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우리는 퇴계를 과연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까? 대체로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퇴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사화(士禍)가 몰아치던 어지러운 시대에 현실 정치의 개혁노선과는 거리가 멀었던 보수적이요 소극적 퇴계, 항상 물러나 자연 속으로 돌아가기만을 꿈꾸었던 은일한 처사, 경세보다는 개인적 인격수양에만 몰두하였던 도덕 군자의 모습, 실천보다는 이론·관념을 좋아했던 공리공담론자, 주자학과 관련해서는 주자학의 완고한 대변인 혹은 "동방의 주자"가 되고자 했던 주희의 아류, 양명학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자로서 사상의 똘레랑스 (관용)를 몰랐던 편협한 이론가, 결국 그의 사상이라고 해봐야 당시 지배 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 뭐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21세기 오늘처럼 변화무쌍하고 온갖 난제로 복잡다기 하기 짝이 없는 시대에 이러한 퇴계가 호감 있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상과 시대현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는 역사 해석의 맥락에서 퇴계의 사상을 조명해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이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퇴계상을 만나게 됩니다. 자 그럼 이제 새로운 퇴계의 모습을 여기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퇴계와 정암 조광조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①
모름지기 사상이란 시대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될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사상이란 물론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간직한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 사상가의 시대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퇴계의 사상 역시 바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보다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차원에서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대현실과 사상의 관련성에 대해서 일찍이 헤겔(1770∼1831)도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의미 심장한 표현을 섞어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이 세계는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하여 한 마디 한다면, 그러한 교훈을 받아들이기 위한 철학의 발걸음은 언제나 너무 느리다고 하는 점이다. 세계의 사상(思想)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그의 형성과정을 완성하여 스스로를 마무리하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시간 속에서 형상화된다. 바로 이와 같이 개념이 가르쳐 주는 이것을 역사도 또한 필연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으니, 즉 그것은 현실이 무르익을 때에 비로소 관념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맞서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전자는 후자의 실재적인 세계를 그의 실체 속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를 하나의 지적(知的)인 왕국의 형태로서 구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이 자기의 회색(灰色)빛을 또다시 회색(灰色)으로 칠해 버릴 때면 이미 생(生)의 모습은 늙어버리고 난 뒤일 뿐 더러 이렇게 회색을 가지고 다시 회색칠을 한다 하더라도 이때 생의 모습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식되는 것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 <법철학, 헤겔,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 36∼37쪽>
미네르바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을 일컫는 말로서 아테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철학 내지 사상을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헤겔의 위 인용문은 시대의 아들로서 현실의 뒤꽁무니만 쫓는 듯한 사상의 모습에 대한 비애어린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1818∼1883)는 그 유명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속에서 이렇게 외쳤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마르크스도 역시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상이란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서 시대의 모순과의 치열한 대결 속에서 사상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헤겔의 이 비애어린 문장 속에서 우리가 얻어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사상은 다시 그의 시대를 뛰어 넘고자 합니다. 비록 황혼이 질 무렵에야 날기 시작하지만 그 비상은 어둠의 저편 다시 동터오는 새벽을 예감하는 것이겠기 때문입니다.
퇴계의 사상도 그러한 관점에서 고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퇴계도 분명 그의 시대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마주한 시대현실은 조선의 16세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질곡의 16세기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던 사람, 바로 그가 퇴계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퇴계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의 16세기(1501∼1570), 이른바 사화(士禍)의 시대였습니다. 성종시대를 끝으로 조선의 창조적 에너지는 쇄잔해지고 어둠의 세력으로 화한 훈구파들의 비리와 전횡이 시대를 병들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에 맞서 온 몸으로 시대의 새벽을 열고자 했던 사림(士林)들에겐 그 훈구파들에게 얻어터지고 깨지고 죽어나가던 수난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퇴계의 유년시절에 갑자사화(1504)가 있었고 19세 때 기묘사화(1519)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퇴계의 장년시절에 소위 "여인천하" 그룹이 일으킨 을사사화(1545)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화의 와중 속에서 구체적 청사진을 가지고 왕성하게 실천으로 옮기고자 했던 젊은 기묘사림(기묘8인)들의 실패와 그 중심인물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죽음이 퇴계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들의 실패에만 촛점을 맞추지만, 사실 그들은 비록 결과적으로 실패했을지언정 우리 나라 5천년 역사를 통털어 볼 때 "세상을 한 번 멋지게 확 바꾸어 보자"고 나선 가장 순수하면서도 폭발적이고 화끈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조선의 뜨거운 젊은 피들이었으며 조선의 386이었습니다.
《참고》기묘8인(기묘사림들중 급진파 핵심 인물) - 이하 기묘사화(1519년) 당시 기준
·조광조 (38세) : 대사헌 ·김 식 (38세) : 대사성 - 대동법의 김육의 고조부 ·박 훈 (36세 ) : 승지 ·김 정 (34세) : 형조판서 ·김 구 (32세 ) : 부제학 - 조선시대 4대 명필 ·윤자임 (32세) : 승지 - 무예도 겸비 ·박세희 (29세) : 승지 ·기 준 (28세) : 홍문관 응교 - 기대승의 숙부
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하여 정치·사회·경제 그리고 정신질서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변화를 지향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상은 성리학적 이념이 제시하고 있는 바, 하늘과 국가와 사회와 인간이 하나되는 조화로운 공동체 질서로서 "대동사회(大同社會)" 였다고 하겠읍니다(이러한 기묘사림들의 이상을 至治主義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들 기묘사림들의 행위는 민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특히 서울의 시인(市人)들은 기묘사림의 중심인물 정암 조광조가 나타날 때마다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이 오신다"며 환호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기묘사림들의 민중성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보수적 이데올로기로 알고 있는 성리학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현실변혁을 위한 혁명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이 성리학 이념은 시대를 황폐화하고 있던 훈구파들에겐 쥐약과 같은 논리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리학 정신은 시대를 주도하는 엘리트들의 도덕성을 기본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입니다(참고 : 기묘사화 이후 성리학의 기본서인 "소학"과 "근사록"이 금서 취급을 받았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이중연 저, "책의 운명", 혜안, 2001, 101∼105쪽 참조).
이들은 비록 이론적으로는 미숙했으나 중국의 대가들도 이 정도의 실천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즉 중국의 대가들(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 등)은 이론적으로는 선구의 역할을 했다고 하겠지만, 그 사회적 실천의 면에서 조선의 젊은 선비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둡고 황량한 시대현실 속에서 정암 조광조와 기묘사림들로 표상되는 빛나는 정신의 실천, 과연 이것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립하고 어떻게 계승할 것인 지, 바로 이것이 퇴계가 생각한 과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저는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퇴계학보(제100집, 1998)에 기고한 일본 동경대의 小川晴久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바로 저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서있는 글이 아닐까 합니다.
"퇴계는 조광조가 「小學」으로 인재를 기르고 「鄕約」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의 올바름과 그 자신을 규율하는 엄격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己卯의 禍」는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조광조의 「崇道倡學의 공은 후세에 미칠 것이다.」하고 그 효과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가 조광조를 얼마나 존경하고 평가하고 있었던가는 장문의 「정암 조선생 행장」을 보면 잘알 수 있다. 이퇴계가 경계한 것은 그 速成(급격한 개혁) 뿐이었다. 이퇴계의 19살 때에 일어났던 조광조 등의 비극으로부터 반세기 동안 그는 이 교훈을 계속 음미하여 왔을 것이다" <小川晴久 , "이퇴계와 류성룡", (퇴계학보 제100집, 1998), 217쪽>
저는 특히 기묘사화(1519) 때 퇴계의 나이가 19세였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19세라는 나이는 일반적으로 감수성에 젖을 나이이고 문제의식에 눈을 뜰 나이입니다. 사상가로서의 생애로 조망한다면 자신의 사고의 기본방향이 설정될 만한 나이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에게서 결정적이었던 것이 그의 나이 20대때 목격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고 하는 데서 유추해 볼 수도 있습니다. 헤겔의 경우도 19세 때 일어난 프랑스대혁명(1789)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훗날 "자유의식의 진보"라는 보편사적 주제로 승화되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지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암 조광조(1482∼1519)가 뜨거운 정신을 안고서 바야흐로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할 때가 퇴계의 나이 15세 때인 1515년(중종 10년)이었고, 그로부터 3,4년간은 개혁의 바람이 조선 전역에 몰아칠 때였습니다. 그러던 그 개혁의 최정점에서 갑자기 곤두박칠 치고만 미스테리와 같은 비애를 간직한 것이 바로 기묘사화였다고 하겠습니다. 즉 기묘사림들의 최대의 정치적 승리하고 할 위훈삭제(중종반정 공신 117명중 무러 75%가 가짜였다고 합니다)의 결정이 떨어지고 불과 몇 일 후에 마치 한 밤의 쿠데타(?) 처럼 기습적으로 일망타진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 기묘사림의 중심인물이자 "개혁의 화신" 정암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고 그 굵고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어떠한 사화보다도 사연 많고 충격적이었던 것이 기묘사화 였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기묘사화 자체가 소년 퇴계의 정신세계에 미친 직접적 언급은 문헌에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퇴계가 남긴 많은 글과 행동, 특히 퇴계가 64세 때 지은 『정암 조선생 행장』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서 기묘사화가 퇴계에 미친 영향을 간접적으로는 짐작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퇴계는 정암을 이렇게 극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正義가 회복됨으로 해서 학문이 다시 방향을 알 수가 있게 되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이로 인해서 다시 正道를 찾을 수 있고 斯文이 여기에 힘입어서 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고 국맥이 이에 힘입어 무궁하게 발전할 수가 있었으니 이것으로 인해서 한 때 士林의 禍가 비록 애석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선생이 높은 도덕과 학문을 세우신 공은 또한 가히 후세에 미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강주진, 조정암의 생애와 사상, (박영사, 1979), 187쪽>
퇴계는 또한 행장의 말미에서 행장을 저술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여 스스로 정암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았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滉이 스스로 생각하니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물론 퇴계는 정암 조광조를 마냥 찬양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퇴계 자신의 글과 제자들이 정리한 언행록에 보면 여러 군데서 정암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때로 신랄하기 까지한 표현도 눈에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암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기본적 노선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인 공감이 전제된 비판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정암의 현실적 실패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전적으로 실천방법론상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는 퇴계의 정암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째는 학문의 미숙성이요, 둘째는 성급한 실천행위와 관련해서 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것은 그대로 뒤집으면 퇴계 자신의 실천 방향을 시사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학문의 미숙성에 대한 반성에서 퇴계는 철저한 철학적·이론적 작업에 헌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기서 퇴계가 말하는 학문이란 오늘날처럼 현실과 괴리된 소위 상아탑 속의 학문이 아니라 시대의 문제해결을 위한 소프트웨어와 같은 학문을 의미함은 물론입니다. 물론 여기서 철학이 현실의 변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질문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변혁을 꿈꾸는 자에게 철학이 특히 의미를 가짐은 다음과 같은 글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변호사 김종훈씨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의 한 내용입니다. "굳이 철학과 이상을 운운하는 이유는 어떤 철학적 고민에서 출발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실천의 선후와 완급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항세력에 대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철학에 기초한 명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00년 2월 12일). 퇴계의 철학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②실천방법론상의 전환입니다. 퇴계는 당대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훈구파집단의 두터운 벽을 직시하고, 소수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위로부터의 급진적 방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우회적이고 간접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 이었습니다. 퇴계는 새로운 철학으로 무장한 신세대 젊은이들을 교육함으로써 다음 시대를 기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엘리트들의 저변확대를 도모한 것이지요. 퇴계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교육제도의 개혁도 추진하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서원건립운동 이었습니다. 변혁의 전략의 측면에서 정암 조광조와 퇴계의 차이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용어로 표현하면 아주 적절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즉 조광조가 일거에 와장창하는 기동전 방식을 취했다면, 퇴계는 장기적인 전망 하에 진지전 방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의 "참호"는 퇴계에게 있어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전국 각지에 산재하게 되는 "서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는 퇴계에 대한 정암 조광조의 영향을 퇴계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즉 정암의 실패와 죽음이 퇴계의 평생의 화두와 같았다는 것이며, 정암이 제시한 방향과 그리고 그 현실적 실패에 대한 사색과 반성적 성찰로부터 퇴계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나오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조사연 올림 <출처: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forum_oriental_forum&page=7&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31 >
<퇴계는 정암 조광조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 퇴계와 현량과>
앞에서 저는 퇴계를 논하면서 정암 조광조와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상당한 정성을 기울여왔습니다. 왜냐하면 퇴계와 정암 조광조와의 관계가 제대로 해명된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퇴계의 모습, 즉 보수적이요 소극적이며 관념적 은둔적 도피적 운운하는 퇴계상은 수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새롭고도 역동적인 퇴계상을 제시하는데 정암 조광조와의 인연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파악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불어 우리 역사의 풍운아 정암 조광조 역시 소위 "실패한 개혁가"라는 진부한 이미지를 넘어 퇴계와 함께 사상사적으로 우리 정신의 새로운 차원을 연 의미있는 인물로 다가오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퇴계가 정암 조광조의 일대기(행장)을 써서 그의 뜻을 기렸다는 것과, 스러져 가는 조선의 정신을 횃불처럼 다시 일으킨 사람으로서 정암을 우리 나라 道學(실천유학)의 최고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는 것과 퇴계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토로하여 정암의 영향을 받은 바가 많았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 등에 특히 주목하였습니다.
"滉이 스스로 생각하니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저는 퇴계의 사상을 특징짓는 理發說(理의 운동성 인정함)이 바로 정암 조광조의 그 불꽃같은 혁명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저는 나름대로 추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저는 저의 논지를 보완하는 취지에서 퇴계가 정암 조광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두루 추적해보았는데, 흥미롭게도 퇴계가 직접 정암을 목격한 적도 있음을 나타내는 대목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제자들이 기록한 "퇴계선생언행록"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내가 중종 임금을 뵈올 때 정암을 바라보았더니, 걸음걸이가 마치 날개를 편 듯 하고 그의 겉모습은 우뚝하여 한 번 보아도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 학봉 김성일의 기록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정암 조광조가 화를 당한 기묘사화(1519) 때 퇴계의 나이 19세, 그 나이에 언제 임금을 뵈올 기회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여러 퇴계학 연구서에 언급된 바로는 퇴계의 처음 서울행은 성균관에 유학할 때인 23세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최근에 <퇴계전서>를 읽다가 "퇴계선생 연보"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고 그 의문을 해결하였습니다.
<퇴계 19세, 기묘(1519), 중종14년, 정덕(正德)14년> 봄에 문과 별거(別擧) 초시(初試)에 응시하다. 이 때 천거취인(薦擧取人)의 과목이 있어, 선생은 이미 향선(鄕選;지방선발)에 들어 있었다.
아 천거취인(薦擧取人), 바로 1519년 정암 조광조의 건의에 의해 시행된 현량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퇴계는 19세 때 현량과 지방선발에 뽑혀서 서울에 올라와 임금이 참석한 자리에서 최종 시험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 정암 조광조를 목격했다는 것이겠지요.
현량과의 선발절차는 이러했다고 하는군요. 지방의 경우는 먼저 유향소(留鄕所)에서 수령에게 천거하면 수령은 관찰사에게, 관찰사는 예조에 전보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과정을 거친 다음 예조에서는 후보자의 성명,출생연도,자(字),천거사항,즉 성품,기국(器局),재능,학식,행실과 행적,지조,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의정부에 보고한 뒤, 그들을 전정(殿庭)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으로 시험하여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절차에 따라 1519년 4월 13일 천보된 120인의 후보자들을 근정전에 모아 시험한 결과 김식 등 28인이 최종 선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퇴계는 최종 선발에는 탈락되었어도 적어도 120인 중에는 포함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현량과 시험일이 4월13일이었으니, "퇴계연보"에 퇴계가 정암 조광조를 만나던 그 때를 술회하여 말하기를 "아마 이 해 봄의 일인 듯하다"고 한 바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아 그것 참 "퇴계와 현량과", 흥미있는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 조사연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