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62주기 제사 축문
오늘은 음력 7월 26일 할아버지님의 기일입니다. 금년에는 이미 윤달이 들어 매우 무덥던 예년 여름 기일과는 달리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완연한 가을 날씨입니다. 이 자리에는 저의 어머님과 세분의 숙부님, 숙모님, 막내고모부 내외분, 그리고 당숙님, 손자는 대영이와 건영이가 참석했습니다. 할아버지님이 돌아가신지는 벌써 62년전이라서 제주인 저 형순이는 자세한 사연을 말씀드릴 수 없어 숙부님에게 말씀을 올리라고 자리를 양보하겠습니다. 비록 전통적인 격식에는 맡지 않지만 숙부님들의 애틋한 사연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올린답니다.
항상 불러보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 오늘 아버님의 기일을 맞이하여 두분의 영정을 놓고 제사를 올리니 비록 60여년이 시간이 지났지만 오늘은 그 햇수를 뛰어 넘어 바로 저희들 앞에 오신듯 합니다.
아버님은 1950년 6.25 전쟁의 와중에서 돌아가셨고, 당시의 가정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의료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농촌에 사셨기 때문에 병을 제대로 진단을 하지 못하고 배 위에 뜨거운 뜸을 뜨시느냐고 고생을 하시기만 했습니다. 아버님의 기일을 당하여 한편으로는 지금도 통곡을 하여야 하겠지만 곡은 이웃집 사정을 생각해서 하지 않겠습니다. 일본군이 곧 패망할 낌새를 미리 아시고 온 가족을 이끌고 일본에서 1945년 2월에 귀국하셨습니다. 생활환경이 바꾸니 귀국하자마자 삶을 이끌어 가느냐고 고생이 심하셨습니다. 도시생활에서 농촌생활로 바뀌었고, 국가의 경제사정이 어려우니 살기가 어려운 것은 우리집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님은 나이 40에 일곱식구를 등지고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시 세 살 여섯 살이었던 동생들도 이제 손자 손녀를 보고 나이가 70언저리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보니 40세의 나이가 얼마나 일찍 돌아가셨는가에 대한 실감을 갖게 됩니다. 어머님은 결혼한지 25년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당시 어머님은 어린 자식들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일념에서 슬픔도 표할 경황도 없으셨지요. 어머님은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홀로 51년을 살았습니다.
장조카 형순이가 아버님이 일본에서 친구와 함께 30세 때에 찍은 사진을 구해서 아버님의 영정을 크게 만들어 어머님의 영정과 함께 놓고 제사를 지내니 직접 뵙는 느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모습에서 저희들에게 물려주신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해는 6.25 전쟁 중이라서 면사소 직원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30리를 피난을 가라고 해서 병석에 누우신 아버님을 모시고 우리 집은 더 갈 수 없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산을 올라가는 길 밖에 없어서 500미터의 누렁재 산마루에 피난을 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이 행해지고 있어서 미군 비행기의 폭격이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장사도 급하게 치를 수 밖에 없어 새벽에 출상을 하여 산역을 하는데 비행기가 떠서 돌자 일을 하다가 나무 사이에 숨기도 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이 영면하시는 곳은 아주 평화스러운 곳이고 머지 않아 저희 형제들도 그 옆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장형은 바로 옆자리로 가 있습니다.
중형은 아버님에 대한 추억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생활한 기억, 그리고 고국에 나와서의 여러 추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중형은 원래 허약한 몸이어서 아버님이 저애는 생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버님의 별세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쓰러운 일입니다. 저는 아버님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기억이라도 있지만 동생들은 거의 아버님에 대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나이어서 아버님에 대한 슬픔보다는 농담으로 원망마저 할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볼적마다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버님의 외유내강의 성품과 어머님의 성품을 저희들 남매는 받았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큰 누님과 둘째 누님도 몸은 비록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기일을 기억하고 아버님의 영혼을 추도한다고 저희들에게 전화를 걸어 주었고, 누나 댁에 무탈함을 확인했습니다.
아버님 작년에 중형의 큰 아들 한순이가 세상을 버리는 슬픔을 당하는 액문을 당하여 저희들 가슴이 아픈데 형의 마음은 오죽이나 애통하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생사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큰형의 손자 국진이는 현재 군대에 입대하여 휴전선 근처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7남매 집안은 모두 각자 별고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겪은신 전쟁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여 항상 우리는 준전시 상황에 처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형제 자매들은 비록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으나 우리들을 이 세상에 살게 낳고 길러주서서 활동을 하게 하신 점만으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부모님이 못다 하신 일을 힘껏 하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제사에 동행하여 오신 어머님에게도 술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을 여의니 외갓집과 형제들도 멀어지는 것을 보아 집안에서 어머님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실감합니다. 꿈에서라도 어머님을 뵙고 싶어도 어머님 꿈이 꾸어지지 않으니 어머님은 아주 편하게 계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아버님 어머님이 산소를 말쑥하게 깍아드릴 계획입니다. 드릴 말씀은 하해와 같이 많으나 이제 아버님이 평소 술을 즐겨마셨으니 참석한 자손들이 모두 한잔씩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착한 장조카 내외가 정성껏 차린 음식을 마음껏 흠향하시옵고 다음 겨울의 어머님 제사에 아버님도 함께 동행하여 와주실 것이며 그 때 다시 뵐 것으로 여기고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2012년 음력 7월 27일 효손 정형순, 고애자 구영, 구복, 구철, 딸 명옥 올림
첫댓글 선생님 참 좋은축문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저희 가족두 이해하지못하는 옛 방식의 축문을 선생님 가족들처럼 바꾸어 볼생각입니다...
효성이 찐하게 묻어짔는 축문이 심금을 울립니다 축문을 읽으면서 나의 어릴적 생활이 영상처럼 지나갑니다.인생의 일생이 파노라마 처럼 펼처지는 우리들의 삶이 역사의 한페지를 장식하는가 싶습니다.
남한산성님 그리고 구룡님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