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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와 화피선[樺皮船]
조선의 토산물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자작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다. 이것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지역에서 생산되었으며 중요한 조세품목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번에는 자작나무의 분포와 쓰임을 분석하여 조선의 북방강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증과 세종지리지에 ‘화피’가 토산 혹은 토공으로 기록되어 있은 곳은 아래와 같다.
[세종실록은 土貢, 신증은 土産]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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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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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평안도 | 함길도 | 평안도 | 함경도 |
토산 (樺皮) |
강계도호부 여연군(閭延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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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목 갑산군(甲山郡) 삼수군(三水郡) |
귀성도호부(龜城都護府)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벽동군(碧潼郡) |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 삼수도호부(三水都護府) 북청도호부(北靑都護府)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 함흥부(咸興府) 단천군(端川郡) 리성현(利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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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도 보이듯이 화피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발견되므로 자작나무는 당연히 한반도에 자생해야 하지만,
백두산자작나무
한국 특산종으로 양강도(량강도) 대홍단지구, 두만강 유역의 고원지대에서 자라며 시베리아와 몽골 지역에도 퍼져 있다. 높이 2∼5m로 잎은 난형 또는 넓은 난형이고 가장자리는 톱니모양이며 밑부분이 둔한 것이 다르다. 좀자작나무에 비해 지점(脂點)이 없으나 잎 뒷면에 지점이 있다. 자웅동주로 암꽃차례는 잎이 2개 나는 짧은 곁가지에서 나온다. 열매는 딱딱하며 솜털이 있다. 나무껍질에 기름기가 많아 땔나무로 많이 쓰인다.
- [네이버 지식백과] 백두산자작나무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0058&cid=40942&categoryId=32694
두산백과와 위의 문헌을 비교에 보면 모순점이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양강도(량강도) 대홍단지구, 두만강 유역의 고원지대에서 자라며
위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자작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은 양강도, 대홍단 지구, 두만강 유역이다. 다시 말해 북한의 백두산과 두만강지역에는 자작나무가 자라지만 평안도에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〇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9일 갑술 1425년 홍희(洪熙) 1년
찬성 황희(黃喜)·이조 판서 허조(許稠)·공조 판서 조비형(曺備衡) 등이 평안도 백성의 민폐(民弊)에 대한 고통을 전번에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그 도에서 공납하는 물품의 양을 감하게 하였는데, 이번에 호조에서 마감하고 계하기를, "공조에 바치는 반화피(斑樺皮), 사재감(司宰監)에 바치는 건어(乾魚)·건저(乾猪)·건장(乾獐)·녹포(鹿脯), 제용감(濟用監)에 바치는 모피(毛皮), 의영고(義盈庫)에 바치는 개암[榛子]·마른 버섯[乾菌], 도염서(都染署)에 바치는 지초(芷草), 제생원(濟生院)에 바치는 약재(藥材) 등은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初, 贊成黃喜、吏曹判書許稠、工曹判書曺備衡等啓平安道居民受弊之苦, 上令戶曹量減本道納貢之物。 至是戶曹磨勘啓: "工曹納斑樺皮, 司宰監納乾魚、乾猪、乾獐鹿脯, 濟用監納毛皮, 義盈庫納榛子、乾菌, 都染署納芷草, 濟生院納藥材宜除。" 從之。]
반화피[斑樺皮] 의 확실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자작나무 껍질의 종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이며, 공조[工曹]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건축자재의 재료로 쓰였을 것이다. 따라서 평안도에는 자작나무가 서식했다는 신증의 내용이 더욱 신빙성 있어 보인다. 그럼 바친 공물의 양은 얼마나 되었을까?
〇성종실록 40권, 성종 5년 3월 1일 병술 1474년 성화(成化) 10년
영안도(永安道)의 갑산부(甲山府) 사람 장이(張弛) 등이 상언(上言)하여 본부(本府)의 폐단을 조목별로 진술하였는데, 그 상언에 이르기를, 첫째 을유년(1465)에 정한 공안(貢案)에 의하면, 초피(貂皮) 1백 15장(張), 서피(鼠皮) 2백 60장(張), 화피(樺皮) 3백 75장(張)을 본부(本府)의 세공(歲貢)으로 삼았으나, 지금 정한 공안에는 초피 65장, 서피 20장, 화피 3백 50장을 더하였습니다. 초피·서피·화피는 비록 본부에서 생산되는 것이나 많이 얻기가 쉽지 아니하고, 또 오랑캐 땅[胡地]에 넘어 들어가서 이를 취(取)하는 것도 불가하므로, 공물(貢物)을 충당할 수가 없으며, 그 값도 비싸서 소[牛] 1두(頭)를 가지고 초피 1장과 바꾸는 형편이니 백성들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초피·서피의 공물을 헤아려 감하고, 또 화피는 북청(北靑)·함흥(咸興)에 옮기게 하소서…… 호조(戶曹)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갑산부(甲山府)의 공물(貢物) 수량은 다른 도(道)에 비하면 가벼우니, 초피(貂皮)·서피(鼠皮)·화피(樺皮)를 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永安道 甲山府人張弛等上言, 條陳本府之弊,: "其一, 乙酉年所定貢案, 以貂皮一百十五張、鼠皮二百六十張、樺皮三百七十五張, 爲本府歲貢, 今定貢案, 加貂皮六十五張、鼠皮二十張、樺皮三百五十張。 貂、鼠、樺皮, 雖産於本府, 而未易多得, 又不可越入胡地以取之, 無以充貢, 其價之重, 至於以一牛, 易一貂皮, 民不能堪。 願量減貂、鼠皮之貢, 又以樺皮, 移於北靑、咸興. "…… 戶曹據此啓: "甲山府貢物之數, 視他道爲輕, 貂、鼠皮、樺皮不可減矣。]
을유년은 세조11년인데 그 때 세공으로 정한 화피의 수량이 375장이었으나 9년 만에 추가로 350장을 더 납부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갑산부에서 중앙에 바쳐야 하는 화피는 총725장이 된다. 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벌목을 해야 하며, 해마다 공급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갑산부 일대에 자작나무가 군락단위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갑산부를 제외한 나머지 도호부와 군현들도 조정에 바쳤을 것이므로 연간 약 수천 장의 화피가 중앙에 공급되었을 것이다.
둘째, 시베리아와 몽골 지역에도 퍼져 있다. 높이 2∼5m.
백두산자작나무가 비록 시베리아와 몽골에 분포하더라도, 시베리아와 러시아에 분포하고 있는 전형적인 자작나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먼저 자생 종은 나무가 곧게 뻗어있지 않으며, 껍질의 두께가 얇아 그 채취가 어렵다. 현재 백두산 자락에 곧게 뻗어 숲을 조성하고 있는 것들은 수입하여 옮겨 심은 것이다. 자작나무는 대개 7속 100종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고 각기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으나 대개 북위56도를 기준으로 높이가 20m~30m, 지름1m까지 성장한다. 그런데 자생 종은 고작 뗄 감 용 수준 에 불과하므로 엄청난 공물의 양을 충당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데 아래의 채취영상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자작나무 껍질 채취 동영상
1.러시아
*берёза. кора́ [자작나무 껍질]
https://www.youtube.com/watch?v=eWmNbyiU2b4
2. 북미 캐나다로 보임
*Harvesting birch bark
https://www.youtube.com/watch?v=o9T0S7WN7HM
예전에 북미에서 인디언들도 카누를 만들 때, 자작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그 껍질을 안에 깔고 그 외면에 액즙을 발라 마감 질을 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지금은 영어권에서 ‘Birch bark canoe’ 로 부르며 뜻을 한자로 옮기면 곧 화피선[樺皮船]이다. 인디언뿐이 아니라 野人들도 이와 같은 배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⑴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6월 18일 병자 1437년 정통(正統) 2년
병조에서 아뢰기를, "평안도 연변 고을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경내의 인민을 모두 거두어 보(保)에 들이고, 여름철 농사 때가 되면 밭과 들로 흩어지게 하매, 이로 인해 자주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쫓아 잡지 못하였으니, 대저 저 도적들은 화피선(樺皮船)을 타고 강을 건너와서 노략질하여 죽이고 사로잡기를 방자히 행하였다가, 아군이 깨닫고 준비를 하면 즉시 강을 건너 돌아가므로, 아군이 비록 쫓고자 하나 건너갈 배가 없어서 쫓아 잡지 못하니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兵曹啓: "平安道沿邊郡邑, 冬節則境內人民, 皆收入保, 至夏月耕農之時, 布散田野, 因此屢被寇掠, 而一不追捕。 蓋彼賊乘樺皮船, 渡江剽掠, 恣行殺虜, 及我軍覺而有備, 卽還渡江 我軍雖欲追逐, 無船可渡, 未得追捕, 誠爲可慮。]
⑵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4월 8일 신유 1438년 정통(正統) 3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알타리(斡朶里)의 무리들이 서로 이르기를, ‘만약 이 성지(聖旨)가 누설되면 공연히 조선의 노여움만 사게 될 것이라.’ 하고, 마파라(馬波羅)가 와서 고(告)하기를, ‘만주(滿住)가 4, 5월 사이에 은밀히 여연(閭延)으로 들어와 도둑질을 하려고 화피선(樺皮船)을 많이 만들고 있으며, 만주가 또 조선 전하(殿下)의 다섯째 아우님이 경사에 간 것을 듣고, 그가 귀환할 때 동팔참(東八站)에서 표략(剽掠)하려고 밤낮으로 노리고 있다. ’고 하옵니다.
[辛酉/咸吉道都節制使金宗瑞啓:…斡朶里等相謂曰: "若漏洩此聖旨, 則徒增朝鮮之怒。" 馬波羅來告: "李滿住欲於四五月間, 潛入閭延作賊, 多作樺皮船。 滿住又聞朝鮮殿下(弟)〔第〕 五弟赴京, 欲於回還時, 剽掠於東八站, 晝夜窺伺。"]
야인들이 세종 년간에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면서 화피선을 만들어 건너와 노략질을 하고 있다. 시기로 보아 분명 리만주[李滿住]의 소행일 것인데 말이나 기타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왜 배를 타고 왔을까?
⑶16세기경 한티족과 만시족은 주로 수렵과 어로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반半 유목민이었다. 통나무로 만들거나 아니면 나뭇가지로 엮어 흙을 바른 오두막집은 이들의 영구적인 겨울용 주거지였으며, 봄에는 마을을 벗어나 수렵 및 어로지역으로 이동해 나무막대와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간편한 사각형 숙소를 세웠다. 1년의 절반이 많은 눈으로 덮여있는 지대에서 스키는 겨울에 이동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였으며 봄에 얼음이 녹아 주변의 땅이 강, 호수, 늪으로 변해버리면 속을 파내거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가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제임스 포사이스, 정재경 옮김.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 솔 출판사, 2009.P, 29.
세종실록 ⑴•⑵의 시점은 비록 15세기에 해당하지만 음력 6월과 4월이므로 양력으로 따지면 5월~8월 초쯤일 것이다. 또 한티만시스크[Khanty-Mansiysk;61°00′N 69°00′E]도 5월에 들어서면 영하였던 기온이 약 7℃가 되어, 추위에 잠자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한티족과 만시족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세종실록의 野人들도 이 시기에 쳐들어오는데 육로를 이용할 수 없어 ⑶의 내용과 동일한 방법으로 배를 타고 건너왔던 것이다.
이 지역에서 자작나무는 손쉽게 구할 수 물건이므로 한티‧만시족의 카누와 야인들의 화피선[樺皮船]은 같은 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도시는 이르티쉬강[R.Irtysh]과 오브강[R.Ob]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바로 이곳이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계인 폐사군[廢四郡]과 한해[瀚海]지방이 아닐까?
*만시인 우랄 산맥의 전사[ Mansi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39393&cid=56762&categoryId=56762
*한티만시스크[Khanty-Mansiysk]
https://en.wikipedia.org/wiki/Khanty-Mansiysk
*위 지역관련 동영상
*Mansi music on the Sangkvyltap
https://www.youtube.com/watch?v=P3u9xdXO-28
*Kurenya - Bear dance - Mansi folk song - Mansi people (Siberia)
https://www.youtube.com/watch?v=6uUttx11xDs
* Mansi Song "Kukkuk" ("Cuckoo")
https://www.youtube.com/watch?v=gec0BST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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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글은 최박사님의 화피선을 보고 참조하여 써봤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글을 종종 보는데 선생님 글 중에 올량합에서 北翟東抵兀良哈,西連西番,北逾沙漠。 책에는 蒙古東抵兀良哈,西連西番,北逾沙漠。北翟을 蒙古로 틀리게 나오는 책이 틀린것 같은데 번역상에는 이상이 없는 것입니까? 독사방여기요 책이 틀린 곳이 좀 보이는데..
네~ 안녕하세요 北翟과 北狄은 글자만 다르고 대상은 같습니다. 蒙古는 지역적으로 北狄[北翟]에 해당하는 북방민족이므로 해석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인용한 독사방여기요의 원문에는 北翟[북적]으로 되어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北狄과 같습니다. 또 해당 글의 전후 맥락도 몽골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주어를 蒙古로 두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