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불던 날 서금복
말이 많은 것보다 적은 편이 좋긴 하나 말수가 아주 적은 며느리와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말을 거는 쪽은 언제나 내 쪽이고, 저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는 물방울 같은 단답형이다.
설혹 말이 많다고 지청구를 듣는다 해도 가슴 속 말을 시원하게 나누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500명이 넘는 카톡 친구를 훑어봤지만, 딱히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A들은 지금 직장에 있을 것이고, B들은 교회로, 성당으로 나가 있을 것이다. 또 C들은 지금 동네에 있는 낮은 산에서, D들은 어느 문화센터에서 자신의 나이와 싸우고 있을 것이다.
창밖을 보니 벚꽃잎들이 무더기로 떨어진다. ‘와르르 와르르’ 봄바람과 수다를 떨다가 웃음을 날린다. 결국, 혼자서 전동차를 타고 말았다. 수다스러운 봄바람은 두물머리까지 따라왔다.
-시댁 식구가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세상이래. 봄바람이 말을 걸었다.
-그런 거 보면 시댁 식구와 함께 사는 우리 며느리는 착하지. 꽃잎이 흩날리는 강변을 걸으며 봄바람에게 쌀쌀하게 대답했다.
-입덧하다 보니 친정엄마가 보고 싶었겠지. 그래서 더 말수가 없었을. 바람이 또 며느리를 감싼다.
-그래, 나도 신랑보다 엄마가 더 좋았던 신혼 시절이 있었어. 특히 입덧할 땐. 봄바람과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 보니 ‘고등어가 먹고 싶다’는 며느리의 힘없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것도 오늘 아침에 몇 번을 물어봐서 간신히 얻어낸 대답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전동차에 올랐다. 바깥 풍경이 오전보다는 맑아 보였다.
전철역 부근 식당 앞에 생선 트럭이 보였다, 마치 우연을 가장한 영화 장면처럼. 식당에서 밥 먹다 말고 나온 트럭 주인은 뜻밖에도 내가 아는 남자였다. 얼굴이 좋아졌다며 말을 거니 그가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좋아지긴요, 요즘 여친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팍삭 늙은 걸요.” 너무나 쉽게 나오는 ‘여친’이라는 단어에 그를 빤히 쳐다보니 그가 말을 이어간다.
자기도 아내에게 미안한 줄은 알지만 평생 생선 장수하며 처음 빠진 사랑이라 어쩔 수 없단다. 몇 개월 동안은 참 좋았는데, 얼마 전부터 그녀가 배신을 때렸다며 그는 생선 팔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연애담만 들려 줄 태세다. 안 되겠다 싶어서 고등어 좋은 걸로 얼른 달라고 하니 그는 마지못해 고등어에 소금을 뿌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여친이 왜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머리숱도 없는 그런 영감태기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다 ‘오늘은 그녀가 그 영감과 어디에서 나오는 걸 목격해서 지금 내정신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내가 봐도 제정신은 아닌 건 같았다. 기껏해야 자기에게 생선 몇 번 산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걸 보면. 고등어 값을 치르고 자리를 뜨려 하자 그가 황급히 휴대전화기를 꺼내더니 오늘 그녀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보라고 했다. 됐다고 하면서도 슬쩍 보니 변심한 애인에게 매달리는 불쌍한 남자와 그런 남자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여자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행인들이 우리를 힐끔거린다. ‘이미 마음 떠난 여자에게는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상책’이라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 그를 못 본 척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집으로 오는 굴다리에서 갑자기 오탁번 시인의「굴비」라는 시가 떠올랐다. 굴비를 살 돈 없는 가난한 계집은 굴비 장수가 내건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라는 말과 바꾼 굴비를 밥상에 올린다. 굴비를 맛있게 먹은 계집의 사내는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했는데 며칠 후 또 굴비가 상에 오른다.
(앞부분 생략) -또 웬 굴비여? /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 (뒷부분 생략)
시 속의 어리석은 계집은 자기의 사내에게 굴비를 먹이려고 그랬다지만 저 생선 장수의 여자 친구는 무엇 때문에 그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길거리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자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는 생선 장수. 푼수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그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긴 오늘 아침, 나만 해도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두물머리까지 다녀오지 않았는가.
말할 입은 많고 들어줄 귀가 없는 세상. 신신당부해도 언제 터뜨릴지 몰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기 어려운 외로운 세상. 그 세상 속에 나는 과연 입보다 귀를 얼마큼 열었을까. 귀에 담은 남의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입 안에 가두었는가. 그런 면에서 보면 내 며느리는 입보다 귀를 열고 사는 사람이다. 타국으로 시집와서 가슴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나눌 친구도 많지 않을 텐데….
얼른 집에 가서 고등어조림이라도 해줘야겠다고 바삐 걷는데 두물머리까지 따라왔던 봄바람은 어느새 생선 장수에 대해 떠드는지 꽃잎들이 아침보다 더 크게 ‘와르르 와르르’ 웃는다. 바람에게 숱하게 들었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옮기지 않아서인지 꽃잎들의 웃음소리가 말갛다.
서금복 『문학공간』 수필(1997), 『아동문학연구』 동시(2001), 『시와시학』 시 당선(2007). 수상 :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과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외. 저서 : 동시집 『파일 찾기』 외 3권, 수필집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 외 2권, 시집 『세상의 모든 금복이를 위한 기도』 . 현재 중랑문인협회 고문, 편지마을 회장, 한국동시문학회 부회장, 『한국수필』 편집차장.
심사평 심시위원 : 지연희 · 장호병(글) · 최원현. 서금복 작가의 수필에서는 체온이 느껴진다. 수필은 시의 서정과 소설의 서사를 아우르면서 객관화할 수 있는 해석을 바탕으로 자아를 세계화한다. 삶과 수필쓰기는 맞닿아 있다. 재주가 아니라 진정성을 담아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삶과 글쓰기에서 작가도 독자도 행복하고 나아가 향기와 위로도 나눌 수 있다. 「그 남자의 이사」에서 작가는 주말 주택에 세든 남자가 종내에는 아무것도 갖고 떠나지 못함을 그렸다. “46년 동안 이 세상에 세 들었던 남자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을 ···. 그런데 그의 이삿짐에 합류하지 못한 것은 ······ 애면글면 사 모았던 땅들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수필 쓰기에 딱 좋은 사람들」 그들 중에는 수필가도, 글 한 줄도 발표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은 온몸으로 수필을 쓰는, 아직도 구상 중의 사람들일 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이웃을 조명한 삶에서 나를 궁구하는 작업이 행간에 녹아 있다. 두 작품집에서 문학성을 담보하기 위한 창작 방법은 달랐으나, 공히 사적 주관을 객관화함으로써 미학적 완성을 꾀한 열정과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문학적 성과를 치하하며 한국 수필문학의 지평을 더욱 드넓혀 주기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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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