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작가로 알려진 이현주 목사를 나는 형이라 부른다. 현주 형과의 인연은 1980년대초 전두환 쿠데타정권의 언론통폐합 이후 우여곡절 끝에 CBS에서 사보 편집을 맡게 됐을 때 성서해설 연재를 부탁하면서 맺어졌다.
감리교 소속이던 현주 형이 목사직을 반납하고난 뒤여서 감리교 목사였던 한 회사 간부는 몹시 못마땅해 했지만 연재는 계속됐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을 현주 형의 번역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당연히 절판된 이 책을 지금은 중고서점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느 날 현주 형이 “교회 욕만 하지 말고 진짜 교회 해보면 어때?” 하신다. 1970년대 NCC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의 본산이면서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 세력의 우산이 되어주던 한국교회는 당시 일부 대형교회를 시작으로 급격하게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진짜 교회라니요?”
교회는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목사는 교회에서 보수를 받지 않는다, 일방적인 설교는 없다, 모든 교인은 수입의 1/10을 세금으로 낸다, 세금은 돈이 바로 필요한 사람에게 즉각 전달된다 등등.
이현주 목사의 제안은 희한한 내용이었다. 당장 수락하고 사람을 모았다.
예배는 참가자들 모두가 참여하는 짧은 기도로 시작돼 지난 일주일 동안 살면서 느낀 것이나 경험을 나누고, 설교는 목사가 성경 본문을 정해 읽으면 이 성경구절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부분은 언제나 토론으로 이어져 두세시간 계속되기 일쑤다. 언제나 감동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전달하는 일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자선으로 해결하려는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절박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앞에 놓고 왜 당신이 물에 빠지는 상태에 이르게 됐는지를 설명하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보자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할 시간이 없듯이 말이다. 중동 건설노동자로 나가 월급을 집에 꼬박꼬박 보냈는데 부인이 돈을 챙겨 달아나는 바람에 귀국하자 땡전 한푼 없이 갈 곳도 없게 된 이, 공사장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관련자 모두가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치료비를 못 내 병원에 붙잡혀 있는 노동자 등이 그랬다
현주 형은 어느 날 덕수궁 뜰 한 귀퉁이에서 가진 모임에서 눈을 뜨고 기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 또한 놀라운 경험이었다. 눈을 감고 기도할 때는 저 하늘 멀고 먼 곳에 계신 분에게 드리는 거라면 눈을 뜨고 하는 기도는 바로 옆에 있는 분과 속삭이듯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눈꺼풀을 살짝 올렸을 뿐인데도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컸다.
이 목사가 혼난 일이 있었다.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라는 책을 출판한 뒤 동화작가 고 권정생 선생으로부터 공개적인 비판을 받은 것이다. 부제가 ‘이름값을 하면서 살고 싶다’에서 보이듯이 책 내용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으나 제목이 문제였다.
권 선생은 들꽃 수십종의 이름을 나열한 뒤 “들꽃이라고 이름 없는 꽃이 없는데 이름을 모르면서 이름이 없다고 했다”는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 글이 이 목사의 친구인 고 최완택 목사의 민들레교회 주보에 실렸다. 교회마다 매주 내는 주보는 흔히 예배순서와 간단한 교회소식에 전 주 담임목사의 설교 내용 요약을 싣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민들레교회 주보는 8면으로 최 목사와 주변 인사들의 주옥 같은 글을 실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줬고 주보를 우편으로 받아보는 이들도 전국에 수백명이나 되는 보기 드문 주보였다. 평소 현주 형과 권 선생의 우정은 워낙 두터웠으니 이 비판마저 따뜻한 조언으로 받아들였음은 물론이다.
내가 한산촌에 있을 때 현주 형에게 편지로 한산촌을 소개하면서 여기 천사가 있다고 했더니 우리 모임 멤버들과 함께 한산촌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감명을 받은 현주 형은 내가 퇴소한 뒤 한산촌 돕기 바지회를 제안했다. 각자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하나씩 내고 주변의 이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증받아 돈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내놓은 작품들은 보잘 것 없었지만 현주 형이 기증받아 온 작품은 수십점이나 됐다. 표구를 하고 전시한 작품이 성공회 서울대성당 전시홀을 가득 채웠다. 바자회는 성공적이었다. 그 수익금으로 한산촌에 건물 한 채를 짓고 한산촌 인근 돌산에 있던 무의탁 만성결핵환자 요양시설 구내에 1백여m가 넘는 도로포장을 했다.
이 목사는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과 기고를 묶어 <공존>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어 주변에 나누어준 탓에 남들이 우리에게 ‘공존교회’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 교회는 현주 형이 충주로 내려가게 되면서 2년여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20여년 만에 만난 이 목사는 청각이 많이 떨어진 것 외에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 목사는 순천 대안학교 아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순천에 살면서 이 학교 아이들에게 매주 ‘마음공부’ 강의를 해왔다는 것인데 최근 충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격주 강의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학교 초등과정을 마친 아이가 중등과정 입학 면접에서 지원 이유를 “할아버지와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단다. 이 목사가 충주로 가게 돼서 마음공부를 못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격주로 공부하면 되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형수와 사별하고 난 뒤 새 형수와 ‘결혼 당한’ 극적인 과정,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값비싼 보청기를 빼버린 이유, 슬기 소리 기림 등 세 딸의 근황, 알러지로 호흡이 끊겨 혼절했다 깨어난 이야기 등등 오랜 세월 만큼 들을 얘기도 많았다. 너무 길어지기는 했지만 알러지 사건은 전해야겠다. 깨어난 뒤 들은 것은 “언제든지 널 데려갈 수 있어. 까불지 마.” 하시는 그 분의 음성이었다고 한다.
헤어질 시간이 됐다. 형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보낼 수가 없다면서 굳이 기차역까지 배웅하겠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현주 형이 심각하게 얘기한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
“예, 뭐든지.”
“내가 택시비 내게 해주라.”
주머니에서 꺼내든 5만원권 한 장과 1만원권 서너장이 세 겹으로 접힌 것으로 보아 비상금으로 갖고 있는 전액임에 틀림없다. 뭔가를 또 주섬주섬 꺼낸다.
“내가 만든 거야. 용헌 엄마 목에 걸어줘.”
희귀하게 T자 모양으로 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십자가 목걸이었다.
역사 안에서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열차 출발을 알리는 구내방송을 듣고나서야 현주 형과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