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레의 패권 장악과 번영
페니키아의 전성기 초반 즉 기원전 12세기 말에서 11세기까지의 시기는 티레보다 시돈이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의 <판관기>,<사무엘서>는 물론 <웬 아문의 항해기>와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의 비문을 보아도 시돈의 우위는 명확했다. 시돈이 이런 우위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정치적 분열로 인해 경제력과 군사력이 모두 약화되어 아시아 방면의 종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집트의 쇠퇴 때문이었다. 물론 두 도시 다 통상 의존도가 높지만 섬에 시가지를 두고 내륙 운송로는 하나 밖에 없는 티레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비옥한 해안평야를 끼고 있고, 여러 개의 내륙 운송로를 가진 시돈이 위기를 더 잘 견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돈 식 토기가 시리아에서부터 이집트까지 광범위하게 발굴되는 등 갈릴레아 일대까지 시돈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스라엘과의 협력으로 돌파구를 연 티레는 기원전 11세기가 끝나갈 무렵부터는 시돈을 제치고 주도권을 장악한다. 에게해-그리스 일대에서 발굴되는 토기 등도 티레 쪽이 훨씬 많아진다. 이후 건설된 페니키아 해외 식민지의 대부분이 티레의 작품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중 하나가 멀리 북아프리카에 건설된 우티카 이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러 티레의 해상 통상제국은 점점 확대되어 갔고, 마침내 90년에 걸친 히람 왕조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에드 바알 1세 (기원전 887-
856 재위)는 시돈의 왕까지 겸하기에 이른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가장 악명 높은 악녀 이제벨 왕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두 도시국가가 합쳐진 것은 아니고 17세기 초, 스튜어트 왕가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두 왕국의 왕을 겸하는 것과 비슷한 일종의 ‘동군연합’이긴 하지만 티레의 발전이 얼마나 눈부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티레를 중심으로 한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본토에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서 지중해에 다수의 식민도시를 만들면서 지중해를 사실상 페니키아의 바다’로 만들기에 이른다. 물론 그리스인들도 그들의 뒤를 따르는데, 여기서 프랑스의 대 역사가 브로델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페니키아인은 동지중해의 연안지대에 뿌리를 두었고, 그리스인은 에게 해와 그리스 중부의 해양도시 코린트를 출발점으로 두었다. 둘 모두 발전된 문명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고 교화시킨다는 식민지 개척의 일반 법칙에 부합된다. 이 경우 힘은 문명, 도시들 간의 연대, 금속을 다루는 기술 거래와 시장의 장악력을 뜻한다. 당시 중동에서 배를 띄우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 기원후 15세기와 16세기 바다의 위대한 발견 이후 –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유럽에서 배를 출발시킨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식민지 개척자들은 먼 지역의 해안에 전초기지와 도시를 세울 때 아스텍, 마야, 잉카 또는 무굴 제국처럼 발전된 문명세계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유럽처럼 고대의 동양은 먼 거리까지 그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의 내적인 분열과 이래다툼, 뿌리 깊은 증오심까지 동시에 전파했다. 식민지 개척자와 상인들은 그 땅들에서 큰 어려움 없이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었고, 곳곳에 도시를 세웠다. 그러나 이 축복 받은 땅들은 경쟁관계에 의해 분열되면서 전쟁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