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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영주 토마바위/이준원
은선 추천 0 조회 98 12.04.06 16:4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도마바위라는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 옛날 어느 날 도마가 인도의 허왕후와 함께 가야국으로 함께 왔었다는 전설... 허황후는 인도의 녹차를 전해주었고 도마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설...
사진으로 보았던 바위의 히브리어는 비록 도마라고 읽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도마라고보면 또 도마라고 보여지는 글이기도 했습니다.
 
 
먼저 긴 길을 찾아 도마바위를 갔던 여정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불교의 석가상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괜히 기독교에서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고 또 불교측에서는 도마 바위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서로 손을 대지 못하고있는 특이한 한국의 문화유적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은 늦은 밤 급한 성격때문에 어둠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았으나 금광2리 입구까지 갔다가 도무지 어두운 밤길에 이리 가도 그 길 같고 저리 가도 그 길 같아서 결국 영주시로 다시 철수하고 그리고 한 밤을 기다려 다시 아침에 도전한 길이기에 먼 훗날 누군가 갈 것을 생각해서 자세히 길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 글은 서론이 아주 깁니다.
 

 
먼저 서울에서는 영동고속도로를 타야겠고 그리고 만종 분기점에서 55번을 타고 안동 방향으로 내려가야합니다. 정확한 지명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금광2리 왕유동이기 때문입니다. 55번을 타기 싫으면 국도로 5번을 타고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를 가르는 죽령을 넘는 것도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괜찮은 여행길이기도 하겠습니다.

55번을 타면 영주시IC 에서 다시 내려 국도 5번을 타고 죽 안동 방향으로 갑니다. 영주시에서 도마 바위까지는 약 20km정도 된다고 할까요? 평은면까지 약 12km 그리고 평은면에서 왕유동까지 약 6-7km되는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은 5번을 타고 내려가다가 여러 면을 지나고 나서 드디어 평은면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보고 기뻐하여 죽 사진을 이어 드립니다.

속칭 ‘왕머리’라고 하는 왕유동(王留洞: 왕이 머무른 마을이라는 뜻)은 고려 31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처들어 온 홍건적의 난리(1361년)를 피하기 위해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는 족보가 있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밭 사이 포장된 길로
무심코 걸어가다가 본 바위...
어? 혹시...이건가? 이게 바로 도마 바위인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도마바위였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지나가는 길에 흔히 있는 바위....
뭐가 보입니까?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바위...
그런데
뭔가... 자세히 올려다 보니....

이렇게 바위가 방치되어 있다는 것이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있을까?
풀 숲을 헤치고 가까이 보니 틀림없이 어디선가 사진으로
보았던 바로 그 바위였습니다.
여름이라서 무성히 자란 풀들을 헤치고
꺾어내고 밟아내고 치워내면서 올려다보니
바로
그 도마바위 또는 분처(分處)바위- 분처바위라는 이름의 근원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몸이 쪼개어졌다는 뜻인가요? 부처바위라는 이름은 많은데 이 바위는 도마바위가 아니면 분처바위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한국의 바위에 새겨진 히브리어!!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바위가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87년 8월 어느 날 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2리 왕유동 분처바위에서 머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암각상을 발견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누구인지 최초의 발견자가 어떻게 이 바위의 히브리어를 짐작하게 되었는 지 추리소설도 아닌데 그 최초의 발견자가 대단히 궁금해졌습니다.
 

 
바로 아래 사진에서 위로 올려다보이는 네모나 보이는 글자가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을 도마라고 읽어야되는 지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이 사실 정확치는 않습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모양만 흉내만 내어서 팠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 알파벳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그 판단은 좀 신중해야할 것 같습니다. 도마 시대에는 히브리어보다는 헬라어가 쓰여지는 시대였을텐데 히브리어로 써져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기본언어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석상의 조각연대는 1-2세기가 아니라 9~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기를 의미합니다. 불교미술에서는 그 당시 석탑 조성능력이 대단히 발전했던 시기라고 합니다.

하단에 새겨진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와 ‘명전행(名全行)’이란 한자 명문이 있다고 하는데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구였을까? 이곳에 예수님의 상을 조각해놓은 그 사람은?
‘야소화왕’耶蘇花王- '예수 꽃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양문화권의 존칭어이며, ‘인도자’는 사도나 전도자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야소’란 한역(漢譯) 지칭의 출현시기가 문제가 됩니다. 781년에 중국 시안에 건립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를 ‘미시가(彌施訶)’, 즉 메시아(구세주)로 칭하고 있는데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에 서방 카톨릭이 중국에 유입되면서부터 비로소 쓰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 ‘원효문집’에서 예수를 불교식으로 ‘법왕자(法王子)’라고 칭한 실례는 있으나, ‘야소’로 한역하거나 음사한 적은 없으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전무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한자 명문도 히브리어 글자처럼 상이 조성된 후에 보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그리고 ‘명전행’이란 명문에 관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순흥면 읍내리 고분 서벽에 고구려인 ‘전행(全行)’이란 같은 이름의 석장이 등장하는 점을 들어 당대의 명장인 이 전행이 분처상도 제작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400년께 고구려 광개토왕이 영주와 순흥, 안동 등 소백산 내부 지역을 일시 통치하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황론적으론 그럴 법한 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행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어서 단정은 이르고 숙고가 요망됩니다.

 


누군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정을 들고 예수님의 손을 바위에 땀을 흘리며 새겨놓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땀과 보이지 않는 얼굴은 사라졌어도 그러나 이렇게 그의 뜨거운 마음은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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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4.06 17:09

    첫댓글 저는 영주군 평은면 천본리가 고향이고 이 바위에 대한 얘기는 어렷을 때 부터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 교육때문에 읍내로 다시 부산으로 이사가서 사는동안 이 바위얘기는 옛날얘기처럼 기억에 남아있 었습니다. 어느날 이곳부근을 가게되어 장로님과 함께 이 바위를 찾아가게되었는데 평는면에 있는 어떤 가게에가서 물었더니 장로님이라면서 길을 가르켜주었습니다.왕유라는곳에가서 길가에서 서성이는데 80을 넘어뵈는 어르신에게 "" 아주 먼옛날 외국에서..." 말도 덜 끝났는데 손가락으로 가르켜준 곳 이었습니다.
    오랜풍상에 그림이며 글자가 깍이서 원형을 확인할 순 없어도.

  • 작성자 12.04.06 17:05

    또 비록 어떤 문건이나 기록으로 남은건 없어도 어렷을때 어른들이 " 도마가 왔다간 바위 " 라고들려준걸로 봐서 이 부근에서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사실인것 같습니다. 안타까운것은 이제 1-2년후면 이 지역이 수몰이 된다고 합니다. 교계에서 깊은 관심을 가져주면 좋은데 그지역의 100년이 넘는 교회들의 이주문제때문에도 힘들것같습니다.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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