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건봉사 불이 팽나무
금강산은 우리 땅이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땅이다. 하지만 산줄기야 그대로이니, 고성군 건봉산의 건봉사는 금강산의 절이다. 이 건봉산은 ‘금강산 감로봉’ 산자락으로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건봉산’이 되었다. 안석경의 금강산 기행기 ‘동행기’(東行記)에 이 감로봉의 이름이 나온다.
안석경(1718~1774)은 강원 원주에서 태어난 주선 후기의 문인이다. 당시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과거에 3차례 낙방한 뒤 강원도 횡성 삽교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상인의 움직임이나 민중적 항거 등이 생동감을 주는 ‘삽교만록’ 그리고 ‘삽교집’, ‘삽교예학록’ 등의 책을 썼다.
그의 금강산 기행기 ‘동행기’는 원주 안산을 나선 1761년 4월 1일부터 5월 13일까지 41일간의 여정으로 이때 건봉사에서는 4월 27일부터 5월 1일까지 머물렀다.
‘외수재(外水岾)에서 남쪽으로 간 것이 산이 깊고 험하여 휘고 꺾이어 봉우리가 되고, 언덕이 되고, 고개가 되고, 골짜기가 되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데 감로봉(甘露峰)을 최고로 일컫는 이유는 건봉사를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감로봉은 건봉사의 주산(主山)이 되는데 그 한 줄기가 나뉘어 북쪽으로 산회하여 왼쪽으로 여러 골짜기의 물을 끼고 고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그의 동행기의 내용처럼 이제 건봉산은 감로봉이란 이름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건봉사는 서기 758년 발징화상, 정신, 양순 등 31명의 수도승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염불만일회를 결성하고 27년 5개월 동안의 긴 염불 수행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이 건봉사도 피하지 못했다. 1951년 4월 2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직전까지 2년간 국군 5, 8, 9사단과 미 10군단 장병들이 북한군 예하 12, 15, 45사단과 이곳에서 16차례의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미 10군단 대신 거진 앞바다의 미 7함대 20여 척 군함의 도움으로 중공군 1개 사단과 북한군 2개 사단을 건봉산 계곡에서 마침내 전멸시켰다. 이때 건봉사는 불에 타 완전 폐허가 되었고 1920년에 세운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았다.
여기 진신 사리탑은 우리나라에 12과, 스리랑카에 3과 등 세계에 15과뿐인 석가세존의 진신 치아 사리를 모신 곳이다. 이 사리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중국 산서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금관가사, 구엽경 등과 함께 가져온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와 통도사에 봉안했으나 임란 때 왜병이 침탈했다.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찾아와 자신이 의승병을 일으킨 건봉사에 다시 봉안했다. 1986년 또 도굴범이 가져가 우여곡절 끝에 찾았으나 이때 4과를 잃어버렸다,
이곳에 한국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절의 모습을 지켜본 3백여 살 왕소나무가 있다. 또 4백여 살 팽나무가 불이문 옆에 있다. 역사의 부침에, 온갖 고난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그 아픈 역사를 보듬고 있는 나무이다.
불이문은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기 전, 마지막 단계의 문이다. 불이는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옳고 그름, 크고 작음, 높고 낮음, 하늘과 땅, 극락과 지옥 등 두 가지로 분별하지 않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인 건봉사 불이문 옆 팽나무 앞에서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전쟁의 참화를 떠올린다. 불이가 모든 게 하나인 부처의 세계라면 그것은 곧 평화와 안식일 테니, 건봉사 불이문과 한 그루의 팽나무는 둘이 아닌 한 몸일 것이다. 고개 숙여 세상만사 평안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