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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동인시집 [☆시인의 견적☆]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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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견적]
작은시앗.채송화 동인시집 제10호 / 고요아침(2013.06.21) / 값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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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견적
정일근
조경석 선배 이름 검색하면 조경석, 정원조경석,
인조조경석, 자연조경석 추천 검색어 이어지는데
그가 등단을 한 뒤 검색하면 시인 조경석 나오는데
누가 전화 걸어와 정중한 목소리로 물엇다는데
시인조경석은 어떻게 꾸미는 정원인지
서정적일 거라며 견적 물었다는데
시인의 견적이 얼마인지 아직 고민하고 잇다는데
내 시인의 경적은 얼마짜리인지 설핏 궁금해지는데.
< 초대시 >
행복
김후란
강물에 별들이 쏟아지고
우리는 별을 주우며 흘러갔다
그대 속 깊은 눈빛에 가슴 벅차
이냥 함께 부서졌다
오늘 우리는 행복하다
낮달
허영자
이제
울음은 그쳤지만
옛날
그 옛날
부치지 못한 편지에
어롱져 남아 있는
눈물 자욱.
부리
이건청
새들은
부리 하나로
피를 만들어
연둣빛 생명을
흔들어 깨우고,
날개를 휘저어
마른 대륙을 건너 갈
근육도 만드누나,
< 동인 신작시 >
인생, 여기
정일근
뜨거운 심장이 불타 버린 별 지나 왔네
추위에 심장이 얼어 버린 별 지나 왔네
지금 여기, 나무마다 바람 많은 이 별 지나
내 몸은 또 어느 별 찾아가는 살별인가
불타고 얼어 버린, 산산조각 난 심장을 담고서.
설늙은이
정일근
오월밤 무더위 여름 차림으로 잠들었네
새벽에 떨려, 춥고 몸 얼어 방에 불 넣고
두꺼운 옷 꺼내 입었네, 날씨가 왜 이러나
일기예보 알아보니 소만小滿이었네
소만 바람에 설늙은이 늙어 죽는다 했는데
소만 아침에 발각된
시 쓰다 일찍 늙어버린 서러운 내 몸의 정체
기력이 노쇠한 사람, 설늙은이!
빗속 문답
함순례
이 비를 무어라 할까요
안개비 이슬비 부슬비 가랑비 는개
되는 대로 불러도
그 마음 이 마음에 젖어들지 않겠습니까
나무가 겨울 나는 법
함순례
새들을삼키고
새들을 토해 놓고
찬바람 고일 때마다
빈 하늘의 적막이 무거울 때마다
잽싸게
젭싸게
꿈꾸는 감옥
김길녀
낯선 바다
낯선 외로움
낯선 고요
낯선 방
낯선 나라
낯설지 않은 당신
반성
김길녀
내 아픔이 치유되자 그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 교두보
나기철
딸 집에 와
온종일 떠다닌다
지하도
수많은 군사들의 행렬
추석
나기철
오늘
보름달 안 떠도
눈망울에
달
훤히
뜨시기를!
먼저
문자 줘서
고마워요
나의 임시정부
나혜경
냉이는 국무총리
봄동은 국방장관
돌나물은 미래창조과학장관
씀바귀는 농림장관
두릅은 환경장관
달래는 통일장관
올해는
탈세 뇌물 병역기피 전관예우 논문표절 없는
새 봄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제발
나혜경
뛰어내리지 마라
하나뿐인, 너라는 꽃을 보려고
졌던 꽃도 다시 오고 있다
참 이쁜 것들
복효근
아직도 내가
변할 수 있다고 믿는 건지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건지
지청구하는 아내와
나도 반짝일 수 있다고 믿는 건지
멀리서 말 걸어오는 별빛과
별똥별
복효근
생과 사를 한줄기 빛으로 요약해버리는
어느 별의 자서전
와신상담
오인태
너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다시,
가시나무 석 짐을 풀어 마음 울타리를 둘러치는 저녁
아직 밥은 끓지 않았고
너무 일찍 뜬 별은 소태나무 가지에 목을 맸구나.
콩 타작
오인태
잽싸게 제 몸을 터뜨려 살려냈구나
만신창이가 된 콩깍지와 무사한 콩들과
평전評傳
윤 효
해가 져도
안방 마루 끝은 언제나 환했다.
증조할머니 놋요강.
나무
윤 효
나무는 가두리양식장.
일 년에 한 번 수문을 연다.
눈비와 땡볕과 바람에 맞서 키워온 씨알들을
너른 품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가을에 딱 한 번.
피붙이의 힘
이지엽
기우뚱 리어카가 한쪽으로 기울어 넘어지려하자, 함무니!
아이가 얼른 달려들어 폐지더미를 잡았다
팔목이 잘못하면 훅 꺾이겠다
순간
이지엽
뉴욕 쌍둥이 빌딩 110층 4천 미터 높잉에서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60미터 길이의 외줄을 타는 필립 프티
그가 대딛는 한 발의 순간
삶과 죽은 사이의 소름이 끼치는
저 아찔하고 팽팽한 긴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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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종종 책을 정리하면서 많은 책을 내다버립니다. 그럴 때마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적어도 한 권의 책 속엔 많은 땀과 시간이 담겨 있는데, 이렇게나 쉽게 책을 버리다니, 누군가의 온 생의 이야기가 짐이 되어 버려지다니……. 머지않아 전자책의 장악으로 한때나마 아끼던 책들도 짐스럽게 생각할 때가 있으리라는 생각의 끝에 머무르자 오싹 소름이 돋았습니다. 활자로 채워진 책이 사라질 날이 도래하고야 말겠구나. 훗날 박물관에서나 볼 교과서와 문예지와 시집…….
식자들은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빈곤을 갈구합니다.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무거움을 내려놓고 가벼워지길 희망합니다. 지금까지는 무조건 쌓아올리는데 치중했다면 그 무리함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하나씩 덜어내기를 꿈꾸는 거겠지요. 요사이 나의 화두는 ‘적게 벌어 적게 쓰기’입니다. 지금껏 그다지 많이 벌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 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벌고 덜 쓰기를 궁리 중에 있습니다. 가난할수록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눈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한 사람의 소비를 줄이는 미미한 일이 지구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눈곱만한 기여를 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군더더기를 싫어합니다. 아포리즘 같은 간결함을 원합니다. 손 편지에서 이메일로, 다시 140자 이내 단문인 트위터로, 트위터가 지면 다시 더 짧은 소통 수단으로, 소통 수단은 지고 뜨면서 더 짧고 빠른 것으로 계속 진화하겠지요. 시든 수필이든 몇 줄 읽어서 아니다 싶으면 책을 덮어버립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풀어놓은들 공감하지 못하는 글은 더 이상 읽지 않습니다. 무릎을 치며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짧은 말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정금처럼 순도 높은 언어를 빚어야겠습니다.
글이든 말이든 물질이든 감량의 고통이 필요한 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허비했습니다. 애초부터 내 것인 양, 물 쓰듯 쓰다 보니 손대지 말아야 할 것까지 손이 닿아 있습니다. 산과 강과 바다가 앓는 소리를 내고 동물과 식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결국엔 그 아픔이 다 사람 몫으로 돌아오겠지요. 장자와 혜시와의 대화 중, 피라미의 즐거움을 아는 마음, 곧 물아일체의 경지는 곧 시인의 마음일 겁니다. 아무런 매개 없이 내맘 속에 들어오는 만물과 공존하는 애니미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한의 유기체로 연결돼 있으니까요.
요사이 떠들썩하게 외치는 ‘힐링’은 바로 공空과 가까운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시를 쓰는 것은 내 ‘힐링’의 첫 단추입니다.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의미를 전하는 시의 속성에 다가가고자, 쓸데없이 불린 욕심의 몸집을 덜어내기까지 작고 낮은 소박함을 추구하는 채송화 정신으로 천 리를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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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詩앗∙채송화 同人詩集 제10호
詩集 [※시인의 견적※]
[ 채송화 시론 ] -
하늘은 쉽고 땅이 간결하니 시는 짧게
안수환(시인, 문학평론가)
1.
하늘은 멀고 땅은 가깝다. 무슨 말인가. ‘먼’ 하늘의 이치는 쉽고, ‘가까운’ 땅의 거동은 간결하다. “쉬우면 알기 쉽고, 간결하면 따르기 쉽다. 쉽게 알아내면 친하게 되고, 쉽게 따르게 되면 공덕을 쌓는다. 친하게 되면 오래가고, 공덕을 쌓으면 크다고 부를 만하다. 쉽고 간결함으로써 천하의 이치를 습득하게 된다.”(易則易知簡則易從 易知則有親 易從則有功 有親則可久 有功則可大 易簡而天下之理 得矣,『주역周易』- 계사상전繫辭上傳 제1장) 하늘은 쉽고(즉, 건이乾易), 땅은 간결하다(즉, 곤간坤簡)는 이 말이야말로『주역周易』을 꿰뚫는 골자였던 것, 공자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시는, 천지의 이치를 꿰고 있는 시는, 복잡다단할 필요가 없다. 지렁이는 징그럽다. 징그러운 까닭은, 지렁이가 길다는 데 있다. 짚신벌레는 징그럽다. 징그러운 까닭은, 짚신벌레 0.3㎜의 작은 몸통을 무수한 잔털이 휘감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비유는 간이簡易의 면적을 외면한 것에 따른 시의 실패를 염두에 둔 지적이다.
쉽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공자의 말씀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 “무릇 역은 넓고 크다는 것. 먼 곳을 말하면 방어하지 못하고, 가까운 곳을 말하면 고요해 올바르고, 천지 사이를 말하면 다 갖추어져 있는 것.”(夫易廣矣大矣 以言乎遠則不濟禦 以言乎美則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주역周易』계사상전繫辭上傳 제6장) 큰길은 한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들어올 때 그 길을 쉽게 갈 수 있다. 어려운 길은 복잡다단하다. 쉬운 것이야말로 지극함인 것. 어려우면 지극하지 못한 것. 가령 도대道大라고 부를 땐 그 도는 넓고도 큰 것. 맹자의 가르침에도 그런 언급이 있다. “무릇 도는 대로의 모습과도 같다. 어찌(그 도를) 알기 어렵다고 할 것인가.”(夫道若大路然 豈難知哉,『맹자孟子』- 告子章句) 대로大路의 모습. 쉬운 것이 크다는 것. 천지의 간이簡易. 하늘은 쉽고 땅은 간결하다.
요컨대 시는 천지의 모습을 본뜬 것. 시를 간략하게 쓸 때 시는 광대해진다. “시는 짧을수록 좋다.” 그 말 한마디면 족할 것을 난 무엇 때문에 공맹을 인용했단 말인가.
2
간이簡易의 시학. 이는 천지가 쉽고 간결하다는 뜻이다. 자연이 쉽고 간결하다는 뜻이다. 물과 불과 공기(즉, 나무)와 돌과 흙(즉, 오행五行)이 쉽고 간결하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가시적인 것(즉, 물질)과 비가시적인 것(즉, 정신)이 다른 얼굴도 아닌 같은 얼굴이라는 말이다. 형태가 움직일 때 정신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물질 없는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탈물질화脫物質化의 언어에 탐닉하는 시인은 자칫하면 정신의 탈루脫漏에 빠져 때때로 비현실적인 연막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그의 언어는 가볍거나 혹은 둔탁할 뿐. 그러니까 그의 의식은 물질 앞에 서 있는 상상력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푸르른 대상들의 순결을 다른 먹물로 갈아엎는다. 그의 직관의 끈은 물질의 직접적인 소여所與를 잃고 딴 명분 없는 형이상학으로 매몰되기 때문이다. 그의 시간은 지루할 따름. 시인의 물질은 견자voyant의 측정이어야 한다. 이때, 그의 물질은 비어 있는 하늘처럼 짧은 단면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짧아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의 본향은 경탄에 있는 것. 경탄은 물질의 심연과 만나는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몽상은 그 몽상으로 착색된 물질의 표면에 대하여 불순한 감정 혹은 논증으로 물드는 여러 조잡한 원인들을 단번에 지워야 할 것이다. 이때, 시인의 언어는 홑껍데기 붉은 뺨이어야 한다. 언어의 극소화와 짧은 시간으로서의 찰나刹那. 사물의 혼에 대한 짤막한 경건. 마침내 비현실은 사라지고 저 고요한 시각, 투명한 물질의 숨결이 새롭게 나타난다. 이는, 이른바 바슐라르G.Bachelard(1884-1962)가 이야기하는 공기의 동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 종달새는 공기를 열어젖히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비상飛翔. 세계 이해의 다른 질료에 대한 어떠한 통찰보다도 공기는 더욱 분명하게 그(종달새의) 비상을 통해 물질과 정신의 통합을 완성해낸다.
이때마다 시인의 노래는 종달새의 하늘로 더욱 높이 고양되며 단 하나의 화음을 거느린다. 정동진 바다가 태양을 밀어 올리듯 그의 문맥은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천지를 들어 올린다. 물론 시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낱말의 간격(즉, 속도)은 짧다. 그의 낱말은 징소리처럼 사물의 표면 위로 솟구친다. 벌써 시인의 몸은 공기주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관능인가.
3
세상을 바라보는『주역周易』의 관점은 대대待對의 눈망울이었다. 물질과 정신의 대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대대. 이 대대의 상관相關이야말로 제곱근(즉, X²)의 자승멱自乘冪이었던 것. 침묵의 침묵이었던 것(즉, 침묵²). 음陰과 양陽이 그것이었고, 하늘과 땅이 그것이었다. 음陰(즉, 감坎) 속에 양陽이 들어 있고, 양陽(즉, 리離) 속에 음陰이 들어 있다. 물속에 불이 들어 있고, 불 속에 물이 들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는 예수의 진담도 이 대대의 보색補色을 보여주는 할喝이었다.(「누가복음」6:27-29) 태극(즉, 太極 음陰과 양陽)의 양단은 둘이면서도 하나인 것.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 있고,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큰 것의 본질과 작은 것의 본질은 제각기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곱근의 관점에 닿으면, 마침내 ‘유有’와 ‘무無’의 상위적相位的 대칭이 하나로 통합된다. 제곱근의 관점이란, 그러니까 그것은 정말로 ‘크다’라고 부를 만한 것의 시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컨대 노자의 관점이 그것이었다. “나는 착한 것을 착하게 본다. 나는 착하지 않은 것 그것까지도 또한 착하게 본다. 그것이야말로 ‘큰’ 착함이다.”(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赤善之 德善,『노자老子』49장) 덕선德善일 때 이 자리엔 선은 사라지고 ‘큰’ 덕만 남는다. 착함과 착하지 않은 것을 ‘같다’고 바라보는 것은, “이 둘이 이름이 다르지만 같은 데서 온 것인데, 같다고 함은 그 황홀함을 말함이며, 황홀하고도 황홀한 것은 모든 오묘함의 문이기”(比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日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노자老子』1장) 때문이다. 대대(즉, 대칭)의 보색으로 바라본다면, 차안此岸이 피안彼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분화의 낱말은 지루하다. 꼭 필요한 말은 단음절이다. 미분微分은 그러니까 미비未備가 아니었던 것. 이와 같은 생기를 감안할 때 짧은 시를 지향하는 시인의 절조는 더욱 귀히 평가되어도 좋다. 비상의 촉수를 붙잡은 그의 시의 문맥은 낱말로 인한 그 어떤 곰팡내도 단호히 떨쳐버릴 것인즉. 시인이 문밖을 나설 땐 그는 언제든지 하늘의 문설주에 이마를 찧는다. 하늘이래야 수다스러운 시인에겐 대수롭잖은 관념일 테지만, 어쨌든 그는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을 바라보되 하늘로 의피擬皮된 오브제 따위는 대개의 경우 시인의 상상 속에서 조련된 관습일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면 침묵의 극지(즉, 침묵의 침묵, 침묵)를 바라본 그로서는 비로소 눈물겨운 회의懷疑에 몸을 맡길 것이다. 함부로 입을 벌릴 수도 없다. 낱말이 하늘의 거동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아수라阿修羅와 정신을 맞대고 싸워야 할 것인가. 손끝에 남은 그의 낱말은 몇 조각 되지도 않는다. 그것이 그의 단시短詩였던 것.
시 한 편을 읽어보자.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무덤 천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는
삶의 무게
비로소 고요하다
-김길녀의「폭설」작은詩앗∙채송화 제9호, 2012
글쎄, ‘폭설’이 내린 천지를 바라보며 시인은 털썩 주저앉았다. 폭설은, 삶과 죽음이 마주 닿아 있는 이른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그 아득한 시차時差를 한꺼번에 모두 드러내 놓았던 것이다. 이 부분을 다시 바라본다면, 그러니까 그것을 공적空寂(즉, 대대의 폭幅이 맞붙은 ‘고요’)이라고 할 것인가 혹은 차안과 피안이 한 몸이 된 만재滿載의 ‘무게’라고 할 것인가. 시인은 방금 대승大乘의 능선을 넘어 폭설이 내린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폭설’이 시인의 하늘이었던 것. 앞에서 내가 여러 차례 지적했던 대로 시인의 물질(즉, ‘폭설’)은 벌써 천상의 침묵(즉, ‘고요’)으로 높이 고양되어 있었던 것. 폭설의 침묵. 황홀. 독자는 홀연 이곳에서 단시를 읽는 선취仙趣에 빠져든다.
― 여는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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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군더더기를 싫어합니다. 아포리즘 같은 간결함을 원합니다. 손 편지에서 이메일로, 다시 140자 이내 단문인 트위터로, 트위터가 지면 다시 더 짧은 소통 수단으로, 소통 수단은 지고 뜨면서 더 짧고 빠른 것으로 계속 진화하겠지요. 시든 수필이든 몇 줄 읽어서 아니다 싶으면 책을 덮어버립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풀어놓은들 공감하지 못하는 글은 더 이상 읽지 않습니다. 무릎을 치며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짧은 말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정금처럼 순도 높은 언어를 빚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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