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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어둠 속의 소리 14-1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통통한 팔로 안고 있는 그림을 올려다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다. "허허, 이 학교는 정말 대단하구려, 고레토 도노(미츠히데)." 아즈치 키리시탄 신학교 3층의 한 방이다. 신학교를 안내한 미츠히데(光秀)와 손님인 이에야스(家康),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 세 사람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비와호의 물결을 건너오는 5월의 바람이 시원하다. 푸른 호수 한편에 구름 그림자가 크게 비치고 있다. 그 구름을 바라보며 미츠히데는 모리란마루(森蘭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에야스는 어제 5월 12일, 아나야마 바이세츠와 함께 아즈치에 왔다. 다케다 정벌의 포상으로 스루가 한 나라(國)를 하사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 접대 임무를 미츠히데가 맡았다.
"이에야스를 나라 생각하고 대접하라." 노부나가가 명했다. 미츠히데는 이에야스를 위해 사카이나 교토에서 그릇과 음식을 가져왔다. 그 화려한 그릇을 보고 모리란마루가, "고레토 도노. 이것은 황제를 모시는 대접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도쿠가와 도노가 황제는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영악하게 따져 물었다.
노부나가는 이를 듣고 꾸짖으며, "나라 생각하고 대접하라 명하였다. 이것으로 되었다. 미츠히데, 수고했다."라며 보기 드물게 란마루를 나무라고 미츠히데의 노고를 치하했다. 란마루는 한쪽 뺨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미츠히데를 바라보았다. 노부나가의 총애에 오만해진 란마루를 무심코 떠올리며, 미츠히데는 이에야스에게 정중히 답했다.
"아즈치성도 그렇고, 이 신학교도 그렇고, 주군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아즈치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신학교의 오르간이나 비올(바이올린의 전신)에는 참으로 놀랐소이다." 계단 아래에서는 지금도 오르간에 맞춰 노래하는 학생들의 맑고 깨끗한 노래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칭찬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미카와 도노(이에야스), 우후 도노(노부나가)께서도 그쪽 영지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후지산을 구경하시고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하시는 듯했습니다." "아아, 그것은 일본 제일의 산이지만,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니지요. 그에 비하면 이 아즈치성도 신학교도 사람이 만든 것, 과연 오다 도노 답니고 감복했습니다."
시종들은 1층 예배당에서 기다리고 있다. 서양복을 입고 상투를 잘라버린 단발머리의 소년이 과자를 가져왔다. "허허, 이것은 무슨 과자입니까?" 바이세츠가 물었다. "카스테라라 불리는 과자입니다." "이것이 카스테라구려." 이에야스가 말했다. "예, 포르투갈어라고 들었습니다. 서양 어느 나라의 이름이라던가..."
"나라의 이름이라고요?" "예, 이스파니아라는 나라를 포르투갈어로 카스테라라 부른다고 합니다." "호호, 이스파니아가 카스테라라... 하지만 나라 이름이 과자가 되어 먹혀버린다니...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구려." 다시 소년이 들어왔다. 차를 가져온 것이다. 소년이 나가자 이에야스가 말했다.
"노부나가 도노 같은 분을 모시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나, 고생도 많으시겠구려." "아닙니다, 모시는 자들보다 영주님의 고충이 더 크실 줄로 압니다." 미츠히데는 신중하게 답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이지만 가신처럼 노부나가에게 충성스럽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시대를 호령하는 영웅이다. 게다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걸물이기도 하다.
혈색이 좋고 윤기 나는 이에야스를 바라보며, (분명 이 남자는 마흔한 살일 것이다) 하고 미츠히데는 생각했다. 얼마 전 전투에서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의 목이 전달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그 목을 발로 차며 "흥, 이 애송이 놈! 이것이 오랜 세월 쌓은 악업의 응보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 그 목이 전달되었을 때의 일을 미츠히데는 들은 바가 있다. 이에야스는 카츠요리의 목을 받침대 위에 정중히 올려놓고, 그 자리에 조아려 "젊으신 나이에...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라며 영혼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옛 다케다의 가신이었던 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엎드려 울며 이에야스에게 깊은 존경을 품었다고도 들었다.
마흔한 살이라는 젊음과 이러한 깊은 심려라니, 얼마나 대성할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미츠히데는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가장 큰 아군인 동시에 최고의 적이기도 하다. 소홀히 답할 수 없다. "이봐요, 고레토 도노. 노부나가 도노는 참으로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오. 그런데 노부나가 도노의 첫 번째 취미는 단연 다도(茶道)였지요?"
"예, 아시다시피 특히 다기(茶器)에 대한 식견이 깊으십니다." 미츠히데의 말에 이에야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희미한 미소였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가 명품 다기에 심취하는 것을 내심 좋게 보지 않는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원래의 발단도 히사히데가 아끼던 다기를 강요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마저 있었다. 그래서 히사히데는 노부나가가 가장 탐내던 '히라구모(平蜘蛛)' 라는 다도용 솥을 성 위에서 떨어뜨려 깨부수고 최후를 맞이했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갈수록 다도 명품에 집착하며 자신의 부와 권력으로 다기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다기 '츠쿠모나스(九十九髪)', '마츠시마' 차 항아리, 천하 제일의 '하츠하나 카타츠키(初花肩衝)' 등 이에야스조차 금방 떠올릴 정도의 명품을 노부나가는 셀 수 없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
물론 그 명품들을 다회 자리에서 선보이기도 하고, 공이 있는 장수에게 포상으로 내려주기도 했으며, 받은 자는 그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즉, 노부나가는 다도를 정치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에야스는 지금 "특히 다기에 대한 식견이 깊다"는 미츠히데의 말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느낀 것이었다. "다도 다음으로는 매사냥입니까?" 바이세츠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매사냥보다 명마와 명검에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오, 명마라 하면 지난해 교토에서 열린 기마 열병식(御馬揃え)의 훌륭함은 지금도 온 일본의 화젯거리입니다. 분명 그때 봉행(총책임자)을 맡으신 분이 고레토 도노였지요. 고레토 도노가 하시는 일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고레토 도노가 계시어 우후 도노께서 매우 큰 도움을 받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야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다케다 정벌 이후 까닭 없이 노부나가에게 매질을 당한 미츠히데의 모습을 이에야스도 보았다. 게다가 새해에 미츠히데만이 군사 회의에 참석했던 것도, 오랜 세월 그의 공로도 이에야스는 알고 있다. 그런 미츠히데가 다케다 정벌에서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자신을 접대하는 데 마음을 쓰고 있다. 그 필사적인 미츠히데의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다.
자신보다 16살이나 연상이고, 50여 만 석의 대영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이에야스의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훗날 미츠히데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미츠히데의 창을 가신 미즈노 카츠나리에게 주며 "알겠느냐. 이것은 고레토 도노가 쓰시던 창이다. 평생 아끼며 고레토 도노를 본받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츠히데를 본받으라는 것은 물론 "주군인 나를 죽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에야스는 미츠히데라는 인물을 크게 평가하여 그 인품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 정도였기에 이때 미츠히데에게 한 이에야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자신은 노부나가에게 장남 노부야스를 잃었고, 마찬가지로 미츠히데 역시 장모를 잃었다는 동병상련의 친밀감이 있었다.
자신도 미츠히데도 함께 그 사실을 견뎌왔다. 그리고 이 미츠히데는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이에야스에게는 미츠히데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아는 도량이 있었다. "오다 도노는 이 신학교의 건립 등도 허가하시고 키리시탄을 두텁게 비호하고 계신데, 정작 본인은 신자가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오?" 라고 카스테라를 다 먹은 바이세츠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우후 도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믿지 않으시는지라..." "과연.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지요. 신도 부처도 믿지 않으시다니 강한 분이시오. 안 그렇소, 미카와 도노?" "참으로 그렇소. 나 같은 사람은 신이든 부처든 매달리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고레토 도노는 어떠시오?"
"저 역시 영주님처럼은 되지 못합니다. 영주님은 스스로를 신으로 삼고 계십니다만..." "이 얼마나 좋은 풍경인가."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그 약간 뚱뚱한 몸을 창가에서 다시 의자로 돌렸다. 바이세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년간 적이었던 오다의 영지에 와 있어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과 몇백 명의 종자를 데리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지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린다.
어제부터 바이세츠는 맥락 없이 화제를 꺼냈다가 또 말허리를 잘라버리곤 했다. (불행히도 바이세츠의 이 예감은 맞아떨어져, 이날로부터 20일이 지나지 않아 귀국길에 일어난 민중 봉기(一揆)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그 바이세츠와는 대조적으로 이에야스는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종일 온화하고 침착했다.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正成)의 깃발에는..." 바이세츠가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츠히데는 바이세츠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챘지만, "저 건너편에 보이는 것이 비에이산(比叡山)입니다"라고 말했다. 쿠스노키 마사시게의 깃발에는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라 적혀 있었다고 들었다.
비(非)는 리(理)를 이기지 못하고, 리는 법(法)을 이기지 못하며, 법은 권(權)을 이기지 못하고, 권은 천(天)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바이세츠는 노부나가가 스스로를 신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권은 천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에야스도 그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빗츄(備中)의 하시바(羽柴-히데요시) 도노는 활약이 대단하구려, 고레토 도노" 하고 말했다.
"예, 고생하고 계십니다." 답은 했지만 미츠히데는 유쾌하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히데요시보다 먼저 성주가 되었고 모든 면에서 중용되었으나, 최근 노부나가태도는 분명히 변해 있었다. 이달 초 시코쿠의 초소카베(長宗我部) 씨 정벌이 결정되었다. 초소카베 씨는 미츠히데의 친척이다.
미츠히데의 조카 사이토 토시미츠(斎藤利三)의 딸과 결혼했다. 그 인연으로 7년 전인 덴쇼 3년,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는 자신의 장남에게 노부나가로부터 이름을 하나 받았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신(信-노부)' 자를 하나 주어 '노부치카(信親)'라 명명(命名)했다.
그리고 그때 노부나가는 초소카베 씨에게 "시코쿠는 맡기겠다. 공을 세우는 대로 정복하여 차지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초소카베 씨는 재작년 6월 24일, 미츠히데를 통해 매 16마리와 설탕 3천 근을 노부나가에게 선물했다. 설탕은 피로회복제로 쓰이던 귀한 약이었다.
이렇게 노부나가에게 순종하던 초소카베 씨에 대해, 노부나가는 "정복하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잊은 듯 토사, 아와 외에는 줄 수 없다고 미츠히데를 통해 전하게 했다. 중재자인 미츠히데는 엄청난 난처함에 빠졌다. 이미 사누키(讃岐), 이요(伊予)를 공략을 마친 초소카베 씨는 "약속이 다르다!"며 불같이 노발대발했다.
시코쿠는 초소카베 씨와 미요시(三好) 씨의 대립이 심했다. 미요시 씨 역시 노부나가에게 자국인 아와를 되찾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점점 세력이 강해지는 초소카베 씨가 싫어진 노부나가는 미요시 씨를 도와 결국 초소카베 씨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이 미요시 씨는 히데요시의 친척으로, 히데요시가 지원하고 있었다.
이 일에서도 노부나가의 마음이 분명히 자신보다 히데요시에게 기울어 있음을 미츠히데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히데요시라는 이름만 들어도 미츠히데는 자신의 발목이 잡히는 듯한 불안과 불쾌감을 느꼈다. 그 미츠히데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에야스가 말했다.
"하시바 도노는 비록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빗츄는 필요 없다, 조선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던데..."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하시바 도노는 부러운 분입니다." 라며 바이세츠가 몸을 내밀듯 원형 테이블에 팔꿈치를 괬다.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미츠히데는 침묵한 채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쳐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소년을 불렀다. 소녀처럼 볼이 통통한 소년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우유를 다오." "알겠습니다." 소년은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나갔다. "하시바 도노 하니 생각나는데, 시코쿠의 초소카베 도노도 이번에는..." 또다시 말을 꺼내려다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입을 다물었다.
미츠히데와의 관계를 바이세츠도 알고 있다. 이에야스가 절절하게 말했다. "오오, 초소카베 도노는 강할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오. 나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지요." 미츠히데는 답할 말이 없었다. 지금 노부나가가 정벌하려는 상대를 손님인 이에야스가 칭찬해도 되는 것인가. 미츠히데의 친척으로서의 의례로 칭찬하는 것인가. 미츠히데는 이에야스의 진심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어서 이에야스가 말했다. "오다 도노도 미요시 씨를 도울까, 초소카베 씨를 도울까 괴로우셨겠구려. 아군으로 삼고 싶은 상대와 싸우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요. 괴로운 것으로 치면, 고레토 도노의 어머님 때도, 내 못난 자식 노부야스가 할복할 때도, 오다 도노가 얼마나 괴로워하셨겠소."
미츠히데는 내심 놀라 이에야스를 보았다. 인질이었던 미츠히데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말하자면 노부나가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강요한 것 역시 노부나가다. 이에야스의 말을 뒤집어 보면, (서로 노부나가 때문에 괴로운 일을 겪는구려. 시코쿠의 초소카베 정벌도 참으로 분하시겠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 남자는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는가. 아니, 내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진의는 알 수 없다. (나에게서 어떤 답을 끌어내려 하는가) 설마 배신하라는 유혹은 아닐 테지. 무언가의 포석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며 미츠히데는 "전국시대의 세상이 다 그러한 법이지요" 하며 웃었다.
이에야스는 온화하게, "그 전국시대도 빗츄의 싸움으로 끝이 나겠지요. 오다 도노의 천하통일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경사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오늘 밤 또 노부나가와의 연회가 있다. 성에서 가까운 신학교로 이에야스를 안내한 이 한낮의 한때, 미츠히데는 뜻밖에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바로 다음 날, 빗츄의 하시바 히데요시로부터 노부나가에게 직접 도움을 청하는 전갈이 왔고, 미츠히데 역시 출전을 명받았다. 갑작스럽게 이에야스 접대 임무를 면하고 출전하게 된 미츠히데가 이에야스와 바이세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고레토 도노, 아쉽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매일 고레토 도노와 담소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접대 담당자를 갑자기 바꾸는 노부나가의 무례함을 이에야스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교토와 사카이에서 가져온 여러 진미에 담긴 미츠히데의 정성에 이에야스는 남다른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손님인 자신을 남에게 맡기고 출전해야 하는 미츠히데에게 동정심마저 느끼는 듯했다. 이에야스는 헤어질 때 한마디를 던졌다.
"고레토 도노, 모리 측에는 요시아키 장군이 계시는구려." 미츠히데는 흠칫하며 이에야스를 보았으나, 그의 눈은 잔잔하게 웃고 있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피기 어려웠다. 말을 달려 아즈치에서 사카모토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털썩 누웠다. 눅눅하고 무더운 해질녘이다. 아내 히로코가 조용히 옆에 앉았다.
"도노, 도쿠가와 님께서는 이제 돌아가셨습니까?" "아니, 아직 아즈치에 계신다." "그런데 어찌하여..." "접대 임무에서 물러났다." "어머나, 물러나셨다니요!!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접대를 위해 도노께서 교토로 사카이로 비싼 물건을 많이 사 오시며 정성을 다해 준비하셨는데..." "출전이다." "어머, 그럼 역시 시코쿠로?"
"시코쿠라면 불만이 없지. 하지만 빗츄다." "예? 빗츄로요? 그럼, 그럼 하시바 님의..." "음, 하시바 도노를 도우라는 것이다. 주군(노부나가)을 모시고 말이야." 미츠히데는 자조했다. "어머나, 그렇다면 굳이 영주님께서 직접 출전하실 필요까지는 없으실 텐데요."
노부나가를 따라 출전하는 것이니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총대장인 히데요시와 동격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미츠히데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시코쿠라면 또 몰라도..." "그렇고말고요. 원래 영주님께서는 우후 님과 초소카베 님 사이를 중재하셨으니, 시코쿠 정벌의 총대장은 영주님으로 정해져 있었거늘..."
"음, 그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으나... 주군께서는 그 관례를 깨부수고 노부타카 도노를 총대장으로 삼으셨다." "----'" "그렇다면 적어도 부대장으로 나를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마저 단바 나가히데 도노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셨으니..." "어째서일까요." 당시에는 중재자가 전쟁터에도 파견되어 끝까지 처리하는 것이 통례였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것은 미츠히데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미츠히데의 체면이 완전히 짓밟힌 셈이다. "나도 모르겠다. 주군께서는 나를 더 이상 총대장의 감으로 보지 않으시는 것인지.... 하시바 도노의 밑에 서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신 것인지." 그때 하츠노스케가 옆방에서 급히 목소리를 냈 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후 님께서는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줄 압니다." "영주님! 아즈치에서 사신이 오셨습니다!" "뭐라! 아즈치에서?" 히로코가 당황하며 미츠히데는 일어나 앉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객전으로 향하니, 객전에 상사(上使, 주군의 사신)가 서 있었다.
미츠히데는 옆방에 엎드려 노부나가의 전갈을 들었다. "이즈모, 이와미 두 나라(國)를 내려주노라." 사신의 목소리는 낮았다. "예?" 이즈모, 이와미는 아직 적인 모리의 영지가 아닌가. 미츠히데는 의아한 표정으로 사신을 보았다. 사신은 불안한 듯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며,
"이나바, 호키, 이즈모를 평정하라. 그런 후에... 이즈모, 이와미 두 국을 내릴 것이다."
"하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답하면서도 미츠히데는 재빨리 계산했다. 평정하는 데 걸리는 세월은 1년 반, 아니 2년일지도 모른다. 2년 뒤의 일이라 해도 영지 추가 약속은 역시 가슴을 뛰게 했다. 오우미, 탄바를 합쳐 50여 만 석인 미츠히데는 80만 석의 대영주가 된다.
기쁜 기색을 띠는 미츠히데에게 사신은 우물쭈물하며, "그 대신, 오우미와 탄바는... 몰수한다." "무, 뭐라고요? 오우미와 탄바를?" 미츠히데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노부나가 명령을 전하자 사신은 서둘러 돌아갔다. (오우미와 탄바를 몰수한다고?) 미츠히데는 망연자실했다. (무엇을 위해서?)
모리란마루가 사카모토성을 갖고 싶다고 노부나가에게 청했다는 소문을 미츠히데는 떠올렸다. (그 어린놈에게 주기 위해서인가!) 복지 행정의 원조는 미츠히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츠히데는 영민들에게 마음을 썼다. 후쿠치야마(福知山)의 400년에 걸친 고료사이(御靈祭)는 미츠히데가 죽은 뒤, 그의 2년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축제라고 한다.
탄바, 오우미 영민들에게 쏟았던 미츠히데의 사랑이 지금 노부나가의 손에 단칼에 끊어진 것이다. (그 정도로 주군께서는 내가 미운 것인가) 한동안 멍하니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미츠히데는 이윽고 비틀거리며 3층으로 올라갔다.
인적 없는 어두컴컴한 3층 회랑에 서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성을 자신이 쌓았고, 잿더미가 된 이 거리를 자신이 넓혀 나갔다. 성을 쌓던 시절, 그 활기차고 기쁨에 차 있던 나날이 떠오른다. 성 정원에서 놀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상냥한 어머니, 현명한 아내, 사랑스러웠던 린, 그리고 타마, 주구로 등...
하지만 그것도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머지않아 이 성에서 아직 열일곱 살인 모리란마루가 주인인 양 행세할 날이 올 것을 생각하니, 멍해 있던 미츠히데의 마음속에서 문득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놈!) 그것은 란마루에게 향한 것인지 노부나가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였다. 오른쪽을 보니 비와호에 노을이 짙게 비치고 있다. 피를 흘린 듯 기괴한 붉은빛이다.
이 오우미, 탄바를 빼앗기고서야 지금 당장 이즈모, 이와미 따위를 준다 한들 무슨 기쁨이 있겠는가. 미츠히데는 카메야마성이나 사카모토성에서 조용히 일생을 마치고 싶었다. (저 히데요시 놈에게는 얼마나 찬란한 포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털썩 회랑에 주저앉고 싶을 정도의 깊은 절망과 허무함이었다. 그때, 미츠히데는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목소리가 났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려라." 이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놀란 미츠히데는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어두컴컴한 방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환청인가 싶었을 때, 세 번째로 방 안에서 목소리가 났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려라."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다. 미츠히데는 섬뜩해져 어스름한 방 안을 투시하듯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누구냐. 나와라." 답은 없다. 방 안으로 한 걸음 내딛던 미츠히데는 흠칫했다. "미츠부치 도노다!"
그렇다. 방금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고인이 된 미츠부치 후지히데(三淵藤英)의 목소리다.
미츠히데는 두려움보다 반가움을 느꼈다. 미츠부치 후지히데는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의 형으로, 장군 요시아키의 신하였다. 요시아키가 추방된 후, 노부나가는 후지히데를 한동안 사카모토성에 연금시켜 두었다.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형이기도 하니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했었는데, 노부나가는 어느 날 갑자기 후지히데에게 할복을 명해 왔다. 장군 요시아키와 내통한 혐의가 있다는 죄목이었다. 후지히데에게 그 할복 명령을 전했을 때의 괴로움을, 미츠히데는 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아우 후지타카만은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신세를 졌네." 후지히데는 할복 명령을 듣고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 후지히데의 목소리가 "노부나가를 쓰러뜨려라" 하고 말한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방은 예전에 후지히데가 할복했던 바로 그 방이었다.
"미츠부치 도노." 방금 목소리가 후지히데임을 알자 미츠히데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리라 말씀하십니까, 후지히데 도노." 방 한가운데 턱 하니 앉아 미츠히데는 중얼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다. 정원 나무에서 새가 짧게 한 번 울었을 뿐이다.
(오우미, 탄바를 몰수하는 것은 그럴싸한 추방이다) 추방이라면 차라리 사쿠마 부자처럼 고야산으로라도 쫓겨나는 편이 낫다. 아니면 오우미, 탄바를 몰수하면 필사적으로 일할 것이라 생각해서 한 처사일까. (이 미츠히데가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으면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을 남자라 주군께서는 생각하시는가)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싸우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비록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일이라 해도 나는 진심을 담아 임했다. 나는 요령을 피우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즈모, 이와미는 정복하는 대로 준다고 하지만, 정복하고 나면 또 몰수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 탄바만 해도 평정한 지 2년 만에 몰수당했다.
시코쿠의 초소카베도 "정복하는 대로 주겠다"는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이제 정벌하려 하지 않는가. (이즈모, 이와미를 평정하더라도... 저 히데요시 놈이 나를 치러 올지도 모른다) 노부나가는 내가 방해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방해되는 자, 쓸모없는 자를 냉혹하게 버리는 남자다. 아니,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의 친족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남자다.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도,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형 후지히데도, 내 어머니도 모두 노부나가에게 죽임을 당했다.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노부나가를 향한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다만 아무도 노부나가에게 거역하지 못할 뿐이다. 왜인가. 그것은 노부나가가 무섭기 때문이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한 혼간지의 신도들도, 잇코이키(一向一揆) 민중도, 쇼군 요시아키도, 그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도 모두 멸망했다. 문득 오늘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이 떠올랐다. "모리 측에는 쇼군 요시아키 도노가 계시는구려." 왜 이에야스는 그런 말을 했을까. 빗츄의 히데요시를 돕는 것은 곧 쇼군을 멸망시키는 일이라고 말한 것인가.
너는 역시 옛 주군인 쇼군에게 적대할 것이냐고 말한 것인가.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에야스라는 남자, 속을 알 수 없다. 성실하고 유순하며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하지만 불투명하다.
(요시아키 쇼군이라 하면... 올해 새해에 이상한 꿈을 꾸었지) 미츠히데는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 형체에 칼을 뽑으려 했을 때, 그 형체가 말했다. "나를 벨 수 있느냐, 주베(十兵衛, 미츠히데의 통칭)." 그 사람 형체가 요시아키 쇼군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만약 내가 천하를 잡는다면 쇼군을 지금처럼 비참한 처지에 두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맥락 없이 그레고리오 성가가 귓가에 울렸다. 어제 신학교에서 들은 노래다. 그 그레고리오 성가의 장엄한 울림 속에서, "아버님, 대체 누구를 인질로 삼으시려는 것입니까" 하는 타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츠히데는 지쳐 있었다.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듯 미츠히데는 일어섰다.
"어쨌든 이제 봉록이 없다. 봉록이 없는 자가 대체 어떻게 먹고, 어떻게 싸운다는 말인가!"
다시 미츠히데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봉록도 없는 자에게 싸우라고 주군께서는 말씀하시는가. 무엇을 먹고 싸우라는 말인가) 결국은 역시 추방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레고리오 성가는 진작에 사라져 있었다.
"마음을 비우면 불 또한 시원하리라(心頭滅却火自涼)." 타오르는 불꽃... 그 불꽃 속에서 맑고 낭랑한 카이센 화상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상은 배가 고파도 싸움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미츠히데는 카이센 화상에게 따지듯 중얼거렸다.
(추방!) 까닭도 없이 몇 번이고 자신을 매질하던 때의 노부나가의 분노에 찬 얼굴이 크게 눈앞에 떠오른다. 그때, 네 번째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려라." 미츠히데는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돌아보지도 않고 혼잣말을 했다. "허망하구나." 노부나가를 쓰러뜨린다 한들 결국 언젠가는 자신도 죽는 것이다.
미츠히데는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 인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노부나가에게 일축당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왔단 말인가) 낮게 웃으며 미츠히데는 고개를 숙였다. 긴 초여름 해도 이제 푹 저물었다.
일하고 또 일한 끝에 얻은 것이 영지 몰수라는 결과라니... "이것이 나의 오랜 노고에 대한 포상이로구나." 중얼거린 미츠히데는 다시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뚝 끊겼다. 그 뒤에는 밤의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비운 명운(悲運命運) 15-1
밖은 장마 끝자락의 비가 내리고 있다.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밤이다. 타다오키는 타마의 무릎을 베개 삼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짙은 눈썹이다. 젊음이 넘치는 이마가 넓다. 타마는 상냥하게 타다오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시시키 요시아리에게 시집간 타다오키의 여동생 이야(伊也)를 떠올렸다. 타다오키의 잘생긴 입매가 이야를 닮아 있었다.
타다오키가 번쩍 눈을 떴다. 큰 눈이다. 평소에는 날카롭고 격렬한 눈매지만, 타마의 무릎 위에서는 온화한 눈빛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타다오키는 타마의 하얀 턱으로 손을 뻗었다. "이야 님 생각을요." "...이야 말이오?" 타다오키는 상냥하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이시시키 님과는 사이가 좋으시다고..." "음, ...하지만 나와 당신만큼이야 하겠소."
"에이, 그것이야…" 웃으며 타마코는 "전하께서는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라며 다다오키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나 말인가? 나는 저 붉고 기분 나쁜 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아, 이봄에 나타난 꼬리가 긴 붉은 별 말씀이옵니까?" "음, 천지에 이변이 일어날 흉조라고 하더구나."
"전하, 별이란 무엇이옵니까?" "어느 이국에서는 죽은 자의 혼이라고 한다더구나. 다카야마 우콘 전하가 말해주셨다." 우콘의 이름을 듣고 타마코는 앗 하고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태연한 척하며 "저 푸른 빛은 참으로 그러하게도 느껴집니다. 할머니께서도 별이 되셨겠지요."
다다오키의 할머니가 5월 19일에 세상을 떠난 지 반 달도 되지 않았다. "음, 별이 되셨을까, 할머니께서도." "어린아이는 작은 별, 어른은 큰 별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다, 강한 장수는 큰 별이 되고, 약한 놈은 작은 별무리가 되는 법이지."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아주 커다란 별이 되실 터이니…"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구나, 오타마는." 그 성격의 격렬함과 과감한 전투 모습은 노부나가의 젊은 시절과 매우 닮아 있어, 노부나가의 사생아라는 소문마저 있는 다다오키였다. "전하께서는 우후(노부나가) 전하보다 강해지실 거라고 타마는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후 전하보다?" "예, 전하께서는 지금 스물이지 않습니까? 아직 더욱 강해지실 수 있습니다." "음."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덕이는 다다오키의 늠름한 팔이 등불에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다, 저 붉은 별은 무슨 징조였을까. 오늘밤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구나." "정말로 별이 무슨 소식을 전해주는 것일까요…" "타마! 설마 우후 전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 리야 없겠지." "출전을 앞 두고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후 전하께 이변이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혹시 저 별은 모리가의 멸망의 징조일지도 모릅니다."
다다오키는 내일 2천의 병사를 이끌고 다지마 가도(但馬街道)를 따라 주고쿠 다카마츠(中国高松)를 향해 떠난다. 방 안에 향내음이 그윽하게 감돌았다. 출전할 때마다 타마코는 다다오키의 갑옷과 투구에 향을 듬뿍 쬐어 두곤 했다. "과연, 모리 멸망의 징조인가. 그렇군, 좋은 말을 해주었구나, 오타마."
다다오키와 동갑인 타마코는 자칫 다다오키보다 침착하여 훨씬 나이가 많은 듯한 표정을 보이곤 한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돌아오지 않고 어쩌겠느냐. 오타마를 두고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내가 죽고 오타마가 다른 곳으로 시집가는 일 따위가 생긴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다다오키는 일어나 앉아 타마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강하십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실 것입니다." 너무나 진지한 다다오키의 눈빛에 타마코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다, 모를 일이다. 오타마, 그것은 모를 일이야. 만에 하나 내가 전사했을 때 그대는 어찌할 작정이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테냐?"
"시집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금 말해도 그건 모를 일이다. 그대의 언니 오린 전하도 아라키 전하에게서 돌아와 야헤이지 전하에게 시집가지 않았느냐." "하지만 타마는 시집가지 않습니다." "정녕 그러하냐? 만약 아케치 전하께서 시집가라고 하시면 어버이의 명령이다. 어버이의 명령은 거역하지 못할 터. 역시 시집가게 되겠지."
"아닙니다, 시집가지 않습니다. 다다오키 님과의 약속이기에 시집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오타마. 이 난세에는 누구와 인연을 맺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그대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다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부글거리는구나." 다다오키는 타마코를 확 끌어안았다.
"알겠느냐, 어디에도 시집가선 안 된다." "시집가지 않고말고요."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몇 번이고 나누었던 대화였다. 타마코는 맹세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타마, 그대는 어찌 이리도 아름답게 태어난 것이냐…" "….." "그대를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다다오키는 안달이 난 듯 말하며 타마코의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기분 좋은 전율에 타마코의 어깨가 흠칫 움직였다.
"강하신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그대가 원망스럽구나." 타마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다오키는 만족스러운 듯 웃고는, "좋은 아이를 낳거라." 하고 타마코의 배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남달리 질투가 심하고 화가 나면 이상하리만치 격분하지만, 본래는 다정한 다다오키의 성품을 이제 타마코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다정할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예, 전하를 닮아 강하고 다정한 아이를…" "음, 몸을 보살펴야 한다." "예." "나는 죽지 않는다. 공을 세우고 돌아오마. 우콘 전하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다."
빗추(備中)의 히데요시(秀吉)를 도우러 가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부하 장수들 중에는 다카츠키(高槻)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비롯해, 세츠슈 이바라키(摂州茨木)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 와슈 코리야마(和州郡山)의 츠츠이 순케이(筒井順慶), 효고(兵庫)의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그리고 단고(丹後)의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가 있었다.
"어머나!" "왜 그러느냐?" "개구리 소리가 딱 끊겼습니다." 시끄럽던 개구리 소리가 불시에 끊어졌다. 깊은 정적이다. 타마코는 문득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어디선가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이어 세 개, 네 개 소리가 피어올랐다. 그러는 사이 다시 시끄러운 개구리 소리로 돌아갔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비운 명운(悲運命運) 15-2
얼마나 잠들었을까. 타마코는 복도를 달리는 급작스러운 발소리에 앗 하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곁에 있던 다다오키는 이미 잠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전하, 전하!" 후스마(미닫이문)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옆방에서 카와키타 이와미(河喜多石見)의 목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대전하(부친)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뭐라? 아버님께서?" "예, 오모테쇼인(表書院)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소에는 야와타성(八幡城)에 있는 후지타카가 다다오키의 출전 소식을 듣고 어제부터 이 오쿠보성(大窪城)에 묵고 있었다. "곧 가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다시 복도를 달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다다오키는 타마코가 켠 등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일까요?" 타마코가 내민 갈아입을 옷에 다다오키는 정신을 차리고, 기민하게 말없이 옷을 입었다.
"무슨 일일까요?" 다시 묻는 타마코에게 "음… 무슨 일일까. 뭐, 무슨 일이라 한들 오타마는 걱정할 것 없다." 다다오키의 잠이 부족해 충혈된 눈으로 조용하게 웃었다. 어스름한 복도를 서두르며 다다오키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 새벽녘에 무슨 일인가!!)' 서원에 들어서자 팔짱을 낀 후지타카의 고뇌로 가득 찬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差し向っての男は、 早足で知られる
早田道鬼斎である。道鬼斎は、藤孝の家臣米田求政の家人である。米田は藤孝の使いで、京の信長のもとに行っている筈で、道鬼斎も同道した。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걸음이 빠르기로 소문난 소다 도키사이(早田道鬼斎)였다. 도키사이는 후지타카의 가신 요네다 모토마사(米田求政)의 수하이다. 요네다는 후지타카의 심부름으로 교토의 노부나가에게 가 있을 터였고, 도키사이도 동행했었다.
"도키사이! 교토에서 무슨 변사라도 들고 왔느냐?" 다다오키는 아버지에게 올리는 인사도 잊은 채 도키사이에게 소리쳤다. "예." 도키사이는 절을 하고 가만히 다다오키를 올려다본 뒤, 그 시선을 후지타카에게 옮겼다. "아버님!" "음." 후지타카의 입술이 경련하듯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할 때, 황급히 들어온 것은 다다오키의 동생 톤고로 오키모토였다.
"아버님, 이것 참 큰일이 난 듯싶습니다." 오키모토는 다다오키보다 조금 뒤쪽에 앉았다. 겉보기에는 형인 다다오키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음, 다다오키, 톤고로, 진정하고 잘 듣거라. 놀라지 마라." 후지타카는 숨을 몰아쉬듯 한 숨 돌리고, "노부나가 전하께서 2일 새벽, 혼노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끝 말이 흐려졌다.
"예!? 노부나가 전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요?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다다오키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오키모토도 경악하며 "그게 대체 어찌하여…" "급사는 아닐 터, 아버님." "그렇다면 누군가의 손에…" "그것이…" 괴로운 듯 눈을 감고 후지타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라니요? 누구의 손에 말입니까?" 이구동성으로 다다오키와 오키모토가 바짝 다가앉았다. 후지타카는 눈을 뜨고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끈으로 꼬아 가져온 밀서임을 알 수 있었다. 요네다 모토마사에게서 온 밀서였다. 다다오키는 빼앗듯 그 종이를 받아 등불 가까이 대고 읽기 시작했다. 그 위로 덮치듯 오키모토가 함께 읽는다.
"컥!? 고레토 전하(아케치 미츠히데)가… 이, 이것이 사실인가!" 다다오키의 손이 떨렸다. "사실이옵니다." 바라보는 도키사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뭐라, 혼노지는 화염에 싸이고… 라니", "2만의 아케치군에 둘러싸여서는 아무리 전하라 해도…", "교토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군데군데를 입 밖으로 내며 두 사람은 밀서를 다 읽었다.
"아, 그 전하께서, 그 전하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장인 고레토 전하의 손에 세상을 떠나시다니…" 털썩 다다오키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친부자 사이인가 소문이 돌 만큼 노부나가가 애지중지했던 다다오키였다.
"뜻밖의 대사로다. 하지만 낙담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임해야 한다. 알겠느냐, 다다오키, 톤고로." 후지타카의 목소리에 오키모토는 진정하며 "도키사이, 자세한 것은 이 도키사이에게 물으라는 요네다의 편지다. 도키사이, 네가 본 것, 들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느냐?"
"예,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제가 평소처럼 요네다 님을 모시고 교토에 올라간 것은 6월 1일의 일…" "무엇 때문에 교토에 갔느냐?" 오키모토의 말에 후지타카가 말했다.
"요네다를 교토에 보낸 것은 나다. 요네다는 둘째 아들이 주뇨인(十如院)에 입당(入堂-절에 입문)한다 하여 교토에 갈 일이 있었다. 나는 노부나가 전하께서 상경하셨을 때 사쿠마 진큐로(佐久間甚九郎)가 노여움을 풀고 모시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축하 사절로 이참에 요네다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상국사(相国寺) 문앞의 요네다 님의 저택에서 혼노지의 변을 접하였습니다." 미츠히데의 군대가 혼노지를 둘러싼 상황을 도키사이는 진술했다. "흠, 그래, 교토의 상황은?" "예, …온통 아수라장입니다만, 고레토 님의 천하를 벌써부터 기뻐하는 자도 있고…" "고레토 님의 천하인가…" 후지타카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 그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니…" 다다오키는 머리를 저었다. 오키모토는 그런 다다오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도키사이, 그래, 고레토 전하는?" "예, 2일에는 사카모토성에, 3일에는 아즈치로 향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후지타카는 고개를 덕이며 "그러냐, 아즈치로 향하셨는가. 도키사이, 수고했다. 물러가 쉬어라. 교토에서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니 참으로 피곤하겠구나."
도키사이가 떠나자 세 사람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연 것은 다다오키다. "장인어른께서 엄청난 일을 벌이셨군요." "참으로 그렇다. 우리가 노부나가 공께 입은 깊은 은혜를 다다오키, 오키모토, 너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 당연합니다. 이 단고를 나이 어린 저 다다오키에게 하사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형수를 내려주신 것도 노부나가 공이시지요." 오키모토는 비꼬는 눈빛으로 형을 바라보며 들리지 않을 만큼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고레토 전하가 과감한 거사를 일으켰구려." "아버님, 어째서 장인어른은 윗분(上様-노부나가)을 쓰러뜨리셨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형님, 저는 이해가 갑니다. 남자란 한 번쯤 천하를 손에 쥐어보고 싶은 법. 게다가 고레토 전하는 윗분께 자주 혹독한 대우를 받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인질인 어머님을 죽게 만든 것은 효성이 지극한 미츠히데 전하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터. 거기에 더해 수차례 이유 없는 매질, 특히 다케다 정벌 때 적과 아군 앞에서 당한 수치… 아니, 그 무엇보다 영지를 몰수당할 상황이었으니 미츠히데 전하도 진퇴양난이었음에 틀림없소. 필시 고뇌 끝에 벌인 일일 테지."
"하지만 윗분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어른의 손에 당하시다니…" 다다오키는 불현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눈물에 끌려 후지타카도 눈을 껌벅이며 잠시 침울한 시름에 잠겼다. 홀로 오키모토만이 천장 한구석을 노려보듯 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아버님. 이렇게 된 이상 고레토 전하의 천하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고레토 전하와 오랜 친구이자 친척이니, 이제 급히 달려가는 것이 당연…"
"아니다, 기다려라, 오키모토. 호소카와가(家)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문이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미츠히데 전하가 이대로 천하를 이끌어갈 수 있을지 어떨지, 여기가 심사숙고할 대목이다." " 그럼 아버님께서는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편을 들고, 그러지 못하게 되면 버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라며 바짝 다가서는 오키모토를 후지타카는 양손으로 제지하며,
"허허, 그리 흥분하지 마라. 알겠느냐, 오키모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이 호소카와가다. 겨우 10여 만 석의 소영주가 이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지혜밖에 없다. 물론 지금 당장 이 호소카와가가 멸망해도 상관없다고 한다면, 나 역시 오랜 마음의 친구인 미츠히데 전하 편을 들고 싶다. 나라고 왜 그런 정이 없겠느냐. 하물며 다다오키와는 장인과 사위 관계가 아닌가. 필시 미츠히데 전하도 우리가 달려와 주기를 기다리고 계실 터."
"아버님, 확실히 고레토 전하는 저의 장인어른입니다. 하지만 노부나가 공께 받은 은혜는 잊기 어렵습니다." 비통한 다다오키의 표정을 오키모토는 차갑게 바라보며, "어쨌든 아버님도 형님도, 천하가 고레토 전하에게 기울면 함께 기울고, 기울지 않으면 기울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오키모토. 무인에게는 가문을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의무다. 조상님들께 면목이 없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지. 다다오키, 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예, 호소카와가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저희의 의무라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아버님, 고레토 전하는 어떻게 되실 거라 보십니까?"
"음, 그것이다. 우선 지금 하시바(羽柴-히데요시) 전하는 멀리 빗추(備中)에 있고, 도쿠가와 전하는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교토와 사카이(堺)를 구경 중이며,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전하는 조슈(上州)의 새 영지에 있고…"
"그리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전하는 우오즈(魚津)에서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둘러싸고 있으며,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전하는 니와(丹羽) 전하와 함께 바다 건너 시코쿠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한동안은 미츠히데 전하의 천하지. 하지만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전하는 모반에 결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다카야마 전하가 미츠히데 전하 토벌의 봉화를 올리겠지." "하지만 츠츠이 순케이(筒井順慶) 전하는 아케치 편에 서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그 자도 영리한 사내다. 천하의 형세를 묵묵히 관망한 뒤에 움직이겠지."
"호소카와가의 움직임을, 호소카와가처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음에 틀림없군요." 오키모토는 비꼬는 미소를 지었다. "말을 삼가라 오키모토. 이제 잠시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 이 인물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아버님, 장인어른이 천하를 완전히 손에 넣을 가망은…" "안타깝지만…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움직여야 합니까?" 후지타카는 눈을 감았다. 창백하고 약간 부어오른 얼굴이 마흔아홉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그렇지!" 번쩍 눈을 뜨며 후지타카는 무릎을 쳤다. "오늘 내일 중으로 미츠히데 전하에게서 가담을 권하는 편지가 올 것이 틀림없다. 나는 노부나가님의 다년간의 은혜를 생각하여 삭발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이 첫째. 그래, 나는 머리를 밀고 바로 지금부터 후지타카(藤孝)라는 이름을 바꿔… 음, 그래, '유사이 겐시(幽斎玄旨)'라 칭하겠다!" "예? 아버님께서 삭발을요?"
"음, 은거하겠다. 하지만 다다오키, 너는 입장이 다르다. 장인 편에 서서 일해도 좋고, 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거라." "아버님께서 머리를 깎으신다면 저도 함께…" "호오, 형님도 스님이 되는 건가?" "다다오키까지 깎을 필요는 없다. 아비인 내가 삭발하면 사람들에게 호소카와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줄 수 있을 터. 정 그렇다면 상투를 자르도록 해라."
"예, 그렇다면 저는 상투를 자르겠습니다." "과연, 아버님도 형님도 똑똑하십니다 그려. 고레토 전하의 사자가 와도 머리를 보면 일목요연하니 단념하고 돌아갈 테지요. 하지만 저는 머리카락 한 터럭도 떨어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두르지 마라 오키모토(興元). 너는 아직 어리다. 혈기에 치우쳐선 안 된다. 다다오키(忠興), 마츠이(松井), 아리요시(有吉) 등을 불러라." 유사이(幽斎)는 서슬 퍼렇게 일갈했다.
호소카와 가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비운 명운(悲運命運) 15-3
호소카와 가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비운 명운(悲運命運) 15-3
[*天橋立(아마노하시다테)는 교토부 미야즈만에 있는 일본 3대 절경(日本三景) 중 하나로 '하늘로 놓인 다리'라는 뜻 (교토부 宮津市 소재. 길이: 약 3.6km 폭: 약 20~170m. 6,700~8,000그루의 소나무가 자라는 아름다운 사주(砂州, 모래톱) 이름의 유래는 일본 신화에서 신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기 위해 놓았던 사다리(또는 다리)가 쓰러져 지금의 지형이 되었다고 전해짐. 그래서 '하늘의 다리(天橋立)' 라는 이름이 붙었음. 아마노하시다테를 전망대에서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거꾸로 바라보는 풍습이 있다. 이를 "마타노조키(股のぞき)라고 하는데, 이렇게 보면 모래톱이 마치 하늘로 뻗은 용이나 다리처럼 보임]
타마코(玉子)는 다다오키(忠興)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녘에 불려 오모테쇼인(表書院)으로 간 채, 진시(오전 8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영내의 잇시키가(一色家)에 또 불온한 움직임이라도 있었던가 하고 타마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푸른 발 건너편으로 오늘은 오랜만에 맑게 개인 요사(余佐)의 바다가 보인다. 긴 장마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랑비 속에 그림자처럼 아련하게 보이던 아마노하시다테(天の橋立)가 뚜렷이 검게 왼편으로 뻗어 있었다. 함께 아마노하시다테에서 놀던 날의 아버지의 정결하고 조용한 모습이 문득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년 봄이었지.) 그때 아버지 미츠히데는 말했다. "오린도 행복해졌다. 오타마에게도 두 아이가 생겼구나.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바란다." "언제까지나 행복하고 싶사옵니다." 타마코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그때 아버지는 시누이 이야(伊也)와 잇시키가(一色家)의 혼담을 추진하고 계셨지 하고 타마코는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것도 떠올려졌다.
"아버님을 다다오키 님보다 더 믿고 있습니다." 그래, 자신은 말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딸에게 있어 아버지란 얼마나 커다란 존재인가 하고 타마코는 생각했다. 무거운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마츠이 야스유키, 아리요시 타츠노부 등 중신들과의 회의을 마친 다다오키의 발소리다.
"다녀오셨습니까." 발을 올리고 들어온 다다오키는 그대로 멍하니 서 있다. 올려다본 타마코는 놀랐다. "아니, 그 머리는… 어찌 된 일이옵니까?" "음, 소다 도키사이(早田道鬼斎)가 교토에서 돌아왔다." 다다오키는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이미 진시가 지났다. 몇 밤을 자지 못한 것 같은 깊은 피로가 있으면서도 머리는 이상하게 맑아져 있다.
다다오키는 임신 중인 타마코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 걸음 빠른 도키사이(道鬼斎)가요? 한밤중에 또 무슨 소식을…" "오타마, 그 붉고 기분 나쁜 별은 역시 불길한 징조였다." 다다오키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불길하다니요? 그렇다면 누구 어떤 분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음, …오타마, 놀라지 마라. 배 속의 아이에게 해로우니 결코 놀라서는 안 된다."
다다오키는 덥석 타마코의 손을 잡아 꼭 쥐고는, "오타마, 전하께서… 전하께서 말이다…" 하고 목이 메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윗분(노부나가)께서요? 그것이 언제? 어찌 되셔서?" 조바심 내는 타마코에게 "오타마, 그것이… 그것이 말이다. 다를 사람에 손에 의해 혼노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누구의 손에 말입니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윗분의 목숨을 거둘 만한 분이라면… 도쿠가와 님이신가요?"
"아니다. 오타마, 그것이 말이다… 그것이, 네 아버지시다." "예!? 아버님이요? 아버님이… 윗분을요?" 타마코의 얼굴색이 싹 창백해졌다. (그 아버님이 윗분의 목숨을…) 아마노하시다테에서 놀던 날 미츠히데의 웃는 얼굴이 크게 다가왔다. "그렇다. 네 아버지는 어제부터 천하인이 되셨다." 다다오키는 일의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 다다오키에게 잡힌 타마코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레토 전하에게는 경사스러운 일이지." 달래듯 다다오키는 타마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 크게 떠진 타마코의 눈이 상투를 자른 다다오키의 머리를 주시했다. "괜찮으냐, 오타마?" 타마코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 아마노하시다테의 한곳이 6월의 아침 햇살에 반짝 하고 빛났다.
타마코의 손이 슬그머니 다다오키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오타마!" 다시 타마코의 시선이 다다오키의 정수리로 쏠렸다. 타마코는 재빠르게 상투를 자른 의미를 깨달았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남편은 상투를 자른 것이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 행위는 단순한 의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목숨을 앗아간 아버지 미츠히데에게 등돌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타마." "…..." 다시 손을 잡으려는 다다오키의 손을 피하며 타마코는 입을 열었다. "전하, 그 머리는 윗분 전하를 위한…" "음, 아버님도 삭발하셨다, 오타마." "너도 알다시피 우리 부자가 전하께 입은 은혜는 깊다. 전하께서는 나에게 이 나라를 내려주셨다. 이 성도 전하께 하사받은 것이다. 전하께서는… 나를 특별히 애지중지해 주셨다. 오타마, 전하께서는… 나에게… 부모와 다름없는 분이시다."
다다오키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어렵게 하사받은 이 영지도 노부나가가 죽은 마당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 부모와 다름없는 윗분 전하를 제 아버지가…" "음, 하지만 네 아버지에게는 네 아버지의 입장도 있다. 이번에는 영지 몰수 조치도 있었지. 필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벌인 일이었을 게다." " ….. "
타마코는 세 번 아마노하시다테로 눈을 돌렸다. 바람에 발이 흔들리고 한순간 아마노하시다테도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경악이 떠나가고 타마코의 마음은 고독하게 침전해 갔다. 아니, 그것은 형태를 바꾼 경악이었을지도 모른다. 까닭 없이 노부나가에게 매질당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 노보요가 노부나가의 무정함으로 인해 야카미성에서 죽임을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윗분의 수많은 폭거에 오늘까지 꾹 참아오신 것이다. 그 참아온 나날이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아버지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노부나가를 향한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것을 타마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저 폭군 노부나가 님을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지금 세상에 아버지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저 냉혹한 처사에 결코 참지 않았으리라. 진작에 목숨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핏기 없는 타마코의 입술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흠칫 놀란 다다오키에게, "전하." 타마코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무엇이냐?" "아버지에게 천하를 평정할 힘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거다. 아버님도, 나도 그것을 생각했다. 하시바 전하든 도쿠가와 전하든 윗분을 쓰러뜨릴 용기는 없었겠지. 하지만 고레토 전하를 쓰러뜨릴 용기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고레토 전하를 쓰러뜨리면 쓰러뜨린 자가 천하를 쥐게 되니까." "-----"
"그렇지 않느냐. 남자로 태어나 천하를 탐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천하를 바라는 것조차 생각지도 못했던 놈들에게도 이제 천하가 손에 닿는 곳에 있다. 그렇다면 누구든 용약하여 고레토 전하에게 덤벼들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윗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명백백한 대의명분이 있지 않겠는가." "-----"
"이것저것 따져보면 겨우 10여 만 석에 불과한 우리가 편을 들어본들 안타깝게도 고레토 전하의 입지는 위태롭다." "그래서 상투를 잘라내신 것입니까?" 노부나가의 상을 치른다고 하면 명분이 선다. 미츠히데를 지원하지 않으려는 다다오키 부자의 속셈을 타마코도 잘 알 수 있었다.
"이해해주겠느냐, 내 입장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버지 미츠히데가 사방에서 몰리는 모습이 타마코의 눈앞에 그려졌다. (아버님!) 사위인 다다오키에게조차 벌써 저버림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가엾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남자아이었더라면 비록 힘이 모자랄지언정 편을 들었을 것을.)
결국 남편에게 있어 아버지는 타인에 불과하다고 타마코의 마음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전하." 넘쳐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타마코는, "만약… 윗분 전하의 목숨을 거둔 것이 도쿠가와 님이나 하시바 님이셨다면… 전하께서는 그 상투를 자르셨겠습니까?" 허를 찔려 다다오키는 타마코를 마주 바라보았으나, 홱 불쾌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거사에 편들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의 천하가 안착할 것이라는 전망이 선다면 누구든 아버지에게 달려올 것이 틀림없다. …결국 아버지를 딱히 나쁘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강하면 그만인 것이다.)
난세에 있어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쓰러뜨린다. 이것이 유일한 법칙이다. 타마코는 마음 밑바닥이 뻥 뚫린 것 같은 허무함을 느꼈다. 뚱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다다오키가 거칠게 일어섰다. "전하!… 그래서 이 저는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너를?" "아버지 편을 들지 않으신다는 것은 곧 아버지의 적이 되신 것이나 다름없는 일. 적장의 딸은 돌려보내는 것이 관례---"
"돌려보내? 너를? 오타마, 너는 돌아갈 셈이냐?" 다다오키는 타마코의 어깨를 덥석 흔들었다. "그것이 관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어쩌면 이리 기세가 당당하고… 차가운 사람인가. 오타마, 어젯밤에도 말했다. 나는 돌려보내지 않는다. 돌려보낼 바에야 내가 죽이겠다." 다다오키의 입술이 떨렸다.
"전하!" "오타마, 잘 들어라. 나는 네가 사랑스럽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죽이지도 않는다. 네 목숨은 나의 것이다. 네가 죽으면 나도 살 수 없다." 다다오키는 타마코를 가슴 깊이 안아 올렸다. 유사이(幽斎)와 다다오키(忠興)가 일찍부터 사방에 풀어놓았던 첩자들의 정보가 호소카와가에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고레토 전하의 군세 2만이라 본 것은 오산으로, 1만 3천이라 함. 우후 전하의 수하는 겨우 70여 명에 불과했음. 장남 노부타다(信忠) 님도 세상을 떠나셨고, 6월 4일 고레토 전하께서는 아즈치성에 입성하셨음."
이러한 요네다 모토마사(米田求政)의 사자를 비롯해 비와법사(琵琶法師)로 변장한 첩자의 입을 통해 미츠히데가 교토의 빈민들에게 금품을 나누어 준 일, 빈민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미츠히데의 본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일, 조정에도 재보(財宝)를 헌납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임명서를 받은 일 등이 연이어 전해졌다.
이어 노부나가의 손님이 되어 사카이에 머물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일 아침 변란을 알고 즉시 이가(伊賀)를 넘어가 자신의 영지로 도망쳐 돌아간 일, 그러나 이에야스와 동행하던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는 이에야스의 권유를 듣지 않고 한발 늦게 돌아가던 중 잇기(一揆)에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런가, 바이세츠는 살해당하고 도쿠가와 전하는 무사히 오카자키로 돌아갔단 말인가." 유사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유사이는 히데요시보다 이에야스의 움직임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주고쿠의 맹웅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 대치한 지 오래다. 노부나가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을 정도이니 히데요시가 손쉽게 움직일 수는 없을 터였다.
"아버님, 도쿠가와 전하가 즉시 병사를 일으켜 고레토 전하를 쓰러뜨릴지도 모릅니다." 다다오키가 유사이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유사이는 깎은 머리를 매끄럽게 문지르며 "그렇겠지." 하고 잠시 묵념하듯 생각에 잠겼으나, "하지만 도쿠가와 전하는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를 잡을 마음은 충분해 보입니다만." 다다오키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지 차림으로 변장한 첩자가 주고쿠로부터 달려왔다. "뭐라?! 하시바 전하가 8일 히메지로 돌아왔다고? 그것이 사실이냐. 오보가 아니냐. 모리와의 전투는 어찌 되었단 말이냐?" 침착한 유사이조차 깜짝 놀라 다그쳐 묻는다.
히데요시가 주고쿠에 있는 동안은 여러 장수들도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당분간 큰 움직임은 없을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비롯해 미츠히데와 그 부하인 호소카와, 다카야마, 츠츠이 등에게 응원을 요청한 참이었다. 실제로 노부나가는 그 출전 길에 미츠히데에게 습격당해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지원군을 기다리다 지쳐 있을 히데요시여야 했다. 그런데 지금 히메지로 돌아왔다는 보고다. 유사이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예, 실은 5월 8일 이래 수공을 펼치던 다카마츠성이 함락되어…" "다카마츠성이 떨어졌단 말이냐?"
"예, 하시바 치쿠젠노카미(히데요시)는 점차 물을 늘렸고, 그로 인해 결국 성 아래의 집들도 물에 잠겨 성 안의 식량마저 동났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장수 시미즈 무네하루(清水宗治) 전하께서 군사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결을 청하셨다고 합니다."
"흠, 그래서…" "치쿠젠노카미는 모리 측의 지혜로운 승려 에케이(恵瓊)를 중재자로 삼아, 시미즈 전하는 할복하고 빗주, 호키, 미마사카는 오다 측에 넘긴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합니다." 안코쿠지(安国寺)의 승려 에케이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10년 전 에케이는 노부나가를 만난 인상을, "노부나가의 시대는 5년, 3년은 유지될지 모르나 내년 즈음엔 쿠게(公家 -귀족)따위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난 뒤 높이 굴러 자빠져 엎어질 것으로 보이고, 토키치로(藤吉郎-히데요시)야말로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라고 예언했었다.
그 예언이 적중했음을 새삼 감탄하며 유사이는 생각했다. "그래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宗治)는?" "예, 4일에 물 위로 배를 저어 나와 적과 아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훌륭하게 자결하셨습니다." "그러냐. 그것은 아마도 혼노지의 변란을 모리 측에 숨긴 채 벌인 큰 연극이었겠지. 과연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黒田官兵衛孝高)를 군사로 둔 보람이 있구나."
히데요시의 실력을 생생히 깨달은 듯 유사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첩자가 물러가자마자 유사이는 벼루를 끌어당겨 히데요시에게 편지를 썼다. 몇 번이고 썼다가 찢고, 찢고는 다시 썼다. 문장에 능통한 유사이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앞서 미츠히데로부터 구원병을 기다린다는 사자가 왔었으나, 유사이는 머리를 깎고 다다오키는 상투를 자른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는 우후(노부나가) 전하께 커다란 은혜를 입은 몸이니 잠시 상을 치르고 싶다."고 하며 돌려보냈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누마타 권노스케(沼田権之助)가 미츠히데의 친서를 들고 가담을 청해왔으나 이 역시 거절하여 돌려보냈다. 미츠히데의 서한은 문함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부자가 상투를 잘라내셨다는 소식,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사료되오. 일단 나 역시 화가 났으나, 사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하오.", "내가 뜻밖의 거사를 일으킨 것은 다다오키 등을 등용하여 기용하고자 한 뜻이었소." 등의 글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츠히데가 호소카와가의 지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유사이로서는 호소카와가의 흥망성쇠가 더 큰일이었다. 미츠히데와의 신의, 우정은 버릴지언정 가문은 지켜야 한다. 미츠히데 역시 오랜 세월 입은 노부나가의 은혜를 배신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호소카와가의 생존 방식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다. 머리를 깎은 유사이를 따라 가신 요네다 모토마사(米田求政)도, 아리요시 타츠노부(有吉立言)도 삭발했다. 이것이 소영주의 살아가는 방식이라 생각하며 유사이는 히데요시를 향해 붓을 달렸다.
호소카와가는 위아래 할 것 없이 노부나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얼마나 정성껏 상에 임하고 있는지, 오랜 친구인 미츠히데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 호소카와가는 히데요시와 같은 길을 가는 존재임을 유사이는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서술했다.
이에 대해 훗날 7월 11일, 히데요시는 "이번 노부나가 전하의 뜻밖의 일에 대해 비할 데 없는 각오를 보여주시어 특히 든든하게 생각하오. (중략) 겉과 속이 없이 공무에 의거하여, 귀하의 신상을 결코 나몰라라 하지 않을 것임을…" 이라는 서약서를 유사이 부자에게 보냈다.
히데요시가 교토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에 당황한 것은 호소카와가뿐만이 아니었다. 미츠히데에게 은혜를 입은 츠츠이 순케이(筒井順慶)도 처음 2, 3일은 미츠히데를 따랐으나, 천하의 형세를 보고 움직임이 신중해졌다.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알게 되자 마침내 중립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쌀과 소금을 성 안으로 날라 들였다.
"역시나." 순케이가 쌀과 소금을 모아 농성을 각오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사이는 다다오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순케이든, 호소카와가든 가문의 흥망이 걸린 이 중차대한 시국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치사한 일이로구나.) 유사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무장에게 있어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승리를 의미했다.
이러한 수많은 정보 속에서 다다오키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미츠히데의 형세는 곧 타마코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타마코의 마음속을 생각하면 섣불리 정세를 알려줄 수도 없었다. 타마코와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다오키는 요즈음 매우 과묵해졌다. 이 와중에 홀로 통고로 오키모토만이 아버지와 형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타마코가 복도에 서서 보는 둥 마는 둥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원을 질러 성큼성큼 통고로가 다가왔다. 구름이 많이 낀 무더운 날이다. 때때로 그 구름 사이로 음력 6월의 햇살이 땅을 강렬하게 내리쬔다. 피부에 땀이 지르르 괸다. 공기 또한 무겁고 습했다.
"형수님." 통고로는 다가들 듯 격렬한 눈빛을 하며 불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 말없이 버티고 선 통고로 오키모토의 늠름한 어깨에 벌이 윙윙거리며 맴돌고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정하게 촉구하자 통고로는 똑바로 노려보듯 타마코를 바라보며, "형수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별로… 정원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예."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형수님은… 이 정원 따위를 바라보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만약 바라보고 계셨다면…" 징검돌을 밟고 올라와 오키모토는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만약 바라보고 계셨다면 이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까?" "…..."
"형수님, 형수님은 호소카와의 녀석들을 겁쟁이냐, 비겁자냐 하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까?" 타마코는 조금 떨어져 앉아 자신의 매끄러운 무릎 근처를 바라보며, "통고로 님, 타마는 아버지의 경솔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심려를 끼쳐드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왜입니까? 무엇이 부끄럽단 말씀입니까?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고레토 전하의 시늉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윗분 전하를 쓰러뜨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형수님의 아버님께서 해내신 것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너도나도 겁쟁이입니다. 가문이 소중하다!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형수님."
오키모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타마코를 바라보며, "나에게는 가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가문보다 소중한 것이요?" 고개를 든 타마코에게 오키모토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것은… 그것은 형수님입니다." "그런 말씀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형수님, 이것이 통고로의 마지막 말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나에게는, 나에게는 형수님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소중하단 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일어서자마자 오키모토는 정원을 내달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대로 오키모토는 호소카와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오키모토가 병사를 이끌고 교토로 향했다는 보고에 호소카와가는 온통 난리가 났다.
다다오키가 얼굴색이 변해 달려와, "오타마, 통고로 녀석이 무단으로 교토로 향했다." 하고 전했을 때, 타마코는 "어머나, 그것이 정녕…" 하고 놀라는 척하며, "아버지를 위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사과했으나, 오키모토의 말은 전하지 않았다. 전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대란 속에 오키모토만이 순수하게 자신을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주인 다다오키와 얹혀사는 신세인 오키모토는 입장이 다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다오키가 오키모토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타마코에게는 쓸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타마코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오키모토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타마코는 아직 알지 못했다.
호소카와 가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비운 명운(悲運命運) 15-4
그날 저녁, 불쾌하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다다오키는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전하…" 수줍게 타마코가 불러보았다. 다다오키는 흘끔 타마코를 보았으나 이내 홱 시선을 돌려버렸다. 변란 이래 자칫 입을 다물기 일쑤인 다다오키였지만, 그 시선을 외면하는 모습이 너무나 냉담하게 느껴졌다.
'형수님이 소중합니다.' 하고 털어놓던 통고로의 말을 타마코는 생각했다. (남편이 나를 소원하게 여기기 시작했구나!) 타마코는 문득 내팽개쳐진 듯한 쓸쓸함을 느꼈다. 다다오키가 탁 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전하." 다다오키는 타마코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방을 나갔다.
또 첩자가 새로운 소식을 들고와 중신 회의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면서도 타마코는 쓸쓸했다. 남편에게 있어 가문은 소중할지언정 이제 아내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천하를 잡고 며칠 동안은 다다오키도 가끔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장인어른께서 아즈치성에 들어가셔서 말이다. 윗분 전하께서 수년에 걸쳐 모으신 차도구와 명기들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모조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하더구나." 훗날 리큐 문하 7철 중 한 사람으로 칭송받게 되는 다다오키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렇게 전하곤 했다.
또 "네 아버님께서 교토의 세금을 면제해 주셨다고 하더구나. 인심도 점차 안정되겠지." 하는 등 타마코를 위로했다. 하지만 점차 아무런 소식도 타마코의 귀에 들려주지 않게 되었다. 한밤중 신들린 듯 격렬하게 끌어안을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다정한 속삭임도 없었다.
오늘 밤 차가운 다다오키의 태도를 보자 타마코는 일찍이 없었을 만큼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걱정되었다. 아니, 사랑스럽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아버님은 힘껏 싸우고 계신 것이다.) 그 고독한 모습이 가슴 아파 견딜 수 없다.
(아버님!) 타마코는 가슴이 터질 듯한 심정으로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여자의 몸이라는 무력함이 원통했다. 노부나가는 아버지에게 수많은 냉혹한 처사를 가하고 끝내 영지까지 빼앗았다. 몰릴 대로 몰린 아버지는 노부나가를 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에게 편드는 무장이 없다는 사실을 타마코는 납득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생각했던 것을 반복해서 타마코는 생각한다. 생각할 때마다 시아버지 유사이와 남편 다다오키에 대한 불만이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쌓여갔다. 특히 오늘 밤은 남편에 대한 미움에 가까운 감정마저 솟구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타마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통통하던 그 뺨도 요 며칠 사이 살이 빠져, 그것이 도리어 타마코를 처연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옆방의 후스마가 열리는 것 같았다. "마님." 키요하라 카요(清原佳代)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들어오세요." "예, 실례하겠습니다." 한순간 등불이 흔들렸다. "쿠마치요와 오초는 잠들었나요?" "예, 쿨쿨 잘도…" 방에 들어온 카요는 말을 하려다 문득 눈시울을 적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잠든 두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겨 흘리는 눈물임을 타마코는 재빠르게 눈치채고, "쿨쿨 잘도 잠들었다고요?" 하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카요는 그런 타마코를 가만히 바라보며, "마님께서도 푹 쉬실 수 있도록… 카요는 매일 밤 기도드리고 있사옵니다." 하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기도요? 그것참 고마운 일입니다. 카요 님, 기도만큼 진실된 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 기도만큼 진실된 것이 없다 하십니까?" "예,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항상 카요 님은 기도해 주고 계시지요. 기도는 남이 모르는 곳에서 진심으로 신불에게 청하는 것이겠지요?"
"예, 카요는 진심으로 기도하옵니다. 땀이 날 정도로요." "땀이 날 정도로요?" "예, 마님, 이 기도를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야 한다고 간절히, 간절히 생각할 때 저절로 땀도 눈물도 나는 법입니다." "어머나, 땀도 눈물도 날 정도로… 그렇게나 진심을 담아서…"
"예, 남에게 조금 어려운 일을 부탁할 때조차 저희는 필사적입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느님께 매달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담아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타마코를 닮아 여동생인가 소문이 돌 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진 카요는 그 하얀 뺨을 옅게 붉혔다.
"변함없는 카요 님의 진심,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해 주어도… 카요 님, 그렇게 간절한 기도도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주실지…" "들어주시고말고요. 신부님께서 하느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날이 더딜 수도 있고, 또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일 수도 있다고…"
"이럴 때에는 확고한 신앙을 가진 카요 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 역시 부처님을 믿고 있다 생각하는데도 이 소란 속에서는 그저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마음이 어지럽기만 하니…" "그것은 카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카요는 쿠마치요 님의 천진난만한 잠든 얼굴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왜 눈물이 나지요?" "…..." "혹시 그렇다면… 역시 아버님의 형세가… 카요 님, 아버님은 지금 어떻게…" "죄송합니다.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만한 말씀을 드려… 그저…" "그저?" "…아닙니다. 역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버님이 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고레토 님께서는 도라가토게(洞ヶ峠)에서 츠츠이 순케이(筒井順慶) 님의 출전을 기다리고 계신다 합니다."
"도라가토게에…" 도라가토게라고 하면 시집왔던 쇼류지성의 망루에서 보였던 곳이라 생각하며, "그 도라가토게에 아버님이 계신가요?" "예. 그럼 저… 카요는 이만…" 도망치듯 절을 하고 카요는 방을 나갔으나, 문을 닫으려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타마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문이 닫혔다.
(무슨 일이 있구나!) 타마코는 문득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다. 카요는 알고 있고 자신은 모르는 일이 있다. 방 안에 처박혀 있는 자신에게는 눈에도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문득 타마코는 아까 입을 다문 채 불쾌하게 식사를 하던 다다오키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
타마코는 코소데의 깃을 여미고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회랑으로 나가자 갑자기 빗소리가 들렸다. "도시락은 잊어도 도롱이와 삿갓은 잊지 마라."라는 속담을 낳은 단고의 나라는 비가 많다. 빗속의 어두운 밤 정원을 타마코는 바라보았다.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자 불안은 더욱 더해갔다. 하지만 타마코는 허리를 펴고 조용히 오모테쇼인 쪽으로 향했다.
오모테쇼인에 가까워지자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전장에서 단련된 사내들의 목소리는 울려 퍼졌다. 방은 닫혀 있었지만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것은 안 된다." 다다오키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웠다. 일찍이 엿듣기 따위를 해본 적이 없는 타마코였지만, 오늘 밤은 그것이 엿듣기라는 사실도 잊은 채 멈춰 섰다.
"전하! 이토록 도리를 다하여 말씀드려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누르듯 덮쳐오는 목소리가 났다. 이어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 비상시에!" 몇몇 사람의 바짝 다가서는 어조가 날카로웠다. "전하,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다시 한번 들어주십시오." 애원하는 어조가 된 것은 중신 마츠이 야스유키의 목소리다.
"장황하다!" "아무리 장황하다 하셔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듯이 물론 마님께는 아무런 죄도 없으십니다." '마님'이라는 단어가 타마코의 귀를 찔렀다. 앗 하고 몸을 굳히며 타마코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자신의 일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마님께 죄는 없으나 천하의 형세가 나쁩니다. 고레토 전하의 영애라는 이유만으로 호소카와가 전체가…"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더니 다시, "…그렇게 호소카와가가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메야마성으로 돌려보내시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하, 이런 경우에는 돌려보내는 것이 세상의 관례이옵니다. 이 마츠이, 결코 무리한 요구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관례가 어찌 되었든 나는 돌려보내지 않는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이 이치를 알아듣지 못하십니까?" "...…" "어쩔 수 없구려."
갑자기 누군가가 차갑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희 가문의 자식들보다 마님의 정에 끌리고 계십니다. 이런 사내답지 못한 전하의 말씀에…" "입 다물라, 아리요시! 사내답지 못하다니 말이 지나치다. 남자가 여자를 감싸고, 남편이 아내를 감싸는 것이 어찌하여 사내답지 못한 것이란 말이냐? 내가 오타마를 감싸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오타마를 감싸줄 자가!"
타마코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늘어뜨린 머리가 흔들렸다. "전하, 호소카와가의 흥망이 걸린 일입니다. 이토록 말씀드려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마님의 목숨은 저희가 거두겠습니다!" "뭐라!? 아리요시! 너는 오타마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전하, 진정하십시오. 고레토 전하 영애의 운명은 어차피 정해져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다카츠키 천왕산은 천하를 가를 결전장이 될 것입니다. 고레토 전하께서 1만 여의 군세로 맞이한다 한들, 4만의 병사를 이끌고 사나운 말처럼 달려 올라오는 치쿠젠노카미(히데요시)의 적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천왕산과 눈앞인 다카츠키에서 다카야마 우콘 전하가 하시바 전하의 선두를 서서 침공할 공산이 큰 바, 그렇잖아도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우콘 전하, 게다가 피로라곤 모르는 상태라면… 이것은 전하, 내일, 모레 사이에 천하는 다시 크게 바뀔 것입니다."
"......" "오다 측은 고레토 전하의 혈육인 자는 부모의 원수, 주군의 원수라 하여 풀뿌리를 헤쳐서라도 남김없이 끊어버릴 것입니다." "......" "그것은 저 아라키 무라시게 전하가 모반했을 때 일족과 노복, 여자아이 할 것 없이 십자가에 못 박고 화형하는 등 멸문지화를 당했던 것이 좋은 선례." "......" "그것이 오다가의 방식입니다. 어차피 적장의 손에 걸릴 바에야 여기가 생각할 대목. 차라리 저희의 손으로… 아니, 전하 친히 자결하게 하시는 것이 마님의 행복이라 아뢰는 바입니다."
"아리요시! 알았다!" 다다오키의 비통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들어주셨습니까? 그럼 한시라도 빨리 마님을 가메야마성으로 돌려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자결하게 하시겠습니까?" "가메야마에는 돌려보내지 않는다." "그럼 즉시 목숨을!?" "아니다, 죽이지는 않는다." "전하, 돌려보내지도 않고 목숨도 그대로라니, 그렇다면 저희 말을 어떻게 들으신 것입니까?"
"마츠이, 부탁한다. 이와 같다. 이 다다오키가 부탁한다. 타마코의 목숨을… 앗아가지 말아다오." 다다오키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타마코는 자신도 모르게 후스마에 손을 대려다 겨우 참아냈다. "에잇, 사내답지 못한 전하 같으니. 전하께서 이토록 사내답지 못할 줄은 이 아리요시, 오늘 이 순간까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가문이 소중합니다. 이제 즉시 마님께…"
"안 된다! 오타마를 베겠다고 한다면 내가 너를 베겠다!" "뭐라고요! 이 아리요시를 베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타마의 목숨을 앗아가는 자는 누구든 베어버릴 것이다. 하시바 치쿠젠이든, 다카야마 우콘이든!" 단호하게 다다오키가 말했다. 다다오키의 기세에 좌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러자 마츠이 야스유키의(松井康之)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그 정도까지의 각오이시라면… 마츠이 야스유키, 목숨 바쳐 마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오오, 마츠이, 살려주겠느냐? 부탁한다, 어떻게든 타마를 돌려보낸 것으로 처리할 수는 없겠느냐?"
"돌려보낸 것으로요?" "음. 가메야마성으로 돌려보냈다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실은 이 성의 어딘가에 숨겨두는 것은 불가능하겠느냐?" "글쎄요, 그것은…" "무리인가, 그것은. 그렇다면 어디 산속에라도 숨겨두고 가메야마에 돌려보냈다고 우기는 것은 불가능하겠느냐?" "….." 깊은 침묵이 이어졌다.
못 박힌 듯 미동조차 할 수 없는 타마코의 가슴을 격렬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남편의 고뇌와 배려가 전신을 관통해 가는 것을 타마코는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에게 미움마저 품었던 자신을 타마코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그것은 영지의 산중에 숨기는 방법도 있겠지요. 이 마츠이 역시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디에 첩자가 침투해 있을지 모르는 일. 저 빛나는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셨으니 아무리 일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한들 외부에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가메야마로 돌려보냈다는 거짓말이 발각될 경우, 전하, 어찌 변명하시겠습니까?"
"음…" "참으로 저희는 그것을 염려하옵니다. …하지만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전하의 방책도 명안일지 모릅니다. 분명 지금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파죽지세라 할지라도 주고쿠의 모리군이 과연 이대로 손놓고 치쿠젠노카미를 묵과할지 어떨지." "바로 그거다!" "고레토 전하께서 일찌감치 모리에 밀서를 보내 은밀히 손을 잡고 계신다면 뜻밖의 길을 통해 모리가 치쿠젠노카미를 협공하고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것은 저희도 몇 번이고 생각했던 바입니다만…"
"좀, 들어보시오. 시코쿠의 초소카베 전하도 고레토 전하의 청을 받아 교토로 달려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소. 그렇다면 고레토 전하께서 허무하게 천하를 빼앗기리라고만은 볼 수 없소. 성급하게 마님을 돌려보내거나 목숨을 거두었다가는 그야말로 큰일이 될 터. 고레토 전하 정도의 지모를 갖춘 장수가 그저 손을 놓고 이 열흘 동안을 헛되이 보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소. 어찌 되었든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마님은 산속 깊은 곳에라도 숨겨두는 것이 현책일지도 모릅니다."
모리 측에 보낸 미츠히데의 밀서가 히데요시의 손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음…" 마지못해 마츠이의 말에 응하는 기척이 났다. "그리 결정되었다면 서둘러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산중이어야겠지요." "오오, 그렇군. 전하, 미토노(味土野)는 어떠합니까?" 마츠이 야스유키가 말했다.
"미토노? 라 했느냐?" "예, 단고반도(丹後半島) 한가운데 있는 산속, 저 금강사 가메야마(金剛寺亀山) 바로 옆에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험준한 산중이겠구나. 여자의 걸음으로는 힘든 곳이겠다만…" "남자의 걸음으로도 쉽지 않은 곳이오니 좀처럼 사람이 접근하는 곳이 아닙니다." "거리는 얼마나 되느냐?" "예, 미야즈에서 배로 요사의 바다를 건너 히오키의 백사장에 내려, 그곳에서 미토노까지는 3리(약 12km)입니다."
"오오, 그것참 가깝구나!" 그제야 다다오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가구수는 얼마나 되느냐?" "겨우 20여 가구나 될런지요. 야마부시데라(山伏寺-산중 수행자 사찰) 등도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다지 즐거울 만한 곳은 못 되겠구나." "예, 산속이라 해도 사람 사는 마을이오니…"
"과연! 그럼 그곳으로 정하겠다. 마츠이!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거처를 마련하도록 해라."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타마코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어디를 어떻게 거쳐 방까지 돌아왔는지 타마코는 알 수 없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유폐(幽閉) 16-1
“자, 구마치요 님, 어머님께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올립시다.” 라고 말하는 유모 코(こう)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아들 구마치요(熊千代)와 딸 오초(お長)와 헤어져 다마코가 미토노(味土野)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다섯점(오후 8시)를 지났다. “싫어.”
평소 같으면 진작에 잠들었을 구마치요가 오늘 밤은 이상하게도 잠들려 하지 않았다. 아직 두 살 두 달밖에 안 된 구마치요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오초는 진작에 잠들어 있었다. 그 오초와의 작별도 조금 전에 끝났다. “하지만, 구마치요 님, 어서 잠자리에 드셔야죠…”
“싫어, 싫어.” 어린 고개를 열심히 좌우로 저었다. 코는 눈시울을 살며시 누르고 있었다. “싫어, 싫어.” 다마코의 어깨에 꼭 매달리는 구마치요에게 다마코는 겉옷 소매 속에서 한지로로 접어싼 봉지를 꺼내 보여주며, “구마치요는 착한 아이지. 자, 네가 좋아하는 아루헤이토(有平糖-사탕)를 줄 테니 어서 안녕 인사하고 자렴.” 아루헤이토라는 말을 듣고 구마치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루헤, 아루헤!” 하며 기뻐하며 봉지를 열었다.
그 어린 옆얼굴을 다마코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무게감이 느껴지는 구마치요의 감촉을, 다마코는 다시금 확인하듯 안아주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며 꿋꿋하게 견디고 있어도, 다마코 역시 아직 스무 살의 어리디어린 어머니였다.
구마치요가 아루헤이토를 집어 먼저 자기 입에 넣고는, 이어 “어마마도” 하며 그 통통하고 작은 손가락으로 집은 아루헤이토를 다마코의 입가로 내밀었을 때, 다마코는 참지 못하고 꽉 구마치요를 끌어안았다. “구마치요!” 너무 강하게 안긴 탓에 구마치요는 괴로운 듯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싫어, 싫어” 하고 다마코의 가슴을 쳤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풀어준 다마코에게서 벗어나 구마치요는 다마코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그럼 구마치요 님,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올립시다.” 하고 다시 융소가 말했다. 구마치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소처럼 두 손을 짚고,
“어마마,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애교 있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다마코의 눈에 넘쳐흐르는 눈물에 놀라, “어마마, 아파?” 하고 방금 자기가 쳤던 다마코의 가슴에 그 작은 손을 대고 걱정스럽게 다마코를 바라보았다.
“아니다, 아니야, 아프지 않단다.” 다마코는 살며시 회지(懐紙)로 눈물을 닦고 방긋 웃어 보였다. 구마치요도 안심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천진난만한 입매였다. 구마치요는 다시 두 손을 짚고 더듬거리며 인사를 한 뒤, 유모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갔다. (구마치요!) “우윽.” 부르려다 다마코는 목소리를 삼켰다.
유모는 일부러 맹장지를 닫지 않고 천천히 다음 방으로 구마치요를 데리고 나갔고, 이어서 복도를 지나 떠나갔다. 다마코의 입술에서 비통한 소리가 새어 나옴과 동시에 다마코는 그 자리에 엎드려 울었다. 이제 저 부드러운 뺨에 뺨을 비빌 수도 없다. 이제 이 손으로 저 어린 몸을 끌어안을 수도 없다. 이제 저 검고 큰 눈을 바라볼 수도 없다. 이제 결코 저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구마치요!” 엎드린 다마코의 어깨가 등불 아래에서 한참 동안 떨렸다. (어머니와 자식이 왜 살아있으면서 이승에서의 작별을 강요받아야만 하는가.) 다마코의 가슴속에 문득 하나의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마코는 이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과 헤어져 미토노로 떠나야 하는 것을, 미츠히데를 아버지로 둔 자신의 당연한 운명이라며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자신에게는 미토노로 떠나는 것 외에 살아갈 길이 없는 것일까. 누구라 한들 자신의 입장에 서면 떠나거나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일까. 지금 자신을 무리하게 이 성에서 쫓아내려 하는 자는 누구인가. 물론 남편인 타다오키는 아니다. 그렇다고 집안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이 성에 머물게 할 수 없는 자, 그것은 오다인가, 히데요시인가. 만약 히데요시의 자리에 도쿠가와가 서 있다면, 도쿠가와 역시 자신을 몰아낼 것인가. 도대체 누가, 무엇이, 연약한 한 여인을 산속으로 몰아내는 것인가. 다마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게 쫓겨 가는 자신을 떠올렸다.
자신을 몰아내는 자가 명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에 다마코는 답답함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다마코는 성을 떠나야만 했다. 오늘 저녁 다마코는 미츠히데의 패배와 죽음을 들었다. 타다오키가 창백한 얼굴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오타마!”라고 말한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깜짝 놀라 타다오키를 올려다보자, 잠시 후 “오타마, 코레토 님의 천하는 끝났다”라며 다마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겨우 세 시각(1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각오했던 일이라 해도 아버지의 죽음은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이었다. 게다가 그 슬픔마저 쫓아내듯 남편과 자식과 헤어져 알지도 못하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구마치요와의 작별 시간, 타다오키도 가요도 다른 시녀들도 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마음껏 아쉬움을 나누게 하려는 배려였다. 겨우 다마코가 눈물을 다 닦았을 때, 애처로운 모습으로 타다오키가 들어왔다. 뚫어지라 바라보는 타다오키의 시선과 눈물에 젖은 다마코의 시선이 얽혔다. “오타마!” “...…”
“모진 놈이라 원망치 말아다오.” “...…” 다마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너를 잠시도 떼어놓고 싶지 않다.” “…...” “네가 없는 이 성은 황야나 다름없다.” “…...” 말을 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다마코는 말없이 타다오키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반드시 데리러 가마. 결코 성급한 짓은 하지 마라.” “예…”
“미토노는 가깝다. 편지도 보내마. 찾아가기도 하마. 순하고 착한 아이를 낳아다오. 산골에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불쌍하지만…” “전하…” “오타마, 다른 남자에게 결코, 결코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 “오타마, 아리요시(有吉)는 나더러 우유부단하다고 했지만, 정말이다. 나는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타다오키는 다마코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죽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마님, 동행하겠습니다.” 맹장지 밖에서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야하는구나, 오타마!” 타다오키는 양손으로 다마코의 뺨을 감싸고 다시 뚫어지라 다마코를 바라보았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유폐(幽閉) 16-2
(그로부터 벌써 한 달…) 방 수가 겨우 네 개 정도 되는 산골집, 이것이 미토노(味土野)에서 다마코의 숨어 사는 집이었다. 숨어 사는 집은 산비탈에 자연스레 만들어진 300평 남짓한 좁은 대지 위에 있었다. 아래 쪽 계곡을 향해서는 전망이 트여 있었지만, 주변은 옷깃을 여미듯 험준한 산이 얼기설기 얽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참으로 이곳은 산속이구나…) 뜰의 굵은 벚나무 옆에 서서 다마코는 근처 부락을 내려다보았다. 잘도 이 산중에 만들었구나 싶은 작은 계단식 밭이 몇 개나 불규칙한 모양으로 산비탈을 차지하고 있고, 그 여기저기에 15~16채 남짓한 집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한낮인데도 적막하게 정적만 감돌아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새소리와 쓰르라미 소리, 골짜기 시냇물이 희미하게 울려오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한가로운 소 울음소리뿐이었다. 은신처의 왼쪽 아래쪽으로는 이시키 소에몬(一色宗右衛門), 이케다 로쿠베에(池田六兵衛) 등 경호를 맡은 사람들이 거처하는 초가지붕의 건물이 보였다. 이런 산속에 다마코가 있으리라고는 분명 오다(織田)도 하시바(羽柴)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이곳이라면 아무 탈 없이 몇 년이고 몸을 숨기고 지낼 수 있을 것만큼 깊은 산속이었다.
(지금쯤 구마치요는… 오초는…) 다마코는 옅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머니인 자신이 없는 생활에도 익숙해져 기억조차 못 할지도 모른다. 겨우 두 살인 구마치요와 한 살인 오초가 언제까지나 어머니를 잊지 못할 리는 없다. (타다오키 님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편지를 주겠다던 타다오키에게서는 아직 한 번도 편지가 오지 않았다.
이 은신처는 집안 사람들에게조차 숨기고 있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라는 유사이의 권유도 있어, 다마코가 성을 나서는 모습을 집안에서 본 자는 없다. 한밤중을 타고 미야즈의 바닷가에서 배를 타서 동행 몇 사람과 경호원 2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히오키의 바닷가로 건너왔다.
일찍이 다마코는 타다오키와 성에서 히오키의 바닷가를 바라보며 “처형(仕置き)의 바닷가”라고 장난삼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노부나가의 가혹함을 생각하며 한 말이었지만, 설마 이 자신이 성에서 쫓겨나 그 히오키의 바닷가에서 노숙하는 신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히오키의 바닷가에서 겨우 두 시각(약 4시간) 정도 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날이 다 밝기도 전에 일행은 미토노로 향했다. 도중의 산길의 험난함도 보통이 아니었다. 남자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산중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남편이라 할지라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남의 눈을 피해 있는 신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외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는 이 한 달간의 은신처 생활은 1년처럼 길고 슬쓸하게 느껴졌다.
(타다오키 님은… 아직 스무 살.)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로 눈을 돌리며 다마코는 문득 어깨를 늘어뜨렸다. 스무 살의 타다오키가 언제까지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해 주기는 했으나, 천하의 정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평생 미토노의 땅에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타다오키가 새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타다오키 님!) 타다오키에게 아내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다마코는 내팽개쳐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과연 몇 년이나 타다오키는 독신으로 기다려 줄 것인가. 느닷없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렇게 한 달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타다오키의 신상에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미츠히데의 딸은 더 이상 타다오키의 아내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달간, 오는 날마다 타다오키의 편지를 기다리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천하는 누구의 것이 되었으려나…)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카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히데요시의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후의 천하 정세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불안했다.
(그나저나 아버지의 마지막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사카모토성의 어머니와 남동생도 아마 죽었겠지만, 그 모습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산속까지 일부러 알리러 올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마코는 말로만 듣던 ‘우바스테산(うばすて山-고려장 산)’을 떠올렸다. 자신은 어쩌면 이대로 이 산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나는 그럴듯한 구실로 산에 버려진 것이 아닐까.
[*うばすて山(姨捨山・おばすてやま)는 일본의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직역하면 '노파를 버리는 산' 이라는 뜻. 옛날에 늙은 부모를 부양하기 어려워진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산에 버리고 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꺾어 놓은 나뭇가지 등을 발견하고, 어머니가 자신이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표시해 두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아들은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여 다시 모셔 왔다는 이야기이다. 姨捨山(おばすてやま)이라는 지명도 실제로 있다. 나가노현 지쿠마시(千曲市) 일대의 산을 가리키며, 일본의 유명한 姨捨伝説과 연결되어 있다. 또 이곳은 예로부터 달맞이 명소로 유명하여, 일본 고전문학과 하이쿠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うばすて山 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지만, 지명으로는 일반적으로 おばすてやま(姨捨山)라고 읽음]
물론 타다오키 자신이 결코 버릴 생각이 없다는 것은 그날 밤 방 밖에서 들은 다마코로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집안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자신을 보내왔는지 알 수 없는 기분도 들었다. “마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키요하라 가요(清原佳代)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 오가요 양.” “예,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가요는 묻지 않는다. 그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이 하늘은 미야즈의 하늘로도 이어져 있으니까요.” “…참으로 그러합니다.” “저 해님을 전하도, 구마치요도, 오초도 보고 있겠지요.” “예… 건강히 지내시겠지요.” “오가요 양. 이곳에 오고 나서 시의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요. 나카마로(仲麻呂)가 '미카사산(三笠の山)에 떠오른 달인가' 하고 읊었던 망향의 염원이 가슴에 사무쳐서…”
“멀리 당나라에서의 시였기에…” “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의…” 말을 하려다 다마코는 그만두었다. 다마코는 사쿄노다이부의, ‘이제는 그저 미련을 끊으려 하오나 - 남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할 길이 있었으면’ 이라는 시를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요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다마코는 화제를 돌려, “오가요 양. 당신은 신기한 사람이에요…” “신기하다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신기해요. 당신은 아직 열아홉의 어리디어린 처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싶고,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을 나이가 아닌가요? 하지만 이 미토노에 와서도 미야즈를 그리워하지도 않고 항상 행복한 듯 미소 짓고 있어요.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어요.” “아이 참, 부끄럽사옵니다.” “게다가 이 산 깊은 곳으로의 험난한 산길도 아무런 고통 없이 올라왔지요. 사내의 걸음으로도 힘든 곳을…”
“마님, 그것은 이전에 매일 산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요?” “예, 버려진 아이를 찾으러.” “아, 언젠가 들었지요. 버려진 아이를 찾아서 산속을 걸었다고 한 이야기…” “예.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반 걸음이라도 더 걸어서 버려진 아이를 찾아내야 한다고…” “오가요 양. 이전에는 그 이야기를 그저 기특한 일이라고 남 일처럼 들었습니다만…”
다마코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맞은편 산으로 눈길을 두다가, “그 버려진 아이는 부모도 버리고 싶어 할 만큼 몸이 약한 아이겠지요?” “예, 부모도 키우기 힘든 약한 아이가 많았습니다.” “결국은 쓸모없는 아이…” “하지만 마님. 서양 나라들에서는 일본처럼 약하다고 해서 제 자식을 버리는 풍습은 없다고 합니다. 아니,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가 소중히, 아주 소중히 키운다고 합니다.”
“소중히요?” “예, 빠드레(신부)님은 일본에 버려진 아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라시고 가슴 아파하시며, 그렇게 소중히 다루라고 신자들에게 버려진 아이를 양육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기리시탄(크리스천)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자나 노인이라도 똑같습니까?” 영주의 자식이라도 약하면 버리거나 독살하는 일도 때때로 있던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마코의 말은 당연했다.
“예, 마님. 기리시탄에서는 사람의 목숨은 모두 똑같이 이 온 세상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모두 똑같다? 그렇다면 전하의 목숨도 신분이 낮은 자의 목숨도?” “예. 기리시탄에서는 사람에 귀천이 없습니다. 어떠한 목숨도 버리거나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이상한 가르침… 하지만 귀한 가르침으로 생각되는군요.”
조금 전 다마코는 자신이 고려장 산에 버려지는 노파처럼 쓸쓸하게 느껴졌었다. 자신은 버려져도 어쩔 수 없다고 느껴졌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만큼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기리시탄의 가르침은 절실하고 가깝게, 감사한 가르침으로 느껴졌다. 매미 소리가 딱 멈추었다. 조용하고 나른한 7월의 오후였다.
“마님, 어찌 이리 조용할까요.” “참으로 아득해질 만큼 깊고 조용한… 이런 쓸쓸한 산 깊은 곳까지 오가요 양은 기꺼이 함께 와 주었어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말이었다. “아이 참, 매번 과분한 말씀이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요는 그저… 마님과 함께 있고 싶을 뿐입니다.” “오가요 양, 고마워요.”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정적을 깨뜨리고 뒷산 쪽에서 소라나팔 소리가 울렸다. 외부인의 침입을 알리는 소라나팔이었다. '남자성' 이라 불리는 저택에서 경호원 십수 명이 총과 창을 손에 들고 우르르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님, 어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가요가 당황해했으나 다마코는 걸음걸이도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이어 경호원 사와무라 사이하치(沢村才八)가 하인을 거느리고 뜰 앞으로 달려왔다. “마님, 수상한 자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툇마루에 꿇어앉은 사와무라 사이하치의 얼굴이 긴장되어 있었다. “수상한 자?” “예, 파수꾼이 산길에서 몇 명의 낯선 사람 형체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사와무라는 잠시 말을 끊었으나, 땅에 두 손을 짚고, “마님!” 하며 예사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실 요전에 부락민이 히오키 바닷가로 내려갔을 때, 치쿠젠 님(하시바 히데요시)은 코레토 님(아케치 미츠히데)의 혈육이나 잔당을 뿌리뽑고자 찾아내어 목을 베고 십자가형에 처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요.” 다마코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저 사람 형체가 치쿠젠 님의 수하라면… 저희는 목숨 바쳐 싸우고 몸으로 지켜드리겠습니다만, 마님, 적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면 자결하십시오.”
“자결? 사와무라, 그것은 전하의 지시인가?” “아닙니다, 전하의 명령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죽지 않겠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귀하신 몸, 만에 하나 마님께서 욕을 보신다면…” 계곡 쪽에서 갑자기 고함인지 욕설인지 모를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미리 준비해 둔 장소로 급히 몸을 숨기십시오.”
재촉하는 사와무라 사이하치의 말에 다마코가 조용히 일어섰고 가요가 뒤를 따랐다. 이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이케다 로쿠베가 뜰로 달려와, “사와무라 님! 안심하십시오!” 하고 숨을 돌리며, “마님, 귀한 손님입니다.” 하고 알렸다.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다마코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뜻밖에도 돈고로 오키모토였다. 몇 명의 종자를 뒤에 거느린 오키모토는 다마코를 보자마자, “형수님! 여기에… 살아계셨습니까!” 하고 쥐어짜듯 말하고 털썩 땅에 무릎을 꿇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유폐(幽閉) 16-3
오키모토를 방으로 맞아들인 다마코는 즉시 밥상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산골집인 만큼 방 안도, 차려진 밥상도 초라했으나 오키모토는 다마코를 만난 기쁨에 마음이 부풀어 잔을 기울이며 타다오키를 비롯해 구마치요, 오초, 유사이 부부의 무사함과 집안의 일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수님, 찾았습니다.” 오키모토는 집어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찾으셨다니요?” “아버님도 어머님도, 집안 사람 누구 하나 형수님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키모토 님에게도…” “글쎄요, 나 같은 자라서 알려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버님이나 형님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코레토 님에게 달려간 철부지였으니까요.”
“…오키모토 님이 아버지 미츠히데를 위해 홀로 교토로 향하셨던 마음을 다마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말씀만으로도 돈고로는 대단히 만족합니다. …아무튼 아버님도 형님도 형수님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으시니, '아, 형수님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가' 하고 한때는…” 말을 하다가 옆에 있던 카와키타 이와미(河喜多石見), 이케다 로쿠베(池田六兵衛), 가요 등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것참, 얼마나 가슴을 조이셨을까…” “하지만 형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이러한 산속의 이러한 주거지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만…” 한동안 미토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다마코가 말했다. “그런데 오키모토 님, 아버지와 일족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지 들으신 바를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오, 코레토 님의 마지막 모습 말입니까?”
괴로운 듯 다마코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키모토는 술잔을 놓았다. 언젠가는 알려주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 산집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는 다마코에게 그 혈육의 마지막 모습을 낱낱이 전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 오키모토의 속마음을 다마코가 헤아리고, “상관없습니다, 오키모토 님. 들으면 저의 마음도 정해질 테니까요.”
오키모토는 입을 다물었다. '오시로(男城)'에서 늦은 점심을 마친 오키모토의 종자들이 어느새 뜰 앞으로 돌아와 대기하고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다시 다마코가 재촉했다. 오키모토는 문득 일어나 툇마루로 가서 종자 중 한 명을 손짓해 불렀다. 종자는 툇마루 가까이 와서 무릎을 꿇었다.
“형수님, 이 자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받고 다마코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젊은 무사에게 눈길을 주었다. “얼굴을 들라.” 오키모토가 말했다. 그 무사는 조용히 얼굴을 들어 다마코를 보았다. 다마코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너, 너는 하츠노스케(初之助)가 아니냐!” 뺨이 패이고 수척해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틀림없이 하츠노스케였다.
짙은 눈썹 아래 소년처럼 맑은 눈이 근심을 띤 채 열려 있었다. “오랜만이옵니다. …하츠노스케만이 구차하게 살아남아…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하츠노스케는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예, 주군(미츠히데)의 명령으로 이 하츠노스케는 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하츠노스케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노부나가 님을 대신하여 천하를 잡겠다고 마음먹으신 것은 5월 28일 아타고산(愛宕山)에서 기원하시던 밤이라 합니다.” 여기서 미츠히데는 세 번 점괘를 뽑았는데, 처음 두 번은 흉으로 나왔으나 29일에는 아타고의 니시노보(西の坊-승방)에서 사토무라 조하(里村紹巴) 등과 렌가(연가) 자리를 가졌다.
“이때 주군께서는 '바야흐로 지금이 때로다. 천하가 알아주는 오월이로다.' 하고 읊으셨다고 합니다.” “…...” “이렇게 마침내 천하는 주군의 것이 되었으나, 가장 기대했던… 본가(호소카와가)의 지원이 없고, 또 주군께 큰 은혜를 입은 츠츠이 준케이 님 또한 확실한 답이 없어…” 하츠노스케는 때때로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3일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날은 신시(오후 4시)가 되어서야 겨우 전투가 시작되었고, 적의 카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활약이 눈부셨으며, 이어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호리 히데마사(堀秀政) 등의 활약에 결국 아케치쪽의 분전도 보람 없이 주군은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셨고 저 또한 모시고 도망쳤습니다.”
그때 미츠히데는 하츠노스케를 불러, “하츠노스케, 너의 활약,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다. 들어주겠느냐?” “무엇이든 주군의 명령이시라면…” “만약 내가 이 전투에서 죽은 뒤에는 급히 사카모토로 돌아가 그 죽은 모습을 히로코(아내)에게 전하라. 그리고 이 ‘유시(遺詩)를 전해라.” 그것은 <순과 역은 본래 두 갈래가 아니며, 큰 도의 마음은 그 근원에 이른다. 오십칠 년의 인생도 한바탕 꿈이었으니, 이제 꿈에서 깨어나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리라> 라는 유시였다.
“히로코는 추한 마지막을 보이지 않을 여자다. 너는 우리 일족의 죽음을 지켜본 뒤 탕고의 오타마에게 가라. 호소카와가에서 설마 오타마의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타마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은 분명하다. 너는 오타마를 모셔라. 그리고 회검(懐剣-여성용 단도)를 단서로 전해라. 이것은 야가미성에서 죽은 오타마의 할머니 유품이다.”
“주군! 그렇다면 이 하츠노스케는 혼자 구차하게 살아남아…” “하츠노스케,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괴로울 때가 있다. 너는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타마와 함께 생사를 함께해 주기를 나는 바란다. 이것이 나의 부모 된 마음이다. 너는 무예가 뛰어나지만 아직 젊다. 그리 이름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이것은 이름 있는 무사에게는 부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츠노스케는 이렇게 죽기를 바라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미츠히데의 말을 하츠노스케는 간추려 전했다. “그 이상한 일입니다. 다행히 비는 개었으나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라 미조오 쇼베(溝尾庄兵衛) 님 등 몇 명과 함께 주군을 따라 사카모토성으로 도망치는 도중 오구리스(小栗栖)라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대나무 숲속 작은 길로 날쌔게 말을 몰고 가던 중, 앞에서 세 번째에 있던 미츠히데가 “으윽” 하고 신음했다. 뒤따르던 쇼베가 즉시 달려와 “주군! 주군!” 하고 소리쳤다. 하츠노스케는 열의 마지막에 있었으나 예사롭지 않은 기척에 달려왔을 때 미츠히데는 괴로운 숨을 내쉬며,
“하츠노스케, 부탁한 것을 잊지 마라.” 하고 말하고는, “이름 없는 자의 창에… 방심했구나. 쇼베, 카이샤쿠(介錯-할복자의 목을 침)를 해라!”
하며 침착하게 스스로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역시 주군의 마지막답게 침착하셨습니다.” 어두운 대나무 숲속에서 겨우 몇 사람에게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는 그 일생을 마쳤는가 생각하니, 다마코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사카모토성에 저희가 돌아왔을 때 이미 마님께서도 각오를 하고 계셨습니다. 오키모토(興元)님을 비롯해 사카모토성에 모이려 했던 분들에게 '일족이 이곳에 불을 지르고 생을 마감할 터이니 아무쪼록 여러분은 성외로 피하십시오. 다른 분들을 휘말리게 하고 멸망했다 해서는 아케치 일문의 수치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야헤이지 님은 요시미츠(吉光-명검장인)의 와키자키(脇差), 코도(虚堂-중국 유명 선승)의 묵적(墨蹟) 등 천하의 명품을 정리하여 그 목록과 함께 성을 둘러싸고 있던 호리 나오마사(堀直政) 님에게 선물하셨습니다. 명품은 천하의 것이라는 주군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야헤이지 님은 성에 불을 지르고 오린 님, 마님, 주구로 님 등과 함께 장렬하게, 참으로 장렬하게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엄숙하여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산을 넘는 바람조차 딱 멈춘 것 같았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하권)
● 산울림 17-1
그곳은 사카모토성 같기도 하고 쇼류지성 같기도 했다. 다마코는 혼자 이불 속에서 비몽사몽하고 있었다. 사람 기척에 눈을 뜨니 머리맡에 타다오키가 서 있었다. 놀라서 얼굴을 들자 타다오키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다마코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타다오키는 흰 린즈(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린즈의 차가운 감촉이 다마코의 뺨에 쾌적했다. “타다오키 님, 보고 싶었습니다.” “오타마, 데리러 왔다.” 다마코가 말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운 향기가 타다오키의 옷에서 감돌았다. “네? 데리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