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 야생동물 분류 도감
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생물의 종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유전학의 발달로 이제는 유전학을 곧 분류학으로 인식하는 학자들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생물을 분류하는 기본은 형태학적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반구대 암각화는 인류 최초의 야생동물 분류 도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개별적으로 구분이 가능한 그림이 총 296점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193점이 다양한 동물을 표현한 그림이다. 동물 그림에서 다시 고래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을 추려보면 58점이나 된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동물 분류군 중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이 바로 고래란 뜻이다. 이렇게 많은 고래 그림을 들여다보면 100%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류의 고래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몇몇 그림이 눈에 띈다. 물론 형태학적 특징만으로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그림도 몇 개 있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이 선사시대 기록자(혹은 예술가)는 행동이나 생태학적 특징까지 표현하여 부족한 형태학적 설명을 잘 메우고 있어 고래 종류를 구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북방긴수염고래, 느린 행동으로 일찌감치 남획된 고래
고래는 약 5,000만 년 전 육상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하여 수중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포유동물이다.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고래는 차가운 바다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두꺼운 지방층이 발달하였고 덩치가 커지게 되었다. 대신 유영할 때 저항으로 작용하는 털과 가죽은 퇴화하여 사라졌고 체형은 매끈한 유선형으로 바뀌었다. 보다 매끈한 체형을 이루기 위해 뒷다리는 퇴화하여 골반만 체내에 남았으며 앞다리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형태로 변형되었다. 유영 시 균형을 잡아주는 등지느러미와 유영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꼬리지느러미가 생겨 마치 물고기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고래는 허파로 대기 중의 공기를 호흡해야하는 포유동물이므로 짧게는몇분에서 길게는수십분 호흡을 참고 물속으로 잠수하였다가 호흡을 위해 해수면 위로 올라와서 숨을 내쉬고 다시 새로운 공기를 들여 마셔야 한다. 이때 콧구멍을 통해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뜻한 체내의 공기와 차가운 바깥 공기가 만나 응결되면서 생긴 일종의 콧김이다.
마치 우리가 겨울철 입이나 코를 통해 숨을 내쉴 때 생기는 입김이나 콧김과 같은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호흡을 할 때 머리를 높이 들지 않고도 호흡을 쉽게 할 수 있게끔 고래의 콧구멍은 정수리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데 공기를 내뿜는다고 하여 특별히 분기공(blowhole, 噴氣孔)이라고 부르며 공기를 내뿜는 행동을 분기라고 한다. 이 분기는 고래의 종류에 따라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이다. 대왕고래(blue whale, Balaenolptera musculus), 참고래(fin whale, B. physalus), 보리고래(sei whale, B. borealis), 브라이드고래(Bryde's whale, B. edeni), 밍크고래(minke whale, B.acutorostrata), 혹등고래(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등의 분기는 일직선으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긴수염고래(northern right whale, Eubalaena japonicus), 북극고래(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귀신고래(gray whale, Eschrichtius robustus) 등은 두 갈래로 갈라진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이제 반구대 암각화의 왼쪽 아래에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고래 세 마리를 살펴보자. 머리 위에 양쪽으로 갈라진 고리 같은 문양이 보인다. 세 마리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고래는 입술 선이 주둥이에서 넓고 뭉툭한 가슴지느러미의 기저부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 마리 모두 등지느러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을 조합해 보면 분명 북방긴수염고래로 보인다. 지금도 북반구의 고위도 해역에서 관찰되는 북방긴수염고래의 사진과 비교해 볼 때도 분기의 모양이나 등지느러미가 없는 형태학적 특징이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개체와 잘 일치한다.
유영 속도가 매우 느리고 연안에 가까이 접근하여 서식하는 긴수염 고래는 일찍부터 고래잡이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지방층이 두껍고 죽은 후에도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포획하기에‘알맞다’혹은 ‘좋다’는 뜻으로 영어로도‘right’라는 단어를 붙여 right whale이라고 한다. 미국의 고래잡이가 번성했던 19세기에는 New Bedford나 Nantucket과 같은 미국 북동부 연안의 포경기지에서 출발한 포경선들이 우리바다까지 진출하여 많은 북방긴수염고래를 포획하는 바람에 현재는 북태평양에 2~300마리 정도만 남아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우리바다에서는 1974년 동해 남부에서 한 마리가 마지막으로 포획된 뒤 자취를 감추었다.
혹등고래, 날개 같은 긴 지느러미를 가진 고래
북방긴수염고래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겨보면 머리를 아래로 하고 복부가 주름으로 가득한 고래 한 마리가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모든 고래 그림이 옆모습이나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개체는 유달리 뒤집힌 채 복부의 주름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복부의 주름이 항문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혹등고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몸길이의 1/3 정도로 긴 가슴지느러미를 가지는 것이 혹등 고래의 형태학적 특징 중에 하나임을 내세워 이 그림은 가슴지느러미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어서 혹등고래라고 단정 짓기가 애매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참고래과에 속하는 대왕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브라이드고래, 밍크고래 등도 복부에 주름이 많다. 특히 대왕고래, 참고래, 브라이드고래는 혹등고래 못지않게 긴 복부 주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왕고래, 참고래, 브라이드고래, 혹등고래로 후보군이 좁혀진다. 이제 이 그림의 주인공이 어떤 종류인지 선사시대 사람들의 배 만드는 기술과 고래의 생태학적 특성을 고려해보자. 반구대 암각화를 만든 선사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배라고 해봐야 동물의 가죽을 덧붙이거나 통나무를 깎아 만든 조그만 배나 나무 몇 개를 이어 만든 뗏목 정도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배나 뗏목으로는 거칠고 먼 바다로 나가서 유영 속도가 빠른 고래를 따라다니며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고래의 생태학적 특성을 보면 북방긴수염고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혹등고래는 천천히 유영하며 육상 가까이 접근하기 때문에 관찰이 쉬운 반면 대왕고래, 참고래, 브라이드고래 등은 주로 먼 바다에 분포하며 빠르게 유영하기 때문에 관찰하기가 더욱 어렵다. 또 이 그림은 복부를 강조하였는데 혹등고래는 고래뛰기, 가슴지느러미치기, 꼬리지느러미치기 등 다양한 행동을 보여주며 복부를 하늘로 향하게 하여 드러눕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대왕고래나 참고래 또는 브라이드고래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신체 부위의 비율이나 형태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당시 사람들의 선박 기술이나 고래의 생태 및 행동 특성을 고려해 볼 때 혹등고래를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거 포경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바다에서는 혹등고래가 아주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북태평양에는 약 22,000마리의 혹등고래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대부분 하와이와 알래스카 사이를 회유하면서 동부 태평양에 분포하고 우리바다를 포함한 서부 태평양에는 일부가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혹등고래는 우리바다에서 2~3년에한마리 정도 연안에 설치된 그물에 걸려 잡히는 경우가 있으나 아직까지 필자가 수행했던 현장 조사에서 산 채로 관찰된적은 없다.
귀신고래, 이름과 달리 한 없이 온순한 고래
혹등고래 꼬리지느러미 좌측에는 목 부분에 다섯 개의 줄을 그려놓은 고래가 있다. 머리 끝부분에는 삼각형의 눈과 입을 새겨 놓았다. 복부의 주름, 측면의 입과 눈을한평면에 동시에 묘사한 것이 이그림의 특징이다. 이렇게 짧은 주름을 가진 종류로는 귀신고래밖에 없다. 밍크고래와 보리고래가 귀신고래보다 약간 더 긴 주름을 가지고 있지만 주름의 숫자가 5∼60개로 2∼7개인 귀신고래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이그림은 귀신고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귀신고래 역시 유영속도가 느리고 연안에 가까이 분포하지만 밍크고래와 보리고래는 대왕고래나 참고래 및 브라이드고래처럼 먼 바다에 서식하며 빠르게 움직이는 종류들이므로 이 그림은 귀신고래로 봐도 무방하다.
지금도 러시아 북극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그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수 백 년 전에 사용한 방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귀신고래를 사냥하고 있는데 이들의 사진을 보더라도 이 그림이 귀신고래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귀신고래는 북태평양에만 서식하고 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연안에 서식하는 집단(동부계군)은 현재 약 19,000마리로 개체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나 한국, 일본,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 연안에 서식하는 집단(서부계군)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이루어진 남획으로 인하여 현재 120마리 정도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멸종 위기에 처한 귀신고래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귀신고래가 회유하던 연안 해역을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하였다(울산귀신고래회유해면,蔚山귀신고래廻遊海面). 그러나 귀신고래 역시 1977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우리바다에서는 더 이상 관찰할 수 없는고래가 되고 말았다.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울주군 대곡리는 과거 바닷물이 접하는 해안선이었고 따라서 다양한 고래가 육지 가까운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을 것 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쉽게 고래를 관찰할 수 있었고 고래의 형태 뿐만 아니라 생태나 행동 특성을 잘 살린 그림을 바위에다 새겼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바다에 많은 고래가 서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바로 반구대 암각화다. 18세기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의 남획으로 인해 우리바다에서 사라진 북방긴수염고래나 귀신고래가 반구대 암각화가 만들어졌던 선사시대처럼 우리 바다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 안용락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 연구사) 사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