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
할매
장마
사이로 날이 반짝 빛났다. 밤에 다시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했지만 지금은 날이 무덥다. 토굴 '할매'가 그물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비오는
날에는 차고로 쓰고 날이 좋으면 할매 놀이터로 쓰는 곳이다. 요새 할매의 일과를 보니 낮에는 동네 할매들과 화투를 치고 밤에는 7km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에서 공연하고 있는 유랑극단 약장수 구경을 간다. 벌써 한 달 동안 매일 저녁 출퇴근 하고 있으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저녁이면 TV밖에 볼 것이 없는 산골에 극단의 봉고차가 와서 모시러 오고 끝나면 모셔주니 편하긴 하다. 약장수들이 노리는 것은
결국 45만원 짜리 한달치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것이다. 사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결국 사고 말았다. 자기 돈으로 산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을
것인가.
할매는
갑자생이니 올해 80세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 강점기 때 갑자생 남자들은 무조건 징용에 끌려갔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한다. 할매의 겉 모습은 건강해 보이지만 심장병, 관절염, 신경통 등 온갖 병과 함께 살고 있어 항상 약봉지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비단
토굴 할매 뿐만 아니다. 이 동네 70세 이상 되는 할매들은 대부분 환자들이다. 그래서 장날이면 면소재지 병원과 한의원은 주사맞고 물리치료하고
침맞는 노인네들로 만원이 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공해에 찌들고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일에 찌든다. 농촌에 있으면 마음은 편하다고 하지만
땡볕에 일하는 육체노동의 고통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12년
전인 1991년 겨울부터 1992년 봄까지 여섯달 동안 할매와 둘이서 토굴 담을 쌓고 외양간으로 썼던 곳을 방으로 만드는 공사를 했다. 당시
68세의 할매는 훌륭한 보조요원이었다. 할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1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런 할매가 75세를 넘기면서 몸이 영 달라졌다.
조그만 멀리 걸으면 다리가 아프고 이젠 돌도 무거워 들지 못한다. 젊어서 일을 너무 많이하면 늙어서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하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일단
약장수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아프다는 소리는 덜하다. 사지 말라는 것을 사서 미안한 마음도 있을 것이고 공연장에서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소리(바람잡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를 들은 터라 몸이 좀 덜 아플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 할 것이다. 포장지를 보니 원료는 한약제와 버섯류를 섞은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니 심리적으로 좋아지리라 생각하면 실제로 좋아질 수 있다. 유명한 의사가 잘 낫게 하는 것은 유명하기 때문에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는 내가 토굴에 있으면 동네 할매들이 어려워하여 잘 놀러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과 겨울 대중처소로
안거를 들어가면 자유롭게 와서 놀았다. 작년 여름부터는 대중처소가 번거로워 계속 토굴에서 살기로 했다. 처음에는 스님이 또 공부하러 또 가겠거니
생각했던 할매들이 내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모이기 시작했다. '스님이 있어도 괜찮으니 와서 화투치자.'고 할매가
적극적으로 홍보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야 밥만 해주면 되니 불만은 없다.
매일
하루 서너시간씩 화투를 쳐도 힘들다는 말이 없으니 노인네들의 근기가 참 수승하다. 나는 한 시간만 쳐도 피곤할 것 같다. 한나절 신나게 치고
계산하는 것을 보니 30원에서 100원 사이에서 수입과 지출이 반복되고 있다. 어느날인가 4명이 모여 있길래 평균연령을 따져보았다. 76.
5세였다. 나까지 포함하니 70. 6세. 70대가 되기 싫어 얼른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할매와 동갑인 아랫집의 무골호인 할매는
선을 볼 때마다 '몇장 까노?'라고 물어보곤 해 항상 다른 할매들의 핀잔을 듣는다.
"조금
전에 했으면서 그것도 모르나?" "몰래~자꾸 이자뿐다. 아하하..."(몰라 자꾸 잊어 버린다)
그리고
화투를 치는 중간에 누군가의 입에서 반드시 나오는 말이 있다. "누가 선이고?" 그러면 또 나다 너다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나곤 한다.
할매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래도 늙으면 시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이 좋음을 알 수 있다. 텃밭에 상추, 옥수수, 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 놓고 매일 자라는 것을 보며 사는 즐거움, 점심 때면 풋고추 상추를 바로 뜯어 먹는 즐거움이 있다. 철철이 피는 꽃을 가꾸는
재미도 있다. 덩달아 나도 좋아하는 고구마 줄거리 된장에 무쳐준 것을 맛있게 먹는다.
부처님은 80세에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아주
오래사신 셈이다. 장부 경전16이나 [대반열반경]은 노쇠한 부처님에 대해 이런 서술을 남기고
있다.
"아난다여, 나는 노쇠했다. 나이가 이미 팔순이 아니냐? 비유하자면 아난다여, 낡은 수레는 가죽 끈으로
얽어맴으로써 겨우 움직일 수 있거니와 내 몸도 또한 가죽 끈으로 얽어맨 수레 같으니라."
요새는
왠만하면 80세다. 할매들이 제일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인 <전국노래지랑>의 사회자인 송해 할배도 76세. 노익장이다. 매주 전국을
돌아다니는 힘든 공연인데도 아직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있다. 음식이 좋고 의학이 발달한 탓에 평균수명이 늘어 났다. 그러다보니 쓸데없이(?)
명줄만 길어져 억지로 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치매는
노인네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병이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맞벌이를 하는 핵가족 사회인 지금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준다. 형제자매간 사이가
벌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늙은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다. 그런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노인네들은 다들 어떻게하면 잘 살다 노망들지 않고 죽을지
걱정한다.
"공부
좀 하소!" 틈만나면 내가 하는 말이다. 어렸을 적 할매가 나에게 한 말을 이제는 내가 할매에게 한다. 계속 자극을 주어 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언젠가 내가 없을 때 막내 사제의 전화를 할매가 받은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안부 끝에 할매가 "공부를 어떻게 할까요. 이뭣고
할까요?"하니 사제는 "이제 이뭣고 하시겠습니까. 그냥 염불만 자주 하세요."하더란다.
공양
때는 꼭 오관계를 한다. 내가 먼저 합장하고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라고 운을 떼면 할매의 응답이 자동으로 나온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보호하는 약으로 삼아 도업을 이루려고
이 공양을 받습니다.
덕행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외우니 좋은 구업을 짓는 일이다. 새벽 잠이 없는 할매는 잠이 오지 않으면 기도를 한다. 어떤 때 새벽에
밖에 나왔다가 할매 방에 작은 등불이 켜 있어 가까이 가보면 열심히 천주를 돌리며 염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효스님의 <발생수행장>을 보면 '파거불행 노인불수'라는 말씀이 있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노인은 도 닦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젊었을 때부터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 새삼스레 할 수 없다. 그나마 염불이라도
열심히 하니 다행한 일이다.
가실
때도 다 되었기에 미리 준비하라는 듯에서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라고 주니 돋보기를 끼고 며칠 읽어보고는 책을 도로 준다. 눈도
피곤하고 내용도 도대체 뭔 말인지 모르는 내용이라 흥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부분은 다 읽었는지 한 마디 한다.
"태백(티벳)은 무슨 장례식을 그렇게 한대? 죽은 사람을 이리저리 굴리다니... 에에~그런 법
없어!."
가끔
정원 탁자에 앉아 어렸을 때 일을 듣는 것도 재미 있다. 우리는 마치 친구와 같다. 아무래도 전생에 큰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치매가 온다한들
낳아주고 길러주고 지금도 밥해주는 공덕을 생각한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못모실 이유가 없다. 아직까지는 할매가 나를 모시고 있는 편이다. 할매의
임종은 그래서 나의 몫으로 생각하고 있다. (200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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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사이에 흐르는 향기 백합에 견줄까....?
향기로운 가난, 그것이 더 큰 울림이고,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행자의 소박한 일상에서 청량함을 느끼며 미소지어 봅니다. ...()...
맑은 가난..깨끗해서 수행자는 더더욱 아름다워야 되겠지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