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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의 성경 묵상
(캐나다 소금과 빛 가톨릭 미디어재단과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CEO,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 고문)
8기 윤영학(아오스딩) ofs 역
하느님께서 관계와 공동체를 첫 자리에 놓으신다.
우리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중요한 차원 중의 하나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를 위한 모델인 사랑과 위격의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는 공동체의 기본적인 상징이다. 그 공동체는 그 안에 다양성을 포함함으로써 하나로 뭉쳐진다.
If our faith is based in this Trinitarian mystery that is fundamentally a mystery of community, then all of our earthly efforts and activities must work toward building up the human community that is a reflection of God's rich, Trinitarian life.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신비인 삼위일체신비에 기초를 둔다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노력과 활동은 하느님의 풍요롭고 삼위일체적인 삶을 반영하는 인간 공동체건설을 지향해야 한다.
Today's Deuteronomy [4:32-34,39-40] passage is an excellent point of departure for probing the depths of the mystery of the Trinity. Consider for a moment Moses' words encouraging and exhorting the people of Israel: "From there you will seek the Lord your God, and you will find him if you search after him with all your heart and soul. In your distress, when all these things have happened to you in time to come, you will return to the Lord your God and heed him. Because the Lord your God is a merciful God, he will neither abandon you nor destroy you; he will not forget the covenant with your ancestors that he swore to them" (4:29-31). The whole passage speaks of the speci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Israel, linking the uniqueness of Israel's special vocation with the uniqueness of Israel's God.
오늘의 신명기(4,32-24, 39-40) 구절은 삼위일체 신비의 깊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떠나는 훌륭한 출발점이다. 잠시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모세의 말을 생각해보자. 거기에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 너희가 곤경에 빠지고 이 모든 일이 너희에게 닥치면, 마침내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의 말씀을 잘 듣게 될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버리지도 파멸시키지도 않으실 것이며,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도 잊지 않으실 것이다.”(4,29-31). 구절 전체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얘기한다. 그 관계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소명의 독특함과 이스라엘 하느님의 독특함을 연결시킨다.
Then in a series of rhetorical questions, Moses, knowing full well that the Lord alone is God, puts the people of Israel 'on the stand,' and asks them about this God of theirs: "For ask now about former ages, long before your own, ever since the day that God created human beings on the earth; ask from one end of heaven to the other: Has anything so great as this ever happened or has its like ever been heard of? Has any people ever heard the voice of a god speaking out of a fire, as you have heard, and lived? Or has any god ever attempted to go and take a nation for himself from the midst of another nation, by trials, by signs and wonders, by war, by a mighty hand and an outstretched arm, and by terrifying displays of power, as the Lord your God did for you in Egypt before your very eyes? To you it was shown so that you would acknowledge that the Lord is God; there is no other besides him" (4:32-35).
그리고 주님만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잘 아는 모세는 일련의 웅변적인 질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증언대”에 세우고 그들의 이 하느님에 대해서 묻는다.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그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4,32-35).
Matthew’s commission
The majestic departure scene at the end of Matthew’s Gospel [28:16-20] relates to us Jesus' final earthly moments and the great commission to the Church: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that I have commanded you. And remember, I am with you always, to the end of the age" (19-20).
마태오의 사명
마태오복음 끝의 장엄한 이별 장면(마태오 28,16-20)은 예수님의 지구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과 교회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을 얘기해 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19-20)
The great apostolic commission implies a service that is pastoral: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 liturgical: "baptizing them"; prophetic: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and guaranteed by the Lord's closeness, until the end of time. The scene gives a foretaste of the final glorious coming of the Son of Man [Matthew 26:64]. Then his triumph will be manifest to all; now it is revealed only to the disciples, who are commissioned to announce it to all nations and bring them to believe in Jesus and obey his commandments. Since universal power belongs to the risen Jesus [Matthew 28:18], he gives the eleven a mission that is truly universal. They are to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위대한 사도적 사명은 다음과 같은 봉사를 가리킨다. 사목적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전례적 - “세례를 주고”, 예언적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그리고 이 봉사는 세상 끝 날까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면서 보증하신다. 그 장면은 사람의 아들의 영광스런 마지막 재림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마태오 26,64). 그리고 그의 승리가 모두에게 보여질 것입니다; 지금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드러납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 그것을 선언하고 그들을 예수님께 불러오고 그분의 가르침에 순명하도록 하는 사명을 받는다. 보편적인 힘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속하므로(마태오 18,18) 예수님께서 11제자들에게 진정 보편적인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들은 모든 나라의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Baptism is the means of entrance into the community of the risen one, the Church.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his is perhaps the clearest expression in the New Testament of Trinitarian belief. It may have been the baptismal formula of Matthew's church, but primarily it designates the effect of baptism, the union of those baptized with the Father, Son, and Holy Spirit.
세례는 부활하신 분의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가는 수단이다.“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는 신약에서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명백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은 마태오 교회의 세례양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례의 효과 즉 세례 받는 사람들과 성부, 성자, 성령과의 결합을 가리킨다.
Trinitarian language
The language of Father and Son is relational language, and reminds us that, for God, as for us, created in God's image, relationship and community are primary. God can no more be defined by what God does than we can. God is a Being, not a Doing, just as we are human beings, not human doings. This is a point of theology, but also, with all good theology, a practical point.
삼위일체적 언어
성부와 성자란 말은 관계적인 말이며,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에게는 관계와 공동체가 제일이란 것을 환기시킨다. 하느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시는 일로 정의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행위가 아니고 존재이시다. 그것은 우리가 휴먼두잉(human doings)이 아니고 휴먼빙(human beings)인 것과 같다. 이것이 신학의 요점이며 또한 제대로 된 신학과 함께 실질적인 요점이다.
To define God's inner life in the Trinity in terms of God's activity leads to defining humans, created in God's image, in the same way. Those who choose to say, "In the name of the Creator, the Redeemer and the Sustainer" err in defining God by function and not by person. God is a living being who exists in intimate relationship with us.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으로 하느님의 내적 삶을 정의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인간을 같은 방법으로 정의하도록 이끈다. “창조주, 구원자, 그리고 지지자의 이름으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격으로 하지 않고 기능으로 정의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숙한 관계 안에 존재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시다.
Our God isn’t immovable. God isn’t alone. God is communication betwee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is is the profound mystery that the liturgy for the feast of the Holy Trinity recalls: both the unspeakable reality of God and the manner in which this mystery has been given to us. The Trinity celebrates the peace and unity of the divine persons in whom the circular dance of love -- "perichoresis" in Greek -- continues. That unity is a dance of life and relationships, encompassing all aspects of human life.
우리의 하느님은 움직일 수 없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혼자가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간의 소통이시다. 이것은 삼위일체 대축일의 전례가 상기시키는 심오한 신비이다. 즉, 하느님의 말할 수 없는 실체와 이 신비가 우리에게 주어진 방법 모두가 심오한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신적인 위격들의 평화와 일치를 축복한다. 그분들 안에서 사랑의 원형춤 --그리스어로 “페리코레시스”--가 계속된다. 그 일치는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생명과 관계의 춤이다.
We must constantly strive for this unity and peace of God, Jesus, and their life-giving Spirit, a peace that theological controversy never gives. Though theology is absolutely necessary, we would do well to pray more and love God more, than trying to figure out our Trinitarian God! The consolation is this: Complete understanding is not necessary for love.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느님, 예수님,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이 일치와 평화를 얻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 이 평화는 신학적 논쟁이 절대 줄 수 없는 평화이다. 신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알아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더 기도하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을 위해 완전한 이해는 필요 없다.
Listen to St. Catherine of Siena’s famous prayer from her Dialogue on Divine Providence: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그의 대화집에서 따온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의 기도를 들어 보자.
"Eternal God, eternal Trinity, you have made the blood of Christ so precious through his sharing in your divine nature. You are a mystery as deep as the sea; the more I search, the more I find, and the more I find the more I search for you. But I can never be satisfied; what I receive will ever leave me desiring more. When you fill my soul I have an ever-greater hunger, and I grow more famished for your light. I desire above all to see you, the true light, as you really are."
“오, 영원한 하느님이시여, 영원한 삼위일체시여! 신성의 일치를 통하여 당신은 독생 성자의 피를 한없이 보배롭게 만드셨습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제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당신은 영혼을 채워 주시지만 그것으로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 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하고 또 목말라 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
Love can never outgrow its fascination with the puzzling aspects of the one loved. This is our approach to the Trinitarian mystery. We must love God more. On this feast, let us pray that we be caught up in the unifying and reconciling work of the Holy Spirit of God. The increasing glory of God is this progressive revelation of the Trinity.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의 어찌할 바 모르는 측면들에 대한 사랑의 매료를 뛰어넘을 수 없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이 축일에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의 일치시키고 화해시키는 은총에 사로잡히도록 기도하자. 하느님의 점점 커지는 영광은 삼위일체의 이 점진하는 계시이다.
Many times during our lives, we experience this revelation and God's Trinitarian presence through the depth of love, communication and relationship with other people. Our God is rich in relationships, communication and love for all people. This God models to us what the dynamic Trinitarian life is all about– communication, relationship and affection. The quality of our Christian live is based on imitation of the interior life of the Trinity.
우리는 삶에서 여러 번 다른 사람들과의 깊은 사랑, 소통, 그리고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삼위일체 현존과 이 계시를 체험한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관계, 소통, 사랑 안에 계신다. 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역동적인 삼위일체 삶이 무엇인가, 즉, 소통, 관계, 사랑이라는 것을 모델로 보여 주신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의 품격은 삼위일체의 내적 삶의 모방에 기초를 둔다.
The foundation of our Trinitarian faith is dialogue, communication and a "dance of life." Though we may struggle in understanding the Holy Trinity, we nevertheless take it into our very hands each time that we mark ourselves with the sign of the cross. Words once spoken over us at baptism become the words with which we bless ourselves in the name of the Trinity. Herein lies the meaning of this unique, one God in three Persons. I offer you this prayer for today's feast and the coming week: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의 기초는 대화, 소통, 그리고 “생명의 춤”이다. 거룩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성호를 그을 때마다 그것을 우리 손으로 받아들인다. 세례 때 우리에게 들려준 말씀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자신을 축복하는 말씀이 되었다. 여기에 세 위격 안에 한분의 하느님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여러분에게 오늘의 축일과 다음 주를 위해 다음의 기도를 권한다.
Glory to you, Father, Who by the power of your love, Created the world and formed us in your own image And likeness.
Glory to you, only begotten Son, Who in your wisdom assumed our human condition To lead us to the Kingdom.
Glory to you, Holy Spirit, Who in your mercy sanctified us in baptism. You work to create in us a new beginning each day.
당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모상으로 우리를 만드신 아버지께 영광!
당신의 지혜로 우리 인간 조건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신
독생 성자께 영광!
세례 때 당신 자비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매일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시는 성령께 영광!
Glory to you, Holy Trinity, You always have been, you are and you always will be Equally great to the end of the ages.
We adore you, we praise you, we give you thanks Because you were pleased to reveal the depth of your mystery To the humble, to little ones.
Grant that we may walk in faith and joyful hope until the day When it will be ours to live in the fullness of your love And to contemplate forever what we now believe here below: God who is Father, Son and Spirit! Glory to You!
May God's Holy Trinity -- in unspeakable goodness and mystery -- teach us and guide us in the life that is ours, and may we grow in "God's love poured forth into our hearts by the Spirit that has been given to us" (Romans 5:5).
예전에도 지금도 세상 끝까지 항상 위대하신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영광!
공경하고, 찬미하고, 감사드립니다. 미약하고 미소한 이들에게 당신의 깊은 신비를 기꺼이 드러내신 당신께!
신앙과 기쁨에 찬 소망 안에 걷도록 허락 하소서. 당신 사랑의 충만 안에 우리가 살게 될 때까지 지금 여기에 우리가 믿는 것을 영원히 관상하도록 허락 하소서.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하느님의 거룩한 삼위일체여 - 말로 다할 수 없는 선과 신비 안의 -- 저희를 가르치시고, 저희 삶 안에서 저희를 이끄시어,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5,5)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