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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운봉 추어탕과. 화수리 황산 대첩비...........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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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운봉 추어탕 과 ,황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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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 운봉을 들썩이게 하던 사람의 물결도, 바래봉 철쭉의 선홍빛 꽃물결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산자락이 온통 붉은 색으로 분주하던 사이, 운봉 국도 변에 도열한 이팝나무는 흰
꽃을 피우더니 어느새 무더위가 다가오고 무더위는 또 다시 긴 장마로, 코로나로 지처있는 사람들을
지리산 계곡으로 불러 들이며 또 다른 8월의 시절을 위무(慰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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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황금물결이 츨렁이는 풍성한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운봉은 조선시대 예언서에 사람이 살아갈
만 한 곳, 즉 ‘이상향’으로 일컬어지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하나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곳이다.
그런데 십승지지의 주요 입지조건이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外侵)이나 정치적인 박해가 없으며’, ‘자
족적인 경제활동이 충족되는 곳’이라는 것에서 볼 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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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를 가려면 화수리 전촌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마을 입구엔 수백년을 자라온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천하일품의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일명 동편제마을 소나무 숲은 조선 숙종시대 때부터 우거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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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마을은 150년 이상 된 소나무 92주와. 상수리나무 20여 그루가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동구숲 형태를 이루고 있어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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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이 지리산 자락 경치 좋은 곳에, 넓고 기름진 땅을 지니고 있는 곳이니 분명 두 가지 조건은 충족
되는 곳이기는 하나, 외침으로 인해 온 나라를 뒤흔든 전쟁을 피해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그 전쟁이
라 함은 왜구의 침략에 의해 일어난 14세기 고려 말의 ‘황산전투’와 16세기 말 두 번째 조선을 처참한
전란의 시기로 몰아넣은 임진왜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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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어지는 큰 길의 길목, 곡창지대 호남의 관문 역할을 하는 운봉은 전쟁의 피해
가 막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지정학적 숙명을 안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분지라는 생태환경으로 운봉
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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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만든 100여m의 숲 터널은 오랜 세월동안 인월에서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모진 찬 바람에 맞서며 마을을
호위 하느라 춤을 추듯 비스듬하게 굽어있어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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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희가 춤을 추듯 대부분의 소나무가 제각각의 형태로 비스듬히 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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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풍부했고 지리산이 만들어준 충적 토양으로 비옥했으며 약초,나물에 땔감도
풍부해 비상시 지리산은 피난처가 되었다는.... 그래서 옛적 춘궁기(春窮期)에도 "운봉에서 배고파서
죽은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남원 추어탕의 유래도 황산전투 중 논두렁에서 미꾸라지와 피라미 잡아
서 풀 시래기 탕을 해먹으며 군량미를 보충 했다는데서 남원 추어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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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남원 추어탕이 생겨났고 운봉 청국장,운봉 여름김치가 유명(요즘은 고랭지 채소에 화회가)했
고, 산나물 비빔밥과 유기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철생산을 자급자족할수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말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로 대패한 왜구들은 뭍으로 도피하면서 지리산 변
운봉을 최후 농성지로 활용한다. 그런데 이게 조선 개국 계기를 만들었으니 역사의 아리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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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운봉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란, 고려말 조선이 들어서기전 청사(靑史)에 빛나는 3대 대첩
이 있다. 최무선(崔茂宣)의 진포대첩(금강하구.군산), 최영(崔瑩)의 홍산대첩(부여)은 청사(靑史)에
빛나는 고려 말엽(末葉)의 삼대첩(三大捷)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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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유랑자는 그 3대첩의 한곳인 운봉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찾았다.
먼저 황산대첩비를 가려면 화수리 전촌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마을 입구엔 수백년을 자라온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천하일품의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일명 동편제마을 소나무 숲은 조선 숙종시대 때부
터 우거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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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470m 고원분지에 위치해있는 동편제마을은 150년 이상 된 소나무 92주와. 상수리나무 20여 그
루가 만든 100여m의 숲 터널은 오랜 세월동안 인월에서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모진 비,바람에 맞서
며 마을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며 동구 숲 형태를 이루며 마치 무희가 춤을 추듯 대부분의 소나무가
제각각 비스듬하게 휘고 굽어있어 말 그대로 환상 그 자체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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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촌마을은 조선 숙종초기 운봉읍에 살던 밀양박씨가 황산 대첩비 옆 강변에서 낚시를 하다가 대
첩비 입구에 있던 아름다운 소나무 숲에 매료되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 전촌마을의 시초가 되
었다. 이후에 김씨.이씨, 강씨가 차례로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다. 이 숲 터널을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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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라는 생태환경으로 운봉은 자급자족이 필연적.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풍부했고 지리산이 만들어준 충적 토양으로
비옥했으며 약초,나물에 땔감도 풍부해 비상시 지리산은 피난처가 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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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운봉에서 배고파서 죽은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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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주차를 하고 람천을 건너면 우측으로는 동편제의 탯자리인 비전 마을과 동편제의 가왕 송홍
록과 인간문화재 박초월의 생가가 있다. 좌측으로 는 이성계의 황산대첩비가 구릉지에 자라잡아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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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밤에만 달맞이 하러나온다는 아침이슬 머금은 달맞이꽃이 하늘 거리는 둑방길을 따라 황산
대첩비로 들어선다. 본시 달맞이 꽃은 척박한 땅이나 한적한 강변, 자갈밭 같은 데서 자라고 그런 환
경에 적응하는 야생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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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운봉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란, 고려말 조선이 들어서기전 청사(靑史)에 빛나는 3대 대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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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崔茂宣)의 진포대첩(금강하구.군산), 최영(崔瑩)의 홍산대첩(부여)은 청사(靑史)에 빛나는 고려
말엽(末葉)의 삼대첩(三大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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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에는 하나의 전설이 흐른다, “님프가 죽은 후에야 찾아 올 수 있었던 달의 신은 매우 슬퍼하
며 님프를 땅에 묻어 주었다. 미안한 마음이 든 제우스는 님프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만들어 주었고,
오늘날에도 달맞이꽃은 달을 따라 밤에만 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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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도 달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는 달맞이꽃의 슬픈 전설이다. 이 꽃은 석양
무렵에 노랗게 피었다가 이튿날 아침 햇빛이 난 후에는 약간 붉은빛이 돌며 시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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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에는 하나의 전설이 흐른다, “님프가 죽은 후에야 찾아 올 수 있었던 달의 신은 매우 슬퍼하며 님프를 땅에 묻어 주었다.
미안한 마음이 든 제우스는 님프의 영혼을 달맞이꽃으로 만들어 주었고, 오늘날에도 달맞이꽃은 달을 따라 꽃을 피우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도 달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는 달맞이꽃의 슬픈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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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달맞이꽃은 뿌리를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어린순으로도 나물을 만들 수 있는데, 순의 경우 매
운맛이 있기 때문에 조리하기 전 살짝 데쳐낸 뒤 찬물에 담가 매운 기를 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꽃의 경우 튀겨서 먹기도 하고, 효소를 담그거나 차로 우려내어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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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씨에는 감마리놀레산이 풍부해 기름으로 짜서 약으로 복용한다. 달맞이꽃 씨앗 기름은 혈
액을 맑게 하여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비만증, 당뇨병에도 좋다. 각종 염증에
저항하는 성분이 들어있어 특히 피부염이나 종기를 치료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을 가진다. 불포화지
방산이 풍부하여 건강식품으로도 인기가 많고, 여성들의 경우 생리 전 증후군으로 인한 통증을 가라
앉히는 효과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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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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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이 잘 되어있는 도회지의 아스팔트 길이 아닌 흙길을 밟으며 한적하게 걷는 시골길의 느낌은 아
주 편안하다, 노오란 달맞이꽃, 그리고 풀내음과 흙내음이 어우러진 둑방길은 왼지 주는 것 없이 여
유롭고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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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적으로는 이곳을 몇번 다녀온 곳인지라 낮익은 곳이기도 하다, 지난번에 여행기를 써 놓은게 있기
는 하나 이번 남원 여행에서 동편제 성지를 가는길에 있기에 다시한번 업그레이드 하는 차원에서 들
렀다. 이곳은 고려末 이성계가 왜구(倭寇)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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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에 의해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군의 최고지휘관 이성계는 적장16세의 아지발도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말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李豆蘭)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얻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섬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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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이 왜구의 침탈에 맞서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조선 숙종대의 성리학자 우담 정시한은 구례와 하동의 지리산자락 절집에서 한 철을 보낸 후, 구례에
서 숙성치를 넘어 남원시 이백면 응령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고는 이튿날 백두대간고
개 ‘여원재(女院峙)’를 넘어 운봉으로 들어서는데, 우담은 그의 [산중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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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현을 지나 비전(碑殿)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우리 태조(太祖)가 황산에서 대첩을 이룬 사적을 기
록한 비석이 있었다.(중략中略) 경건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감상하다가 승장의 방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신시 무렵에 실상사에 도착하였다.’(1686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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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 태조’라 함은 고려 말,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와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황산대
첩’의 영웅으로, 후일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 장군을 일컬음이다. 황산대첩비는 선조 때(1577년, 선
조10) 황산전투의 승전 사실을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니, 우담은 그 후 약 109년 뒤에 이 비전(비를
보호하는 건물)에 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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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황산대첩비에 이르기 전 하마비 와 하마정이 있었고, 이곳을 지나는 관리나 사대부들은 우
담처럼 말에서 내려 비전에 이르러 예를 갖추어야만 했다. 고려 말인 1380년(우왕6) 8월, 왜구들이 곡
식을 노략질하기 위해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이끌고 금강하구 ‘진포’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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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나세',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우리 해전 사상 최초로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의 배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른바 ‘진포대첩’이다. 이때 해상으로의 퇴각로가 끊긴 왜구는 살
육과 약탈을 일삼으며 내륙으로 이동하였고, 병력을 집결하여 경남 함양으로 들이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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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전투에서 이성계에게 몰살당한 왜놈들은 530년이 흐른후 일제때 이곳 비전 마을에 찾아와 일본놈들은 대첩비를 깨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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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은 도원수 배극렴을 비롯한 아홉 장수가 이들을 맞아 사근산성에서 대혈전을 벌이지만, 중과
부적으로 장수 2명이 전사하고 500여명의 고려병사들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후 왜구는
기세를 몰아 운봉을 거쳐 남원성까지 진출하였다가 다시 되돌아와 인월역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의
일전에 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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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운봉현은 왜구에 의해 온통 불살라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을 잇
는 큰 고개 여원재에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한 이성계 장군과 관련된 전설은 앞서 여원치 여행
기에서 소개한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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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극심한 피해를 입힌 왜구와의 전쟁은 1380년 9월 연재를 넘어온 이
성계가 운봉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의 승리로 그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후 10여년 뒤 조선 개국으로
역사의 흐름은 바뀌게 된다. 그 운명적 역사의 현장에 운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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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때(1380년)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
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년)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이곳에 황산대첩비를 건
립하였다. 현종 8년(1667)비각을 세운 뒤 고종 19년(1882)에 다시 고쳐 지었으며 이때 어휘각을 창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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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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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놈들의 두 번째 침략 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온 왜군에 의해 한반도 전역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어둠처럼 번져가던 참혹한 전쟁의 기운
은 지리산자락을 또 다시 공포의 분위기로 에워싸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이 있은 지 212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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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왜군간의 강화협상이 시작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전쟁은 1593년 6월, 오히려 지
리산자락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가게 된다. 10만 대군의 왜군이 진주성을 재침공한다는 흉흉한 소문
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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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후방, 전라도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왜군 과 맞닥뜨려야 하는 함양과 운봉지역은 극도의 공포
와 긴장감에 휩싸인다. 함양 선비 정경운(鄭慶雲)은 그의 저서 ‘고대일록(孤臺日錄)’에 당시의 절망적
인 상황과, 무기력한 조선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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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權慄)과 최원, 전라 방어사(全羅防禦使) 이자복(李自福)은 흩어져 달아나 아예 군사들을 통제
할 뜻이 없었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 모두가 흩어지려는 생각을 품었다. (중략) 사람
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고, 짐을 지고 달아나는 자의 행렬은 앞뒤로 백여 리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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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이 발생한 이후 산에 몸을 숨기는 변고는 지금까지 세 번째이지만, 인심의 동요가 오늘과 같은 적
은 없었다.(고대일록 1593년6월)” 그런가하면 남원의 춘향가의 저자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은 마치 정
경운의 글을 이어받기나 하는 듯, 그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당시 운봉의 긴
박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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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이 운봉에 진을 쳤다.(1593년 6월 19일) 진주성이 함락 당하여 6만여 명이
죽었고, 이빈(李賓)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함양에서 물러나 원수에 임명된 권율과 함께 운봉에 주
둔하였다.(6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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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장수 16세 아지발도가 이 바위에서 이성계의 활을 목에 맞고 쓰러저 피를 흘러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피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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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597년 2월, 소강상태에 있던 전쟁은 ‘전라도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정유재란이 발발하
며 또다시 지리산자락을 공포에 휩싸이게 한다. 7월의 칠천량해전 승리 후, 섬진강을 거쳐 하동과 구
례를 살육과 노략질하며 북진한 왜군은 결국 남원성을 함락하고 뒤이어 전주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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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교두보 남원성이 비참하게 함락되던 날(1597년 8월 16일),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다음과 같
은 기사들이 이어지며 남원과 운봉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함양에서
운봉으로 진군하였다. 운봉 황산 부근에는 왜병으로 가득 차 득실거렸다.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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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 사람들이여 남원 추억탕은 운봉에서 시작 되었다는것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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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은 지리산에서 흘러온 물이 풍부했고 지리산이 만들어준 충적 토양으로 비옥했으며 약초,나물에 땔감도 풍부해 비상시
지리산은 피난처가 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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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방어하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부민(府民) 등 1만 여명이 전멸하였다. (중략) 왜군 양쪽의 군
대가 모두 운봉으로 돌아가 며칠을 머물렀다. 이어 지리산으로 들어가 사찰에 유숙하거나 산꼭대기
에서 노숙하면서 난을 피해 숨어들어간 우리 양민을 수색하여 죽이고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난중잡록 1597년 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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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리산의 마을 운봉은 이렇듯 처참한 전란의 한가운데서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오죽했으면
살아남은 사람이 적어 폐현(廢縣)에 이를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 사이 운봉으로 가는 길에는 한줄기
희망을 싹틔우는 걸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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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추어탕의 유래는 황산전투 중 논두렁에서 미꾸라지와 피라미 잡아서 풀 시래기 탕을 해먹으며 군량미를 보충 했다는데서
남원 추어탕의 시작이며 운봉이 원조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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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이 정유재란의 참상을 겪기 넉 달 전(1597년 4월 25일), 서울 의금부에 투옥되었던 이순신
장군이 출옥하여 합천으로 백의종군하러 가던 도중에 ‘여원재’ 고개를 넘어 운봉으로 들어선 것이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이곳 운봉에서 하룻밤을 보낸 장군은 도원수 권율 장군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
을 접하고는 방향을 바꾸어 연재를 지나 구례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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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넘어온 여원재 옛길에는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지나가며 바위에 새겼다는 ‘유정과
차(劉綎過此, 1593년), ‘유정부과(劉綎復過, 1594년)’ 바위글씨가 두 곳에 남아 있다. 이 두 장수는 15
98년 순천왜교성 전투에서 함께 수륙양공을 펼치게 된다. 우리 역사의 ‘타임캡슐’ 여원재와 운봉이 새
롭게 깨어나, ‘역사로 걷는 운봉의 길’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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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남원 추어탕이 생겨났고 운봉 청국장,운봉 여름김치가 유명(요즘은 고랭지 채소에 화회가) 유기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철생산을 자급자족할 정도로 자원이 풍부한 운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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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말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로 대패한 왜구들은 뭍으로 도피하면서 지리산 변 운봉을 최후 농성지로
활용합니다. 그런데 이게 조선 개국 계기를 만들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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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고려말 운봉 황상 전투에서 몰살을 당한 왜놈들은 그로부터 정확히 530여년이 흐른뒤 일제강점
기 때 일본놈들은 이곳 비전마을을 찾아 와 530년전 그때 당했던, 그때 못 풀었던 한을 달래고 보복하
기 위해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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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한민국은 광복후 1957년에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우고 보호각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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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b2345/9t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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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운봉읍 가산화수길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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