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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모 종편채널에서 방영한 '집시맨'이 한때 마니아층의 인기를 모았다. 각양각색의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누비는 '차박족'들의 리얼 로드 프로그램이다.
‘집시맨’을 보며 나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난 캠핑카는 커 녕 SUV도 없다. 그렇다고 연식이 오래돼 덜덜거리는 검은색 승용차를 타고 차박 하기엔 너무나 모양이 빠진다.
집시맨은 2019년 3월 183회를 끝으로 종영됐다고 하는데 방영 일정이 시기적으로 일렀다. 지금도 방영했으면 시청률이 더 오르지 않았을까. 코로나팬데믹시대를 거치면서 차박 열풍이 더 뜨거워졌다. 웬만하면 '집콕'하는 사람들에게도 대자연 속에서 일출·일몰을 감상하며 식사를 하고 별을 보며 차를 마시는 '집시맨'을 보면 대리만족이 될지 모른다.
지난해 10월 친구들과 함께 전북 군산 무녀도로 배 낚시를 갔다가 작은 포구의 민박집에서 하루 묶었다. 파도소리가 명징한 소박하고 조용한 어촌이었다. 음식솜씨 좋은 민박집 안주인이 신선한 해산물로 요리한 푸짐한 저녁 식사로 과식을 한 뒤 소화를 시킬 겸 섬 산책에 나섰다.
달이 자취를 감춘 칡흙같은 하늘에 북두칠성이 보이고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다. 중년의 사내들이 하늘을 보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도시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낮 설은 풍경은 시골 외갓집에 놀러 갔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섬 주변의 밤 풍경은 포구로 들어서자 완전히 바뀌었다. 바닷가를 따라 차박을 위한 캠핑 트레일러와 SUV 등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개중에는 흰색 트레일러 벽면을 이용해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감상하는 중년 커플도 있었다. 부부가 와인 잔을 기울이며 바닷가에서 영화를 보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 포구에서 중장년층 여행 풍속도의 변화를 실감했다. '간편함(Simple)'과 '언택트(Untact)' 를 추구하는 '차박'이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차박이 중장년층으로 확산하고 있는 분위기다. 설문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2년전 시니어 전문 기업 임팩트피플스가 45세 이상 1천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해외여행'보다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여행'을 선호했다.
특히 '캠핑 또는 차박'을 선택한 응답자도 34.4%로 적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50대 중반 이상일수록 차박을 시도할 의사(40.1%)가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는 점이다. 차박이 중장년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같은 트렌드를 자동차 업계에서 놓칠 리 없다. 차박 열풍에 편승해 최근 떠오른 차종인 픽업트럭은 업체별로 다채로운 특징을 갖추고 있다. 픽업트럭을 출시한 업체들은 차박 차량으로 SUV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박에 도움 될 만한 옵션을 차량에 추가해 차별화를 모색하고 있다.
소비자 니즈에 따라 개폐형 적재함(데크)을 장착할 수 있도록 했다. 오프로드 감성을 갖춘 픽업트럭에 캠핑 트레일러 견인 안전장치나 디자인 패키지 팩 등을 선택 사양으로 제공했다. 소비자들이 차박을 실시하는 동안 차량을 더욱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는 취지다.
차박족 중에는 굳이 새 차를 사지 않고 중고 미니버스나 승합차를 자기 취향에 맞게 개조해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 작은 공간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는 움직이는 집이다.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출발해 원하는 풍경 속에 주차 시키면 캠핑 공간이 만들어지고 야외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등 일상에서 벗어나 캠퍼(camper)로서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캠핑 외에도 새로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취미를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동차가 이동용 별장 같은 개인 활동의 '무대'로 기능하는 셈이다.
3년 전 가을, 친구와 함께 강원도 강릉시의 해발 1100m에 위치한 고랭지 채소 단지 안반데기를 친구의 SUV를 타고 올랐다. 배추밭이 바다처럼 펼쳐진 능선에 차를 세운 뒤 뒷문을 열고 앉아서 멀리 산등성이 위로 석류 빛 노을이 붉게 번지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노을을 바라보며 친구와 함께 마시던 향긋한 커피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확실히 미각(味覺)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날 땅거미가 지고 청정한 밤하늘에 판타지 영화처럼 쏟아지는 별을 보며 차에서 하루를 묵었다. 차박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자유와 감성을 일깨운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