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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 지속된 시간 - 차경희展 』
Cha Kyounghee Solo Exhibition :: Photography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제주도 제주시 우도면, 2007
전시작가 ▶ 차경희(Cha Kyounghee 車慶姬)
전시일정 ▶ 2015. 11. 06 ~ 2015. 11. 30
초대일시 ▶ 2015. 11. 07 PM 2:00
관람시간 ▶ Open 10:00 ~ Close 18:00(일요일 휴관)
∽ ∥ ∽
갤러리 진주 미르아트홀(GALLERY JINJU MIR ART HALL)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922 미르치과병원 8F
T. 055-745-8180
www.jinjumir.co.kr
● 차경희, 흙을 먹고 사진을 토하다.
★이영준(기계비평가,
계원 디자인 예술대학 교수)
인간은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다. 땅을 떠나려고 비행기, 우주선, 배를 만들었지만 거기에는 항상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땅을 밟고 있어야 하는 운명을 거스르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려 하기 때문에 위험이 닥치는 것이다. 땅은 인간이 태어난 모태이다. 인간은 발로 땅을 밟고 있지만 사실 발로 깔아뭉개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땅이 개미 같은 인간을 받쳐주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만해진 인간은 땅의 분신인 흙을 함부로 다룬다. 함부로 다루는 정도가 어니라 혐오하고 내쫓으려 든다. 구두에 흙이 묻으면 돈 들여서 닦아버리고 실내는 물론 심지어 길에 흙이 묻어 있어도 싹싹 닦아 없애버린다. 마치 흙이 해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듯 말이다.
흙과 땅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래선 안 된다. 흙은 어차피 우리가 죽으면 돌아갈 미래의 집 아닌가. 흙과 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입주 일이 한참 남았다고 내 아파트를 더럽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흙에서 나왔다. 흙과 땅은 우리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입으로 먹으면 퉤퉤 하고 뱉어내니까 눈으로 먹는다. 본다고 하지 않고 먹는다고 한 이유는 ‘흙-이미지-존재 혹은 신체’로 이어지는 관계가 눈에 의해 긴밀하게 매개돼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 훑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깊이 관계 맺는 것이다. 즉 내가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나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내 삶은 거기 영향을 받아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의 피 흘리는 장면이 완전히 가짜임을 알아도 보는 이는 그것을 끔찍하게 여기며 진저리 치는 이유는 눈으로 본 가짜 피와 가짜 죽음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 삶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상을 내 것으로 소화해버리는 동일시보다 더 근본적이고 강력한 작용이다. 인간이 잘나서 대상을 파악하고 이름 붙이고 정리해서 지식으로 만들어 동일시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 대상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우리가 흙을 볼 때도 흙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우리는 흙을 보면서 흙인간이 된다. 아니, 원래부터 흙이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그런데 흙을 촌스럽고 구차하게 여기는 도시인들은 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잔디를 심어놓고 잔디인간이 되려 한다. 엄밀히 말하면 마당에 잔디를 곱게 깔아놓고 즐기는 서양식 잔디인간이 되려고 한다. 한국 사람도, 서양 사람도 본래는 흙인간이었다. 아니, 흙인간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흙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콘크리트 위에 살면서 그런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흙인간이다.
우리가 흙을 볼 때 거리를 두고 시선으로 훑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렁이가 아니기 때문에 설사 흙을 먹는다 해도 직접 몸 안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시각성이라는 매개를 쓴다. 아무리 흙을 밟고 사는 것이 좋다 한들 도시인의 경우 항상 맨발로 다닐 수는 없다. 기껏해야 잠깐이다. 여름에 해변에서 맨발로 모래 위를 걷는 것, 혹은 지압 효과가 있다고 하여 산에 가서 잠깐 맨발로 걷는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지저분하게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멀찍이서 관조한다.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충청북도 충주시, 2006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경상북도 예천군, 2011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충청북도 괴산군, 2007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경상남도 하동군, 2011
반면, 시골 사람들은 온몸으로 땅을 받아들인다.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시골분들이 올라탈 때 몸에서 땀과 흙이 섞인 냄새가 날 때가 있다. 도시 사람인 나는 얄궂게도 그 냄새를 맡으며 촌스러움, 낙후함, 원시성 등 온갖 부정적인 함의를 떠올린다. 사실 떠올린다기보다는 그런 함의의 그물을 시골분들에게 덮어씌우고는 나는 도회 사람이라고 물러앉아 거드름을 피운다. 그런데 시골분들에게 그런 냄새가 나는 이유는 흙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 냄새는 흙인간의 존재의 증거이다. 도회 사람들이 샴푸인간, 로션인간일 때 시골분들은 흙인간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그분들에게는 풍경화가 필요 없다. 이미 몸 안에 풍경이 들어와 있으니 말이다. 시골사람들이 즐기는 소위 이발소 그림은 사실 풍경화가 아니다. 흙 자체가 풍경화가 아니듯이, 이발소 그림은 시골 사람들이 흙을 대하는 태도의 일부이다. 풍경화란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태도를 필요로 하는데, 이발소 그림에서는 뒤에는 스위스 알프스 산이 있고 앞에는 충청북도의 물레방아가 있는 말도 안 되는 판타지가 등장한다. 이 판타지는 허상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이 먹고사는 시각적 음식이다. 그들의 밥상에는 열무김치와 된장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판타지도 올라와 있다. 그들은 그 그림을 보면서 알프스에 갈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보는 그림’으로 인식할 뿐이다. 뒷산에 소나무가 있듯이 이발소에는 이발소 그림이 있다.
그런데 그런 취향이 도회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분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증명한다. 그 냄새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면 나도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설악산 십이선녀탕에서 산나물 캐는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을 때 그랬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촌스러움, 낙후함의 함의가 있는 어떤 감각적 인상도 받지 못했으며, 그분들과의 대화는 맑은 샘물을 떠 마시듯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대화라고 해봐야 뭐 캐러 다니시냐는 둥, 잠은 어떻게 주무시냐는 둥, 십이선녀탕 다음에는 널협이골로 가시는 거냐는 둥의 자못 사이비 인류학자 같은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산행을 통해 나도 어느덧 땅이 되었기에 나는 그 아주머니들에게서 어떤 촌스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흙은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사진가는 항상 거리를 두는 습관이 있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의 대리자 혹은 증언자로 카메라를 채용하면서 흙을 대한다. 사용이라고 하지 않고 채용이라고 하는 이유는 카메라를 단순히 도구로 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많이 찍어본 사람이라면 결정적인 순간에 카메라가 고장나거나 필름 혹은 메모리 카드가 없어서 낭패를 본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 단순한 사태가 낭패인 이유는 우리의 잘난 존재가 그 하찮은 메모리 카드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우주로 가기 위해 복잡한 우주선을 타는 것만큼이나 대상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생존 방식이다.
차경희는 우리가 언젠가 돌아갈 집인 무덤과, 그 집의 터전인 땅을 찍는다. 이때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진이 너무 앞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맹수조차 사냥할 때 숨을 죽이고 먹잇감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차경희는 풍경을 대할 때 조심하는 편이다. 몸과 카메라에 흙이 묻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묻힌다는 것은 나의 외부에 어떤 것이 달라붙어 이질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하는 상태를 말한다. 묻히지 않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묻은 것을 털어내는 것, 즉 묻은 것의 이질성은 놔둔 채 아예 제거해버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묻은 것에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다. 차경희는 후자의 방법을 택한다. 그렇다고 흙 속에 마구 뒹굴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온몸에 묻히면 안 되고 입을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흙을 묻히는 데도 적절한 방식이 있다. 차경희는 그것을 하나의 리추얼로 만들어 사진을 찍는다. 그녀의 사진에는 무덤이 나오는데, 꼭 무덤을 찍어야만 하는 개인적인 사정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전면에 주인공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흙의 일부일 뿐이다.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경상남도 하동군, 2011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강원도 영월, 2011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전라남도 구례군, 2011
▲ 차경희, <터, 지속된 시간>, 강원 평창, 2012
흙은 분명히 우리 존재의 고향으로서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범위에서 무시돼왔다. 아마 고매한 사상가치고 존재의 근원을 얘기할 때 흙을 말한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흙은 항상 발 아래에 밟히며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당연히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 토양의 오염을 막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지식들과 방법들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흙이 마냥 지식의 진공상태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차경희는 흙을 시각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풍경의 일부로서 끌어들인다. 그의 사진에는 나무와 풀들, 지형과 장소성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의 토대는 흙이다. 그 사진들은 흙을 잊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다. 매우 조용하게. 그 사진들은 풍경 사진이면서 풍경 사진이 아니다. 풍경이란 자연을 프레임에 넣어 관조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차경희의 사진은 흙과 땅으로 다가가기 위한 통로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풍경 사진에 들어 있는 건방짐을 극복하고 있다. 왜 풍경 사진이 건방질까? 관조란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판단은 괄호 속에 넣고 조용히 보는 것이다. 그러나 풍경을 관조하는 우리의 머릿속은 맑게 비어 있지 않다. 온갖 쓸데없는 사상과 이념들이 시선을 재단한다. 왜냐하면 평생 풍경에 대해 배워온 것이 많기 때문이다. 차경희는 그런 것들을 괄호 속에 넣고 흙이 다가오게 만든다. 그 사진들을 통해 우리도 흙을 먹을 수 있게 된다. 흙 냄새에 얽힌 촌스럽고 투박하고 문화화되지 않은 온갖 부정적인 함의들은 사라지고 흙을 우리 곁에 둘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 사진들에서 흙의 외피인 나무와 풀, 심지어 하늘과 물 조차 흙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겸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봉분이 거의 깎인 탓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봉분을 낮게 쓴 것인지, 땅과 거의 같아져 버린 두 기의 무덤 위로는 초봄의 파릇한 풀들이 나 있는 작은 둔덕이 있고 그 위로 매화가 피어 있다(표지 사진). 매화의 고장 광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충청북도 괴산이라고 한다. 어쩌면 흙은 그만큼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광양이면 어떻고, 괴산이면 어떤가 말이다. 매화는 항상 매혹적인데. 그런데 그 사진의 5분의 2쯤은 회색 하늘이 채우고 있다. 땅과 그 위의 외피들을 찍는 거였다면 그렇게 하늘을 많이 넣을 이유는 없다. 지금 보이는 하늘의 반 이상을 잘라낸다고 해도 아무로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늘은 잘라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도시의 마천루는 하늘을 마구 잘라내 버려서 우리는 저녁 노을도, 제비도 볼 수 없게 됐지만 땅과 흙에 대해 겸손한 사진가 차경희는 하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하늘도 흙만큼이나 소중하지만 사상가들의 사유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아마 하늘의 철학이라는 것을 펼친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차경희만이 하늘의 철학자다. 그녀는 하늘을 존중하며 조심스레 사진 속에 초대한다. 이 사진에서 하늘은 피사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진을 있게 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어머니란 나를 있게 해준 존재지만 우리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배신하고 못살게 군다. 하늘에 대해서도 그래 왔다. 차경희는 그런 잘못된 역사를 이 사진으로 뒤집는다. 이 사진은 하늘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사진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나 붉은 저녁 노을이 물든 하늘 등 뭔가 극적인 함의를 가진 하늘도 아니다. 희뿌연 구름이 끼어서 회색빛이 가득하고, 대지마저 회색으로 가득 채우는 퍽퍽한 하늘이다. 가장 함의가 없는 하늘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하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왜냐하면 하늘은 우리가 판단하기 전부터 거기 있었으므로. 이 사진은 그 넓고 큰 하늘에 대해 인간이 뭐라고 말들을 갖다 붙이는 그 담론과 내러티브의 건방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왜 쓸데없이 회색 하늘을 이렇게 많이 사진에 넣었느냐고 물었으나 그 물음은 이내 쓸모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나 자신도 하늘에 대해 쪼잔한 담론으로 판단하고 있었음을 알고 겸연쩍어질 뿐이다.
그러고 보면 차경희의 사진에는 하늘이 참 많이 나온다. 그래서 하늘의 반복 앞에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복이란 더 안 나타나도 되는데 자꾸 나타나서 지겨운 것이다. 그리고 그 지겨움 속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반복이다. 그러나 하늘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넓게, 땅보다 넓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편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이다. 옛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그런 하늘이 사진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어떤 존재가 항상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듯이 하늘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흙과 하늘 사이에 끼어 있는 온갖 자잘한 것들의 의미는 뭘까? 수많은 풀들, 돌들, 안개, 나무들이 사진에 나온다. 사실은 흙과 하늘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중요하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생태계라는 정교한 조직을 이루는 요소들이며, 그중 어느 것 하나만 없어져도 생태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인간의 인식론적 폭력이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라는 식으로 생태계의 요소들을 무시해왔을 뿐이다. 차경희의 사진은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소중하다고 외쳐서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말없이 사진으로 보여줘서 일깨운다. 말없이 대지에 서서 한참을 응시하고는 카메라를 설치하여 찍는 조용한 태도를 통해 작은 사물들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차경희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흙과 하늘만이 아니라 사진에 나오지 않은 것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게 된다. 지렁이가 하늘만큼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