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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韻文소설]
예브게니 오네긴(발췌)
알렉산드르 뿌쉬낀[러시아]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1799년 6월 6일 ~ 1837년 2월 10일)은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지중해 인종) 출신 귀족이었다. 주요작품; <예브게니 오네긴>, <루쓸란과 류드밀라>, <정동의 기사>, <대위의 딸>, <깝까즈의 포로>, <보리스 고두노브> 등 다수가 있다.
(타자가 아름차서 제6장 블라지밀 렌스끼와 예브게니 오네긴의 ’결투‘ 장면만 소개한다.)
제 6 장
1
블라지밀 렌스끼가 자취를 감춘 것을 안 예브게니는 또 게으름에 쫓겨 스스로가 행한 복수에 만족하며 올가의 곁에서 명상에 잠겼다. 그의 뒤에서 올가도 하품하며 블라지밀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끝없이 코티용이 악몽과 같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니 이제 그것도 끝났다. 모두들 야식의 자리로 모였다.
잠자리가 펴졌다. 모든 지붕 밑은 침대가 열을 짓고 손님들에게 배당되었다. 누구나가 이젠 잠을 필요로 했다.
우리 예브게니는 다만 홀로 자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2
잔치집엔 이제 고요가 찾아들었다.
객실에서 몹시 무거운 푸스챠꼬브가 아내와 같이 코를 골고 있다.
그루즈진, 브야노브, 페보슈꼬브, 몸이 좋지 않은 프리야노브 이 네 사람은 식당 의자에서 나란히 자고 있고,
무슈 토리케는 다 낡은 나이트 캡에 스웨터를 입고 침대 위에, 아가씨들은 따찌야나와 올가의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
단 한 사람 따찌야나만이 가엾게도 잠 못 이루어 슬프게 창가에서
달빛에 묻혀 어두운 바깥 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3
예브게니의 생각지도 않은 출현과
잠깐 번뜩인 저 눈의 상냥함과
올가 상대의 알 수 없는 것이
영혼의 속속들이까지 그녀를 꿰뚫었다.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질투의 괴로움이 그녀의 가슴을 쥐어짰다.
마치 섬뜩한 손으로 가슴을 동여매는 듯
마치 그녀의 발 밑에서 시꺼먼 기은 못이 빙빙 돌고 있는 듯.
“나는 멸망이야.”라고 따찌야나는 말한다.
“하지만 그 멸망이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난 기쁘다.
불평은 말아야지, 원망할 것은 없어.
그 사람은 다만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없을 뿐이니까.“
4
자! 어서 빨리빨리 들어 주게나, 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들이 재촉을 한다니까 글쎄.
블라지밀 영지의 카라스노고리에에서 5킬로 떨어진 곳
철학적인 광야 한가운데에 한 집안을 꾸민 자레츠끼
지금도 그는 건재하시다.
일찍이 지독한 난봉꾼, 도박 대장이자
장난 대장으로서 선술집 웅변가.
그러던 그가 이젠 친절하고 호인인
홀아비이며 한 가정의 아버지
믿음직한 친구, 상냥한 지주, 청렴지사라고까지 일컫는 인물이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다.
5
전에는 흔히 사교계에 아첨하는 소리가
악질인 그의 용기를 북돋았다.
실제 그는 피스톨로 10미터 거리에서도
에이스 패를 쏘아 구멍냈고
또 어느때는 싸움터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칼뮈크에서 보기도 좋게 큰댓자로 진창으로 떨어져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이름도 났었다.
참 이는 고귀한 인질이다.
신의의 화신 레그루스의 재림은 매일 아침 벨리서 포도주 석 잔
외상으로 주기만 한다면
또 한 번 포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6
전에는 흔히 싱숭생숭 장난도 치고 바보 자식들을 속여도 먹고
약은 놈들을 아무데서나 마음대로 데리고 놀기도 했다.
그야 어느 때는 장난이 지나쳐 사과를 한 일도
바보 짓을 저지르고 난처한 일도 있었다.
그는 또 남과 유쾌하게 토론을 하든지
약아빠진 또는 미련한 대답을 하든지
짐짓 잠자코 있든지 짐짓 다치고 덤비든지
젊은 친구에게 싸움을 시켜 결투를 시키든지.
7
그런가 하면 화해를 시키든지
셋이서 아침을 든 뒤 상쾌하게 웃고 즐기든지
거짓말을 늘어놓아 어느 틈에 두 얼굴에 똥칠을 하든지
그런 짓엔 선수였다.
sed alia tempora ! 이런 엉터리 짓은
(또 다른 희롱, 연애의 꿈도 그렇지만)
활기에 찬 청춘과 더불어 과거의 것이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레츠키도
드디어 앵두, 홰나무 따위 그늘에서
폭풍우를 피하는 몸이 되어 지금은 참된 현자처럼 살면서
호라티우스의 눈썹 찡그리는 것을 배워 양배추를 심든지
거위를 기르든지 애들에게 글씨를 가르치든지 한다.
8
그는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예브게니도 그 심정은 얍보면서도
그의 독특한 판단이나 갖가지 일에 상식적인 의견을 좋아했다.
또 기꺼이 만나도 보았다.
그래서 그날 아침 일찍이 왔을 때도
조금도 이상하겐 생각지 않았다.
인사말을 끝내자 자레츠키는 시작된 대화를 별안간 중지시키고
눈에 미소를 띠며 예브게니에게 시인의 편지를 넘겨 주었다.
예브게니는 창 곁으로 가서 잠자코 편지를 읽었다.
9
그것은 간결하고 점잖게 쓴 도전장,
소위 결투를 도전해 온 것이었다.
예브게니는 답장에서 이 편지를 가지고 온 심부름꾼에게
쓸데없는 소리는 한 마디도 않고
“좋소! 언제 어디서라도 응하겠소.” 라고 단언했다.
자레츠키도 두말 없이 일어섰다.
볼일이 집안에 많으므로 이 이상 오래 앉았긴 싫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나갔다.
그러나 홀로 자기의 영혼을 바라보는 예브게니는
자기의 넋과 자기 몸이 성에 차지 않았다.
10
그도 그럴 것이 마음속 깊은
저 법정에 나를 세워놓고 내가 나를 규문해 보아도
솔직히 말해 책망받을 점이 많았다.
우선 첫째로 엊저녁 저렇게 주책도 없이
비비하고 정다운 사랑을 조롱한 그 짓이 이미 나쁘다.
둘째로는 설사 저 시인이란 사람이 저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할지라도
18세의 나이로 보아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
예브게니는 이 청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상
철없는 아이도 혈기찬 소년도 싸움 잘하는 건달패도 아닌데
성실하고 분별 있는 당당한 남자로서 처세해야 옳았을 것이다.
11
짐승처럼 털을 세워 싸우지 말고
흉금을 터놓고 말해도 좋았을 걸.
젊은 마음의 무장을 스스로 풀게 해 주는 것이
이 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허나 이미 때는 늦었다........ 거기다가 또.”
하고 그는 생각한다.
“이 사건에는 결투의 경험자가 끼어들어 있어,
심술궂고 입이 싼 놈...... 물로 그런 놈의 이 소리 저 소리
일일이 그런 것 걱정할 것은 없지만
바보 같은 놈들의 속삭임이나 껄껄대는 소리..... .“
(이것이 여론이다!)
명예의 태엽 우리들의 우상!
세상은 사실 이 위를 맴돌고 있다.
12
한편 시인 블라지밀 렌스끼는 증오에 불타
집에서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수다스러운 이웃 지주가 큰일이나 치른 듯 답장을 가져왔다.
질투의 마음은 천하를 휘어잡은 듯
장난꾼들이 이 사건을 조작해서 농담 속에 어름어름 얼버무려
총구를 그의 가슴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허니 이제 의심은 풀렸다.
그들 둘은 내일 새벽 해 뜨기 조금 전 물레방아간으로 나가서
서로 상대의 넓적다리거나 관자놀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13
노여움에 불타는 블라지밀은 바람둥이 처녀를 미워했기에
결투가 끝나기 전에는 올가를 안 만날 작정이었는데
햇살과 시계를 보고 있는 동안에
드디어 될 대로 되라 하고 손을 저으며 이웃 부락으로 향했다.
이 방문으로 올린카와 올가를 깜짝 놀라게 할 속셈이었는데
이 속셈은 대번 무너져 버려 올가는
그전대로 대문에서 뛰어나와
가엾은 시인을 기꺼이 맞았다. 믿을 수 없는 희망이지만
발랄하고 명랑하고 거리낌도 없이
즉 그전과 똑같은 그녀가 되었다.
14
“엊저녁은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올가의 이것이 첫 질문이었다.
블라지밀은 감각이 모두 마비된 듯 말 한 마디 못하고 고개 숙였다.
이 티없이 맑은 시선 앞에, 이 순진한 천진난만 앞에
이 발랄한 영혼 앞에서는 질투도 섭섭함도 말끔히 사라졌다.
쾌감이 넘쳐 흐르는 눈으로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본다.
그는 알았다, 자기가 지금도 지극히 사랑을 받고 있음을.
후회에 책망을 받으면서 용서를 빌려고 생각해도
다만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입을 열어도 할 말이 없다.
그는 이제 행복한 순간이다.
15 16 17
그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기면서
그렇게도 그립던 올가 앞에 서서
블라지밀은 그녀를 향하여 어제의 일을 입에 올릴 힘이 없었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여성의 구원의 신으로 나는 영원히 임하는 것이다.
호색한들이 탄식과 칭찬의 불을 뿜어
젊은 여성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것을
저 더러운 독충이 귀여운 백합의 줄기를 갉아먹는 것을
겨우 어제 핀 꽃이 반도 못 피어 시들어 버리는 것을
내가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친구 여러분! 들어 주십시오! 이것은 곧 이런 뜻입니다.
“나는 나의 친구와 피스톨로 결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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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따찌야나의 마음을 태우는 상처의 깊이를 알고 있다면!
내일은 블라지밀과 예브게니가 무덤 밑의 움집을 향해
목숨을 걸고 겨루는 것을 만약 따찌야나가 알고 있었다면
아! 어떻게 알기만 했다면 그녀의 사랑은
두 친구를 다시 한번 결합시켜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렬한 이 정열을 우연이라도 알아차린 자는 없었다.
예브게니는 아무런 말 한 마디 없었다.
따찌야나는 남몰래 슬픔에 싸여 있었다.
다만 유모만은 알 수가 있었을 텐데
아뿔싸! 둔감해서 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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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이 새도록 블라지밀은 멍청해 있었다.
조용히 묵도를 하고 있는가 하면 별안간 혼자 떠들어 댔다.
그야 뮤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자는 언제나 이 모양이다.
낯을 찡그리고 크라비코드를 향해서는
화음만을 긁어 소리를 내고
그러다가는 올가 쪽을 보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행복해. 그렇지 않아, 올가?”
그러나 이젠 밤도 깊었다. 돌아갈 시간이다.
심장은 고민에게 주리를 틀리고
젊은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할 그때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정면으로 사나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본다.
“왜 그런 표정을?”
“뭐 별로.” 이 한 마디를 남겨 놓고는 문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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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 피스톨을 살펴보고는 다시 상자에 넣고
목도리를 벗고 촛불 밑에서 실러의 저서를 펴보았는데
다만 한 가지 생각이 그를 붙들고 놓지를 않는다.
수심에 싸인 그의 마음은 이 밤을 그대로 뜬눈으로 새운다.
뭐라 말할 수도 없이 아름다운 올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블라지밀은 책을 덮고 펜을 잡는다.
사랑이 쓰게 하는 애절하고 슬픈 싯구들이
리듬에 붙어 조용히 흐른다.
그것은 그는 사랑의 열에 들떠 소리도 드높게 낭송한다.
향연의 자리에서 만취가 된 델리비크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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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의 시는 우연히 지금까지도 내 손에 남아 있다.
다음에 적힌 것이 그것이다.
“어디로 아! 어디로 가 버렸느냐?
내 봄의 황금의 나날이여!
오는 내일은 나에게 무엇을 준비해 주느냐?
헛되이 나는 눈동자를 노려보는데
어둠에 싸여서 나를 알아줄 까닭도 없다.
상관 없도다. 운명의 가는 길은 항상 옳은 것이매.
설사 내가 살을 맞아 쓰러지더라도 또한 그냥 스쳐 지나간들
그 모두가 좋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방문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리니
심로(心勞)의 나날에도 축복은 있다.
암흑의 나날에도 축복은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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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또 여명은 비치고 휘황한 햇살이 빛날 것이리.
그러나 나는 ㅡ 아마도 무덤 아래의 신비한 안식처를 찾아
젊은 시인의 추억은 흐름이 느린 레테 강에 쓸어 버리리.
이 세상은 나를 잊고 또 비리리.
그러나 너는! 미의 조그만 화신이여
너 하나만은 내 무덤을 찾아 눈물 흘리리라고 나는 믿는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느니라.
폭풍우 같은 생애의 슬픈 한 새벽을 나 한 몸 위해 바쳤노라고.....
마음의 벗이며 사랑하는 벗이여
오려마! 오려마! 나는 너의 단 하나의 새신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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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애매하게 또 힘도 없이 시인은 썼다.
(이것은 낭만주의라고 불린다.
물론 나는 이것이 낭만주의 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드디여 동이 트기 전 블라지밀은 밤을 새운 머리를 숙이고
‘이데알’이라는 당시 유행어를 되새기며 꿈의 세계를 헤맸다.
그가 잠에 빠지려는 순간 이웃 자레츠키가 조용한 침실로 들어섰다.
이때 그가 오지 않아서야 했는데
그는 와서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자! 여섯 시가 넘었다구, 오네긴도 우리를 기다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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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
예브게니는 이 시각에 죽은 듯이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밤의 장막이 걷히며 동녘이 밝아오고
닭 우는 소리가 별을 맞이하는 그 시각에도
예브게니는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다.
태양이 이미 높이 솟아 하늘을 돌고
바람을 탄 눈조각이 반짝이면서
회오리로 맴도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예브게니는 잠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잠은 아직도 그를 사로잡고 있다. 이윽고 두 눈을 비비며
장막 끝을 치켜 들고 자세히 보니 벌써 떠날 시각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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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 그는 벨을 울렸다.
기요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종이 뛰어 들어오더니
그에게 가운과 슬리퍼를 내놓고 바지를 손에 쥐어 준다.
예브게니는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하면서
종에게 같이 갈 준비를 시키고
군용함(軍容函)도 가져가도록 일렀다.
빠른 썰매도 준비되었다. 서둘러 물방앗간으로 달렸다.
잠간 만에 거기에 닿더니
종에겜 르파쥬가 만든 불길한 무기를 가지고 따라오라 이르고
썰매는 들판의 저편 두 떡갈나무 밑에 갖다 놓으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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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방에 몸을 기대고 블라지밀은
벌써부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시골에 와 사는 기계기사 자레츠키는
맷돌의 점검을 하고 있었다.
예브게니가 양해를 구하면서 다가온다.
“그렇지만.....” 하고 자레츠키는 기가 막힌 듯
“어디 있소, 당신의 시중꾼은?”
결투에 괜해서는 정통파며 잔소리꾼인 자레츠키는
진정으로 형식주의자.
사람 하나 해치우는 데도 아무렇게나 끝내는 것은 허락지 않고
모두 옛 법식에 따라 엄격한 법칙을 지키게 했다.
(이 점만은 칭찬해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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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중꾼 말입니까?” 예브게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입니까? 나의 친구 무슈 기요.
이 소개에 무슨 이의는 없으시겠죠?
세상에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양심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자레츠키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예브게니는 블라지밀에게 물었다. “어때, 시작하면?”
“좋겠지, 시작하세.” 블라지밀은 이렇게 말했다.
일동은 물방앗간 뒤로 갔다.
조금 떨어져서 자레츠키와 ‘양심적인 사나이’가
중대한 결정을 하고 있는 동안
원수이자 친구인 두 사람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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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끼리! 과연 오래 전부터 원수였던가?
피의 갈망이 두 사나이를 격리시킨 것은 과연 오래 전이던가?
이는 둘이 한가한 때 식사나 대화를 나누거나
또 그 밖에 여러 가지 인간으로소의 영위를 친히 나누던 것은?
이제 뜻하지 않게 두 친구는 적이라는 의식에 가득 찬
부모 죽인 원수와도 같이 무섭고 이상스러운 꿈이라도 꾸듯이
새벽 적막 속에 냉엄하게 상대의 멸망을 준비하고 있다........
손에 피가 묻기 전에 웃고 그만 둘 수는 도저히 없는가?
유쾌하게 인사하고 헤어질 수는 없는가?
그러나 러시아 상류 사회의 반목은
이상하게도 거짓의 수치를 드려워 한다.
29
이러는 동안에 피스톨이 번쩍이고
포목을 망치로 때려박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음침하게 되흔들었다.
육각형 총신에 탄알이 재워지고 한 방이 울렸다.
이윽고 화약 터진 연기가 잿빛으로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이 잿빛으로
신호 피스톨은 다시 재워졌다.
가까운 숲속에는 입장이 난처한 기요가 서 있다.
이 총소리를 신호로 등을 맞대고 서 있던 두 사나이는
망토를 휙 벗어 땅에 던지고 각기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자레츠키가 재놓은 32보 거리를
두 사나이는 16보씩 나누어 걸어갔다.
두 사나이는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각기 피스톨을 오른손에 쥐었다.
30
“자, 돌아 설까요?”
냉정하게, 아직 겨누지는 않고
원수끼리는 어엿한 발걸음으로 네 걸음씩 서로 다가갔다.
죽음의 계단을 네 단씩, 먼저 예브게니가 계속 걸음을 옮기면서
자기 피스톨을 쳐들기 시작했다. 이어 다시 다섯 걸음씩 앞으로.
숨막히는 순간이다.
블라지밀도 왼쪽 눈을 실눈으로 감으면서 겨누기 시작한다.ㅡ
이때
예브게니가 발사를 했다.
시인 블라지밀은 말없이 자기 피스톨을 떨어뜨렸다.
31
조용히 가슴에 손을 대고 힘없이 땅에 넘어졌다.
흐려진 눈은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큰 눈덩어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산의 찬물에 뛰어든 느낌으로 예브게니는 시인 곁으로 달려갔다.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름을 불렀다.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시인은 때아닌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폭풍우가 불어치더니 성벽의 햇살 속에
아름다운 꽃은 시들어 버렸다.
제단의 불은 사라져 버렸다........
32
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
이마 위에는 이승에서 지쳐 버린 평안이 음산히 비쳤다.
탄환은 가슴 바로 밑을 관통해 있었다.
상처에서 연기 같은 핏줄기가 샘솟고 있다.
얼마전 이 심장에서는 영감이나
미음, 사랑, 희망이 울리고 있던 것을.
그런데 지금은 마치 사람 없는 흉가처럼
쓸쓸하고 암담한 채 영원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덧문은 모두 닫히고 창문 유리는 분필로 칠해졌다.
여주인은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갔는지는 신만이 안다.
33
서슴치 않고 에피그램으로써 서투룬 짓을 한 적을 화나기 한다.
이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 적이 굳이 뿔을 세워 덤벼들려 할 때
불현듯 거울을 보면서 내 모습에 놀라
부끄러워하는 꼬락서니를 바라다본다.
이것도 유쾌한 일이다. 만약 그가 ㅡ 친구 여러분! 쑥스럽게도
이것은 바로 납니다 ㅡ 하고 실토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 유쾌하다. 그보다 더 속이 시원한 것은
무언중에 그 적에게 명예스러운 영구를 준비시켜
규정대로의 거리를 두어
파랗게 질린 그의 이마에 조용히 겨냥을 한 일.
그러나 그를 그의 조상 앞으로 보내는 것은
여러 분이 생각해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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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눈치나 대답 또는 그밖에 조그마한 일 때문에
술자리에서 당신에게 창피를 주든지
아니면 격분하여 자기 쪽에서 거만하게 도전해 온
나이 젊은 당신 친구가 이편에서 쏜 권총에 쓰러졌다면?
그 친그가 여러분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이마에 나타내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점점 굳어 가면서 당신의 필사적인 부름도
못 듣고 말이 없을 때
도대체 어떤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속을 휘어잡을 것인가?
그 대답을 나는 듣고 싶다.
35
양심의 가책에 옥죄이면서 예브게니는
피스톨을 손에 쥔 채 블라지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젠 할수없군, 심장인걸 뭐.”
결투 입회자 자레츠키는 이렇게 단언했다.
할수없군! 이 무서운 한 마디에 예브게니는
일루의 희망도 끊겨 버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서 썰매를 불렀다.
자레츠키는 얼음처럼 찬 유해를 조심조심 썰매에 실었다.
그리고는 이 가엾은 시체를 그가 살던 집으로 옮긴다.
말들은 주검의 냄새를 맡고 흰 거품을 뿜어 재갈을 적시고
콧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더니 채찍을 맞고 화살처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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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시인을 아까워하시리라.
기쁨에 넘치고 갖가지 희망에 찬 꽃봉오리가
세상을 위해 그 희망을 이룰 겨를도 없이
어린애 옷을 벗으려는 순간에 그만 시들어 버린 것이다.
저 뜨거운 가슴의 동계, 저 고상하고 상냥하고 용감한
저 젊은 사상과 감정의 고귀한 지향은 그 어디메뇨?
너희들이 감춘 공상의 여러 가치, 또 신비로운 세계의 환상은
또다시 너희들의 신성한 시의 꿈은?
37
아마도 그는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
적어도 인간다운 명예를 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말없고 그의 하프는 대대로 쉬임없이 울릴 텐데
아마도 세상의 층계 중 가장 높은 한 계단이
우리 블라지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괴로움에 찬 그의 영혼은 신성한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떠나 버려
우리들을 위해서는 생명을 가져오는 하나의 소리가
영구히 사라져 버렸는지도, 무덤 속 당신의 그 영혼에게는
대대의 찬가도 모든 사람들의 축복도 이제는 들리지 않겠지.
38 39
또 어쩌면 평범한 운명이 블라지밀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의 한때가 지나면 마음의 정열도 식어 사람이 달라져서
뮤즈와는 인연을 끊고 평범한 여인 아내로 맞아
시골에 묻혀 30년을 같은 생각 하고
다행히 계집 빼앗긴 서방노릇 하며
솜 둔 가운 따위 입었을는지도.
인생의 참됨을 이제야 알자 마흔엔 중풍, 쉰엔 할아버지
마시고 먹고 하염도 없이 뚱뚱해지는데 몸은 약하고
드디어 말 안 듣는 자식들이나 훌쩍이는 계집일랑 돌팔이들의
이제 그만이란 선고를 받고 계집 침대를 등에 지고서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을는지도 모르지.
40
그건 어떻든 독자 여러분!
시인이기도 하고 사리 분별 있는 몽상가이기도 한
이 젊은이는 가엾게도 친구 손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여기에 한 장소가 있다. 영감의 후손이 살고 있던
이 마을의 왼편 쌍소나무가 난 곳이다.
그 그늘에는 가까이 여울 소리가 구비구비 흐르는 강을 만들어
그 언덕에서는 농부들이 일손을 쉬고
또 추수하는 여인들이 찾아와
맑은 여울에 주전자를 담가 물을 떠간다.
여울 곁 녹음 속에는 간소한 묘비가 하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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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면 그 묘비 아래서는
목동이 나무 껍질로 여러 가지 빛깔의
껍질신을 삼으면서 복가 어부의 뱃노래를 부른다.
여름을 지내여 시골에 와 있는 젊은 도시의 아가씨 한 분이
말을 몰고 혼자 단숨에 들을 건너 숲을 지날 때
언뜻 가죽고삐를 당겨 묘비 앞에 말을 내려 발을 멈추고
모자에 달린 베일을 쳐들어 조촐한 묘비명에 시선을 쏜다.
그러자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상냥한 눈을 흐리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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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씨는 묵도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말을 몰아 들을 되돌아간다.
아가씨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블라지밀의 운명이 가엾어진다.
그녀는 생각한다. ‘올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오래 고민했을까? 눈물의 세월은 곧 끝났을까?
그녀의 언니 따찌야나는 지금 어디에?
그리고 저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사람은
젊은 미녀의 훌륭한 적수는, 저 우울한 별난 사나이는
젊은 시인을 죽인 자는 지금 어디 있을까?‘
이 모든 의문들을 나는 독자에게 자세히 밝혀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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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기다려야 되겠다.
나는 나의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물론 어느날엔가는 그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를 상대로 하고 싶지가 않다.
나이는 헛되이 좋아하는 각운(脚韻)을 쫓아낸다.
그리고 나는 ㅡ 한숨 섞어 자백하지만 ㅡ 쫓아다니기가 싫어졌다.
나의 펜은 종이를 한 장 또 한 장
삽시간에 더럽혀 버리는 옛날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것과는 다른 차디찬 꿈이 또 다른 호된 마음의 피로가
상류 사회의 시끄러움 속에서도 혹은 정적 속에서도
고이 잠든 넋은 잠을 자게 마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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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와는 다른 욕구의 소리를 나는 들어서 알아차렸다.
새로운 비애도 알았다. 그러한 욕구에 나는 너무나 기대를 걸었다.
또 나에게는 낡은 비애가 그립다.
꿈이여! 꿈이여! 어디에 있느냐, 너의 달콤함은?
언제나 너에겐 붙어다니는 각운, ‘젊음’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정말 틀림없이 애가(哀歌)의 본뜻도 나오기 전에
내 삶의 봄은 날아가 없어졌느냐?
(지금까지는 장난으로 그렇게 말도 해 왔지만)
그 봄은 과연 되돌아오지 않느냐?
과연 나는 30이란 소리를 들어야만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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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에게도 대낮이 온 것이다.
어쩐지 나도 그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다. 그럼 화목하게 헤어지자.
오 경쾌했던 나의 청춘이여!
즐거움, 슬픔, 달콤한 괴로움이나 시끄러움,
폭풍우, 멋진 연회석상
모든 것에 네가 보내준 모든 것에 나는 감사 드린다.
오로지 너에게 감사한다. 불안한 날에도, 한가한 날에도
나는 너를 받아들였다...... 마음껏, 그것으로 됐다!
청명한 마음을 안고 이제 나는 새 나그네길을 떠난다.
지난날의 피로를 잊고 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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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뒤돌아보자꾸나! 그럼 안녕! 나의 은둔처여!
수풀 속의 은둔처에서 정열과 권태와 근심을 안은
영혼의 꿈이 가득찬 나의 날들은 흘러갔다.
그 젊은 날의 영감이여, 아무쪼록 나의 상상을 불러일으켜 다오.
혼미한 내 마음을 흔들어 깨워 다오.
내 방에 더 자주 날아와 주게나!
그리고 저 시인의 넋이 친구 여러분
당신들과 내가 몸을 담은 상류 사회의 죽음과 도취의 저 못에서
아슬아슬해지고 무자비하게 되고 완고해지고
그리고 나중에는 돌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지켜보아 다오!
(제6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