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소벌도리(박혁거세를 길러준 양아버지)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中
죽산 최한규박사 편역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양아버지다. 사량부沙梁部 최씨崔氏의 시조이다(『삼국사기』와 경주 최씨 족보에는 사량부 최씨 시조로, 『삼국유사』에는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이 고장 백성들은 동해 변 산골짜기에 흩어져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이를 진한辰韓 6부六部라 한다. 소벌도리는 그중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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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신라의 옛 이름)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북부여 5세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만주 흑룡강성의 눈강)에서 도망하여 동옥저(現 함경도와 강원도 지역)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박혁거세를 길러준 양아버지, 최씨의 시조)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임금)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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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단고기는 인간이 천지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창세 역사 시대인 ‘환단 시대 이래 한민족의 역사 이야기책’이다!
서문(序文) 권두언, 서사(序詞), 서제(書題)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역사, 문화의 원형을 밝혀 주는 보배로운 사서이다. 특히 환단고기는 다른 사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역사 사실이 많이 실려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의 해제 편에서는 ‘환단고기에서만 전해 주는 새로운 역사 진실’이라고 하여 이를 52가지로 정리하여 밝혀 주고 있다. 이를 중심으로 환단고기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43 박혁거세의 모母, 파소의 신원을 밝혀 준다!
사로시왕 선도산성모지자야
斯盧始王은 仙桃山聖母之子也라
석 유부여제실지녀파소 불부이잉 위인소의
昔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가 不夫而孕하니 爲人所疑하야
자눈수 도지동옥저 우범주이남하
自嫩水로 逃至東沃沮하고 又泛舟而南下하야
저지진한나을촌
抵至辰韓奈乙村하니
시 유소벌도리자 문지 왕수양어가
時에 有蘇伐都利者하야 聞之하고 徃收養於家러니
이급년십삼 기억숙성 유성덕
而及年十三에 歧嶷夙成하야 有聖德이라
어시 진한육부 공존 위거세간
於是에 辰韓六部가 共尊하야 爲居世干하니
입도서라벌 칭국진한 역왈사로
立都徐羅伐하고 稱國辰韓이오 亦曰斯盧라.
사로斯盧의 첫 임금(박혁거세)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婆蘇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居世干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辰韓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가 부여 황실의 딸이라는 『환단고기』의 기록은 ‘신라가 부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주는 획기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종래에는 사대주의 사관의 왜곡⋅날조에 의해 중국 진秦나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인식돼 왔다.
중국의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을 보면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 사람이었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진秦과 진한辰韓은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다.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秦나라 때 군軍에 가지 않으려고 달아난 사람들이 마한馬韓으로 갔다고 한다.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떼어 줘서 도망 온 사람들을 살게 하였다. 진秦나라 사람들이 살므로 그 땅을 진한秦韓이라고 불렀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 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라는 내용이 있다. 즉 신라의 선계는 본래 진한종辰韓種인데, 진秦나라의 유망민流亡民이 한반도로 건너와 신라의 전신前身인 중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한은 분명 고조선의 ‘전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전신인 ‘중삼한의 진한’을 세운 주체 세력을, 단군조선의 진한 유민이 아니라 중국 진秦나라의 유망민으로 억지 부회한 것이다.
또 『삼국유사三國遺事』 「감통感通」에는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한漢나라 8세 소제昭帝나 9세 선제宣帝)의 딸이었는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라고 하였고, 또 사소가 처음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고 기록하여 파소와 박혁거세의 혈통을 중국 한족 혈통으로 왜곡시켜 놓았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에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본서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 파소와 박혁거세는 부여 황실의 혈통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도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라고 한 데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고조선의 진한辰韓 유민이다. 중화 한족의 주장을 일부 수용한다면, ‘진秦나라의 유망민’은, 진시황의 혹독한 동이족 탄압 정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와 경주 지방에 정착한 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동이 조선족(한국인)인 것이다.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양아버지다. 사량부沙梁部 최씨崔氏의 시조이다(『삼국사기』와 경주 최씨 족보에는 사량부 최씨 시조로, 『삼국유사』에는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이 고장 백성들은 동해 변 산골짜기에 흩어져 여섯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이를 진한辰韓 6부六部라 한다. 소벌도리는 그중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다.
거서간(혹은 거세간, 거슬한)은 신라 초기의 왕호王號다. 거세간은 고대 진한辰韓 말로 ‘임금’ 또는 ‘귀인貴人’을 뜻하였고, 제사를 맡은 웃어른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박혁거세 이후로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순서로 왕호가 변해 갔는데 ‘웅雄’· ‘금今(또는 儉)’· ‘간干[또는 汗(韓)]’은 임금을 뜻하는 신시 배달 이래의 전통적인 호칭이다. 그러다가 22세 지증왕 때에 이르러 중국식으로 왕을 칭하게 되었다.
경주시 서북쪽에 위치한 선도산은 신라인에게는 더없이 신성한 산으로 존숭되었다. 선도산 정상 바로 밑, 경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지금도 선도 성모仙桃聖母의 유적지와 함께 성모의 위패를 모신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성모사에서는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0일 박혁거세의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