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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원 총기교육 지역방위 지휘
증 언 자 : 문장우(남)
생년월일 : 1953. 5. 28(당시 나이 27세)
직 업 : 상보문화사 경영(현재 한국인명구조봉사단)
조사일시 : 1989. 5
특기사항 : 이 증언은 그대로 {광주여 말하라}에 수록되었음.
개 요
1980년에 학운동 예비군 소대장이던 문장우 씨는 5월 20일 세무서를 방화하고 21일 청년들을 규합해 나주, 화순, 전남방직, 일신방직 등지로 무기를 탈취하러 보냈다. 그리고 광주공원에서 시민들에게 총기교육을 한 후 지역을 나누어 지역 방위를 하게 하고, 1백여 명의 시민군을 이끌고 학운동 배고픈다리에서 지역방위를 담당했다. 그러나 5월 23일 도청 시내순찰반의 요청으로 모두 무기를 반납했다.
그 후 친구집에 피신해 있다가 6월 26일 자수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81년 4월 석방됐다.
하사관으로 지원했으나 곧 탈영
나는 1953년 광주시 학운동에서 4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한의사였기 때문에 생활은 넉넉했다. 골목대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빠구리'를 쳤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학교를 가지 않고 놀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니 부러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독학을 하여 중학교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그 후 아버지 일을 돕다가 1972년 하사관으로 지원해 상무대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총을 쏠 때 거리측정을 하는 수학이 가장 필요했는데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내가 사격을 하는 데는 많은 애로가 따랐다. 포병하사 자격시험에 요령껏 합격했으나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여 포병하사 졸업시험 때는 최고점수를 받았다. 훈련받는 과정에서 배워야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상관의 업무를 대행할 때 영문자와 한자로 일지작성을 했으므로 더욱 피부에 와닿았다. 배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 군복을 입고 숭문고에 편입했다.
1973년 초가을 조치원의 51사단이 32사단으로 부대명이 바뀌면서 포병부대 1개 대가 창설되어 광주 상무대에서 장교와 하사를 포함한 2백 명의 사병이 지원을 했다. 그때 하필 내가 차출되었다.
조치원에 가는 첫날부터 시비가 생겨 사병을 구타한 것이 상관에게 알려져 구타를 당했다. 그러잖아도 군대에 불만을 가졌는데 상관에게 구타까지 당하자 나는 포대장을 두들겨 패버렸다. 곧바로 상관폭행으로 영창을 갈 것 같아 탈영을 했다. 탈영 후 경기도 양평 5사단에 자수하여 4개월 동안 영창생활을 하고 1973년 12월 제적되었다. 하사생활 24개월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가 아닌 제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신체검사를 받고 예비군에 편입되어 보충역이 되었다. 그때 지금 애들의 생모를 만나 동거생활을 하면서 직장을 다녔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80년에는 광고대행회사의 영업과장으로 일했으나 지사장이 다른 사업을 하는 관계로 내가 회사를 인수받게 되었다. 들뜬 기분으로 사업계획안을 마련하던 중 5·18을 맞이하게 되었다.
불의를 보고 참아야 하는가
5월 18일 오후 충장로 파출소 뒤의 삼양다방에서 박관수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사업계획을 의논하고 있는데 다방 손님들이 우르르 창문밖을 내다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도 밖을 내다봤다.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7, 8명의 학생들이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고, 그 뒤에 40-50명의 공수대원이 마치 사냥개처럼 학생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학생들을 붙잡지 못한 공수대원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몽둥이로 마구 내려쳤다. 그중 한 여학생까지 붙잡아 무조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여학생의 옷이 벗겨졌는데도 그들은 가슴이 다 드러난 여학생을 지하도로 질질 끌고 갔다. 주위 건물의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항변하지 못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수대원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오십대 아저씨까지 붙잡아 자전거를 망가뜨리고 곤봉으로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나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행패를 부리는 공수대원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대한민국 군인이냐. 죄없는 사람들까지 왜 때려!"
그러자 각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동조하여 공수대원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때 공수대원 하나가 나를 쳐다보자 뜨끔했다. '별일이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곧바로 M16으로 착검한 공수대원이 들어왔다. 2, 3명이 아니라 7, 8명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다방 안에는 열댓 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거의 노장이었고 젊은이라곤 우리뿐이었다. 공수대원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무조건 곤봉을 휘둘렀다. 우리는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곤봉으로 대여섯 대를 때리더니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있는데 장교 하나가 "야! 가자"고 하자 공수들은 우리를 그대로 두고 나갔다. 그 장교로 인해 큰 위기는 모면했다. 그 후 여기 저기 시위장면을 구경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5월 19일은 친구와 삼양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여 정장을 하고 나왔다. 그 친구를 만나 몇 가지 사업구상을 한 후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학생은 거의 없고 공수부대와 경찰만이 집합해 있었다. 군데군데 있던 시민들이 공수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간의 행패에 항의하자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아댔다. 최루탄이 터지면 시민들은 피했다가 다시 모여들곤 했다.
그때까지 적극적인 시위를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나는 '사업을 진행시켜야 하는가, 불의에 대항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어제, 오늘의 시위상황을 보고 가만히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 학생들을 보호하고 또한 젊은층이 많이 참여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겠노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단 결단을 내리니 홀가분하여 시위대 틈에 끼어 열심히 시위를 했다. 공수대원이 최루탄을 발사하면 나는 시위대와 함께 열심히 돌을 던졌다. 한번은 시위하다가 쫓겨 적십자병원 부근의 막다른 골목에서 공수대원과 대치하게 되었다. 두 명의 공수대원은 착검한 상태에서 나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유도와 복싱으로 몸이 단련되어 있던 나는 그대로 있다가는 초죽음이 될 것 같아 몸을 잽싸게 움직여 공수들이 쥐고 있는 총을 발로 걷어차고 도망을 쳤다. 죽음 직전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날 저녁은 집에 들어가려다 시위대가 나처럼 빠지면 모두 빠져버릴 것 같아 차마 가지 못했다. 설령 집에 들어가더라도 처자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전남공고 부근에 하수도공사를 하는 노깡(대형 콘크리트 하수관)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정장을 입고 있어 옷이 더럽혀질까봐 상의를 벗고 잤더니 추운 기가 들어 전남대병원 근처의 선배집을 찾아갔다. 5월 20일 오전 선배집에서 시내로 다시 나왔다.
세무서 방화
20일 밤 이날은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약을 한 때이다. 밤 10시 30분∼11시경 전남대 의대 쪽에서 충장로로 가려다가 세무소 앞으로 갔다. 세무서 앞에는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다. 시민들 사이를 뚫고 세무서 앞으로 가는데 갑자기 총성이 들렸다. 세무서 양쪽에 있던 공수대원이 총을 쏜 것이다.
노동청 쪽에서 밀려온 청년 세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성을 들은 시위대는 흩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리를 지르며 세무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세무서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공수대원이 세무서 안으로 도망쳤다.
갑작스런 총성에 흥분한 몇 명의 청년들이 사람들을 규합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라니까 오히려 자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눕니다. 그러니 세무서도 필요없지 않습니까? 세무서를 없애버립시다"
라고 시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청년이 군용 트럭 한 대를 가져왔다. 내가 운전석에 앉고 청년 한 명이 옆자리에 탔다. 시민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그 차에 휘발유를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정면으로 돌진하면 총을 맞을까봐 차를 후진하여 세무서를 향해 돌진했다. 그때 세무서 건물로 화염병, 연탄집게 등이 사정없이 날아갔다. 나는 차를 세무서 입구에 들이박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재빨리 차에서 내렸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세무서 옆의 담을 뛰어넘었다. 순간 실탄이 나를 향해 우두둑 쏟아졌다. 세무서 안에 들어갔던 공수대원이 쏜 것이다. 단 1초만 늦었어도 나는 총탄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또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런데 옆자리에 탔던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담을 넘어 나오는데 세무서가 불에 타고 있었고, 주위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곧바로 노동청 쪽으로 가서 시위를 했다. 그곳의 시위대에게 노동청 앞과 신역에서도 총성이 있었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시위를 하다 보니 기진맥진해졌다. 갑자기 집식구들이 생각났다. 특히 지원동 주남마을에 사는 신체불구인 형님이 보고 싶어졌다. 곧바로 형님집으로 갔더니 형님과 형수님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몹시 피곤해 잠을 잤으나 깊은 잠은 들지 못했다.
21일 아침 일찍 시내로 나왔다. 차가 없어 시내 쪽으로 한참 걸어갔다. 학동에 있는 버스종점에 다다랐을 때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탄 시위대가 보였다. 버스 옆면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죽이자', '신현확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가 씌어 있었고, 어떤 차는 플래카드를 걸치고 있었다. 각목을 두들기고 있는 시위대와 시위차량을 보니 몹시 감격스럽고 흐뭇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학동 석천다리까지 걸어나왔다.
석천다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담배를 얻어 핀 후 시위버스를 잡아탔다. 광주 시가지를 한바퀴 돌고 전남대병원 앞에서 내렸다. 무작정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구하려는데 차가 없어 광주천변 쪽에서 지나가는 시위버스에 다시 탔다. 그 차 안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면서 손을 잡았다.
"형님!"
동네 후배인 김춘국이었다. 그를 보니 굉장히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춘국아, 너는 들어가거라."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은 형수님과 애들이 기다리는 가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형님이 들어가십시오."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나는 괜찮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냐?"
"형님은 무엇을 안다고 그러십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형님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다면 나 또한 마찬가집니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후배로부터 신념에 가득 찬 말을 들으니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후회하지 않겠냐?"
"괜찮습니다."
"그럼 죽어도 같이 죽자."
이렇게 후배와 마음이 맞아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그 시위 차를 타고 도청 앞으로 갔다. 관광호텔 앞에서 시민들이 총에 맞은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수협 앞에 있는 계단에 서 있었다.
오전 12시30분쯤 갑자기 도청 앞에 지키고 있던 공수들이 도청 앞 광장 바닥에 총을 사정없이 쏘기 시작했다. 유탄에 맞아 쓰러진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시민들이 골목골목으로 피하자 이제는 공수들이 사람을 정조준해서 쏘았다. 나는 재빨리 진내과 앞으로 몸을 피했다. 춘국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국민학생도 있었는데 각개전투가 필요없을 정도로 총을 잘 피했다. 전남일보 쪽에서 수협 쪽으로 오면서 총알이 심하게 날아오면 몸을 엎드려 기어오다가 좌우를 살핀 후 진내과 쪽으로 뛰어왔다. 시민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격려해 줬다.
무기탈취 주도
총을 들고 집단발포를 한 그들과 맨주먹인 우리와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진내과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여러분, 얘기 좀 합시다. 저는 학운동 예비군 중대장인 문장우라는 사람입니다. 현재 공수들이 무차별 발포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돌멩이나 각목 따위로 싸울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무기를 가집시다."
내가 큰소리로 외치자 20-30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광주시내의 각 파출소, 경찰서 그리고 방림동에는 중대에 보급할 수 있는 병기창고가 있습니다. 일신방직, 전남방직, 화순, 나주 등지에도 무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주의 경찰서에서는 이미 무기를 숨겨버렸을 것입니다. 화순탄광, 나주 등지에 무기가 많이 있을 테니 모두 무기를 가지러 갑시다."
청년들 역시 무기탈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주 쪽으로 갈 사람은 손을 드시오."
그러자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그쪽에 연고지가 있거나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무기가 있는 나주, 화순, 전남방직, 일신방직으로 몇 명씩 조를 짜서 보냈다. 그리고 총을 가져온 후에 곧바로 광주공원에서 모이자고 했을 때 시각이 오후 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다.
청년들을 규합하여 각 지역으로 보낸 나는 총을 탈취하려면 2-3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혼자 시내를 돌아다닌 후 오후 3시경 화순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학동 석천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3시 20분경 화순으로 간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2대의 트럭에 총기, 다이너마이트, 실탄 등을 싣고 차 한 대에는 LMG를 설치하고 왔다. 화순탄광에서 탈취한 것 같았다. 나는 차를 세워 무기를 내렸다.
LMG는 1분에 480발 정도 나가는데 실탄이 몇천 발 있었고, 다이너마이트는 몇 상자가 있었다. 40백-5백 정의 총이 있었으나 M16이나 연발로 나가는 M2는 거의 없었고 단발로 나가는 M1이 많았다. 그리고 실탄은 20발들이 사각 클립과 30발들이 바나나 클립이 20-30상자 정도 있었다. 상자는 넓이가 약 35센티미터, 높이가 30-40센티미터의 크기였다. 나는 그 실탄을 보고 이제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기뻤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시민들에게 소리쳤다.
"광주시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총을 듭시다."
그곳에 있는 50-1백 명의 시민들에게 총과 실탄을 나누어 주었다. 그때 동네 후배인 김복수가 예비군복을 입고 왔다. 김복수도 총을 들었다. 드디어 우리는 완전무장을 한 것이다.
총을 분배한 후 나는 총기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교육을 시켰다. M1은 안전장치를 잠그면 개머리판에 충격을 줘도 자물쇠가 풀리지 않으나 카빈은 안전장치를 잠가도 실탄이 나가므로 개머리판에 충격을 가하지 말라는 것과 클립을 빼도 실탄이 한 발 남게 되니 클립을 뺀 후 반드시 실탄도 빼라는 등 기초적인 군사기술을 가르쳤다. 이렇게 대충 교육을 한 후 "여러분은 1차적으로 총기교육을 받았으니 이제 총집결지인 광주공원으로 모입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남은 총기를 두 대의 차에 싣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서 총기교육을 시키고 지역방위를 지휘
광주공원에 가니 저녁노을이 공원바닥에 비치고 있었다. 오후 5-6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공원 앞에는 평상을 쌓아올린 곳에 LMG가 설치되어 있었고 계단 앞에는 일신방직, 전남방직, 나주 등지에서 가져온 1천5백 정의 총이 50센티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
또한 11대의 벤츠 고속버스가 시내 쪽을 향해 세워져 있었다. 그 주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중·고등학생까지 약4백-5백 명의 사람들이 총을 아무렇게나 들고 있었다. 조금만 이상해 보이면 "너는 누구냐"며 총을 겨누기도 했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폭발하면 잘게 '세열'하는 수류탄을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안전핀을 들고 다니는 고리인 줄 알고 주머니에 달아버린 상태에서 안전핀이 빠져버리면 공원 전체가 난리가 날 판이었다. 겁날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 나이가 마흔 살 정도 되는 분이 메가폰을 들고 시민들을 향해 LMG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집중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기탈취를 주도했던 나는 그의 메가폰을 빼앗아 시민들 앞에 나섰다. 질서를 잡아 체계적으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목청이 큰 나는 더 크게 외쳤다.
"저는 학운동에 거주하는 광주시민 문장우입니다. 몇 년 전에 하사로 제대하고 현재 학운동에서 예비군 소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을 밝히니 시민들이 모두 쳐다봤다.
"제가 여러분들 앞에 메가폰을 들고 선 것은 다름 아니라 여러분은 지휘자가 없는 오합지졸인 상태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지금 우리 스스로 다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이유는 여러분들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광주 시민을 사랑하고 위한다면 수류탄을 가지고 있는 사람부터 앞에 보이는 고속버스에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간곡히 부탁합니다."
너무 어수선하여 차에 먼저 타게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부탁했더니 사람들이 모두 차에 탔다. 11대의 벤츠 고속버스에 타고 남은 사람은 열을 세워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기에서 군대를 다녀오신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몇 사람이 손을 들었다. 그들에게 계급을 물어보니 병장, 하사제대를 한 사람 들이었다.
"지금 여러분들의 가슴에 달고 있는 수류탄이 터지면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수류탄을 안 가져도 됩니다. 수류탄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보관합시다. 이 사람들이 수류탄을 회수할테니 여러분은 손을 대지 말고 모두 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군대 다녀온 사람들로 하여금 수류탄을 회수하게 했다. 회수한 약 2백여 개의 수류탄을 박스에 담은 다음 누구에겐가 그것을 관리토록 했다. 이처럼 사람들이 내 말을 잘 따라주었던 것은 진내과 앞에서 무기탈취를 주도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각 지역으로 무기탈취를 주동했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각 차마다 들어가 총기교육을 했다. 먼저 안전사고에 유의하도록 학동에서 교육했던 내용을 설명했다. 그리고 계엄군과 밤에 대치할 경우 한자리에서만 총격전을 벌이면 총구의 불빛 때문에 계엄군에게 노출되므로 총을 쏜 후 반드시 자리를 이동하라고 했다. 또한 총구 가늠자에 담배의 은박지를 붙여 총구의 방향을 표시하여 아군의 피해가 없도록 교육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수류탄 투척술도 교육했다.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던지면 몇 초 사이에 터지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총기교육을 끝낸 후 나는 도청을 빠져나간 계엄군들이 주둔해 있는 조선대 뒷산 부근을 집중포위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자! 우리 모두 행동에 임합시다. 계엄군이 조선대 뒷산으로 후퇴했으나 언제 다시 진주할지 모릅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시내지역의 방위를 해주시고 버스에 탄 사람들은 선두차를 따라와주십시오."
10명 단위로 조를 편성하고 군대 다녀온 사람을 조장으로 세웠다. 그런 후 11대의 벤츠 고속버스를 이끌고 광주천변을 따라 학강다리를 지나 남광주시장 공판장 옆 도로에 전남대병원 쪽을 향해 차를 세웠다. 앞의 두 대가 정차하자 뒤따라오던 차들도 멈췄다.
앞의 두 대에 탄 80명의 시민군을 내리게 한 후 간단한 총기교육을 시키고 전남대병원 주위에서 지역방위를 하게 했다. 그 차들이 출발하자 남광주 철로 부근과 학동 제일시장 부근에 있는 조선대병원 환자대기실에 각각 두 대씩을 배치했다. 그리고 5대의 차량을 이끌고 학동으로 갔다. 학동 석천다리 두 대를 배치하고 숭의실고 건물 안에 한 대를 배치했다. 숭의실고에서 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니 공포를 쏘는 장난은 치지 말라"고 당부한 후 마지막으로 버스 두 대를 이끌고 나의 본거지인 학운동 배고픈다리로 갔다. 계엄군이 있는 조선대 뒷산을 집중포위한 것이다.
학운동 지역방위
나는 벤츠 고속버스에 탄 시민군과 함께 학운동 배고픈 다리로 갔다. 내가 그쪽의 지리를 잘 알았거니와 계엄군이 시내로 곧장 진입하지 않을 경우 그곳을 통과하게 되어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배고픈다리까지 왔을 때는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원거리의 사람은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80여 명의 시민군이 버스에서 내리자 동네 주민들이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일단 다리 가운데에 엄폐물로 삼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치기로 했다. 다리 옆의 노인당에 적십자마크가 그려진 백색 지프차가 펑크가난 채 버려져 있었고 트럭 두 대분의 건축용 목재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가져와 차를 다리 한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건축용 목재를 차곡차곡 쌓았다. 바리케이드 양쪽에 한 사람 정도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배고픈 다리 밑에 자가용이 버려져 있어 지휘본부로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조편성을 다시 했다. 처음에는 12명을 1조씩 6개조로 편성했다. 그때 학운동, 소태동 지역의 예비군과 동네 청년들이 자원해 9개조로 편성했다가 청년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자 11개조까지 늘려서 편성했다. 본부까지 총 12개조였다. 나는 학운동 배고픈다리 지역방위의 대장격이었고 유홍렬을 보좌관으로 했다. 나의 호칭을 예비군들은 '소대장', 다른 사람들은 '팀장'이라 불렀다.
조를 편성한 후 조장을 뽑고 1인당 3개의 실탄 클립을 나눠주었다. 한 클립당 실탄이 20-30발 있었으니 1인당 70발 정도의 실탄을 나눠준 셈이었다. 나는 유흥렬 씨에게 남은 열 정 정도의 총과 실탄을 맡기면서 "내 허락 없이 누구에게도 분배하지 말라"고 했다. 실탄을 지급한 후 전원이 모두 경비를 서지 말고 삼교대로 두시간씩 근무하라고 했다.
최종적으로 암구호를 정하고 각 지역을 나누어 배치했다. 1조는 배고픈다리, 2조는 후방인 배고픈다리 밑의 홍림이발소, 3조는 수정맨션 입구에 있는 다리 밑 , 4조는 수정맨션 돌담, 5조는 증심사 쪽의 공격에 대비하여 배고픈다리와 호산나유치원 사이에 배치했다. 조선대 뒷산과 가장 가까운 호산나유치원에 6조, 호산나유치원 옆의 향나무 밑에 7조, 무등유아원 뒷편에 8조를 배치했다. 그리고 9조는 무등육아원 정문, 10조는 무등교회와 태봉부락, 11조는 지휘본부 옆의 공터에 배치했다. 이렇게 배고픈다리를 중심으로 집중배치했다.
주민들이 김밥을 가져다주었다. 이틀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뿐 아니라 박카스 몇 상자, 담배, 심지어는 돈까지 걷어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성의는 고맙지만 돈은 필요없으니 차라리 노인당의 노인들을 도와달라"고 했다. 담배가 너무 많아 노인당에 주기도 했다. 대원들은 주민들이 해온 밥으로 배를 채운 후 각 조마다 배치받은 곳으로 가 각 지역을 지켰다.
나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순찰을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단위로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 시간이 되면 1조 조장이 공포를 한 방 쏘고 그것을 들은 2조 조장이 또 한 방 쏘고 이렇게 11조 조장까지 공포를 쏜 후 이상이 없을 시는 내가 본부에서 공포 2방을 쏘았다. 순찰할 때 석천다리까지는 한 번 갔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그날 저녁은 별 일 없이 지역방위를 했다.
계엄군과의 격렬한 전투
5월 22일 아침에 주민들이 또 김밥을 해다주었다. 우리는 어제 저녁에 남은 밥을 먹고 새로 해온 김밥은 노인당에 가져다주었다. 또 가정에서 쓰는 쌍안경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있는 엽총도 가져다 주겠다고 했으나 우리가 엽총은 필요없다고 했다. 이렇듯 학운동 주민들이 호응을 했다.
아침식사를 한 우리는 낮에는 계엄군이 내려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밤의 경비를 위해 노인당 부근의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조장들은 배고픈다리에 모여 근무를 했다.
나는 다른 지역이 궁금해 전남대병원 쪽으로 차를 타고 갔다. 전남대병원 앞에서도 여전히 지역방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들을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자 대원들은 위치변동 없이 다시 지역방위를 했다. 그런데 5월 23일 새벽 1시 30분-2시쯤 조선대 뒷산의 숙실부락에서 계엄군의 군화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냇가를 건너면서 랜턴을 잠깐씩 비치며 지나갔다. 그곳에서 본부까지 약 2백 미터 정도의 거리였고 호산나유치원의 6조와 7조와는 약 1백50 미터 거리였다. 6조와 7조가 계엄군을 발견했는지 먼저 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이에 다른 조까지 발사하기 시작하자 계엄군 역시 총을 쏘았다. 양쪽에서 불꽃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칠흑같은 밤이었지만 양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의해 마치 여름날 반딧불이 많이 날아드는 것처럼 주위가 훤했다. 약 30분 정도의 격전이 있엇다. 한참 후 어느 쪽이 먼저 사격을 중지했는지 모르지만 총성이 그쳤다.
밤에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사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보좌관 2명을 데리고 1조부터 순찰을 했다. 순찰을 하면서 대원들이 추울까봐 소주 한 잔씩을 나눠주었다. 전체 이상이 없었는데 수정맨션에 배치된 4조의 대원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보니 그는 다른 조의 상황을 살피러 갔다가 돌아 왔다. 일단 안심이 되어 그들을 격려한 뒤 본부로 돌아왔다.
그날 아침에 대원 모두가 집합하여 점호를 했는데 누구 한 명 다치지 않았고 배고픈다리 난간에만 총탄 구멍이 뚫려 있었다. 승리감에 젖은 우리의 기세는 더욱 당당했다. 한밤중의 격전으로 잠을 못 잔 주민들이 걱정된 표정으로 아침 일찍 밥을 가지고 나왔다.
아침을 먹은 후 주민들이 가져온 쌍안경으로 그날 새벽의 격전지를 쳐다봤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아 군인들의 피해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격전지로 갔다. 총탄에 넘어진 소나무만 있고 군인들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계엄군의 흔적을 찾지 못해 허탈한 마음으로 본부에 있는데 소태동의 태봉마을에 사는 주민의 신고가 들어왔다. 군인 두 명이 밥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기질있고 담력있는 6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태봉마을로 갔다. 태봉마을 부근에는 2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동굴 2개가 있었는데 그 동굴까지 일일이 수색작전을 폈다. 막상 동굴 앞까지 갔을 때는 어디에서 공격이 있을지 몰랐으므로 몹시 긴장되었다. 30-40분 동안 여기저기를 수색했으나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염탐하러 온 공수대원을 붙잡아 도청으로 넘기고
석가탄신일(21일) 증심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던 사람들이 발이 묶여 있다가 23일 오전에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전 11시쯤 20미터 전방에서 시민들 틈에 사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있었다. 대원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소대장님, 저기 수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봤소. 모른 척하고 있으시오."
우리는 담배를 피면서 허술한 척 얘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앞을 태연히 통과하려 했다. 나는 그가 우리 앞을 지나려는 찰나 그를 나꿔채고 발로 차 쓰러 뜨렸다. 그의 옷이 벗겨져 군번이 나왔다. 하사였다. 그러는 사이 뒤에 따라오던 사복을 입은 군인이 계곡 쪽으로 몸을 엎드려 황급히 도망가고 있었다. 우리와 70-80미터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쫓아가 잡을 수는 없었다. 나는 M2 자동소총을 갈겨대며 그를 향해 공중사격을 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도망가지 못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몇 명의 대원들이 그를 잡아왔다. 군인들은 오금이 저려 벌벌 떨었다. 그 역시 사복을 벗겨보니 군번이 나왔고 속옷은 군용 포대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민간인을 가장하여 염탐하러 온 공수부대였다.
"너희 아지트가 어디냐?"
"지원동으로 모두 넘어갔고 우리 둘만 남았습니다."
"그럼 너희 장비는 어디에 있느냐?"
"태봉마을 철탑 밑에 있습니다."
대원들이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장비를 모두 가지고 왔다. 베낭, 신발, 낙하하면서 쓸 수 있는 기관단총, 낙하산, 건빵 등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포승줄로 묶었다. 주위에 모여 있던 시민들과 다른 대원들 80-90퍼센트가 그들을 죽여버리자고 했다. 총을 겨누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 자들도 같은 군인이지만 우리 동포니 죽이지는 말자"고 설득했다. 그때 마침 도청에서 순찰대원 2명이 지프차를 타고 왔다. 나는 순찰대원에게 장비와 함께 군인 둘을 넘겼다.
논란 끝에 무기를 반납하고
그날 오후 1시 30분쯤 순찰차가 와서는 무기를 회수한다고 했다. 우리는 무기를 반납할 의향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무기가 너무 많이 분산되어 있으니 체계를 잡기 위해 무기를 회수한 후 다시 분배하겠다"며 간곡히 사정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대원 중 2분의 1 정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특히 김춘국 등이 "제2의 생명인 총기를 반납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의견통일이 되지 않아 순찰대에게 잠시 후 다시 오라고 했다. 나는 그 사이 대원들에게 "광주시민과 함께 하자"고 설득해 두시간 후에 그들이 오자 23일 오후 서너 시경에 전부 총기를 반납했다. 이렇게 해서 학운동 지역방위대가 해산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1백여 정의 총과 실탄을 싣고 순찰대와 함께 도청으로 갔다. 무기를 반납하면서도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도청에 가보니 사실대로 무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무기는 수위실 옆에 잔뜩 쌓여 있었다. 도청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나오더니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래 가지고 어쩌겠다는 거요."
"일단 무기를 회수하고 상황이 바뀌면 다시 분배하겠습니다."
"당신들의 나이나 직업은 모르겠지만 당신들과 입장은 다른 것 같소. 광주 중심지인 도청에서 질서유지를 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은 엉망이지 않소."
"어떤 차원에서 엉망이다고 하십니까?"
"시내 중심지인 도청에만 있어봐야 계엄군이 다시 진주한다면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소. 계엄군의 목적지에 훈련된 자위대가 경계를 서야 합니다. 더군다나 자체방어를 하고 있는 곳에서까지 무기를 회수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소."
"충분히 알았습니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 말을 듣고도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청에서 바로 나와 시내를 한바퀴 돌다가 시외곽지역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오토바이나 차로는 갈 수가 없어 시내에 있던 자전거를 타고 나주로 갔다. 큰 도로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금천을 지나 나주, 완곡까지 갔다. 나주에서는 시위차량이 광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주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나주 사람들 역시 광주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계엄군에 대한 분노들이 모두 대단했다.
25일 밤 다시 광주로 들어와 시내에 있는 친구집으로 갔다. 집에는 계속 연락을 못 했다. 집에 연락을 하거나 들어가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26일 도청에 들어가 두 시간 정도 있었다. 뭔가 어수선하다는 느낌만 받았다.
철두철미한 피신생활
5월 26일 저녁은 친구 아버지 기일이라 지원동에 있는 친구집으로 갔다. 27일 아침 계엄군의 도청 장악 소식을 들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싸움에서 완전히 패한 기분이 들어 통곡을 했다. 밖을 나가보니 트럭에 탄 계엄군이 수색작전을 펴고 있었다.
나는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예비군 중대장과 동네 선배들과 한께 술을 마신 후 "다음에 만나자"고 한 뒤 그곳을 벗어났다.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나간 30분 뒤 예비군 중대본부에 계엄군이 쳐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다행히 자기 집은 안전하다면서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농성동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는 그 친구집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친정에 가 있는 아내에게 연락이 되어 아내를 만났다. 아내에게 친구집을 가르쳐주면서 기억으로만 약도를 암기시켰다. 나를 보러 올 때도 집에서 바로 오지 말고 시내를 들렀다가 농성동으로 온 다음 먼저 남의 집으로 들어가 미행이 있는가를 확인한 후 오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아내와 몇 차례 만났다.
가끔 친구와 함께 시내도 나갔다. 나는 현상금과 벽보가 붙어 있는 상태여서 매우 조심했다. 만약 검문에 걸려 위험해지면 무조건 죽여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수입품 등산도를 항상 휴대했다. 섣불리 대들다가 권총을 소지한 경찰에게 당할 바에야 먼저 공격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자신감을 갖고 다녔다.
그런데 나로 인하여 예비군 중대장이 끌려가 두들겨맞고 형사들이 지원동에 사는 형님을 찾아가 못살게 군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 하나 때문에 주위의 여러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이 몹시 괴로웠다. 그러는 사이 방송에서는 5·18 관련자를 관대히 처분한다면서 자수를 권했다. 이에 솔깃한 아내와 친구가 자수를 권했다. 내 생각으로는 자수하면 관대한 처벌은 커녕 초죽음이 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자수를 권하려면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 후 아내가 또다시 찾아와 자수를 권했다. 자수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런 말을 하는 아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한편 YWCA 산악클럽 회장단은 자매결연을 한 목포 상태마을로 나를 피신시키려 고 했다. 그들은 상태마을의 학생들에게 가방을 전해 주고 나오면서 나를 그곳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가다가 분명 잡힐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서야 할 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수하여 보안대로
혼자가서 자수하면 체포했다고 할까봐 관할 동장과 학운동 예비군 중대장을 대동하고 6월 26일 광주경찰서 정보과로 가서 자수를 했다. 한 달간의 피신생활을 마치고 자수를 한 것이다. 정보과에서 자술서를 쓰고 있는데 형사 두 명이 들어 왔다. 그들은 강원도 묵호에 있는 외사촌집까지 수색을 한 것이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이런 문딩이 자식, 우리 손에 잡히지 왜 자수를 했어"
라고 호통을 쳤다. 곧바로 수갑이 채워져 검정 포니 승용차를 타고 보안대로 끌려갔다. 그날부터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당했다.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 보안대 형사는 내 등산용 허리띠와 버클을 풀고 팬티만 남겨놓은 채 옷을 모두 벗게 했다. 그는 내 허리띠로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1백여 대 이상을 심하게 맞아 등이 피로 낭자했다. 그는 자수동기를 물은 후 피신장소를 대라고 했다.
"이 새끼, 한 달 동안이나 어디에 있었어."
"무등산에 있었습니다."
"거짓말 말어, 군인들이 몇 번을 수색했으나 너 같은 놈은 찾지 못했어."
"아닙니다.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을 상대로 지냈습니다."
내 목숨은 버려도 나를 숨겨준 친구만은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냐?"
"물론 굶기도 했었고 칡뿌리도 캐먹다가 정 배가 고플 때는 시내에 나가 행인에게 구걸한 돈으로 라면이나 빵, 부식 등을 사먹었습니다."
"그럼 무등산 어디에 있었냐?"
"중봉에서 2수원지 계곡 사이에 6개의 동굴이 있습니다. 우측에 있는 4개의 동굴 중 세번째 동굴에 있었습니다."
산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듯하게 대답했다. 사실 나는 현장을 검증해 주기를 바랐다. 2, 3명의 군인이 데리고 가면 산에는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탈출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신장소의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신장소를 확인하지 않고 매질만 해댔다. 그뿐 아니라 개미고문까지 했다. 온몸을 묶고 입, 코, 귀 등을 막은 뒤 들것에 실어 개미가 많은 나무 밑 잔디밭에 두었다. 불개미들이 온몸에 달라붙었다. 공포에 치를 떨었다.
살인적인 고문
6월 28일 합동수사본부가 있는 상무대로 넘겨졌다. 상무대에 들어가자마자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수갑을 뒤로 채우더니 탁자 위에 거꾸로 눕혀놓고 물묻은 곡괭이 자루로 발바닥을 70대나 내리쳤다. 발이 퉁퉁 부어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감각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일으켜세우고 계속해서 고문했다. 이번에는 무릎을 꿇게 한 후 그 곡괭이 자루로 어깨쭉지 양쪽을 각각 40대씩 내려쳤다. 그들이 한 대 때릴 때마다 나는 오뚜기처럼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야 했다. 뒤로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일어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80번을 쓰러졌다 일어나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실신상태에 이르자 의자에 앉혀 조서를 받기 시작했다. 조사받으면서 거짓말한다고 맞는 것은 덤이었다. 계엄군 잡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자체방어한 것만 대충 얘기했다. 이렇게 1차 조서를 받고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고문실로 불려갔다. 서울 합수부에서 내려온 체중이 80킬로그램 이상이 되어보이는 세 명의 수사관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보안대에서 똑같은 식으로 알리바이를 캐물었다. 나는 산에 있었다고만 했다. 그들은 내 말을 곧이듣지 않고 두들겨팼다. 온몸을 묶은 뒤 무릎을 꺽고 곡괭이 자루로 때렸다. 한 대 맞을 때마다 온몸에 전기가 왔다.
이틀에 한번 씩 불려갔다. 내 이름을 부르면 마치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나갔다. 그들이 계속해서 알리바이를 캤으나 끝까지 버텼다. 수갑을 채운 채로 무릎을 깍지끼우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고는 물고문을 시작했다. 머리가 무겁기 때문에 밑으로 쳐지자 얼굴에 수건을 덮어놓고 물을 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을 먹지 않으려고 숨을 쉬지 않았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나 물을 먹었는지 배가 퉁퉁 부어올랐다. 그들은 맹물만 부은 것이 아니었다. 후추가루, 고추가루까지 섞은 물을 먹이면서 온갖 방법으로 실토하게 했다. 그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를 배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온몸이 실신상태가 되어 기절을 했다.
그들은 내가 끝까지 버티자 "좋다. 네가 정 그런다면 무등산에서 전전한 걸로 인정해 주마"라고 했다. 모진 고문 끝에 이긴 것이었다. 나는 헌병에게 업혀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또다시 불려갔다. 영창에 들어온 후 벌써 네번째였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너, 김복수 알지?"
순간 뜨끔했다. 학운동 자위대로 활동했던 김복수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모른다고 잡아뗄 수는 없었다.
"잘 압니다만."
"김복수가 이미 다 말했으니 사실대로 불어라."
"무엇을 불란 말씀입니까?"
"김복수가 그러는데 네가 무기탈취 주범이라고 하드라."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그럼, 학동에서 무기를 분배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나는 그곳에 무기가 있길래 한 정 갖고 주위 사람들도 한 정씩 줬을 뿐입니다. 그것이 뭐가 무기탈취 주범입니까?"
"이놈 안 되겠어, 아주 지능적으로 속이는군."
그들이 소위 통닭구이 고문을 했다. 밧줄로 목을 가볍게 묶은 뒤 뒤로 젖힌 다음 손과 발을 묶어 S자형으로 만들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1백 바퀴나 2백 바퀴 정도 사정없이 돌렸다. 처음에는 그네를 탈 때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참을 돌리다가 중지하면 감겨진 밧줄이 풀리면서 가속도를 받아 굉장이 빨리 돌았다. 천지가 어지러왔고 머리를 땅에 처박는 기분이었다. 뱃속에 있는 똥물까지 넘어 왔다.
대질심문 과정에서 고문
심문은 계속됐다.
"계엄군 몇 명을 죽였냐?"
"죽이지 않았습니다."
"2명을 생포하여 인계했지 않냐?"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고문으로 통하지 않았는지 김복수를 데리고 와 대면시켰다. 김복수는 내가 학운동 지역방위의 지휘자였고 계엄군 두 명을 잡아 도청으로 넘겼다는 사실을 모두 얘기해버렸다. 수사관들은 김복수의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면서 김복수를 추켜세웠다.
"김복수 이놈은 착실해, 담배 한 대 피울래?"
김복수는 담배도 피우고 음료수도 마시면서 그때의 일을 모두 빠짐없이 얘기했다. 무기탈취를 주동했다는 것과 총기교육은 물론, 수류탄 투척술을 교육했다는 것 등 지금까지의 거짓말이 모두 들통나버렸다.
모든 사실이 드러나자 그들은 마치 미친 사냥개처럼 고문을 시작했다. 수정을 채우고 발바닥을 밀착시켜 꿇어앉혀놓고 다리 사이에 지름이 10센티미터 이상 2미터 길이나 되는 각목을 끼워넣고 한 사람은 목을 뒤로 제치고 80킬로그램 이상 되는 두 사람이 양다리에 올라가 몽둥이를 비벼댔다. 계속해서 짓뭉개니 다리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야! 개새끼들아, 차라리 총으로 죽여라. 왜 이리 고통을 주느냐"고 퍼부으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사관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러자 그들은 발로 면상을 차버렸다. 그 통에 이까지 어긋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초인간적인 힘이 생겼다. 그 무거운 체중을 버티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허리를 다쳤다. 그때 모진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기 때문에 석방 후에는 양쪽 어금니가 나가버렸다.
몇 번을 헌병에게 업혀 영창 안으로 들어갔다. 영창 안의 사람들은 통합병원에 가면 쌀밥과 담배를 준다니까 조금만 다쳐도 통합병원으로 후송을 가려고 했다.
후송갈 입장이 못 되면 설사약이나 머리 아픈 약을 한꺼번에 먹어 후송가기도 했 다. 나 같은 경우 후송이 우선적이었으나 가지 않았다. 저놈들 손에 당하고 저놈들이 준 약으로 낫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한 달 동안을 손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손의 스냅을 이용해 먹었고, 그것도 불편할 경우 개처럼 엎드려서 먹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란임무 주요종사자 15년형
나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끌려올 때마다 조서를 받았다. 모두 14차례 조사를 받았고 학운동 지역까지 현장검증도 했다. 수감자들은 형량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검사조서를 받았다. 특히 공군소령인 이차량 검사에게 조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심하게 맞고 왔다. 나 역시 이차량 검사에게 조서를 받았다. 그 검사는 내가 수갑을 풀자마자 "네가 문장우여"라면서 몽둥이로 어깨쭉지를 내려쳤다. 그가 두번째 내려치려고 할 때 나는 그 몽둥이를 잡아버렸다.
"검사님, 저는 사실 검사님에게 조서받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검사님의 매가 무서웠다면 원치 않았을 겁니다. 이따위 매는 수없이 맞았습니다. 이 정도 매로 내가 밝히지 않았던 것을 끝까지 밝히겠다면 때려보십시오."
그는 내 말에 당황했던지 때리지 않고 매를 내렸다. 그는 켄트 담배를 권했다. 그가 담뱃불을 붙이려 하자 나는 라이터를 자연스럽게 빼앗아 그에게 먼저 붙을 붙여준 후 고개를 약간 돌려 내 담뱃불을 붙이고 고맙다고 한 후 라이터를 돌려주는 여유를 보였다.
"검사님, 양담배 피운 것을 고발하고 싶었는데 나도 같은 공범이라 관두겠습니다."
"이 자식 보소."
"검사님, 비록 수감자이지만 인격적으로 조서 받읍시다."
"뭐 인격! 죄수에게도 인격이 있냐?"
"죄수이기 전에 인간이지 않습니까? 거지에게도 인격이 있답니다. 선진국을 향하는 우리나라도 죄수를 인격적으로 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자식 보소. 그럼, 간략하게 하자."
"조서받은 뒤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할테니 들어주십시오. 그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묵비권을 행사 하겠습니다."
"약속만 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너만 괴롭지 않느냐?"
"검사님 인격을 믿고 싶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조서를 받았다. 조서에는 내가 한양대 2년 중퇴한 걸로 되어 있었다. 학교 정문에도 가보지 않은 나를 그런 식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조서가 끝나자 지장을 찍기 앞서 조건제시를 했다.
"조건제시를 합시다. 사격술 요령과 수류탄 투척술을 교육했다는 이 두 가지만 삭제해 주십시오."
"그것이 가장 핵심인데 말이 되는 소리냐?"
"약속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자 검사는 그 부분을 빨간 볼펜으로 두 줄을 긋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 후 군법재판을 받았다. 나는 사형을 받을 줄 알았는데 내란 주요임무 종사자로서는 가장 낮은 형량인 15년형을 받았다. 그 외 학운동 지역방위를 했던 김춘국은 내란 부화수행으로 5년, 김복수는 2년형을 받았다.
교도관의 임무
재판 후 교도소로 이송되었으나 교도소에서도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밥보다 못한 식사와 용변보는 모습이 다 보이는 화장실이 문제였다. 잠을 잘 때는 모두 칼잠을 자야 했다. 또한 교도관들 역시 우리를 개 돼지 취급을 했다. 하루는 잠이 오지 않아 성경책을 보고 있는데 야간근무 교도관이 대뜸 욕을 했다.
"개새끼, 잠 안 자고 뭣 해?"
그 소리를 듣고 기분이 나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 새끼, 네가 나를 쳐다봐. 일어서."
상의를 벗어 내의만 입은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수번이 몇 번이냐?"
"2118인데 왜 그러십니까?"
"건방진 자식, 왜 그렇게 쳐다봐. 이 개새끼야!"
"담당님, 꼭 그런 식으로 욕설을 해야 합니까? 욕을 안 해도 충분히 나무랄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새끼 봐라."
그는 교도관이 근무하는 관구실에서 몽둥이를 가져오더니 철창 밖으로 손을 내라고 했다. 야간에는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철창 밖에서 때리려 한 것이다.
"정말로 때려야겠습니까?"
"때려야것다."
철창 밖으로 손을 멀리 내밀었다. 교도관이 몽둥이를 높이 들어 내려치려고 할 때 나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내민 손을 쑥 빼버렸다. 그러자 몽둥이가 철창에 맞고 부러졌다. 교도관은 더욱 흥분하여 욕을 퍼부었다. 나는 그에게 호통을 쳤다.
"담당님, 한자로 교도관이란 글자를 쓸 줄이나 아십니까?"
"이 새끼, 나를 놀리는 거냐?"
"너희 같은 놈들이 교도관이라니 대한민국이 웃긴다. 교도관 임무가 뭔지나 아냐? 교도할 때 '교' 자는 가르칠 교야. 너는 가르칠 능력이 없으니 집에 가서 책을 좀 더 봐!"
이렇게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 자고 있던 동료들이 깨어나 "저 자식, 무식한 놈이여"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놀려댔다. 그 교도관은 온갖 험악한 인상을 쓰며 발광을 하더니 관구실에서 백묵을 가져와 철창에 뭐라고 썼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우리 방에 식수금지, 세면금지, 잡수금지라고 씌여 있었다. 어제 그 교도관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보복을 한 것이다. 아침식사는 들어 왔으나 매일 주는 한 말의 물은 주지 않았다.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단식투쟁
나는 우리 방의 수감자들과 상의하여 다섯 끼를 굶기로 했다. 이른바 단식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교도소측에서는 처음 당한 일이라 놀랐는지 야간근무 교도관을 문책했다. 문책받은 교도관은 화풀이를 하려고 나를 불러내 관구실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나에게 엎드리라고 했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니 사정없이 빰을 쳤다. 입술에 피가 터졌는데도 계속해서 때렸다. 참다 못한 나도 그를 때렸다. 일반수인 규율부 애들까지 합세하여 나를 때렸다. 3대1로 붙어 우당탕탕하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지 우리 방의 수감자들이 문짝을 발로 차며 항의를 했다. 수감자들의 집단적인 항의에 겁이 난 교도관은 나를 때리는 것을 중지하고 방에 넣어줬다. 우리는 계속 단식을 했다.
그때가 10월 말쯤이었는데 방에 있던 몇 명이 출감되었다. 우리 방의 숫자가 적어지자 교도관 열댓 명이 밧줄과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우리 방의 수감자들을 군화발로 짓밟은 다음 보안과로 끌고가 온몸을 묶고 채찍으로 때렸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양심수 2백여 명 모두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에 들어 갔다. 우리는 서신왕래와 면회허용, 구매허용, 접견물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요구했다. 전체가 다섯 끼를 단식한 후 수감자 전체가 소장을 면담했다. 소장은 모든 조건을 들어주는 대신 순화교육을 받으라고 했다. 우리는 일반수들이 짐승 취급을 당하면서 하루에 8시간씩 받는 순화교육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한 시간 교육을 받기로 했다.
그 후 면회가 허용되었고 서신도 일주일에 한 번씩 연필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교도관들도 약간 의식있는 사람들로 대체되었으나 교도소측의 행패는 여전했다. 김치는 썩은 젓갈로 담은 데다 모래가 섞여져 있어 도저이 먹을 수가 없었다. 물로 씻어내고 고추장으로 양념을 해야만 겨우 먹을 수가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그런 김치를 주고 따로 김치를 팔았다.
교도소내에서 5·18 관련 수감자들끼리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허규정, 정상용 등 학생 출신의 수감자들은 거의 책을 보며 지냈다. 그러나 학벌이 낮은 수감자들은 한자를 모르고 이해력이 없어 책을 보지 못하고 바둑, 장기 등을 두며 나날을 소일했다. 가끔 우리가 장기를 두다가 "장이야"하고 소리치면 그들은 일제히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그러면 우리는 못 배운 죄로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도소에 있을 때 이차량 검사가 몇 차례 불렀다. 조서가 미비되어 불려간 줄 알았는데 쉬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담배, 음료수, 빵을 주면서 "내가 조사할 때 모두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너만은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정책적인 것이니 1년-2년 반 사이에 모두 풀릴 거다"라면서 그동안 건강에 유념하고 잘 지내라는 것이었다.
석방 후 생활
10개월 정도 수감되었다가 1981년 4월 3일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되어 나와보니 아내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야쿠르트 배달을 하다가 바람이 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헤어지고 어머니를 모시고 애들과 함께 살았다. 그동안 있던 살림도 모두 풍지박산이 되고 빈 몸뚱아리뿐이어서 막노동을 했다. 4년 이상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986년 2월 시청에 다니던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상무대에서의 살인적인 고문으로 지금도 건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날씨가 흐리면 다리에 뭐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고 힘이 없다. 무릎 관절과 손가락 관절이 다 부어 있다. 그래도 교도소에서 고문을 풀기 위해 요가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건강이라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인명구조봉사단 전남도지부에 종사하면서 5월 광주민중항쟁동지회의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5월단체들이 난립해 있고 이원화되어 있는데 5월 유관단체가 모두 통합하여 한 목소리가 되길 바란다. 또한 나는 5·18 관련자라고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광주시민에 비해 우리는 단지 두들겨맞고 수감됐을 뿐이다. 5·18 관련자 모두가 떳떳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