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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생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사자가 될 수 있을까. ‘붓다뎐’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④“천상천하 유아독존”은 그런 뜻 아니야
붓다의 탄생에 대한 불교의 전승은 놀랍다. 룸비니 동산에서 갓 태어난 아기 왕자는 두 발로 우뚝 섰다. 그리고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봤다. 그런 뒤에 발을 뗐다. 정확하게 일곱 걸음이다. 아기 왕자가 발을 뗄 때마다 땅에서는 연꽃이 올라왔다고 한다. 왕자는 그 연꽃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걸었다.
그런 뒤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은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그걸 한문으로 옮기면 우리에게도 익숙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된다.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전승이 불교에는 있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일화다. 인도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탄생불. 백성호 기자
#붓다는 이치의 과학자
불교의 이 전승은 과연 사실일까.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달랐다. 그래서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며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세상에 알렸다.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을 숭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첫 단추부터 달랐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불교 신자도 분명히 있지 싶다.
과연 그럴까. 나는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붓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 가르친 것은 ‘이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과학’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정체, 나조차도 알 수가 없는 감정의 정체, 마음의 정체,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정체, 삶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영원의 정체 등. 붓다는 우리가 품어내는 그 모든 물음표에 대해서 느낌표를 건넸던 인물이다. 그러니 붓다는 마음의 과학자이고, 이치의 과학자였다.
그런 붓다가 갓 태어난 신생아 때 이적을 행했을까. 물론 아니다. 붓다의 탄생 일화는 후대에 생겨난 이야기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인류를 위해 그 이치를 설한 붓다에 대한 일종의 찬탄이다. 고마움의 찬탄이다. 게다가 붓다의 탄생 일화는 단순한 찬탄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가 품어도 좋을 화두(話頭, 불교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궁리하는 물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 델리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불상. 인도의 전통과 간다라 미술 양식이 함께 보인다. 백성호 기자
그게 뭘까. 다름 아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언뜻 들으면 “내가 제일 잘났어”로 들린다. 실제 우리 주위에서도 ‘독불장군’이란 말 대신 ‘유아독존’이란 표현을 갖다 쓰기도 한다. 이런 비유도 따지고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말뜻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무슨 뜻일까. 많은 사람이 아기 붓다의 외침을 풀면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말이다. 법정 스님이 번역한 일본의 저명 문학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그런 식으로 번역한다. 쇼코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 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
쇼코뿐 아니다. 불교계에서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풀어내는 사람은 많다. 또 그렇게 믿는 이들도 많다. 나는 달리 본다. 이유가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핵심은 ‘독존(獨尊)’이 아니라 ‘유아(唯我)’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아(唯我)의 ‘나(我)’는 어떤 나일까. 깨달음을 이룬 나다. 그러니 작은 나가 아니다. 너희는 못났고, 나는 잘났다고 하는 비교의 선상에 있는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아주 큰 나다. 이 우주의 바탕이 되는 나다. 그걸 알면 “나 홀로 존귀하다”의 뜻이 달라진다. “내가 제일 잘났어”가 아니라 “진리 홀로 존귀하다”는 뜻이 된다.
룸비니 동산의 마야데비 사원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그 뒤에 아름드리 보리수가 한 그루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붓다의 외침을 비판하는 사람도 여럿 만났다. “아니, 어떻게 자기만 최고이고, 자기가 가장 존귀하다고 할 수 있나. 그건 너무 독선적이고 오만한 것 아닌가.” 이분들의 지적도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다. 붓다가 말하는 ‘나’를 ‘작은 나’로만 보기 때문이다.
# 예수의 선언…아버지에게 가는 길
그리스도교에도 비슷한 오해의 사례가 있다. 예수는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6절)고 말했다. 이 구절을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 봐, 예수님을 통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잖아. 그러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거지. 다른 종교에는 길이 없는 거야. 예수님을 통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건 이들에게 예수의 선언은 굉장히 배타적인 선언이 된다.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내치는 공격적 선언이 된다. 그건 예수를 ‘작은 예수’로만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가 말한 ‘나’를 ‘큰 나’로 보면 달라진다. 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속성’으로 보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살았던 육신의 ‘작은 예수’가 아니라 그 육신 안에 깃들어 있던 ‘신의 속성’을 통과하라는 선언이 되기 때문이다.
인도 중부에 있는 산치 태탑의 조각상. 아소카 왕 시절에 산치 대탑이 조성됐다. 백성호 기자
나는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아기 붓다의 탄생불 앞에 섰다.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동산의 나무는 푸르고, 꽃들도 예뻤다. 바람도 불었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이 모든 풍경을 관통하며 붓다는 말한다.
“오직 진리만이 홀로 존귀하다.”
짧은 생각
초기 불교 경전인
『수타니파타』에는
재미있는 대화가 하나
수록돼 있습니다.
다름 아닌
붓다와 소 치는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마치
바둑을 두듯이,
티키타카처럼
치고받는 대화와
시처럼,
노래처럼
피어나는 메시지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소 치는 사람
다니야가
말합니다.
“나는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놓았다.
마히야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
움막 지붕은 잘 이었고,
불은 충분히 지펴놓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그 말을 듣고서
붓다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나는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이 확 터져 있다.
움막에는 지붕이 없고,
불은 꺼져 있다.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소 치는 사람은
행복을 노래합니다.
밥도 있고,
우유도 있으니
걱정도 없다고 합니다.
움막의 지붕도
튼튼하고,
모닥불도 충분히 피웠으니
두려울 게 없습니다.
이 자체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비야,
내릴 테면 내려라!
그런데
붓다가 노래하는
행복은 좀 다릅니다.
지어놓은 밥도 없고
짜놓은 우유도 없습니다.
당시의 출가자들은
탁발로 걸식했으니
더더욱
가진 음식이
없었습니다.
붓다는
소 치는 사람과 똑같이
강변에서 자지만,
붓다의 움막에는
지붕이 없습니다.
비라도 쏟아지면
흠뻑 젖어야 할
처지입니다.
게다가
몸을 녹일
모닥불도 없고,
불을 지필
나뭇가지나 장작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야,
내릴 테면 내려라!”
왜 그럴까요?
지붕도 없고,
모닥불도 없는
붓다가
왜 큰소리를
치는 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소 치는 사람의
행복론과
붓다의 행복론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소 치는 사람이
말합니다.
“움직이지 않게
말뚝을 박았다.
문자풀(갈대의 일종)로 잘 만든
새 밧줄은
어미 소도 끊을 수가 없다.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그 말을 듣고
붓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황소처럼 결박을 끊고
큰 코끼리처럼
악취 나는 덩굴을 뭉개버리고
나는 다시는
모태(母胎)에 가지 않으리니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소 치는 사람은
단단한 말뚝과
튼튼한 밧줄로
소를 잘 묶어 놓았으니
행복하다고 말하고,
붓다는
황소처럼 나는
결박을 끊었으니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폭우가
쏟아집니다.
두 사람이 머물던
마히야 강변의 낮은 땅은
순식간에
빗물로 가득 찼습니다.
소 치는 사람은
그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노래한 행복이
무너질 수도 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붓다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위대한 성자여!
당신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따지고 보면
소 치는 사람이
노래한 행복은
우리가 노래하는
행복과
무척 닮았습니다.
다들 압니다.
그런 행복은
조건을 갖추었을 때만
유지됨을 말입니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행복임을 말입니다.
붓다는
그 너머의 행복을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지고,
빗물이 차올라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 말입니다.
떠내려가지 않을
행복 말입니다.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저는
붓다의 이 외침에서
삶에 대한
본질적 용기를 봅니다.
이런 용기는
오로지
붓다만의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붓다의 내면에 있는
용기의 뿌리,
그게
우리의 내면에도
똑같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그걸 찾는 날,
누구나
이렇게 소리를
치겠지요.
“하늘이여,
비를 내릴 테면 내려라!”
백성호의 붓다뎐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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