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마태오 18,21―19,1)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백성에게 경고하는 또 다른 상징적 활동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멸망과 백성의 귀양살이를 예고하신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여 주는 이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여전히 믿지 못하는 유배된 백성이 예언자를 믿고 그의 말에 회개하기를 바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안에서는 용서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때 모든 사람은 이미 아버지의 한없는 용서를 넘치도록 받았다.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보여 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마련하신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당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초대해 주시고, 한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는 오직 사랑으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바로 그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주님의 공동체에서 용서의 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행위가 끝이 없는 것처럼, 용서하는 행위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때, 이미 아버지께 넘치도록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잘못한 이웃을 얼마만큼 마음 깊이로부터 용서하느냐에서 드러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도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거기에는 증오와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어울리는 행동은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용서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일도,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청합시다.
마음의 용서 마음〔心〕은 의지·생각·근본·본성·중심·도(道)의 본원·알맹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마음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는 ‘얼굴·모양·모습·몸가짐·담다·그릇 안에 넣다.’라는 뜻을 가진 ‘용(容)’과 ‘헤아려 동정하다, 깨닫다, 밝게 알다.’라는 뜻의 ‘서(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이란 우리 근본`-`중심에서 깨닫는 일이며 밝게 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용서란 본질에 해당하는 깨달음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교회 안의 큰 경사이자 대축제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축일을 지냅니다, 각별한 성모신심을 지녔었던 콜베 사제는 성모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했으며, 성모님을 세상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성모의 기사’란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콜베 사제가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둔 이웃사랑의 실천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담근 시원한 동동주가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만사가 술술 잘 풀리는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사실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평화로운 가운데, 넉넉한 자금과 수많은 협력자들이 확보된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도 죽을 지경인 상황 속에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코가 석자’인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그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살짝’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보다 한 2% 더 사랑이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난 데 없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와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동료 수감자들이 주검이 되어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며 그분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맞이해보는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하는 하소연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콜베 신부님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쥐꼬리만한 빵 조각을 젊은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버린 형제의 눈을 감겨주고, 임종을 지켜주고... 이것이 바로 참 목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명의 동료 재소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가셨지만, 사실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지하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꼭 빼닮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내 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단 한 생명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용서,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독서> : 시대의 징표를 알아듣는 신앙인이 되자.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
새벽을 열며 제가 살고 있는 강화도는 자전거 도로가 그래도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휴일이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저는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특히 많이 만나게 되지요. 상대방보다 먼저 반가운 인사를 합시다. 빠다킹신부
몇 번씩 용서? -김광태 신부- 보통 사람이 세 번을 꼽는데 비해, 너그러움을 과시하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처럼 말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초라해집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김흥주 신부- ◆올 초 한 방송국에서 ‘마음’을 주제로 6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특히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제목의 마지막 편은 ‘용서’의 문제를 비록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긴 했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고 본다. 그 내용은 우선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한 고정원씨를 비롯해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빚진 사람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용서는 과연 이렇게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용서에 대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결론은 누구나 노력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만큼, 용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끔씩 예수님 말씀이 ‘제대로다!’며 무릎을 ‘탁’ 칠 때가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특히 나름대로 한 가닥씩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수도 공동체 생활, 때로 본의 아니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미운 감정이 생겨납니다. 특히 제 내면이 불안정할 때, 제 영적 생활이 엉망일 때 더욱 그렇더군요. 그래도 저희 같은 수도자들은 결혼생활하시는 분들에 비해 훨씬 상황이 나은 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분들, 미운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채, 끝도 없는 평행선을 달릴 때, 얼마나 고통이 크겠는가, 상상해봅니다. 그 누군가를 향해 미운 감정을 가지기 시작할 때 하나의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합니다만, 점점 분노가 쌓입니다. 직접 대면해서 할 말 안 할 말 ‘화끈하게’ 한번 털어놓아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게 또 여의치 않습니다. 혼자서 속으로만 꿍꿍 앓습니다. 성격이라도 대범해서 술 한 잔하고 마음 한번 확 바꿔먹는다든지, 그도 아니라면 적정선에서 포기하면 좋을 텐데, 그게 또 생각 같지 않습니다. 눈만 뜨면 그 사람과의 불편했던 사건이 떠오릅니다. 내게 던진 모욕적인 언사가 생각납니다. 그 사람 생각만 해도 속에서 불길이 확확 타오릅니다. 심장박동수도 빨라집니다. 용서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소화기능이 떨어 지다보니 혈액순환도 안 되고 힘도 없고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육체가 맛이 가니 정신도 슬슬 맛이 갑니다. 어느덧 미워하는 그 사람이 내 삶의 중심에 떡 버티고 들어앉아 있습니다. 내 삶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좌지우지합니다. 매사가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결국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생활입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파생될 수 있는 실제 상황입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적 생활이 받게 될 타격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없이 영적생활도 없습니다. 용서 없이 하느님 체험도 없습니다. 용서 없이 참 사랑의 실천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의 살길이며, 용서만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이수철신부- 자기를 모르는 ‘무지(無知)’이며, 받은 은혜를 자주 잊어버리는 ‘망각(忘却)’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 후렴도 “주님의 업적을 잊지 말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그의 고문이 되어 일러 드릴 수 있으리오.” 외람되이 현명한 길을 그분께 보여드릴 수 있으리오.” 비로소 겸손에 지혜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오늘의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향한 말씀 같습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지와 무자비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과 자기를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무자비해지고, 하느님과 자기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비로워집니다. 자기에게 백 탈렌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매정한 종, 바로 탕감 받아 무한한 은혜로 사는 자기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며, 가장 쉬운 것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라 합니다. 백 탈렌트 입은 손해에는 마음 아파해 하며, 만탈렌트 잘해 준 것은 곧 잊어버리고 백탈렌트 서운하게 한 것은 잊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 같습니다. 백 탈렌트 손해 본 쪽만 생각하면 불평불만에 마음도 옹색하고 편협해 질 것입니다.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우리 또한 자신을 잘 알게 되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에게 마냥 너그럽고 자비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명하신 무한한 용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容恕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박상대 신부 -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용서만이 완전한 평화
저는 지난 화요일에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물론 어디에 문제가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인천교구 사제라면 2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정기 종합검진이지요. 그런데 제가 이 종합검진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답니다. 그것은 바로 ‘비만’이랍니다. 사실 지난 정기 종합검진 때, 검사 결과 중에서 ‘비만’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다음 정기 검진 때에는 체중 조절을 해서 반드시 정상 체중을 만들겠다고 다짐했었지요.
그리고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지난 5월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현재 6키로 이상을 감량했지요.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저의 정상체중을 말해주는데, 글쎄 앞으로도 5키로 이상을 더 감량해야 정상 체중이라는 것입니다.
6키로도 꽤 많이 감량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멀었습니다. 아직도 지금까지 감량한 만큼을 더 감량해야 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이 정도면 되었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던 노력을 그만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안일한 마음과 포기하는 마음이 후회할 행동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학창시절, 시험공부를 하다가 문득 이 정도면 다 공부한 것 같지요. 그래서 공부하지 않고 놀다보면, 시험 볼 때 후회하게 됩니다. ‘그때 놀지 말고 공부를 조금만 더 했어도…….’
이러한 마음은 인간관계 안에서도 생깁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다가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지요. ‘나는 이 사람에게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저 사람은 내게 왜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내가 행하는 배려를 멈춰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멈춘 나의 행동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식어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후회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행위를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지요.
베드로는 일곱 번 정도 용서를 하면 최대의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정도로 부족하다고 하지요. 즉,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행위를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만하면 되었다는 안일한 마음과 포기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사랑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안일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후회할 나의 행동들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세요.
-김호균 신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한 분이 약을 먹고 죽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남편은 냉담신자였습니다만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경제력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경제적인 부분을 아내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철 없는 자녀들까지 카드빚을 지면서 여러 차례 어머니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가족들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밝게 웃으며 생활해왔습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속사정을 숨기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출한 남편이 돌아올 날을 10년 넘게 기다리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이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렵게 직장을 잡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맏며느리 역할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다시 재결합을 바랐지만 자녀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이
왔고, 잠이 오지 않은 관계로 과다한 수면제 복용이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남겨진 것은 자신을 쫓아낸 자식들에게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남겨줄 전세금 이 천만 원과 현금 천만 원이 유서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남궁영미 수녀-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음에서 용서하라고. 그러나 우리는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그 사람과 마주치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화가 치미는 자신을 대면하게 되고, 그때마다 자기 부정의 유혹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 갈등과 죄책감은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합니다.
용서는 어둠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세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은 용서하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며 동시에 용서받는 사람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 갈등하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없이 갈등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를 반복하는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용서의 과정임을 믿을 수 있을 때 용서하는 일이 조금씩 더 쉬워질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 순간과 저 순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용서한다는 것도 용서한 순간과 용서하기까지 갈등의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갈등의 순간이 용서를 잉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 힘을 냅시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용서가….
-김찬선신부-
어제는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교정해주어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보게 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몇 번이면 되는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한다면 누구를 위해 왜?
나에게 죄를 지은 그 형제를 위해?
나에게 죄를 지은 그 사람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그 형제를 위해 용서를 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니까
그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그를 용서하라면 죽어도 용서 못합니다.
죽이고 싶은데 어찌 용서를 합니까?
용서하려 해도 억지로 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하려 할수록 더 생각나서 더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용서하려는 생각은 아예 거두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안에 있는 그의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빼내지 않고 그냥 놔두면
그가 던진 말이
그가 한 행위가
그가 끼친 손해가
계속 나를 후벼 파 상처를 덧내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심장에 가시를 박아놓았다면
원한을 품고 그를 미워한다고 그 가시가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렇게 상처 주고 괴롭게 하였으니
너도 상처 받고 괴로우라고 미워해도
무디고 뻔뻔한 사람은 아무리 미워해도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사는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함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고
그러니 몇 번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함으로
우리 마음이 하느님 마음처럼
넓어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또한
먼저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 했어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서로 용서 하기를 원하시니
어머니 사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내가 미움과 원한에서 해방되고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로 하여금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하신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은 머지않아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고 지냈지만, 오히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 재앙을 보여주신 것이다. 왕은 바빌론 군대를 피해 도주하려다가 붙잡혀 눈이 멀어 바빌론으로 끌려오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이곳저곳으로 흩어질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 백성에게 한편 경고하시며, 다른 한편 예언자의 상징적인 행위를 보고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차례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회개하도록 권유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우상숭배를 하였다. 그 결과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하느님께 불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백성까지도 포로가 되어 끌려올 것임을 미리 보여주셨다. 당신께 불충한 이들이 앞으로 당할 모습을 예언자를 통하여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에 닥칠 불행을 미리 보고 마음을 돌이킴으로써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변하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끝없이 말씀을 던지시고 애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당신 품에 돌아오라고 목청껏 소리치시며 사정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비뚤어진 자식에게 회초리로 때리며 벌하기도 하고, 꾸짖고 애원하기도 하며, 어르고 달래며 애원하기도 하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그렇게 하신다. 때로는 사정과 애원을 하시고, 때로는 고통과 어려움을 주시면서 우리가 옳은 길을 걷도록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전혀 헤아리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눈과 귀가 멀어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듣지 못한다. “두 눈이 성하면서도 보려고 하지 않고, 두 귀가 성하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고 들으려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따라 세상을 보고 듣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죄악에 빠지곤 한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루가 12,54-56)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시대의 징표를 통해 던지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점에 대해 꾸짖으신 것이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징표가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기도하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귀를 기울이자.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는 하루가 되자....................◆
-천향길 수녀-
사람 사이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기억하려고 하지 용서하려고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철저하게 돌려주고 싶은게 인간의 마음이고 보면 용서란 무척 힘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사인을 용서를 뜻하는 ‘恕’자로 사용하는 선배 수녀가 있다. 이름과 상관없는 사인이라 궁금해서 직접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선배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고만 했다.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완성되고 그 행동은 다시 생각을 규정한다. 선배는 자신의 삶에서 ‘용서’가 필요해서 그렇게 의식하려고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살아간다. 송봉모 신부는 자신의 저서 『상처와 용서』를 통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제시한다.
저자의 말처럼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를 버리기 전에는 힘든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때는 감당할 수없을 정도로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또 어느 때는 목이 타도록 사람이 그립다.
그래서일까?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산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 해서 그렇게 상처받을까? 아니다. 지나가는 개가 짖었나보다 생각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지 되씹는 것이다.
사소한 ‘말’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윈스턴 처칠은 “한번 내 뱉은 말은 도로 삼켜도 잘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송봉모 신부는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렇게 제안한다.
첫째 기대하지 말라. 둘째 추측하지 말라. 셋째 상처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앞으로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고, 넷째 상처 때문에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다섯 번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적인 예화를 들어가며 기도로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마태 18,22)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오늘은 이렇게 일침을 놓으신다. 언제나 내 생각이나 방법과 다른 그분께 주님의 빛을 구하자.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볼 수 있도록....................◆
얼마 전 휴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날 저는 아침에 운동을 하지 못했기에 오후에 복장을 갖추고 성지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와 같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무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그들이 너무나 신경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그 도로에는 차들이 너무나 많이 지나가고 있어서 추월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답답했지요. 화도 났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미움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움의 감정이 생기고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 상황이 바뀌지는 않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제 자신이 더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이 날은 그냥 자연 경관을 즐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서 자전거 타시는 분들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면서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자전거를 탔습니다.
저는 이날 가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전에 빨리 달리면서 보지 못했던 경관도 볼 수 있었으며, 천천히 달리는 그 맛도 너무나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책에서인가 읽었던 인상 깊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이해의 대상이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사람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결과는 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부정적인 모습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이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판단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본다면 이렇게 용서할 수 없겠지요. 어쩌면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아니 그 이상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그 판단의 대상으로 보려는 못된 마음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께는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좀 더 근원적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문제 삼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며,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려하여 1만 탈렌트를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노동자의 일당을 5만 원씩으로 계산하면 3조 원에 이릅니다. 현금 천만 원을 조달하기 힘든 서민들의 형편은 말할 것도 없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아도 그 정도의 빚을 상환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빚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창조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존재론적인 가난을
이야기하는 근거입니다. 동료가 빚진 백 데나리온, 즉 5백만 원이 적은 액수라서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떤 것이 커보일 때마다 눈을 돌려서 하느님 쪽을 바라보아야 배은망덕한 행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용서해주면서 자기의 너그러움에 스스로 도취하는 착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용서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용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방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 용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일 뿐 아니라 용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상대방에게 동정과 사랑을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웃을 수 있는 것이 용서의 힘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이다. 반면에 마음을 편하게 하고 용서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용서의 대가는 마음의 평화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온 러스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삶이 허락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때만이 우리도 하느님의 더 크신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양승국신부-
진정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인간의 원죄와도 같은 고질병,
하느님과 멀어진 결과가 무지요 망각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아침기도 시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누가 야훼의 정신을 지도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분께 지식을 가르치겠으며,
이런 하느님을 깨달아 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알게 되어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 가운데에 살고 있다.
하느님께 멀어지면 반항적이 되고, 마음 어두워져
오늘 복음의 ‘매정한 종의 비유’가 바로 하느님을 잊은 인간이
만 탈렌트 부채를 탕감 받고도
만 탈렌트 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받은 은혜 만 탈렌트를 생각하면 자비롭고 넉넉하겠지만,
이 매정한 종에 대한 주인의 말, 바로 주님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이어 주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진정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체험해 갈수록,
오늘도 성체성사의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그대에게
진정한 용서(容恕)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용서(容恕)했다고 말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 울분과 울화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긴 했지만 내 방식대로 용서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용서(容恕)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너는 갚을 능력이 없구나.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인정하고 받아주마.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윽박지른다고 일만 달란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금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은 그는 더 이상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어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옹졸함은 친구를 감금하고 끝내 자신도 감금당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소나무를 느티나무가 되라 하지 않습니다. 잔디를 클로버가 되라하지 않습니다. 수국에서 장미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기에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아름답고 늠름합니다.
하느님은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깨끗하게 되라 하시거나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비의 손길로 감싸 어루만져줍니다. 그 순간 나의 더러움은 씻겨나가고 상처는 깨끗이 치유됩니다. 여기에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容恕)하십시오.
용서(容恕)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一明)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오늘복음은 생각이나 말로는 가장 쉬우면서도 행동이나 실천으로는 너무도 어려운 용서편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참 답답한 말입니다. 지난날 분심, 원한 등으로 응어리 진 것들이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아, 나이 50이 들어선 지금도 그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판인데, 일곱번도 아니고 일흔번도 아니고, 일흔에 일곱번을 용서하라니요.......에이, 예수님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요 모양 요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는 너무 심한 요구 아닙니까...하고 십자가 앞에서 무척 대들기도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에 대해서는 에누리(일본어)도 없이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만을 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고....그러면 더 이상 불순하게 버틸 수도 없고, 순명은 해야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요구하는 것은 무언인가를...제대로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복음의 묵상은 용서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참된 용서의 의미와 실천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용서받을 자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라.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산 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더 많은 은총을 거져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죄값을 치를 수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생들은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 화목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26절의 전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사자(천사)들을 뵙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된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유황불의 심판으로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 도시를 향하여 걸어가는 도중에서 대화입니다.
심판의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간청합니다.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 때 야훼(하느님의 천사)가 말하기를 "소돔 성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어떤 심각한 경우라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싶은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한사람도 멸망치 않는 것을 원하십니다. 결국 소돔의 멸망의 원인은 죄없는 사람(의인) 열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소돔 고모라는 유황불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의 도시로 유명한 니느웨와 그 백성들은 40일 후면 멸망 할 수밖에 없는 위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은 예언자 요나의 복음을 듣고 왕과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서 용서의 은퐁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다른 예를 하나더 들겠습니다. 창세기 50,17의 말씀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동생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을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형들의 모든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라는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요셉과 그 형들은 서로 부등켜 않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지은 그 형제들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 55,7입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용서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실천하므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엄청난 부채를 탕감받은, 즉 은총받은 자가 오늘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은총받은 자가 마땅히 행할 것은 자신도 그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맺힌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풀리는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맺힌 것이 있다면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주 어리석고 불행을 자초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같습니다.) 본문에서 10,000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거져 탕감 받은 자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직은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아놓고는, 정작 이웃에게는 전혀 용서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영원한 은혜와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미미하고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삶은 결국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삶>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하느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와 일반인들의 비교를 정신과 의사들이 종종 많이 하고 있습니다. 폴 토레니에라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치료 사례집속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과 질병과의 관계에 대해서, 병과 사람의 생각과의 관계에 대해서 치료한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불치의 빈혈증에 걸린 한 소녀가 날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 어떤 정신요법이나 약물 요법으로도 낫지 않는 병이었다. 마침내 산중의 요양소로 보냈다. 얼마후 요양소에서 진단을 했는데 혈액 검사의 결과 아무 이상이 없고 빈혈증도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닌 정상이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지난번 자신에게 진단을 받을 때와 요양소에서 진단을 받을 때까지의 생활상에 무슨 변동이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지독하게 미워했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환해지고 삶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점점 몸의 병이 나았다고 했다.... 이런 치유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ㅇ아이구 툴툴 털으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 6,14-15입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에페 4,32에서는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영광은 용서에서 옵니다.- 윌리암 브레이크 -
가장 고귀한 보복은 용서하는 것이다. 영국 속담 -
상해에 대한 용서만큼 우리로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 닮게 하는 요인은 없다. - 크리소스톰 -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될 수 없다. - J.C.라일 -
3.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저주스런 삶을 선택하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주인공은 엄청난 빚을 탕감을 받았으니 너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탕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어서 조그만 용서도 잘하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은 믿음은 능력입니다. 지혜입니다. 성숙한 모습입니다. 자랑스러운 주의 일군의 몫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엄청난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 보혈로 용서하심>
하늘에는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계산하셔야 할 갖가지 것들을 모두 책에 기록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거 신상명세서 첫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미가엘 크리스텀...머리카락은 6,276개..."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저에 대하여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 페이지에는 하느님의 모든 법들, 특히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제가 각 계명을 범할 때마다 표시를 해 놓을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명세서는 상당히 두껍습니다.
맨 마지막 페이지는 차용증서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미가엘 크리스텀은 제1계명을 8,322회 범했으며, 제2계명을 5,456회 범했고, 제3계명은...제4계명은...그러므로 미가엘 크리스텀은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제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꺼내드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탬프 도장에 자신의 피를 듬뿍 묻히시더니 매 페이지마다 "폐기됨"이라고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쓰레기는 하늘나라에 두실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셨습니다. 누근든지 미가엘 크리스텀의 신상명세서를 보고 싶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영원히 지워진 사건입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이제 우리는 갚지 못할 빚을 지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감 받은 축복을 누릴려고 한다면 어떤 신앙으로 살아야 할까요? 그 첫째는 감사 신앙이 불타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마음에 품고있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적은 것을 탐심을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큰 은혜와 축복을 놓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지혜로운 자는 용서를 서두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용서할 기회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 사무엘 죤슨 - 의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격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손길에 축복을 주셨다. 한 손에는 용서를, 또 다른 손에는 거룩함을 주셨다. - W.E.생스터 -의 말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은총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에 의지하여 사는 삶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용서 베푸는 삶으로 은혜를 유지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믿음과 실천을 병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