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겨울 숲
 
 
 
 

최근 댓글 보기

 
최신 댓글이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 문화 통조림 스크랩 원림(園林)과 고가(古家) 순례 <2>
몽절 추천 0 조회 26 11.05.23 21:06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김선기 가옥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0호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정말 오랫만에 찾아간 김선기 가옥.

 지난 칠팔십년대, 행여 쓸만한 고매(古梅)가 있을까 하여 찾아들었던 기억이다.

골목을 따라 마을 맨 윗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온 몸을 비틀어대며 사랑채를 가리고 선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

 

그러고 보면,  담양 일대 상당 수 고가엔  멋드러진 수세를 자랑하는

커다란 소나무가 예외없이 한 그루 씩 서 있는 걸 보게된다.

 

 

 

 

 

사랑채

 

선조36년(1603)경에 만덕 김대기(晩德 金大器, 김선기의 14대조)에 의해

음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며, 순조25년(1825) 김현대씨에 의해 중수되었다.

 “망인당(望仁堂)”과 “대산제(大山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가옥의 형태는 안채(정면 5칸, ㄷ자형), 사랑채(정면 4칸, 측면 2칸),

사당(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배치되었으며, 결구나 치목기법이 너무나도 특이한 형태이다.


 

 

 

 

사당

 

김선기 가옥이 자리한 이곳 대소산 마을은, 구산서원에 배향된 열두분중 한 분으로

"취국헌"의 시를 쓴 만덕 김대기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저서로는 상. 하 2책, 4권으로 된 "만덕집"이 있다. 

만덕집의 간행은 일찍부터 추진되었으나 결실을 맺지못하다가

1915년에야 그의 후손인 김용직(金容稷),김영주(金永柱)등에 의해 실현되었다.

서문은 고정헌(高廷憲1797)과 송사 기우만(奇宇萬1915)이 썼으며,

 발문은 1915년에 김용직과 김영주가 썼다.

 

 

- 아래는 만덕 김대기가 쓴 詩 세 편이다 -

 

 

- 晩德遺老之齊 -

(만덕유노지제)

晩德山連瑞石山

서석산에 이어지는 만덕산 줄기
百年空老此山間

이 산간에서 헛되이 백년을 늙었다
世人遺我吾何有

세인이 나를 버렸으니 내 어찌할 것인가
齋室惟希陋巷顔

재실에선 오직 속된 거리 표정 아득하여라

 

 



- 國家危聞日至示守吾 -
(국가위문일지시수오)


家邦危聞日來多

국가의 위급한 소식 날로 더하니
男子爲身正奈何

남자된 몸으로 정녕 어찌할 것인가
殉國無緣山不可

순국자 주검은 연고 없어 묻히지도 못하는데
請君垂道敎生涯

대 도를 베풀어 내 생애 인도하게나

 

 



- 詠雪竹雨松 _

(영설죽우송)

雪積竹林蒙白玉

눈 쌓인 대숲은 백옥을 뒤집어 쓴것이요
雨沾松葉沐頭翁

비에 젖은 솔잎은 머리감은 늙은이라
老?被酒形貌變

늙은 이 몸 술에 절어 모습은 변했어도
皓首蒼顔是竹松

힌 머리 푸른 얼굴은 송죽과 같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전퇴가 있으며, 팔작기와 지붕이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굵은 누하주(樓下柱)를 세워

전면이 마루로 된 당의 형식을 갖춘 건물이다.
누하주 위에는 대청의 우물마루에서 빼낸 부재가 결구되었고

그 결구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통나무를 깍아 만든 계단의 형태가 참으로 예술이다.

 

 


 

 

 안채

 

 정면5칸, 측면2칸의 ㄷ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막돌 허튼층 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왼쪽부터 부엌, 골방, 큰방, 대청2칸, 작은방 2칸 순으로 배치되었다.

 

 

 

 

'만덕집'을 쓴 김대기(晩德 金大器)라는 인물을 잠시 살펴보자면....

 

자는 옥성(玉成), 호는 만덕 본관은 광산(光山).

만덕이라는 호는 그 향리에 있는 산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1557년(조선 명종 12년) 담양의 대곡면 대산촌(지금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대소산)에서 출생,

1631년(조선인조9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김응(金應)은 생원으로 훈도를 지냈는데

바로 옆 동네의 미암 유희춘과는 도의지교(道義之交)사이.


 6섯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학, 대학, 중용을 차례로 읽어

14세 때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한다.

16섯살이 되어서 지암(支巖) 양자정(梁子渟)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양자정은 조선 중종때 담양 지곡리에 소쇄원을 짓고 은거한 양산보의 아들이자

하서 김인후의 제자이기도 하다.

또하 송강 정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가 송강 문하에 들어간 것은 송강의 아들인 정종명, 정진명,정홍명(鄭弘溟) 각별한 교분이 있었다.


또 40대에는 사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밖에 서석(瑞石) 김언욱(金彦勖), 죽계(竹溪) 김존경(金存敬), 동림(東林) 김광혁(金光爀),

수죽(數竹) 조홍립(曺弘立)등이 그와 밀접하게 교유하였던 인물로
무등산 인근의 소쇄원, 송강정, 서봉사(瑞峯寺)를 비롯하여 전북 순창 강천사등은

그가 학문에 몰두하고 시문을 짓던 주요한 활동 무대였다

 

 

 

 

 

- 만덕 김대기 선생의 행적 -

 

만덕선생은 남다른 품성과 높은 식견을 지녔으나 평생 과거에 응하지 않고

리에서 학문과 시주(詩酒)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유인 즉, 그의 나이 19세(선조 8년 1575) 가을 전북 옥구에서

향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만덕선생도 어머니 김씨의 뜻을 받들어 광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도중 신창진(新倉津)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많은 선비들이 먼저 건너고자 다투어 배에 오름으로써 매우 위험하였다.
이를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음으로 만덕은 할 수 없이 혼자서 강 언덕에 앉아 불안스런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삐걱거리며 강을 건너던 배가 그만 전복되고 말았다. 이를 보고 만덕은

 

"명리(名利)가 사람을 곤경에 빠트림이 또한 이러한가!"

라 탄식하고 가지고 가던 책 상자를 몽땅 강 물속에 던져버리고 돌아와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벼슬길에는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만덕은 나라가 위급한 일이 있을 때면 발 벗고 나서 우국지사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1624년(조선 인조 2년) 2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어가(御駕)가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자,

만덕은 68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 방울 이슬과 같은 여생이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
 

분연히 일어나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사(義士)를 모집하였다.

 

 그는 진사 신유일과 함께 영광에 의창을 설치하여 의곡(義穀) 삼천 석을 모으고 아울러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이내 난이 평정되자 그 동안 모은 의곡을 완주부(完州府)에 바치고 해산하였다.
그 해 4월 인조 임금은 조야(朝野)에 교지를 내려 국가가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할 방도를 물었는데,

만덕도 이에 응하여 자신의 의견을 적은 봉사 를 올리게 되었다.

 봉사의 내용과 그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일곱 가지 방도가 있는데,

 

첫째는 편당(偏黨)을 없애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지극한 정성으로 현자를 구하는 것이요,

넷째는 선대에 당한 어진 재상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요,

다섯째는 명분 없는 조세를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부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거듭 귀양 가거나 죽은 자의 억울함을 살피는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하여 여헌(旅軒) 장현광이 숙덕(宿德)을 지니고 은둔함과

사계 김장생이 덕을 간직하고 나라를 근심하였음을 말하였다.“

당시 수차에 걸쳐 무고한 선비를 희생시킨 붕당정치 및 백성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조세와

부역의 폐해에 대한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재야의 선비로서 나라와 백성이 처한 어려움의 근원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덕선생의 이러한 의견은 조정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에게 건원릉(健元陵:경기도 양주에 있는 이태조의 능)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덕선생은 만년에 그의 향리에 만덕재를 짓고 여기에서 독서로 소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그는 <만덕문답>, <시자손서> 등을 저술 하였으며, 특히 율곡의<성학집요>에 심취하여
“율곡선생의 평생 정력이 이 책 속에 있다. 전체의 내용이 크게 유용하고 두루 갖추었으므로

구도의 뜻이 있는 자는 마땅히 침잠하여 완역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후 22년 뒤인 효종 4년[1653] 구산사에 노송 송희경, 눌재 문간공 박상, 면앙정 숙적공 송순,

서석 김언욱, 청계 김응회, 시은 윤원호, 율옹 송징, 물염 송정순, 구화 나무춘,

청오 임광필,동악 문혜 이안눌12분과 함께 배향되었다.

 

 

(김덕기에 관한 부분은 카폐 '광주민학회' 내용을 참조)

 

 

 

 

 


 

 

 

 

 

 

 

연계정 원림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미암 유희춘(1513년∼1577년)이 학문을 강학하던 공간으로

임란으로 소실한 것을 문인들 90여명이 힘을 모아 중건하면서

정자 앞의 계류 이름을 따 연계정이라 하였다.

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을 하였다.

 

 

 

 

 


        연계정 흥폐 사실(璉溪亭 興廢 事實)  

                   


연계정(璉溪亭)은 문절공 미암(眉巖) 류(柳) 선생이 도(道)를 강(講)하던 곳이다.

대개 선현(先賢)의 장구가 지나간 곳에는 다 가히 비를 세우거나 누각을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곳에서 쉬고 이곳에서 거처하고 이곳에 정(亭)을 짓고

또 이 정자에서 도를 강론하였으니

학(後學)들이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어찌 亭子의 흥폐(興廢)로써 깊고 얕음이 있으랴.


 亭이 추성(秋成: 담양)고을 남쪽에 있는데 사방으로 산이 솟아 있어 푸르고,

골짜기 물이 난간 앞에 괴어 못이 되고 또 졸졸 흘러서 시냇물이 되었는데,

시내 이름이 연계(璉溪)이므로 선생이 그때 亭子의 이름을 이 시내 이름에서 딴 것인지

또는 시내 이름이 亭子로 인하여 붙여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 선생의 자호(自號)가 璉溪이므로 시내와 亭子가 모두 선생의 호를 따라 이름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선생의 문집 중에 혹은 연계 권옹(璉溪倦翁)으로 칭한 것도 있으니

이로써 본다면 자호(自號)도 또한 꼭 그러하다고 볼 수 없다.  

정자는 兵亂에 무너지고 선생의 유고(遺稿)도 遺失되어 자손이 그 유허(遺噓)만을 지키니

사방 선비들은 다만 선생의 亭 터만을 알 따름이다.  


중고(中古)에 후손들이 先業이 아주 떨어지게 됨을 애석히 여겨 모든 선비와 함께

두어칸 집을 이 터에 짓고 글방 스승을 맞아 마을 자제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집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退落되므로 또 遂築하였는데 지난 무진(戊辰)년 겨울에 일국의 선비 90여인이

이곳에서 계(契)를 설립하고, 효도, 우애, 믿음, 사랑으로써 강마(講磨)하며 서로 권장하니

선생이 미친 교화가 어느 곳에서도 감발되었다.

 

그 터에 다시 기와집으로 중건하여 수신하고 휴식한 곳이 되니 계(契)를 닦아온지 40년에 다 말하기를

이 터는 옛 선생의 유적이니 선생의 정호(亭號)로써 懸板함이 가하다 하고

가친(家親)에게 큰 글씨를 부탁하여 璉溪亭이라 써서 걸었다.

광수(光秀)에게 명(命) 하여 그 始末을 기록하라 하기에 광수는 삼가 복명하기를,

"옛날 정부자(程夫子)의 안락정(安樂亭) 명(銘)에 샘물은 버려 두지 못할 것이라"하였다.


슬프다! 올바른 학문을 그 어찌 잊으리오.

오늘날 선생의 정호(亭號)로 현판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에 새롭게 됨은

실로 선현을 사모하는 뜻에서 나옴이니 선생의 도(道)가 장차 이 세상에 길이 밝으려는가.

 

 

 

 

 

 

 

 

 

내가 굳이 연계정을 '원림'이라 칭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색감도 기막힌 노랑상사화가 소담스레 피어나기에...

 

 

 

 

 

꼭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연계정 원림

 

 

 

 

 

열심히 꿀을 찾고 있는 나비의 날개짓.

근데 상사화헤 꿀이 있을까 몰러 ...?

 

 

 

 

 

모현관이 있는 풍경

 

 

 

 

 

상사화의 슬픈 전설을 아시나요.....?

 

 

 

 

 

미암종가와 연계정, 모현관 연지가 어우러진 공간을

나는 주저없이 '연계정 원림'이라 부른다

 

 

 

 


 

 

 

 

 

 

담양 매산리 소나무(2)

 

전라남도 기념물 제275호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몽한각 입구에 선 반송형 소나무로 가슴높이 둘레 평균 276cm, 높이 16m, 수령 250년.

 

 

 

 

 

매우 아름다운 수형을 뽐내는 소나무다.

 

 

 

 

 

솟을 대문 사이로 본 몽한각 (夢漢閣)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17번지

 

몽한각은 조선 시대 이서(李緖ㆍ1484∼)의 재실(齋室)이다.

이서는 태종(1401~1418)의 5세손이며 양녕대군의 증손으로

중종 2년(1507) 이과(李顆)의 왕위 추대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로 담양 명양현(鳴陽縣 :지금의 대덕)에 유배되었다.

그 후 14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한 후 자유인이 되나 끝내 귀경하지 않고 담양의 산수와 벗하면서 일생을 마쳤던 인물.

훗날 양녕대군들의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보내면서

오랫동안 이서 공의 재실이 없음을 알고, 순조 3년 (1803년)에 그를 추모하며 현재의 몽한각을 건축하였다.

 

 

 

 

 

 

 

매년 음력 7월 7일에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몽한각의 유래는 유배시절 그가 남긴 시 구절의 일부분인

'금명금야몽(今明今夜夢),비도한강파 (飛渡漢江波)'에서 기인했다.

 '어젯밤 꿈은 한강수를 건너리라' 는 구절에서

몽(夢)자와 한(漢)자를 각각 따와서 몽한각이라 칭했다고.

 




 

 

 

몽한각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의미로 빼놓을 수없는 점은 

서가 유배당시에 지은 '낙지가(樂志歌)'가 전해지기 때문.

물 왼편 네모난 오석엔 이의 '낙지가'가 적힌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본당 건물은 1916년과 1979년에 기와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솟을대문은 1966년에 조영한 것이다. 경내에는 이훈휘의 〈몽한각 상량문〉과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글이 있는 신도비가 있으며,

이서의 유서(遺書)가 윤용구(尹用求)의 친필로 조각되어 있다

 

 


 

 

 

 부지가 상·하단 영역으로 구분되었는데,

상단에는 두 단의 높은 축대 위에 남서향의 본당이 배치되고,

하단에는 넓은 마당과 솟을대문을 본당에 일축선상으로 배치하였다.

평면은 중앙 3칸의 대청마루와 양익(兩翼)에 2칸의 방을 둔 단층 유실형(有室形)이다.

그러나 특이하게 전후좌우의 처마 공간에 마루를 설치하였고,

 좌우 측면과 정면 협칸 처마에만 부분 외목도리를 설치함으로써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인 듯한 구성을 이룬 것은 보기 드문 처리법이라고.

 

 

 

 

 

평방(平枋)과 장여 사이에도 위에 소로를 낀 원형 화반

(花盤 :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을 설치하고 있다.

그러나 외목도리에 위치한 주두 결구는 포작(包作) 없이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창호는 전면은 띠살문, 배면은 판문(板門)으로 하였고,

대청마루의 문은 4분합 들어열개문으로 서까래에 걸쇠를 걸치게 하였다.

가구는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세운 다음

종량(宗樑)을 얹어 종도리를 받치는 무고주(無高柱) 5량가이다

 

 

 

 

 

지방유형문화재 제54호 몽한각

 

 '낙지가'는 순 한문 투로 표기된 한문가사라는 점에서

전남지역 가사문학의 효시 작품으로 손꼽아 문학적 위상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형식은 모두 4ㆍ4조이며, 전체 152구로 그가 남긴 문집 몽한영고(夢漢零稿)에 수록되어 전한다.

 

 

 

 

 

낙지가의 주 내용은

무궁한 태평성대를 축원하면서, 담주(지금의 담양)의 경치와 미풍양속을 찬양.

 또  자연 속에서 처사로 살았던 중국의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흠모,

그의 사상을 이어 초가삼간을 짓고, 선현의 도를 본받고 ,

안빈낙도로 살아가겠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

 

 

 

 

 

서의 '낙지가'는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의 뒤를 이어

송순이 '면앙정가'를 창작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도 부여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담양 매산리 소나무 (1)

 

전라남도 기념물 제275호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반송형으로 발달한 소나무 2주로 원색생의 소나무로 보인다고.

몽한각 근처에 선  소나무로 가슴높이 둘레는 평균410cm, 높이는  29m, 

수관폭은 동서로 12m, 남북으로 15m

수령은 350년으로 추정한다는데 참으로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다.

 

 

 

 

 (1)과 (2)  두 그루의 소나무는

 묘지옆에 심었던 전형적인 '도래솔' 로 추정한다고

 

 

 

 


 

 

 

 

 

담양군 창평면 삼치천 마을 돌담길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65호

 

 

 

 

슬로우시티의 대표격인 창평 삼지천 마을 돌담길

 

 

 

 

 

 

 

 

 

 

마을 전체의 돌담길은 등록문화재이고,

고재선 가옥, 고광표 가옥, 고정주 가옥은 전남 민속자료이다.

이들 외에 남극루가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삼지천의 현재 행정구역 명칭은 삼천리이다.

삼천(三川)이란 월봉산에서 시작한 월봉천(月峰川)과 운암천(雲岩川) 그리고 유천(柳川)이다.

이들 세 갈래 하천물이 모인다고 해서 삼지천이 되었고, 삼지천이 줄어 삼천리가 된 것이다.

삼천리는 현재 상삼천과 하삼천으로 나누어져 있다.

삼지천 마을은 동쪽에 월봉산, 남쪽에 국수봉이 자리한 길지로,

봉황이 날개를 펴 감싸 안은 형국이라고 한다.

 

 

 

 

 

 

 

임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5월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 전주, 여산, 황간을 거쳐 7월 금산에 이르렀다.

 고경명 고인후 부자는 이곳 와평(臥坪: 눈벌)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고경명의 시신은 화순현 흑토평에 묻히게 되었고 고인후의 시신은 창평현 수곡리에 묻히게 되었다.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창평에 묻히게 된 것은

처가인 함풍이씨가 창평에 세거하고 있었기 때문. 고인후는 32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함풍 이씨와의 사이에 이미 부림, 부천, 부즙, 부량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창평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  장흥 고씨들이 세가를 이루게된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 11.05.23 21:50

    첫댓글 콘크리트보다 오래가는 가옥들 입니다...요즘의 가옥형태도 늘 기본엔 古家를 바탕으로 한다고들 합니다~아직도 더 배워야 하는 현대가옥들인게죠...

  • 작성자 11.05.24 10:02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전통가옥 기법을 왜 이어가지 않을까요? 아파트는 그리 할 수 없겠죠? 돈도 무지 많이 들고...요즘 가옥들이 고가를 바탕으로 하는 어쩜 당연할지도 몰라요. 그런 건축가는 과학자라고 해도 맞을듯.

  • 11.05.24 15:17

    시간과 돈이 많이 드니,,돈을 벌수가 없으니 현시대엔 당연하겠죠...옛날엔 못이 없어도 나무못이나 연결고리를 만들어 쓰고...마감도 동물뼈나 생선뼈갈아만든 아교나 옻으로 칠했으니,,사람몸에 해로울게 별로 없었죠...지금은 마감재도 프라스틱재나 본드라서 사람몸에 안좋은것들로만 이뤄져있으니..그독기를 이길려니 불독처럼 사나워 지는듯합니다~^&^

  • 작성자 11.05.24 17:12

    예...아귀 잘 맞는 댓글 감사해요.^^

  • 11.05.25 18:54

    와!!!연계정 몽한각 건축하신 명장님 손도 정말 훌륭하시고 귀한 한옥에 담긴 사연들도 역사 그대로 증거해주시고 중간에 가옥마을 주변에 산사화 소나무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이룬 정경 꿈결같고 나무는 시간이 지나서 손길이 닿을수록 더 윤이나고 멋난다는데 정말 오랫시간 지난 지금뵈도 감탄이 아!!나올것같아요^^몽절님 올려주신 귀한 사진뵙고 가까이서 보고 나뭇결 나무계단 만져보는듯하고 버블님 말씀하신 나무못 연결고리 아교나 옻 옛선조분들 지혜도 처음으로 알고 너무 행복한 여행다녀왔어요^0^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