나라의 미래와 어두움을 밝히는 촛불
국민 하나 하나의 마음과 꿈과 소망이 모여
빛나는 촛불이 되었다
백만 개의 별이 되었다
백만 개의 별보다 이름다운
백만 개의 촛불이 빛났던
이날을 역사는 아름다운 민주주의로 기억할 것이다
작은 촛불이 모여
정의와 진실을 바로 세운 날
아름다운 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다.
―「하늘의 별이 내려온 듯」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광장에 모인 “백만 촛불”을 “하늘의 별이 내려온 듯/아름”답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이 나라의 미래와 어두움을 밝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국민 하나 하나의 마음과 꿈과 소망이 모여/빛나는 촛불”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백만 개의 별보다 이름다운/백만 개의 촛불이 빛났던” 그날을 “아름다운 민주주의로 기억”하는 것은 물론 “작은 촛불이 모여/정의와 진실을 바로 세운” 그날을 “아름다운 혁명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형제 같은 체제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나라가 민주주의 제도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평등을 긍정하는데 반해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불평등을 긍정한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학력과 부와 나이와 성실성과 사회 기여도 등과 상관없이 선거를 할 때 1인 1표를 행사한다. 이에 비해 극단적인 불평등을 긍정하는 자본주의는 부익부빈익빈이 심화되는 상황을 인정한다. 경제적인 능력자가 무능력자에 비해 사회의 적자(適者)이기 때문에 적자생존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정반대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공존이 가능한 것은 사회복지와 교육 분야에 공공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시장 결과의 평등화를 위해 누진세 등을 적용하고 있고, 시장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연금, 의료보험, 실업보험 등을 제공한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공공교육을 제공한다. 결국 국가는 평등의 아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소득층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생산성이 상승하고 임금이 증대되는 상황일수록 두 체제는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는 갈등을 보이고 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데다가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해 경제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가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국가 권력도 정치 권력도 자본주의 권력에 대등하게 맞서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원인도, 국가가 보인 무책임한 태도도, 자본주의 권력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작은 꽃들이/이름 없는 꽃들이 하나 둘 모여 촛불을 밝히고 하나가 되”(「광장의 봄」)는 것은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자본화된 국가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참여해야만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은 다음의 자세에서도 볼 수 있다.
봄이 온다
남에도 북에도 벌써 봄바람이
칠천만 겨레 마음에도
평화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거름 주고 땀 흘려
가을에 결실을 거둬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때는 한반도에도 평화의 물결 넘치길
우리 함께 손잡고 만나니
어이 아니 반가울쏘냐
봄이 온다
가을이 왔다
아름답고 정겨운 인사 주고받으며
이제 칠십년 동안 닫힌 문 열고 만나자
그렇게 손잡고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통일로 가자
―「봄이 온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봄이 온다/남에도 북에도 벌써 봄바람이”라고 노래한다. 아직 평화 통일의 봄이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칠천만 겨레 마음에도/평화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고 즐거워한다. “봄에 씨 뿌리고/여름에 거름 주고 땀 흘려/가을에 결실을 거둬/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통일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북 분단의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 문제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남북통일은 불평등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 조장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진정한 민족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곧 친일 청산을 하기는커녕 그들과 손을 잡은 분단 정권과 공존해왔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다. 그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매카시즘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조장하는 자본주의를 옹호해왔다. 따라서 민주주의 회복과 자본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분단 극복이 요구된다.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민주주의 회복이 힘들고 자본주의 병폐도 개선하기 어려운 것이다.
남북통일이 한국 경제의 성장을 늦추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일군의 주장은 잘못된 진단이다. 많은 비용이 들어 미래 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우려 역시 섣부른 판단이다. 통일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기보다는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한의 생활수준이 하락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생산 비용의 절감, 실업 문제 해결 등으로 경제 발전을 이끌 것이다. 통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분단으로 인해 발생해온 문제보다 분명 심각하지 않은 것이다.
4.
뜻은 하늘에 닿고
가슴은 이 땅을 다 품었으나
의로운 뜻 다 펴지 못하고
떠나는 그대 영전에 흰 국화 한 송이 바칩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어둠 속 속울음 울다
다시 온몸 던져 이 나라와 국민을 구한 당신
당신은 스스로 바위에 온몸 부딪혀 울며
잠든 이 나라와 국민들을 깨웠습니다
이제 당신은 설움 많은 땅 떠나가지만
남은 이들은 당신의 뜻을 이어
당신의 스러진 꿈 일으켜 세워
침묵과 절망과 죽음의 이 땅에서
다시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렵니다
7년 전 당신과 함께 꿈꾸었던
민주와 자유와 평화의 세상
모두가 웃는 사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당신의 못 다한 꿈이
다시 피어나는 날까지
부디 하늘에서라도 잊지 말고 이 땅을 지켜주길
누구보다 시대를 뜨겁게 사랑했으나
그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남자
슬픈 영전에 눈물로 꽃 한 송이 바치며
한평생 힘들고 외로웠던 삶
그러나 영원히 빛날 그대의 이름 석 자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헌화를 하며―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헌화를 하며” “7년 전 당신과 함께 꿈꾸었던/민주와 자유와 평화의 세상”을 다시금 추구한다. “모두가 웃는 사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당신의 못 다한 꿈이/다시 피어나는 날까지/부디 하늘에서라도 잊지 말고 이 땅을 지켜주길” 기원하면서 함께하려는 것이다. “민주와 자유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려고 하는 화자의 희망은 단재의 바람이기도 하다.
3․1운동이 일제의 야만적인 진압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했지만 민중이 민족 운동의 주체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단재는 그 상황을 수용해 아나키즘을 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선택하고 확산시켜 나갔다. 1923년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 것이 그 여실한 면이다. 단재는 선언문에서 일제의 박해를 규탄하는 것을 넘어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조선 민중이 일제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물론 폭력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전쟁에서 내세운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사회진화론은 인간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적자생존(適者生存)은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강자와 약자 간의 경쟁을 통해 인류의 역사는 발전한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해 조선에 대한 침략 전쟁과 식민지 정책을 합리화했다. 단재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을 당연시하는 일제의 사회진화론에 맞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종(種)의 진화에서 중요한 요소는 사회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고 보고 상호부조를 내세운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 상호부조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라고 파악하고 자발적인 결사체를 중시했다. 그리하여 상호부조를 근거로 일제에 맞서는 폭력을 추구했다. 일체의 독립운동이 봉쇄당했던 상황에 맞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계를 마련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중들과 함께 투쟁한 것이다.
신동원 시인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에 맞서 촛불 연대를 추구하고 남북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단재의 민중 투쟁을 계승한 면으로 볼 수 있다. “독립하게 독립하게/어서어서 독립하게//자유하게 자유하게/어서어서 자유하게”(「독립자유의 노래」)라는 단재의 노래를 “기꺼이 칼을 들고 싸우는 시인이”(「꽃과 밥과 칼」) 되어 잇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민중과 함께 민주와 자유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孟文在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