솎아내기
조수현
몇 년째 베란다에 방치된 화분에 큰 기대 없이 바질 씨앗을 뿌렸다. 며칠 만에 싹이 많이 올라왔다. 눈 뜨자마자 베란다로 달려가 밤새 바질이 얼마나 자랐는지 살피는 게 아침 일과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바질 보는 재미에 힘들었던 새벽 기상도 어렵지 않다.
오늘은 친정엄마에게 빼곡히 자란 바질 사진을 자랑스레 찍어 보냈다.
“솎아줘야 해.”
김이 팍 샌다. 당장 전화를 걸어
“이렇게 귀엽고 튼튼하게 잘 자란 것을 뽑아내라고? 너무 아깝잖아.”
라며 따졌다.
그런 내게 20년 가까이 수박 농사를 지었던 어머니는 뜬금없이 본인이 수박 농사 처음 짓던 해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수박 열매 솎는 날이었어. 아빠가 하나만 남겨놓고 다 잘라버리라고 했거든. 근데 아무리 봐도 매달린 수박이 하나같이 예쁘고 좋아 보이는 거야. 버리기 아깝더라고. 아빠 몰래 두 개씩 남겨 뒀지. 그해 수박 농사 어떻게 됐게? 완전히 망쳤어.”
어머니는 적과나 싹 난 채소 솎아내는 것이나 같은 원리라고 했다.
“좋아 보인다고 다 남겨 놓았다간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게 되는 거야. 과감하게 뽑아내야 크고 좋은 열매가 달리지.”
올해 3월 1일 자로 육아휴직을 했다. 6개월 이상 고민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보직이 바뀐 지 1년밖에 안 된 한참 일할 신규의 휴직, 남편이 주말부부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와서 저녁에 육아를 함께 할 수 있는 상황 등 휴직이 필요 없거나, 하면 안 될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직장에서 인정받기 위해 항상 후 순위였던 딸에게 엄마 노릇을 좀 해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는 너무나 결정적이었다. 빨리빨리, 시간 없어, 뛰어를 달고 사는 엄마가 아니라 1년 만이라도 느긋하고 편안하게 딸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고. 책 읽어주며 지난 시간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범한 일상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어제, 하교한 딸에게 간식 차려주며 몇 마디 하다 잠깐 소파에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책상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딸아이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일어났어?”라고 한다. 새벽 기상 후유증이다. 12시까지 유튜브 실컷 보다가 겨우 잠자리에 들고, 새벽 기상한답시고 5시부터 일어나서 사부작거리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집안일을 비롯한 각종 관혼상제를 제외하면 평일 오전 3시간 정도 내 시간이 생기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고요한 집에서 독서와 글쓰기로 내면을 충만히 채운 뒤 딸이 하교하면 아이에게 오롯이 시간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휴직하자마자 월 2회 그림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고, 교과 연구회 회원의 학교를 찾아다니며 수업 촬영을 하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엔 시민대학에 가서 글쓰기 수업을 듣다 보니 개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나만의 시간을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5월 말부터 새벽 기상을 하게 되었다. 새벽 6시 전에 일어나서 아이 하교 전까지 알차게 시간을 쓰지만 정작 딸아이가 하교할 즈음 에너지가 바닥난다. 하교한 딸에게 간식을 주고 혼자 조용히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오전에 읽다 만 책을 읽으려 하지만 보통 꾸벅꾸벅 졸다가 한두 시간 낮잠을 자기 일쑤였다.
낮잠에서 깨어나 부랴부랴 딸이 오늘 분량의 공부를 마쳤나 확인하고 안 되었으면 다그치다가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딸을 씻기고 감사 일기를 쓰게 하고, 20분짜리 영어 유튜브를 보여주고 나면 어느새 자야 할 시간이다. 어젯밤 문득, 잠자리에 든 딸을 보면서 ‘직장 다닐 때랑 별반 달라진 게 없네. 이럴 거면 왜 굳이 휴직했지?’라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온다.
새벽 기상을 하고 싶으면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늦게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자정을 넘기고는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 나. 휴직했으면 학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온전히 가정생활에 집중해야 하는데 아직 연구모임을 두 개나 하는 나, 거절을 잘 못해서 내키지 않는 모임에 나가고 있는 나·나·나.
‘선택은 동시에 포기다.’
며칠 전 김신지 작가의 수필에서 봤던 문장이 떠오른다. 남은 휴직을 딸아이와 밀도 있는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처럼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조금씩 남겨두다 보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후회의 열매를 거두게 되겠지 싶으니, 등골이 오싹하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보기에도 아까운 바질을 뽑는다. 절반 이상 뽑아내니 빽빽하던 새싹들 사이에 틈이 생긴다. 처음 휴직할 때 품었던 마음을 지키며 남아있는 8개월이 후회 없도록 삶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솎아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