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첩작전 순직 경찰관 <弔辭>와 <告別辭>,
그리고 사건 개요[기사]에 대하여
정 박사님의 과분한 격려와 위로 말씀 감사합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수많은 종류의 글을 썼습니다만, 새삼 ‘세월’이란 주제로 과거를 회고하다보니, 순직 경찰관 조사와 고별사를 쓸 때의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글에서는 한 줄 언급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1995년 충남 부여에서 발생한 무장간첩 사건입니다. 삼가 순직하신 두 분 경찰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어느덧 25년 세월이 흘러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당시 제가 쓴 순직 경찰관 영결식장의 조사와 고별사는 이제 다시금 공개하기에는 슬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계실 유가족에 대한 예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또한 영결식장에서 눈물로 조사를 낭독하신 지방경찰청장님과 하염없는 흐느낌과 울분으로 고별사를 낭독하기조차 힘들었던 당시 동료 경찰관에 대한 예의 상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비극을 다시금 회상한다는 것이 당사자들에겐 고통일 수 있습니다.
다만 조사와 고별사를 부분적으로 인용한 당시 신문 기사를 상당수 보관하고 있어, 기사 내용에 들어 있는 조사, 고별사 인용부분(빨간 줄)을 참고하시면 내용은 대강 짐작이 가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영결식장에는 중앙의 고위 인사는 물론, 전국의 지방경찰청장도 전원 참석했습니다. 일부 지방경찰청장은 영결식을 마치고 제게 와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대간첩작전이라는 이 같은 불행한 사건과 순직 경찰관 영결식은 평상시에 자주 발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어느 경찰관서든지 조사나 고별사 ‘샘플[견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이런 비극이 뜻하지 않게 닥치는 것을 보면 언제 나의 일, 우리 경찰관서의 일이 될지 모릅니다. 조사와 고별사를 한 부씩 복사해 주세요. 지방경찰청 경무과 서류 철에 ‘견본’으로 보관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서 조사와 고별사를 한 부씩 복사해 간 기억이 납니다.
※ 참고로 당시 조사와 고별사를 인용 보도한 신문 기사를 덧붙입니다. [윤승원]
당시 무장간첩과 교전했던 지역에 건립된 부여경찰서 순직경찰관 충혼탑
첫댓글
장천선생 가슴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그 신문 시가를 다시보면서 유족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특히 고 장진희 경사의 아들 대한군과 라성주경사의 딸 하나양은 32세
일터인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매우 염려됩니다.
국가의 배려로는 유족들의 슬픔과 보상을 충분히 해주지 못합니다. 순직한 순경에게 2계급 특진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 저의 평소의 지론입니다.
또 순직한 장진희 라성주경사의 유족이 당하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순직한 사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그들의 순직한 기사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것을 경
고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기사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 유족에 대한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정 박사님이 저의 졸고를 관심 있게 살펴 주셔서 책장 깊숙이 파묻혀 있던 과거사 기록을 다시 들춰보게 됩니다.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회고하면 경찰에겐 정말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순직한 두 경찰관 자녀는 정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제 30대의 나이가 됐겠네요.
오열하던 그들 부모님과 젊은 부인 등 억장 무너지는 슬픔을 생각하면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런 비극의 역사를 지금 우리는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북 관계는 개선돼야 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북괴의 만행, 그 비극의 역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의 기록’이 그래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저는 고향에 갈 때 부여방향으로 가면서 ‘순직 경찰 충혼탑’에 꼭 들러 참배했습니다.
두 경찰관의 원혼(冤魂)이 지금도 나라 걱정을 하면서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
정 박사님도 함께 슬퍼해 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