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밤 설교 2023년 12월 24일
루가 2:1-14.
역설의 신비
오늘 밤 우리는 한 생명의 탄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역설’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역설이 놀랍게도 신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동네에 사는 가난한 요셉과 아내 마리아는 해산할 곳이 없어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고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의 호적등록 명령에 따라 남편인 요셉과 함께 먼 길을 떠났고, 낯선 베들레헴에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은 본래 아버지 요셉의 고향이었기에 사실 그 가문은 이른바 왕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 다윗의 계보를 잇는 가문이 이렇게 볼품없이 살 리가 있었을까요?
이 또한 역설입니다. 그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관점으로 왕권의 지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낮은 분, 천한 지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권력으로 세상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몸이지만 탄생만큼은 식민지를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명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굴복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역설은 다른 곳에서도 있습니다. 장차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실 메시아가 태어나 누운 곳은 구유 즉 먹이통이었습니다. 먹이통에 누우셨다는 말 역시 역설의 신비입니다.
그분은 이미 세상의 먹이가 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고 쏟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먹이통에 오셨다는 것이 인류를 위한 희생을 선언하신 의미입니다.
거룩한 탄생의 출발점이 누추하고 불결한 먹이통이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를 먹이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을 제일 먼저 듣고 찾아온 이들 역시 역설적이게도 천한 직업이었던 목자였습니다. 밤을 새워 양을 지키는 목자들은 매우 고달픈 사람들입니다.
파수꾼과 다름없이 아침만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가장 힘겹고 고된 일을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아침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먼저 오셨다는 사실 또한 기억합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고 간구하는 그 마음자리에 주님께서 먼저 오신다는 이 사실을 기억합니다.
아침을 기다리며 풍찬노숙하던 이들이 가장 큰 기쁨의 진리를 전해 들었듯이, 힘겹고 고달프며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자리에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볼품없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오늘 복음은 아기의 탄생이 온 백성,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초기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성탄은 기쁨입니다. 신나는 캐럴과 화려한 장식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까지. 성탄은 기쁜 날이라는 인식이 우리에게 박혀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왜 기쁜지를 깨달은 초기 신앙인들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는 습성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학자인 호세 보니노는 ‘예수님은 인간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셨다’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나약하고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성탄은 ‘인간’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의 가난하고 나약한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권력과 부와 호화로움으로 오시지 않았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분을 경배합니다.
이 역설을 깨닫고, 나약한 탄생이 온 인류의 큰 기쁨이었음을 선언한 복음의 의미를 깊게 묵상하는 오늘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생전의 삶을 반추해 봅니다. 진정으로 굴곡이 많은 평탄치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분의 굴곡진 삶과 역정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에, 우리는 그 분이 누우신 그 초라한 마구간과 구유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이치에만 의지하여 사는 이들이게,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의 선한 잣대라고 믿는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과 뜻을 하느님의 뜻인 양 끼워 팔아 권위를 유지하려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오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 어긋난 세상의 질서 가운데 가장 약하고 가장 비참하게 태어나신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성탄을 경험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혐오와 차별로 다름을 규정하는 세상의 잣대와 완고한 마음자리에 예수님은 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이 성탄의 역설을 깊이 깨닫고 고백하는 이에게 성탄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지금의 현실이 비록 보잘것없고 나약한 가운데 출발점에 서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은 물론 온 인류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걷기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성탄이 시작될 것입니다.
대림의 기나긴 터널, 눈물과 아픔의 기다림을 마음에 품은 채 우리는 더 큰 기쁨과 영광의 산고를 겪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이 곧 나와 우리들의 탄생임을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탄의 역설적 본질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이 성탄의 기쁨이 더 커질 것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그분이 사랑하시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