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옥 치 부
신발이 온데간데없다. 누군가가 꿰신고 가버린 것이다. 피난 길이었거나 산속을 헤매다가 잃었다면, 목숨 부지한 것만으로 천만다행이니 그 신짝을 잃었다고 애통해할 것까지는 없다.
새로 사면 될 일이 아닌가. 하나, 가만있는데 실물(失物)을 하니 부아가 치민다. 대신 남겨 놓은 신발을 꿰신고 나오며 액땜으로 여겼다. 더 엄청난 재앙을 가볍게 치루는 걸로 여겨야 빨리 평온해 질 터이다. 그런데 발자국을 뗄 적마다, 길들지 않은 신발이 걸리적거려 신발 잃어버린 사실을 들추는 것 아닌가.
타자의 발고린내가 모세혈관을 통해서 전신에 퍼질 것 같다. 찻간에서는 발을 빼어 신발 위에다 발을 얹었다. 집에 닿는 길로 팽개쳐 버릴 참이다. 말이 빗나가지만 - 조선시대, 당시 제일의 풍류가로 호방한 백호 임제는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으리!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 짝씩 신으셨습니다요.” 했더니 길 오른편에 있는 자는 나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왼쪽에 있는 자는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무슨 문제란 말이냐? - 치열한 당파싸움 시절 시국을 빗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액땜의 위안과 불편한 속을 삭일뿐이다.
식당에서는 더러 의도적인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모양이다.
“신발을 각자가 챙기세요. 당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 주인 백 -”
머리에 이고 다니거나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으니 참 어이없다.
신발이 바뀐 일은 처음이 아니다. 내가 먼저 꿰신고 나온 적은 없다. 그러니 피해만 입은 것이다. 실수이건 의도적이건 자기 신발보다 나은 것이기에 바꿔 신고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기에 반사적으로 받는 피해의식이다.
이런 와중에도 신발이 바뀌었을 때는 자기 것과 빨리 비교를 한다. 얼마만큼 낡았는가, 싸구려인가, 유명메이커가 있는 것인가, 자기 신발보다 낫다는 판정이 내리면 오히려 횡재를 했다는 생각으로 불쾌감이 수그러질 것 같다. 바꿔 신고 간 녀석이 나중에 알아채고 도로 찾으려고 나타날 것 같다. 얼른 현장을 뜨고 싶은 생각도 날 게다. 역시 여차직하면 바꿔치기할 생각이 잠재해 있었다는 심보 아니겠는가,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신발은 신체 일부와 마찬가지이다. 외출 때는 절대 떨어지지 않고 동고동락한다. 옷은 한두 가지를 더 껴입거나 벗어제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그럴 수 없다. 겹쳐 신을 수도 없고 맨발일 수도 없다. 반드시 한 가지를 신어야 한다.
저승길에도 신는다. 미당(未棠)의 시 귀촉도(歸蜀途)에 이런 구절이 있다.
“흰 옷깃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미투리…….”
그러한대도 오래되거나 쓸모없다 해서 폐기처분 물건들 헌신짝처럼 내팽개친다고 한다. 신발을 일반 장신구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산이 풍부해서 아직 말짱한 신을 버리는 등, 물자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 풍습이 만연해 있다. 그리고 자꾸 새 신발을 탐하다 보니 현관에는 신지도 않는 신발이 수두룩하다. 한식가옥에는 신발장이 따로 없었다. 마루 밑이나 섬돌에 짚신이나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였을 정도였으니 신발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가옥에는 신발장이 농짝만큼 큰 것도 있다. 계절별로 골라 신는 신이 나오고, 등산, 조깅, 골프 등의 특수화나 신분이나 재력에 따라 신발의 패턴이 달라지고 한때 우리나라는 신발제조로 수출고를 올릴 만큼 신발산업이 융성했던 것이다.
유명배우의 신발장이 공개된 적 있는데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경매에 붙여져 이익금을 불우이웃 돕기에 쓴다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이쯤이면 사치 행각이나 낭비벽이 아니고 예술품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신발은 이렇게 생활용구로서가 아니다.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의 한 구절인데 “대목장 시오리 길을 꽃신은 흙 묻을까 봐 품에 안고 타박타박”이다.
추석 전날, 엄마 따라 읍내장에 따라간 아이가 꽃신을 갖게 되고, 이것이 너무 좋아서 아끼느라 신지도 못하고 품에 안고서 엄마의 뒤를 타박타박 걸어오는 정경을 묘사한 구절이다. 특수한 경험이 아닌 왜정 때의 농촌 실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인데, 그때 거의 짚신을 신었다.
고무신이나 베로 만든 공장제품의 신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짚신을 물론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 비 오는 날 모정방에는 동네 일꾼들이 모여 짚신을 삼는 일을 했다. 여가를 손놀음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쁜 농사철에 신을 삼느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기에 바깥일을 못하니 일손을 놓칠 수 없어서다. 그리고 짚신은 오래 신어야 겨우 열흘 남짓 된다. 그러니 자꾸 신발을 삼아 비축해야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신는 짚신은 일본 사람들의 나막신을 본뜬 것으로 발판이 되는 널찍한 바닥에다 엄지발가락과 다른 발가락을 끼우는 새끼가 나온 것인데 일본의 신에서 개량한 것이라 이름도 일본식만 불렀다. 조리(草履)이다. 공정은 간단하다. 새끼를 자기 키만큼 꼬아 넉 줄로 구부려 씨줄로 하고 날줄로는 짚가닥을 넣어 발판을 짜고 발가락 끼우는 장치를 하면 완성품이 된다.
잘 신어야, 잘 삼아야 일주일 남짓 신을 수 있기에 방과 후에는 신을 삼는 일이 고정 일과이고, 이 신도 닳을까 싶어 흙바닥이나 모래가 고운 길에는 신발을 벗고 다녔다.
짚신보다도 더 튼튼한 재료가 있었는데 선박에서 어구용으로 쓰는 로프 가닥이 있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걸로 신을 삼으면 상당히 오래 신을 수 있어 아이들은 무척 이 신발을 신고 싶어 했었다. 이 신발들은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이어서 캄캄한 밤에도 자기 것인지 아닌지를 재깍 알았다.
하루 이틀 아닌 여러 날을 남의 신을 신고 다니는 걸 일종의 족쇄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 컸다. 제 신발을 분별하지 못해 남의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은 감각이 무디어서이겠지만 그 무감각은 애착이 없어서이다. 만사가 그렇다. 집착은 좋지 않으나 신경만 조금 쓰면 자기 발에 꼭 맞는 자기 신발을 구분 못 할까. 우선 외양으로 가려야 하지만 신어 보면 감각이 다르다. 특히 발은 인체의 내장 기능이 모여 있다고 한다.
제 신발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심리적인 장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남의 것을 바꿔치기하려는 물욕보다도 신체의 내장 기능이 약화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