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천군수 민사용(文川郡守 閔思容)
[본관] 여흥(驪興)
[거주지] 한성([京])
[생원]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生員) 3등(三等) 48위(78/100)
[생졸년] 1515년(중종 10)~1579년(선조 12) / 향년 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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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中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여흥(驪興)이고, 字는 언묵(彦黙)이다. 曾祖父는 이조정랑을 지낸 민수(閔粹)이며, 祖父는 성균관 전적을 지낸 민구손(閔龜孫)이고, 아버지는 左贊成을 지낸 입암(立巖) 閔齊仁이며, 어머니는 固城李氏이다.
夫人은 廣州李氏와 光州金氏이다.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의 五代祖이다. 1541年(明宗1年)에 生員으로 出仕하여 以後 文川郡守에 이르렀다. 議政府 左參贊에 追贈되었다.
閔思容의 墓域은 父親인 贊成公 閔齊仁 墓下인 南楊州市 一牌洞 鳴牛마을에 位置해 있다. 封墳은 配位 光州金氏와 廣州李氏와 三位 單墳 合葬墓이며 封墳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床石. 향로석(香爐石) 等이 배치(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望柱石과 文人石이 各各 한雙씩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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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외선조 군수 민공 묘표 후기(外先郡守閔公墓表後記)
공의 묘에는 옛 묘표가 있어, 공의 생졸, 관력, 자손을 대략 기록하였는데 그 글이 질박하면서도 화려하지 않다.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르지만 공의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자애롭고 검소한 일단을 보기에는 충분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갑자년(甲子年, 1744, 영조 20), 6세손 부솔 창수(昌洙)가 재종형 판서 응수(應洙)에게 의논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들의 묘에 대부분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였는데, 오직 이 묘는 옛날의 작은 묘갈만 그대로 있으니 이것은 아마도 후손들을 기다려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선조는 추증된 관직이 있으나 아직 비석에 새기지 않았고, 또 근세 이후로 높은 관직에 오르고 명성이 알려진 후손이 많으니 이것 또한 뒤늦게라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응수가
“좋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별도로 비석 하나를 마련하고 이재(李縡)에게 기록해주길 청하였다.
삼가 공의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은 훗날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두 부인도 따라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여덟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 및 손자와 손녀 다섯 명이 모두 옛날의 묘표에 기록되어 있다.
아들 여건(汝健)은 훗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여준(汝俊)은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여신(汝信)은 병조 정랑을 지냈고, 여임(汝任)은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선록되어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여검(汝儉)은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부사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고, 여길(汝佶)은 집의에 추증되었고, 여간(汝侃)과 여우(汝佑)는 요절하였다.
딸 한 명은 정랑 윤기신(尹起莘)에게 시집가고 두 딸은 어렸는데, 훗날 사인 경인(慶遴), 현감 이의형(李宜兄)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딸은 전한 채경선(蔡慶先)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 표(杓)는 구(構)로 개명하고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기(機)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출계하여 백부의 후사가 되어 공의 사손(嗣孫)이 되었고, 근(根)은 교관을 지내고 출계하여 여신(汝信)의 후사가 되었고, 어린 딸은 훗날 참봉 권여(權輿)에게 시집갔다.
손자들 가운데 옛날 묘표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여임의 아들 계(枅)ㆍ담(橝), 여검의 아들 평(枰)ㆍ해(楷)ㆍ환(桓), 여길의 아들 설(樰)이다. 계는 서령을 지냈고, 평은 효성으로 정려되고 정랑에 추증되었으며, 해는 출계하여 여간의 후사가 되었고, 환은 의금부 도사를 지내고
역시 효성으로 정려되고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설은 승지에 추증되었다.
관찰사 증 영의정 광훈(光勳), 직장 광윤(光尹), 감찰 광황(光煌), 장령 광소(光熽), 현감 광혁(光爀), 참봉 광신(光晨), 현감 광민(光旻)은 공의 증손이다.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는데, 대사헌 증 좌찬성 시중(蓍重), 좌의정 문충공 정중(鼎重), 영의정 여양부원군 증 영의정 문정공 유중(維重), 이조판서 증 영의정 진주(鎭周), 우의정 문효공 진장(鎭長), 좌참찬 충문공 진후(鎭厚), 좌의정 문충공 진원(鎭遠)이 있다.
응수(應洙)의 제종형제로는 장령 익수(翼洙), 지평 우수(遇洙)가 있다. 또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낸 형수(亨洙)와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은 지낸 통수(通洙)는 창수(昌洙)의 아우들이다. 응수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백행(百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낸 백창(百昌), 형수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를 지낸 백상(百祥)은 모두 장파(長派) 소생이다.
직장을 지내고 장령에 추증된 태중(泰重),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지낸 경중(慶重),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동중추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된 진유(鎭有),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낸 진동(鎭東),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을 지낸 택수(宅洙)는 모두 각파(各泒)의 소생이다.
이제 공의 시대와는 또 2백 년이 떨어져 자손들이 번창하여 모두 문학과 충효를 서로 계승하였는데, 문정공이 바로 우리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낳아 더욱더 나라의 영광이 되었으니, 이 어찌 근원이 커서 드넓은 강물을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재(縡)는 문정공의 외손으로 지금 묘비문의 찬술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감히 그 대체를 모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보이노라.
[註解]
[주01] 외선조 …… 후기 :
저자가 민사용(閔思容, 1515~1579)을 위해 쓴 묘표 후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