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노은동 마라톤 코스를 기림
마라톤은 길이 있으면 어디에서든지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길바닥의 상태에 따라 운동화를 골라 신고,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고, 자기 몸에 알맞게 달리면 된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길은 교통사고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데다, 달리면서 더러워진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시게 되므로 몸에도 나쁘고 기분도 언짢다. 순수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게 안전하고 맑은 공기가 감도는 코스가 삶의 터전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면, 그거야말로 또 하나의 큰 행복이다.
내가 살고 있는 노은동은 사방이 낮은 산으로 에워싸인 분지마을이다. 이 곳의 서쪽과 북쪽은 왕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줄기를 뻗어 내리고 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어서 따뜻하게 보호하듯이, 이 산줄기가 휘몰아치는 겨울 높하늬바람을 병풍처럼 둘러막고 있어서 마을이 아늑하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왕가산 줄기 산자락과 산등성이를 따라가는 오솔길과, 반석동 일대의 산기슭을 따라가며 논두렁과 밭두렁의 생김새대로 꼬불탕하게 휘어진 논틀밭틀을 주로 달린다.
매우 부드러운 산세를 따라 만들어진 길에는 언제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오간다. 마치 내가 어릴 때 보던 장보러 가는 시골길의 모습이다. 여러 갈래로 산등성이에 생긴 길 중, 집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꼭 20분이 걸리는 산등성마루가 하나 있다. 거기서부터 산등성이와 산자락을 따라 순환되는 2㎞가 조금 모자라는 오솔길이 있다.
나는 이 길을 아주 좋아한다. 기울기가 작을뿐더러 오르막과 내리막의 변화가 적절하고,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고, 키가 작은 나무와 풀이 다옥하게 자라고 있으며, 공기가 깨끗해서 목구멍에 불이 날 정도로 숨을 거칠게 들이키며 뛰면 기분이 상쾌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마다 부엽토 위에 솔가리가 풍성하게 쌓여 있으므로 힘껏 내달려도 푹신푹신하다. 다리를 한껏 벌려 힘차게 내딛더라도 충격이 거의 없다. 이 오솔길은 파틀렉 훈련1)에 안성맞춤이다. 우레탄보다 더 부드러운 천혜의 트랙이다. 길이 부드러워서 자주 찾으며, 자꾸 달려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 부드러운 길은 마음이 푸근하고 사랑이 느껴져서 자주 가서 한없이 머물고 싶다. 딱딱한 길은 무릎 관절이 피곤해서, 가파르고 험한 산비탈 길은 위험해서, 고약한 냄새가 나거나 지저분한 길은 더러워서 피하게 된다. 우리 부드럽게 살자. 함께 어울려서 포근하게 참사랑을 나누고, 사이좋게 도와가며 도란도란 살자. 으스댐보다는 겸손하고, 소가지가 없기보다는 너그럽게 살자. 딱딱하면 피곤해서, 우락부락하거나 몰상식하면 더러워서 피하게 된다.
산길을 뛰다보면 오르내리며 걷는 사람에게 헤살을 놓게 된다. 여러 사람이 살다보면 한 편으로는 도와주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부대끼면서 이해와 양보를 하게 마련이다. 걷거나 뛰는 사람 모두 건강을 위해 산을 타는지라 가볍게 인사하며 지나가면 서로 반갑다. 덤부렁듬쑥2)한 골짜기에는 꿩들이 떼 지어 놀고 소나무 곳곳에 청설모가 흔하다. 힘차게 뛸 때마다 자연의 싱그러운 기운이 듬뿍 들어오는 이보다 더 좋은 달리기 코스가 어디 있으랴. 내게는 자연이 내린 가장 좋은 선물이다.
미국의 수많은 길과 호주 퍼스의 스완강 기슭이며 시드니 바닷가의 한적한 길이며 런던과 파리의 드넓고 평평한 길을 뛰어 보았지만, 한갓진 곳은 흔하되 아기자기한 변화와 몸에 스며드는 자연의 기운은 왕가산 오솔길에 어림도 없다. 힘차게 달릴수록 코 찌르는 뉴질랜드의 로토루아 호숫가 유황냄새를 어찌 여기에서 풍기는 은은한 솔 향과 견줄 수 있으랴. 고욤이 일흔 개인들 감 한 개를 당하랴.
노은동에서 왕가산을 넘으면 반석동 들판이 길펀하게 펼쳐진다. 그 뜰에 농사용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시멘트로 포장된 논틀밭틀이 작은 기울기를 이루며 구부러진 뱀 모양으로 2㎞ 안팎쯤 내달린다. 이 길은 언덕훈련3)에 제격이다. 나는 밤이든 낮이든,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고즈넉한 이 길을 마음대로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공기가 깨끗한 데다 자동차도 없어서 사고가 날 염려가 전혀 없다.
봄에는 산수유나무가 다른 꽃에 뒤질세라 앙상한 가지 사이에 잎보다 먼저 앙증스러운 노랑꽃을 드러내면서 꽃철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낮은 골짜기를 따라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 복숭아나무, 조팝나무, 찔레, 철쭉, 아카시아, 밤나무가 순서를 다투며 물감을 풀어놓은 듯 눈이 부실 정도로 흐드러지게 펴서 꽃 잔치가 벌어지고 꽃향기에 온몸이 취한다. 이른봄에 입맛을 돌게 하는 냉이와 꽃다지가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머위, 미나리를 거쳐 씁쓰레한 잎이 맛으로 으뜸인 왕고들빼기가 여름까지 흔하게 이어진다. 늦은 봄에서 여름 사이에는 길 양편에 흔한 복분자딸기 넝쿨마다 검붉은 열매가 흐무러지게 익어 내리고, 길을 조금 비켜선 산기슭에는 보리수나무에 주홍빛 열매가*나무에 새까만 버찌가 여러 알씩 짝지어 익으며, 뽕나무에 검은 자주 빛 오디가 주저리주저리 탐스럽게 열린다.
가을이면 넓은 들녘에 벼이삭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골짜기 숲에 가려진 개암나무에는 갈색 열매가 남몰래 익어간다. 논*밭두렁에 몇 그루 서 있는 고욤나무와 대추나무마다 다래다래4) 매달린 열매가 부끄럼타듯 검붉게 물들고, 감나무마다 묘령(妙齡)의 아가씨 볼 닮은 주황빛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서 풍요로움이 넘쳐나니 한없이 흐뭇하다. 겨울이면 풀숲에 산새*들새, 철새*텃새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면서 재잘거리니 적막한 골짜기에 그 소리도 드높다. 논*밭두렁 곳곳에 사시사철 산비둘기와 꿩들이 날아들고, 봄*여름*가을에는 왜가리가 보태져서 한가로이 노닐며 먹이도 찾고 짝꿍도 만나는 평화로운 길이다.
시멘트 길 마지막에는 논두렁을 따라 타원형을 그리는 시멘트 트랙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길 한 쪽에 계룡산에 뿌리를 둔 깨끗한 시냇물이 마를 날 없이 흘러서 물고기들이 지천으로 넘치고, 변두리에 듬성듬성 나이든 감나무는 까치들이 주인이라서 언제나 지저귀는 소리가 높다. 감나무와 까치와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뛰다보면 돌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밀려온다. 자연과 사람이 멋지게 어우러진 앙상블에서 누구인들 빠지고 싶겠는가.
이렇게 좋은 코스를 가까운 거리에 두고 살면서 어찌 그 품속을 자주 찾지 않으리. 어린 아기가 엄마 품속에서 젖을 찾아 영양과 사랑을 얻는 것처럼, 나는 노은동 품에서 마라톤 코스를 누비며 건강을 얻는다. 나보다 더 행복한 아마추어 마라토너는 없으리.
1) 파틀렉 훈련(Fartlek training) : 스웨덴어(語)로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속력에 변화를 주면서 달리는 훈련. 일명 스피드 플레이(speed play). 2) 덤부렁듬쑥 : 수풀이 우거지고 깊숙한 모양. 3) 언덕 훈련(hill training) : 뉴질랜드의 아서 리디아드(Arthur Lydiard)가 고안한 언덕을 이용한 훈련법. 4) 다래다래 : (작은) 물건들이 많이 매달렸거나 드리워져 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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