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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스크랩 27. 고대의 동서 교류(2)
임광자 추천 0 조회 29 06.10.22 19: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7. 고대의 동서 교류(2)

 

다. 동서의 교통로 비단길

 

(1) 한 대의 동서 교류와 비단길

 

비단 길이라고 하면 비단처럼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광택과 보온이 뛰어난 비단을 연상하여 그런 대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전혀 다른,  너무도 험해서 죽음의 길이라는 것이 더 적합한 이름일지 모른다.

 

19세기 어떤 독일의 지리학자가 중국의 비단이 이 길을 따라 서방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비단(緋緞)이라고 하면, 중국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고, 중국에서의 비단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여의 귀족들이 나들이 할 때는 비단옷을 입었고, 동예에서는 산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오래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비단을 명주(明紬)라 한다.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을 명주실, 즉 생사(生絲) 혹은 생견사(生絹絲)라고 하고, 이를 고급스럽게 제직한 것이 비단이다. 다시 비단은 그 제직 기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하나 그 본 바탕은 명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이 비단의 원료와 제직 기술을 알게된 것은 16세기 이후라고 하고 질감과 보온성이 뛰어나고 광택이 우수해서 로마의 귀족들이 다투어 이 비단을 구입하여 천정부지로 값이 올라서 금과 맞 교환할 정도였다고 하며, 제정시대 로마의 황후조차도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단을 백(金帛)이라고도 한다. 중국은 비단에 대한 일체의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이것은 국부의 원천에 대한 보호 조치로서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해서 들어왔다는 목화에 대한 이야기나, 소련이 회충, 요충, 편충의 구충제로 쓰이는 산토닌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 씨앗의 해외 유출을 엄격히 통제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당시 서역에는 무제 무렵에 36개의 나라가 있었다가, 그 후 55개로 늘어났고, 도시마다 성곽이 있었으며,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였으나, 나라의 규모는 매우 작아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8만 정도였고, 작은 나라는 2천도 안되었기 때문에 나라의 수는 많았지만 그 세력은 아주 약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나라들은 모두 흉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한 무제는 이들을 흉노로부터 해방시켜 한의 속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쪽에서 흉노를 협공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 파트너로 삼은 것이 흉노에게 쫓겨서 권토중래의 꿈을 품고 서쪽으로 밀려난 대월지(大月支)라는 나라였다.

 

이 대월지와의 동맹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명을 띄고 서역으로 간 것이 장건과 백 명 정도의 그 부하들, 이들이 장안을 출발한 것이 기원전 139년이었고, 돌아온 것이 기원전 126년이었으니까 13년이 걸렸다.

 

이 기간 중 하서로 향한 장건은 곧 흉노에게 잡혀 10년간 억류생활을 하였고, 흉노의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얻었다가, 10년이 지나 감시가 소흘한 틈을 타서 그곳을 탈출, 월지로 갔으나, 사정을 달라져서, 월지는 다시 오손(烏孫)에게 쫓겨 일리 강유역의 땅을 잃고 더욱 서쪽으로 나아가 오늘날 우주베크 공화국이 있는 소그디아나(사마르칸트일대의 고대 지명)로 이동하였다. 이에 장건은 톈산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서진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고, 대완(大宛:페르가나)과 강거(康居:키르키즈 초원)을 거쳐 월지에 도착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월지에는 도착했으나, 기름진 소그디아나 지방을 차지한 월지는 아프카니스탄 북부에 있었던 대하(大夏)까지 복속시키고 잘살고 있었기 때문에 힘겨운 흉노와 싸우면서 까지 옛 고향으로 돌아갈 의사가 전혀없었다.

 

장건은 1년 넘게 대월지에 체재하면서 여러 곳을 다녔는데, 대하에서는 중국의 촉(사천성)에서 생산되는 베와 죽장을 보고 또 다른 루트, 즉 버마루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체, 귀로에 올랐던 장건은 다시 흉노에게 잡혔으나 흉노의 내분을 틈타 다시 탈출, 호탄, 차말, 미란 등 이른바 서역남도를 거쳐 무사히 장안에 도착하였다.

 

하서 4군의 하나인 주천장건은 서역 남, 북도를 두루 돌아왔고 그에 의해서 전해지는 진기한 서역의 풍물은 한의 군신에게 크다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무제에게 감명을 주었던 것은 대원에 있다는 한혈마(汗血馬/천리마)와 오아시스 지대에서 포도로 만든 술(포도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제는 위청과 곽거병에 군사를 주어 다시 흉노를 정벌하고, 하서 4군을 설치하여 마음껏 포도주는 얻을 수 있었고 서역으로 통하는 회랑도 확보하였다.

 

그러나 대원국에사절을 파견하여 한혈마의 수입을 시도한 것은 실패, 결국 이광리를 보내어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원국을 토벌케 하였다(기원전 104)

 

이광리는 간신히 대원국을 정벌하고 양마 3천필을 얻어서 돌아 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한의 위명이 천하에 알려지고, 한편 장건이 다시 서역에 파견되어 오손과 동맹을 맺음으로서 서역으로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오른편 그림은 하서 4군의 하나인 주천(주취안) 호수 풍경인데, 이름이 주천(酒泉)이라는 것은 술이 많이 생산된다는 것이고, 술 중에서도 향기 좋고 마시기에 부드러우며, 마신 후 숙취가 덜한 포도주의 명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의 무제가 이런 좋은 술을 얻기 위해서 군사를 보냈다면, 이것은 천자의 위엄? 폭군? 애주가?

 

오손은 투르크계의 유목민으로서 그 왕을 곤막이라고 했는데, 흉노의 지배하에 있다가 독립하여, 한과는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고 한의 공주를 왕비를 마지하는 등 한의 서역진출에 중개 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왕망이 신을 세우고(AD 8 ~23) 이 지역을 소흘히 하자 다시 한에 반기를 들고 제 가끔독립을 선언했는데, 후한이 성립되고, 명제 때 반초가 서역 도호가 되어 이 지방을 다스리면서 다시 한의 영토를 서쪽으로 더욱 확장하였다.

 

이 길을 통해서 조공 품을 비롯하여 각가지 진기한 서역의 문물이 중국에 들어오고, 중국 산 물품이 서역으로 나갔으며, 사절과 둔전 병, 그리고 상인들의 부단한 내왕으로 오아시스 도시들이 더욱 활기를 띄게되었다.

 

이때 중국에 들어온 서역의 산물로는 낙타, 사자, 공작 등의 동물, 포도, 석류, 참외, 호도 등의 과일, 재스민과 같은 식물, 향료, 상아, 서각, 대모(玳瑁) 등 장식품 등이었고, 대진국이라고 불렀던 로마의 특산물도 중국에 들어왔는데, 특히 야광벽, 명월주, 산호, 호박(瑚珀), 유리 등의 보석류와, 금화와 은화 등의 화폐, 그리고 금실로 수놓은 모직물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상(代償)으로 중국으로부터 서역 각지로 나간 것은 단연 견직물(비단)이 으뜸이었고, 그 외에도 철기, 모피, 칠기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역로가 후한이 망하고, 중국이 삼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로 분열되면서, 중국의 서역 경영도 어려워졌고, 유목민들이 오히려 중국으로 들어와 그들의 왕조를 세우기 시작하여 비단길은 그 빛을 일시적이 남아 잃게 되었다.

 

(2) 당 대의 동서 교류

 

오랜 중국의 분열을 수습하고 재통일을 달성한 수나라는 38년만에 그 잔명을 다하고, 다시 중원을 하나의 강력한 왕조로 탄생케 한 것이 당나라(618 ~ 907)였다. 당초에 북변을 주름잡고 있던 유목민은 돌궐(투르크)족이었고, 이때 이들은 알타이 산맥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 있었다.

 

동돌궐은 만주의 거란과 실위의 여러 부족을 항복받아 지배하였으며, 서돌궐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격파,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다.

 

당의 고조가 거병 할 때도 이 돌궐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과다한 대가를 요구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가 태종이 즉위하고 당의 국력이 강대해 지면서 이들과 정면 대결하였을 때 돌궐의 사정을 매우 좋지 못해서 수년간 많은 눈이 내려 가축이 굶어죽고, 유목민들은 혹한과 기아에서 허덕이게 되는 참상이 되풀이 되자, 재정이 궁핍해진 돌궐의 추장(칸,가간,혹은 가한)은 더욱 과다한 수취를 감행, 내부적으로 불평이 높아지고 배반이기운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태종은 이들을 과감히 소탕하고 추장 일리가한을 사로잡아 돌궐의 평정을 끝냈다(630) 이래서 태종은 여러 유목민들로부터 천가한(텐그리 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앞서 정관의 치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투르판에 있는 고창 고성터서쪽에는 오호 16국시대부터 청해(靑海/칭하이) 방면에 토곡혼(吐谷渾)이 나타나 강성하고 있었다.

 

동돌궐 평정의 여세를 몰아 당태종은 이를 정벌하고, 티베트의 조상인 토번(吐蕃)을 공략하자

 

이에 놀란 토번은 화평을 요청, 이에 당나라에서는 종실의 딸 문성공주를 토번왕과 결혼케 하여 화친을 맺었다.

 

당의 태종은 계속해서 톈산남로의 서돌궐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서정(西征)을 시작, 640년에 투르판 지방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던 한인왕조 고창(까오창)을 멸한 것을 시초로, 언기(옌치), 구자(쿠처)를 정복하고, 소륵(카슈가르), 우전(코탄)을 귀순케 하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다스리게 하였다. 왼 쪽의 그림은 고창의 옛 터로서, 지금은 폐허가 된 성터에 옥수수만 푸르게 자라고 있지만, 고구려 멸망후 유민들이 끌려가서 살았던 곳으로 당시는 동서 교역의 한 중심 축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었다.

 

이로써 당은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방과 연결되어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돋움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 현장이 인도로부터 돌아와(645), 서역기를 발간하여 당나라가 서역을 경영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중국 감숙성의 서쪽 끝, 돈황(툰황)에 있었던 옥문관(위먼관)과 양관(陽關)을 지나면 서역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이 나오는데 그 북쪽 길, 즉 톈산북로를 따라 가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이 하미이며, 이 하미를 이오라고도 한다.

 

하미는 타림 분지의 최동단에 위치하며, 참외의 산지로 유명하였고, 서역으로 들어가는 목구멍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역의 이점을 얻기 위해 유목민과 중국과의 쟁탈전이 수없이 되풀이된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속령, 당나라 후기에는 위구르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하미를 지나면 고창이 나오는데, 고창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 번영하였던 중국의 식민국가였다. 450년에는 한인이 세운 고창국이 세워져 번영하다가 640년 당나라에 망할 때 까지 국가로 존속하였고 중국의 색채가 농후한 곳이다.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이곳 출신이다.

 

다시 서쪽으로 나가면 언기가 나오는데, 언기는 카라샤아르(Karashahar)의 중국명으로 한 대에는 아알시이라는 국호를 가진 아리아족의 방언을 가진 민족의 국가였다가, 당대에는 안서 4진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언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면 구자(龜玆)라고 하는 오아시스가 등장하는데, 구자는 쿠처의 중국명이라고 한다.왕가를 백(白)이라고 칭하였고, 인도유럽어를 사용하였으며, 당대에는 서역도호가 설치되어 서역경영의 중심이 된 곳이다. 불교가 성하여, 오호 16국 시대에 명승이었던 구마라습과 불도징이 모두 이 곳 출신들이다.

 

힌투쿠시 산맥의 험로톈산남로(서역남도, 쿤륜북도)는 양관에서 출발하여 조금 지나면 선선(敾善)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톈산남로에서 가장 중국에 가까운 오아시스 도시국가로서 한나라 때는 병참기지로 이용되고,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 번영하였으나, 중국의 분열시대인 5세기 경에는 토곡혼의 지배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에 중국에 귀속되었고, 선선의 서쪽에 있는 우전은 코탄(Khotan)의 중국명이며, 오아시스 도기국가로서 일찍부터 번영하였던 곳이다다.

 

원주민은 아리아계로서 그 왕실을 한자로는 위지씨(尉遲氏) 또는 위씨(尉氏))로 기록하고 있는데, 불교의 동진에 큰 역할을 하였고, 당대에는 안서 4진의 하나로서 도독부가 설치되었으나 이슬람세력의 진출과 함께 도시는 황폐화되었다.

 

톈산 남 북로의 서쪽 끝, 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곳에 소륵이 있다. 이곳을 카슈가르라고도 한다. 당대에는 안서 4진의 하나가 되었고, 그 후 투르크에 의한 이슬람화가 가속되면서, 이슬람세계의 동방 경략 거점이 되었다. 실크로드가 동서에서 서로 만나는 교차지점으로, 여기에서 동으로는 타림분지를 돌아가는 남 북로의 두 길이 있고, 서쪽으로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우주베키스탄 등으로 나가는 세 길이 있다.

 

파키스탄 길은 사차(莎車:Yarkant)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다시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면 푸르샤프라, 즉 쿠샨왕조의 도읍이었던 페샤와르에 이르는데 이곳은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의 대상무역이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는 곳이다.

 

소륵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남서쪽으로 가면 박트라에 닿게 되는데 이곳은 박트리아왕국의 수도로서 지금은 발흐라고 부르고 있고, 이곳에서 이란 중부의 옛 상업도시 이스파한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 중부의 옛 도시 바미안

위쪽의 보이는 왼쪽 그림은 힌두쿠시 산맥의 험준한 고개로서 이 길을 통하여 인도의 펀자브 지방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티무르 제국도 이 길을 따라 인도에 들어왔고, 현장을 비롯한 고승들이 인도를 다녀오는데는 이 길을 통과해야 했으나 지금은 터널이 뚫려 험한 고개를 넘는수고는 없어졌다.

 

오른쪽의 그림은 아프카니스탄 중부의 옛 도시 바미안(파미안:Bamian)계곡이며, 아래 쪽의 그림은, 바미안의 많은 석굴사원의 원경이다다.

 

 

 

 

 

 

 

바미안의 석굴사원카불 북서쪽 바미안 계곡의 해발고도 2,590m 지점에 있는 석굴사원을 현장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범연나국(梵衍那國)이라 하였다.

 

바미안 강 북쪽 연안의 암벽을 뚫고 조성된 석굴원(石窟院)이 대소합하여 약 2만 여개,

 

그 대부분은 계단 또는 회랑(廻廊)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용도는 분명치 않으며 불교의 상징인 탑이나 차이티야(caitya / 예배나 공양을 드리는 장소로서 대웅전과 같은 것)은 없고 거대한 마애불입상(磨崖佛立像)이 유명하다.

 

쌍봉 낙타에 짐을 싣고 머나 먼 길을 가는 대상이곳은 역사상으로 6세기부터 등장하지만, 8세기부터 이슬람이 침략, 871년에는사파르 왕조의 야쿱, 이븐, 라이스가 많은 불상을 바그다드로 가져갔다.

 

그 후 가즈니왕조와 고르 왕조의 치하에서 번영하다가 1221년에 칭기즈칸의 막내 툴루이 군의 침략으로 도시는 파괴되고, 주민은 모두 학살당하여 이후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몽골의 기미군이 박트리아의 수도 박트라 즉 발흐의 점령 때는 사람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것도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오른쪽 그림은 쌍봉낙타에 짐을 싣고 머나 먼 길을걷고 있은 대상의 행렬이다, 이들 상인들은 환자 등 특수한 사정이 아니고는 짐을 싣지 않았을 때도 낙타를 타지 않고, 낙타와 함께 걸어 간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충직한 낙타의 노고에 대한 무언의 보답이다.

 

소륵에서 갈라지는 또 하나의 길, 즉 우즈베키스탄으로 나가는 길이 실크로드의 본류라고 볼 수 있는데, 소륵의 서쪽은 페르가나(Ferghana)지방으로 한 대의 장건이 이곳에 있던 대원국의 한혈마 이야기를 귀국 후, 무제에게보고(報告), 무제는 이 말을 얻기 위해 이광리를 보내어 정복, 양마 3천필을 얻어왔다는 이야기는 앞서 하였고, 페르가나의 타슈겐트는 수 당 시대에는 석국(石國)이라 불렀는데 교통과 상업의 요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페르가나 서쪽은 소그디아나(Sogdiana/粟持)로서 옛 대월지가 자리잡은 곳으로, 이 방면의 국민은 대체로 국명에 따라서 지(支)씨, 강(康)씨 등으로 불렀는데, 수 당 시대에는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 옛 대월지의 땅이었던 소그디아나의 사람들, 즉 속드인을 가리킨 말이다.

 

이 소그디아나의 사마르칸드에는 이란 족의 강(康)국이 있었고, 중국의 사서에는 "이 곳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높으며, 수염이 많다, 호서(胡書/소그디아나문자)를 배우고 장사를 잘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란 인들이 장사를 잘하고, 이익을 찾아 중국에 오는 자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 나라 때에는 신강성 동부에 마을을 이루가 살 만큼 많은 수의 이곳 사람들이 이주해와 살았고,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록산의 본성이 강(康)씨라는 것은 그의 조상이 이 지역 출신임을 의미한다.

 

강국의 남쪽에 위치한 셸 세브즈는 당나라 시대에 사(史)국이라 불렀고, 여기에서 온 자는 모두 사성(史姓)을 칭했다. 강국의 바로 서쪽은 마걍, 즉 미(米)국이라 해서 이곳 출신들은 모두 미성(米姓)을 사용하였다.이들은 예술에 기예가 뛰어나 당나라 때는 노래 잘하는 미가영, 궁중음악을 맡아보는 영관(영官) 미도지, 의관(醫官) 미수가 이곳 출신이며,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元章)의 조상도 이곳 출신이다.

 

강국, 즉 사마르칸드  북서에 있었던 미탄은 당나라에서는 조(曹)국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비파에 능했다고 하며, 미탄의 서쪽에 있던 카샤냐는 하(何)국이라 하여 이곳 출신은 何姓을 썻으며 수나라 때 하타(何妥)는 국립대학총장에 해당하는 국자제주가 되었고, 그의 부친은 촉의 대 상인이었다. 이들도 강성과 마찬 가지로 장사에 아주 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부하라의 오아시스하국의 서쪽, 부하라(Bukhara)는 안(安)국이라고 하였는데, 옛 안식국(파르티아/Parthia)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이곳 출신들은 안씨 성을 사용하였다.

 

후한 말에 중국에 온 고승 안세고는 안식국(安息國)의 태자였다고 하며, 수 당 시대에 안식국은 부하라 였고, 후위 때 안난타로부터 손자 파라에 이르기 까지 양주에서 있으면서 현교(현敎/조로아스터교)의 단속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때 그 후손은 이씨 성을 하사 받고 이포옥은 병부상서 평장사 양국공이되었다. 모스크가 보이는 위쪽의 그림은 실크로드로 번영했던 사막의 오아시스 부하라의 단면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부하라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파르티아왕국 때의 영화를 누렸던 크테시폰과 팔미라의 폐허된 유적지가 나오고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이슬람이 성지 다마스쿠스에 이른다.

 

다시 그 서쪽에는 안티오크가 있어서 지중해로 연결되고, 한편으로는 이스파한을 지나 이란 고원을 넘어면 페르세폴리스의 고적지가 있고, 대상(隊商)로를 따라 북으로 가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크와 연결되며, 서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다다르게 된다.

 

이렇게 머나 먼 길이지만, 이 교역로에 생명을 걸다 싶이 한 수 많은 상업민족과 오아시스 인들은 캬라반(caravan/隊商)에 의지한 체 멀고도 험한 사막 길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의 내용과는 상품이 다르다고하여 거래를 기피한다면 그 참담한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이래서 이들에게는 일찍부터 계약이라는 것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고, 계약의 내용과 틀린 것이 없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다르면 받지 않는 계약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사막의 오아시스나 캬라반의 이동 중에 흔하게 만나는 것이 강도를 비롯한 약탈자들이었고, 이들과의 사투는 생명을 담보로 하여야했기에,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공동의 방책으로 신의 말씀을 그들의 생활신조로 갖기로 서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요람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이런 사막에서 발생하여, 유목이나 상업을 생업으로 하는 조상을 가진 민족들에게 삽시간에 전파될 수 있었는 것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이런 배경이 깔려 있고,

 

불교 역시 발생 지역을 보면 북 인도로서 목축과 무관하지 않는 곳이다. 이 불교가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지만, 각각의 생활양식과 생업수단에 따라, 유목사회인 티베트의 불교와 농경 사회인 한국 등의 불교가 그 내용이 아주 다른 것도 흥미있는 사실이다.

 

이 비단길이 당나라가 이슬람과의 전투, 즉 탈라스 강변의 싸움(751)에서 패배한 후 당으로서는 이 귀중한 비단길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슬람 세력이 동진하면서, 일체의 우상숭배를 거부한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많은불교 유적도 파괴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교역은 뱃길을 이용한 해상무역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송 대에 이르러서는 위구르 인들이 이 비단길을 이용하여 동서 교역을 주도, 거란이나 서하가 송으로부터 세폐로 받은 비단과 교역했기 때문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몽고가 동서 세계를 연결한 후로는 비단길의 의의도 상실되었고, 점점 그 가치도 사라져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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