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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나는 누구인가> ①②③ / 배철현교수 칼럼
ysoo 추천 0 조회 93 15.05.09 08: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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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칼럼]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베이징박물관의 찰스 다윈 관. 찰스 다윈이 저서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적자생존 이론은 과학 뿐 아니라 여러 학문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사진=신화사>

 

 

[나는 누구인가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성’ 탐구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의 유전인자가 발견되기 전,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인간을 모호한 개념들로 정의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 유전인자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인문학자들은 인간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유전자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이 주도한 인간본성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종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적자생존의 영웅으로만 해석한다.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 인간은 자기 자신, 자신과 관계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인가? 과학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답다고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92)도 이런 인간본성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학의 발전으로 흔들리는 심정을 절친 아서 헨리 핼럼의 죽음을 기리며 시로 토로하였다.

이 시는 핼럼이 죽은 1833년부터 17년간 틈틈이 기록해 1850년 <인 메모리엄 A.H.H>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그는 이미 자신이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신앙이 지질학, 생물학, 특히 진화론에 크게 흔들리자 ‘과연 이 세계는 신의 질서가 지배하는가 아니면 무자비한 자연의 투쟁인가?’라고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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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슨은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외친다.

 

“Who trusted God was love indeed. And love Creation’s final law.

Tho’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With ravine, shriek’d against his creed.

(신은 진실로 사랑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리고 사랑이 창조의 마지막 법이었다고 누가 믿겠는가?

자연은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들고, 계곡에서는 인간의 신조를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시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산 지식인의 종교와 과학의 상반된 세계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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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 1859년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기원>을 출간하면서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A.H.H> 시구 56에서 “Nature, red in tooth and claw”를 서문에 인용한다.

20세기 다윈의 추종자인 영국 옥스퍼드대학 교수 리차드 도킨스도 <이기적 유전자>에서 다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모든 생물의 행동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원칙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적자생존’이란 문구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대체하는 용어로 영국 생물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생물학의 원리>(1864)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펜서는 ‘적자생존’ 이론을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 특히 경제이론에 접목시킨다.

 

다윈과 허버트 모두 모든 생물은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적자만이 생존하는 잔인한 투쟁의 영원한 회로에 빠져있다고 생각했다. 다윈과 허버트의 과학이론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적자생존 이론은 나치와 공산주의의 핵심사상으로 변질되고 19세기 말, 아니 오늘날까지 풍미하고 있는 ‘무자비한 자본주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적자생존-약육강식에 의거한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이며 혈연주의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틀을 통해 대기업은 인간에게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생필품이라고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세뇌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거대한 시장경제를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그 덮개 아래 우리는 하루를 연명한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에 의하면 강력하고 거대한 기업이 작고 연약한 회사들을 갈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들의 행위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자연이론에 의해 정당화된다.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은 당시 영국에서 소수집단의 욕심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열렬히 수용되었다.

독일의 역사가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란 책에서 “경제학을 생물학에 적용함으로 자연선택이 영국에서 진리로 수용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는 “자연선택은 자본주의 윤리와 맨체스터 경제학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욕망의 철학’의 완벽한 표현이다”라고 개탄한다.

 

 

스웨덴-영국의 작가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랜더(Oscar Gustave Rejlander, 1813~75)가 그린 알프레드 테니슨의 초상화. 테니슨은 <인 메모리엄>에서 흔들리는 신앙심에 대한 인간적 고뇌를 드러냈다.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시로 칭송 받는다. <사진=위키미디어>

 

 

적자생존 이론, 경제로 확대 적용

 

실증주의 창시자이자 ‘이타주의’ 개념을 만들어낸 오귀스트 콩트(A. Comte, 1798~1857)는 자신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찬양했던 과학의 시대와 이타심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는 공포로 가득 찬 유럽의 혁명시대를 살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사회적 질서의 도래를 자신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 후손들, 동료들에게 의미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행복과 의무의 공통자원인 자비를 향한 본능의 직접적 요구”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믿는 오늘날 과학근본주의자들은 인간의 유전자가 불가피하게 이기적이며, 라이벌에 대항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해왔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은 모두 ‘나-자신’을 최우선으로 놓도록 프로그램 돼있다. 그러므로 이타주의는 환영에 불과하며 인간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인 것이다.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은 이타심도 실제로는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이시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타적이 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위험에 빠진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즉각적인 행위도 결국은 유전적으로 이기적인 행위이다. 그런 행위의 표면적인 의도는 이타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혈연을 종속시키기 위한 ‘혈연선택’에서 출발한다.

이타주의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예외로 자연선택의 실수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생존 메커니즘이었던 것이다. 협동하는 법을 배운 인종들은 자원에 대한 절박한 경쟁에서 유용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도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에게 보답을 기대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선한 행위는 종종 완전히 의식적이며 계산적이고, 그의 술책은 사회의 복잡한 승인과 요구에 따라 세밀히 조직된다.”

 

이렇게 ‘덜 노골적인 이타주의’는 거짓말, 가식, 자기기만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기 행동이 실제라고 믿고 연기할 때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 당시 자신의 이기심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하지만, 내심 상대방도 그와 같은 이타적인 행위를 자신에게 하기를 바란다.

 

이 연재는 ‘인간은 정말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시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정말 도킨스나 윌슨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기적일 수밖에 없나?

 

우리 주변의 소방관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든다. 하루 종일 시청에서 쓰레기 수집 일을 하면서 주말에 양로원에 가서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종종 읽는다.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7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시작으로 오늘날 현대인까지 인류사의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이루어낸 위대한 문명을 찾고, 오늘날 우리 삶의 지표를 더듬어 가고 싶다.

 

 

 

 

[배철현 칼럼]

크로마뇽인의 심장소리를 듣다

 

 

스페인 북해안에서 발견된 알타미라 동굴벽화 복제본. 벽화가 그려진 동굴은 크로마뇽인들에게 성스러운 장소였다. <사진=위키미디어>

 

 

[나는 누구인가②]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핑겐스(Homo Pingens)’

 

어린 시절 꼭 배워야 할 기술 중 하나가 그림그리기였다. 동네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장군 아그리파 흉상 포스터가 달린 화실들이 즐비했다. 우리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가 적어도 꽃병 정도는 흉내내 유사하게 그릴 수 있는 ‘창의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화실에 아이들을 등록시켰다. 그림 그리는 행위가 인간 창의성의 표상일 수 있을까? 왜 인간만이 그림을 그릴까?

 

예술에 대한 연구는 18~19세기 철학자 칸트나 헤겔에겐 중요한 학문분야였다. 그러나 고대에는 달랐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 특히 회화를 무시했다. 이들은 회화가 진리를 묘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껏해야 이데아에 대한 그림자, 즉 현실의 모사품일 뿐이다.

플라톤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 속 용어를 빌리자면, 동굴 안에 다리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있는 포로들은 그들 뒤에서 한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인형의 그림자를 포로들이 마주한 벽에 비추게 한다. 포로들은 그 환영이 실제라고 믿지만, 그것은 인형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진리’에 대한 흉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에 와서 예술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탈리아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는 마음을 전달하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빈치는 인간 마음속에 숨겨진 진리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회화, 시, 음악을 인간 내면에 숨겨진 지성에 대한 예술적 표현이라 정의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까? 인간이 그린 최초의 그림은 프랑스와 스페인 동굴에서 발견된다. 이런 그림의 존재가 알려진 시기는 1879년 11월이다. 스페인 북해안 알타미라의 영주인 사우투올라 자작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다섯 살 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근처 동굴에 들어가 석기 따위를 수집하곤 했다. 아빠의 유물 발굴에 싫증이 난 마리아가 동굴을 두리번거리더니 갑자기 “아버지, 소들이 천장에 있어요!”라고 소리 지른다.

그 그림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벅찬 가슴으로 그 짐승들의 그림을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들의 작품이라고 확신하고 스케치 한다. 그는 당시 프랑스 고고미술사학회에서 구석기 시대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벽화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회는 그 벽화가 너무나 뛰어났다는 이유로 위작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사우투올라는 아무에게도 그 그림을 인정받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 죽었다.

 

저명한 프랑스 고고미술학자 에밀 까르따이약(1845~1921)은 사우투올라의 주장을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인류가 점차 진화하고 문명화된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신봉자였다. 그는 2만 년 전 구석기시대 거의 ‘동물’ 상태인 구석기인들이 그런 정교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예술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여유로운 문명사회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다. 크로마뇽인의 예술을 연구한 최초의 예술사학자인 신부 앙리 브루이(Abbe Henri Breuil, 1877~1961)는 그들이 영적인 예술창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폄하한다. 후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등장하는 미신적인 행위를 기초로 크로마뇽인들의 예술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분석한다. 원시인들이 자신이 잡고 싶은 동물들을 그림으로써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원시적인 풍요제사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동굴벽화에 남겨진 동물 중 뾰족한 칼이나 창으로 긁힌 흔적이 있어 그의 가설이 그럴 듯해 보였다. 이 이론은 간단명료하여 매력적으로 보이나 원시인들이 가진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간과하고 설명하지 않았다.

 

독일 표현주의의 구루이며이란 책의 저자인 빌헬름 보링거는 플라톤의 예술 정의를 신봉한다. 그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공감’의 기술이며 원시인들은 공감이란 감정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거친 현실상황 때문에 예술작품을 남길 수 없고 기껏해야 알 수 없는 기호만 끼적일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에밀 까르따이약은라는 책에서 사우타올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조사한 끝에 그 벽화들이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예술작품이라 선언하고 선사시대 미술연구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그는 예술을 ‘진리에 대한 흉내’라고 정의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동굴벽화 속 대상은 ‘또 다른 자아’

 

왜 크로마뇽인들은 거주하는 장소가 아닌, 지상으로부터 50m 이상 지하로 내려가 이런 찬란한 벽화를 그렸을까? 횃불이 없다면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본성과 위대함과 연결시키는 설명은 없을까?

상상해 보자. 지금부터 2만여 년 전,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들은 빙하기에 살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이들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들이 누구인가, 왜 사는가 하는 철학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를 표현할 방법을 간구하였다. 이들은 눈 덮인 지상이 아니라 산이나 계곡에서 발견한 동굴로 들어간다. 깊고 좁은 지하통로를 통해 지상으로부터 한참 내려간다. 이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과 귀를 멍하게 만드는 침묵만이 존재한다.

 

크로마뇽인들은 횃불을 들고 내려와 자신들과 지상에서 삶을 공유하고 있는 동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동물들은 사냥 대상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자신의 이웃이나 ‘또 다른 자아’라는 사실을 벽화로 표현한다. 그들이 이 고유한 공간 안에서 듣는 것은 자신들의 심장소리뿐이다. 자신의 심장소리는 듣는 행위는 영적인 의례이며, 지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여기서 삶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먹이사슬의 운명을 묵상하고 깨닫는 ‘제3의 귀’를 얻게 된다.

이 장소는 크로마뇽인들이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살아있는 심장소리를 듣는 ‘시스틴 채플’이었다. 이들은 이 성소에서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처럼 삶에 대한 신비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표현했다.

 

구석기시대 인류의 조상들은 그들이 서로 하나이며 심지어 동물들과도 하나의 끈으로 이어졌다는 ‘유동성’을 확인했을 것이다. 깊은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선물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없는 ‘그것’까지도 하나라는 인식이다. 그들은 또한 이미 죽은 조상들과 소통하여, 자신들도 다음 세계로 진입하는, 즉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투과성’을 경험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신들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획득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성인들, 모세, 엘리야, 플라톤, 붓다, 예수, 공자, 노자, 무함마드가 그런 섭리를 깨달은 자들 아닌가?

 

 

 

 

[배철현 칼럼]

문명창출 원동력, 문자와 도시

 

 

우룩은 인류 최초의 도시다. 이라크 남동부 유프라테스강 부근에서 발굴된 우룩 도시 유적 <사진=British Museum>

 

 

[나는 누구인가③]

 

‘우룩(Uruk)’과 ‘도시인(Homo Civitas)’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문자’다. 인류가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과 달리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70만 년 전 인류는 불을 발견해 다룰 수 있었고, 허리를 펴고 두 발로 걷게 됐다. 이들을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라 부른다.

 

그 후 기원전 1만 년경 중동지방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보리와 밀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사냥·채집경제에서 농경·정착경제로 급변하게 됐다. 인류는 파종하면 싹이 나고 그 열매를 추수하는 자연의 순환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킨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신석기혁명’이라 불렀다. 인류는 이제 겨울 동안 먹을 것을 찾아 다니지 않고 촌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공동체를 이뤄 살다 보니 자연히 갈등이 일어나고 누군가 대표로 나서 중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기원전 6000년경 촌락들이 등장한다. 촌락들이 성곽을 짓고 공동체를 방어하고 필요한 물품을 다른 촌락과 교역하며 점점 촌락들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 때 촌락과 촌락의 소통, 한 촌락의 행정을 위해 새로운 소통체계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문자다.

 

인류는 문자를 통해 촌락을 더 큰 촌락으로, 급기야 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최초로 문명을 시작했지만 다른 문명들도 독립적으로 후대에 등장한다. 기원전 3100년 이집트, 기원전 2500년 인도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기원전 1900년 중국 황하 유역, 그리고 기원후 9세기경 아메리카 대륙에서 등장하였다.

왜 이렇게 다른 시기에 문명이 등장했을까? 학자들은 기후변화로 농업이 가능해진 시기가 지역별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우룩(Uruk)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 중 가장 먼저 문자를 기반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에 의하면 우룩은 엔메르카르가 기원전 4500년경 건설했다. 수메르(오늘날 와르카, 이라크) 남쪽 우룩은 셈족어인 히브리어로 에렉으로 음역되며, 아마도 ‘이라크’ 국명의 어원이다.

우룩이란 도시는 인류 최초 영웅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7세기 우룩 왕인 그는 불멸을 찾아 가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문자’라는 소통수단을 기반으로 ‘도시’를 이룩했다. 사진은 인류역사상 첫 도시 ‘우룩’ 제1왕조 5대 왕이었던 불멸의 영웅 길가메시. 사자를 굴복시킨 모습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기원전 7세기 사르곤 2세 왕궁 부조다. <사진=위키미디어>

 

 

진흙 계약서에 인장으로 소유 표시

 

우룩은 문명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완성한 도시다. 문명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문자와 도시다. 이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해야 시너지를 발휘해 문명을 이룰 수 있다.

고고학에서 설정한 우룩 IV지층은 기원전 3300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자가 등장한다. 문자는 낙서와는 달리 모양이 그림문자라 해도 그 도시의 경제·행정체계 안에서 통용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진흙이 아닌 돌로 지은 행정건물, 종교시설인 지구라트가 등장한다. 특히 수많은 원통 인장들이 발견됐다.

우룩인들은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진흙으로 만든 계약문서 위에 진흙이 마르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원통인장을 굴려 표시하였다. 원통인장은 개인의 정체성과 명성을 표시하는 도구다. 또한 우룩은 오늘날 뉴욕이나 파리처럼 명성 있는,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도시였고 기원후 300년까지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다. 우룩은 1853년 대영박물관의 윌리엄 로푸투스가 발굴하면서 과거의 영광이 복원됐다.

 

수메르인이 건설한 우룩은 기원전 4100~3000년 사이 융성했다. 우룩은 상업과 행정의 중심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우룩을 중심으로 도시와 문자가 등장한 사건을 ‘우룩 현상’이라고 부른다. 우룩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이집트와 터키,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 문명탄생을 연구하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이 완전하지 않아 우룩 현상에 대한 구체적 정황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 중이다. 문명이 시작된 우룩에선 처음으로 그릇이 대량생산됐다. 테두리가 일정하지 않은 우룩 그릇들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미뤄 전문적 도공들이 삯을 받고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두리가 울퉁불퉁한 그릇’은 북쪽 도시 마리에서도 발견된다. 이 그릇이 인간이 처음으로 대량생산한 제품이다.

 

우룩은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에안나’과 ‘아누’다. 에안나 지역은 우룩의 여신 이난나를 위한 공간이고 아누 지역은 이난나의 할아버지인 아누 신을 위한 공간이다. 우룩에서 발견된 대리석 여성얼굴 가면을 ‘와르카의 가면’ 혹은 ‘우룩의 여주인’이라 부른다. 아누신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래된 하늘신이며 신들의 모임을 관장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난나 여신이 최고신으로 등극하자 높은 담을 쌓아 그녀를 위한 특별한 공간을 표시했다. 이난나 여신은 샛별여신이자 전쟁여신이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 신이자 지혜의 신인 엔키로부터 수메르 문명의 문화적 틀인 ‘메’를 훔쳤다고 한다. ‘메’는 우주 삼라만상의 운행원칙이자 인간사회의 규범, 인간 개개인이 살아있는 동안 해야 될 자신의 운명이다. 신화에서 엔키신이 ‘메’를 에리두라는 도시로 가져갔지만, 이난나 여신은 아버지를 속이고 다시 우룩으로 가져갔다. 이 신화는 우룩이 수메르 문명의 중심임을 시사한다. 에리두는 원시적 삶을, 우룩은 새로운 삶인 ‘도시’문화를 각각 상징한다.

 

수메르는 우룩 시대를 거쳐 초기 왕조시대로 진입한다. 우룩이 아직 수메르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고 있었다. 길가메쉬 왕이 우룩의 성벽을 쌓았다. 라가쉬라는 도시에서는 에안나툼 왕이 등장해 라가쉬 제1왕조를 기원전 2500년경 건립한다. 라가쉬의 왕 루갈-짜게시는 우룩을 흠모한 나머지 우륵을 수도로 정한다. 기원전 2334년 셈족 사람인 사르곤이 아가데라는 곳에서 왕국을 세운 후 우룩으로 들어와 이난나와 아누 신전을 재건하였다.

 

기원후 3세기 이후 버려진 이 을씨년스러운 우룩이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창조적 공간이었다. 우룩에서 인류는 자신의 의견을 말이 아닌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상징체계를 고안해냈다. 이 상징체계는 나만, 혹은 한 집단 안에서만 소통되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마을과 도시에도 통용됐다.

 

문자를 사용하는 공동체는 자신들이 약속한 문자라는 상징체계를 지키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했다. 처음으로 도시에 거주하게 된 ‘호모 시위타스(Homo Civitas)’는 서로를 배려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법’이란 체계도 만든다. 초기의 법은 기원전 2400년경부터 등장한 왕정제도에 의해 취지가 흐려졌지만, 공동의 이익을 위한 시도에서 등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출처 :

NEXT NEWS NETWORK . 아시아엔

http://kor.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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