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제(金希磾)는 본래 군산도(群山島) 사람이다. 그 선조가 상선(商船)을 따라 개성(開城)에 도착하여 머물러 살다가 결국 개성을 적(籍)으로 삼았다. 처음에 감목직(監牧直)으로 산원(散員)에 보임되었으며 여러 차례 옮겨 충청도안찰사(忠淸道按察使)가 되었는데, 청망(淸望)이 있어 장군(將軍)으로 옮겼다. 고종(高宗) 8년(1221)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 등이 관반(館伴)의 접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여 혹은 활을 쏘고 혹은 〈관리를〉 때렸다. 관반낭중(館伴郞中) 최공(崔珙) 등이 문 밖으로 달아나 곧바로 자물쇠를 내리니 몽고 사신이 나올 수 없었다. 김희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 달래니 노기(怒氣)가 풀렸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다시 몽고 사신 저가(這可) 등이 온다고 보고하자, 왕은 몽고 사람들이 욕심이 끝이 없어 무릇 달라는 대로 주다가는 재정이 고갈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틈이 생길 것이라고 여겨 의논하게 하였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시중(侍中) 이항(李抗)과 사천감(司天監) 박강재(朴剛材)를 보내어 태묘(太廟)에서 점을 쳤으나 또 결정하지 못하였다. 저가 등 23인과 여자 사신 1인이 와서 국신(國贐)을 독촉하니 왕은 김희제가 담략이 있고 시(詩)와 예(禮)를 알며 언변이 좋다 하여 명하여 유회사(類會使)로 삼았다. 저가 등이 말하기를, “이에 앞서 안지녀대왕(安只女大王)이 사신을 보낸 바 있었는데 잘 접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니 김희제가 답하여 말하기를, “지난 해 대국(大國)의 은혜를 입었으며, 지금은 사신이 우리나라에 왕림하였으니, 영아(迎迓)의 예와 국신(國贐) 등의 일에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대가 도호부(都護府)에 있을 때 직접 1인에게 활로 쏘아 생사를 아직 알 수 없으니 만약 살아난다면 그대의 복이고 죽는다면 일행은 반드시 구류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저가 등이 무릎을 꿇고 부끄러워하였으며 김희제의 처분을 모두 들어주었다.
또 몽고 사신 희속불화(喜速不花, 코스부카) 등이 오자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희속불화 등이 궁시(弓矢)를 찬 채로 대전(大殿)에 오르려 하니 김희제가 말하기를, “두 나라가 우호를 맺은 후로 모두 예복(禮服)을 갖추고 상견하오. 지금 고건(櫜鞬)을 하고 연향에 나아가려 하니 어찌 예가 있다 할 것입니까?”라고 하자 곧바로 이를 풀었다. 또 동진(東眞) 사신의 관반(館伴)이 되었을 때 동진의 사신이 앞서 창(唱)하여 말하기를, “봄의 신령[東君]이 처음으로 따뜻함을 알리네.”라고 하자 김희제가 즉시 대구하기를, “겨울 신령[北帝]은 이미 추위를 거두었도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어떤 뜻이 있어 이 구절을 지었소?”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춘의(春意)로 창하기에 나 또한 춘사(春事)로 화답하였소.”라고 하였으므로 대답하니 사신이 탄복하고는 다시 따지지 않았다.
〈김희제(金希磾)는〉 외방으로 나가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이 되었는데, 〈고종(高宗)〉 10년(1223) 금의 원수(元帥) 우가하(亏可下)가 마산(馬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몰래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 3주를 노략질하였다. 김희제가 가서 칠 것을 주청하였으나 명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이에 갑사(甲士) 100인을 보내 우가하의 진영을 급습하여 3인을 생포하고 달아나다가 압록강에 빠져 죽은 자가 자못 많았다. 〈그리고〉 군수품 수송선 22척을 취하여 돌아왔다. 얼마 뒤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고쳤는데, 〈고종〉 13년(1226) 우가하가 군사에게 몽고복을 바꿔 입도록 하고는 〈다시〉 의주·정주로 쳐들어 왔다. 지병마사(知兵馬使) 이윤함(李允諴)이 별장(別將) 김리생(金利生)과 대관승(大官丞) 백원봉(白元鳳)을 보내 군사 200여 인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석성(石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선무부통(宣撫副統) 등 5인을 베고 우마와 병장기를 노획하였으나 우가하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김희제가 판관 예부원외랑(判官 禮部員外郞) 손습경(孫襲卿)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송국첨(宋國瞻)과 함께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가하가 우리나라의 은혜를 배반하고 우리 변방 민을 노략질하는 데 아무도 막는 자가 없으니 나라의 수치요. 마땅히 서로 적을 베는 힘을 합해 추토(追討)함으로써 나라의 수치를 씻어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보병과 기병 10,000여 인을 뽑고 김희제는 중군(中軍)을, 손습경은 좌군(左軍)을, 송국첨은 우군(右軍)을 지휘하여 20일 분량의 군량을 지고 가서 석성(石城)을 토벌하였다. 우가하가 군사를 보내 구하려 하였으나 김희제 등이 〈적과〉 싸우면서 분격하여 적을 대패시키고 70여 급을 참하였다. 〈다시〉 서둘러 석성을 공격하니 성주(城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울면서 흙덩이를 물고 하늘에 맹세하며 포위를 풀어줄 것을 빌었다. 김희제가 여러 차례 우가하가 지은 배은(背恩)의 죄를 들어 말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포강(紫布江)에 이르렀을 때 얼음이 이미 녹아 건널 수가 없었으나, 이날 밤에 얼음이 얼어 이내 강을 건넜다. 청로진(淸虜鎭)으로 들어갔을 때 김희제가 시를 지었는데, ‘장군(將軍)으로서 부월 받고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대궐에 조회하리오. 한 번 청사(靑蛇)를 떨쳐 마산(馬山)을 가리키니, 오랑캐의 군세 모두 넘어지고 쓰러지네. 범처럼 날쌔게 뛰어올라 붙잡으며 오강(五江)을 건너니, 성곽은 모두 불에 타 재가 되었네. 여럿이 원망하여도 이미 장부 마음 폈으니, 얼굴 돌리니 까닭 없이 부끄러운 땀만 흐르네.’라고 하였다.
송국첨이 화답하기를, ‘인(仁)을 칼등에 새기고 의(義)로 칼날 삼으니, 이것이 장군의 새로운 거궐(巨闕)이라네. 한번 바다 향해 휘두르니 고래가 달아나고, 두 번 육지 향해 드니 물소 코끼리 거꾸러진다네. 하물며 저 마산(馬山)의 궁벽한 곳 완악하고 거친 자들, 그 제어함이야 채찍 끝만으로도 가능하리, 아침에 오강을 건너고 저녁에 승첩을 올리니, 기쁜 기색은 만 되 봄빛처럼 쏟아지는구나.’라고 하였다. 손습경은 화답하기를, ‘변방이라 정(鼎)도 종(鍾)도 없지만, 큰 공 적으려고 하니 시가 빠지랴. 현판 위에 적어 후세에게 알리리니, 보려는 자 앞 다투다 쓰러지고 넘어지네. 맹명(孟明)이 황하 건너 진(秦)나라 치욕 씻었으나, 공에게 견준다면 끄트머리에나 해당하리. 내년엔 또 천산(天山)을 평정할 수 있으리니, 세 화살 본디 하나도 헛되이 쏜 것 없었네.’라고 하였다.
처음에 김희제가 출병하면서 은밀히 글로 최이(崔怡)에게 보고하였으므로, 돌아올 때, 유사(有司)에서 김희제가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킨 일을 탄핵하려 하였는데, 최이가 알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중지하였다. 그러므로 논공행상을 행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밖으로 나가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김희제(金希磾)가 일찍이 술승(術僧) 연지(演之)가 최이(崔怡)의 상을 보았다는 말을 누설한 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로 인하여 최이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김희제 등이 공을 모해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최이가 사람을 보내어 김희제 등을 체포하였다. 당시 김희제는 나주(羅州)에 있었는데, 체포하려는 자가 이르렀지만 둘러보면서 두려운 기색 없이 조용히 말하기를, “바라건대 한 마디 하고 죽었으면 한다.”라고 하고는 구호(口號)하여 이르기를, ‘청하(淸河) 백 번 따라주신 은혜 갚으려고, 동서남북 이 한 몸 모두 잊었었네.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하늘의 버림받아, 자맥(紫陌) 사람이 벽해(碧海) 사람 되었을꼬.’라고 하고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아울러 아들 김홍기(金弘己) 등 3인도 〈바다에〉 빠뜨렸다.
김희제는 풍모와 용의가 아름다웠고 지용(智勇)이 있었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다. 최이의 가까운 신임을 받다가, 최이가 병이 드니 김희제가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여 연지의 집에서 점을 친 일이 있었는데, 세력을 시기하였던 자들에게 참소를 받아 죽기에 이르렀다.
김홍기(金弘己)는 상장군(上將軍) 조염경(趙廉卿)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조염경은 김홍기가 죄가 없는데도 죽은 것을 측은히 여겨 온 집안을 들어 〈애도하며〉 채식을 하였다. 하루는 최이가 양부(兩府) 및 여러 장군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조염경에게 물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소?”라고 하니 말하기를, “온 집안이 소찬(素饌)을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이가 얼굴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내가 알기로 공이 만약 딴 마음이 없다면 의당 속히 사위를 맞아들이시오.”라고 하였다. 조염경이 두려워하면서 낭장(郎將) 윤주보(尹周輔)에게 〈자신의 딸을〉 처로 삼도록 하였는데, 딸이 울면서 말하기를, “남편이 죽은 지 며칠이라고 갑자기 지조를 빼앗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조염경은 강제로 혼인을 시켰다. 혼인날 저녁 윤주보의 꿈에 김홍기가 나타나 그의 불알을 때리기에 놀라 깨었는데, 갑자기 음통(陰痛)이 생겨 이튿날이 되어서는 죽었다.
김희제의 사위 정상(鄭相)은 판추밀(判樞密) 정통보(鄭通輔)의 아들인데 세력을 믿고 오만방자하였다. 일찍이 대장군(大將軍) 지윤심(池允深)의 처를 간통한 일로 남쪽에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소환되었다. 〈어느 날〉 밤에 〈정상이〉 수덕궁(壽德宮)에 이르렀는데, 이문(里門)이 닫혀 있었으므로 정상이 자물쇠를 관장하는 자가 늦게 왔다고 성을 내며 문틈으로 활을 쏘아 죽였다. 법관(法官) 대집성(大集成)·김득순(金得循)·최종번(崔宗蕃)·홍사윤(洪斯胤) 등은 김희제와 정통보의 청탁을 받고는 불문에 붙이려 하였으나, 낭중(郞中) 이정핵(李廷翮)만은 할 수 없다 고집하였으므로 결국 가벼운 죄로 면죄를 논하였다. 얼마 뒤 이정핵이 진양부사(晋陽副使)가 되었는데, 최이는 그가 법을 지키려 했던 점을 가상히 여겨 자문지유(紫門指諭)에 제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