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면 아영고원에 있는 돌로 쌓은 산성으로 아막성, 성리산성 등으로 불리운다.
아영고원은 운봉고원과 황산의 산줄기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 일대는 백제의 아막산, 신라의 모산성 등으로 불렀으며, 역사상 신라와 백제간에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가야(伽耶)의 영토였으나 신라의 영역으로 돌아가자, 신라 서쪽 주변의 침공에 주력하던 백제는 무왕(武王) 3년(602)에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하여 신라장군 무은(武殷)을 사살하자, 그 아들인 화랑(花郞) 귀산(貴山)이 취향과 함께 돌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백제는 무왕 17년에 또다시 공격하여 모산성을 함락하였고, 동왕 25년에는 드디어 이 지역을 차지하여 함양 등 6성을 점령하여 경상도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형세에서 이 성리산성(城里山城)은 부근의 성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견고하여, 백제측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이를 「아막산성(阿莫山城)」으로 비정(比定)하고 있으나,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다.
성터는 동북쪽을 접한 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북변(北邊) 수구(水口:물이 흐르는 곳)에 북문 터(北門址), 서쪽중앙(西邊中央)에 서문 터(西門址), 동남쪽 모퉁이(東南隅)에 가까운 동변(東邊)에 동문 터(東門址)가 남아 있다. 북쪽은 성벽이 완전히 남아 있으며, 길이 15.07m로 거의 직선으로 3개소에 적태(適台)를 돌출시켰다. 동쪽도 거의 직선으로 길이 147.1m, 서쪽 길이 126.9m, 북쪽은 곡선을 이루는데, 길이 208.1m, 주위는 총 632.8m에 이른다. 성이 높이는 약 4.0m에 이르며, 상변폭(上邊幅)은 3.5m이다. 그러나 동벽은 위쪽의 폭(上邊幅)이 7.5m로서 가장 넓으며, 내벽은 약 1.0m에 불과하다. 남쪽 성벽의 능선 연결부분에는 못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한 환호(空濠)가 설치되어 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백제계의 도자기 조각 등이 퇴적되어 있는데, 북문지 수구(北門址 水口) 동쪽에는 지름 1.5m의 돌로 쌓아 만든 원형의 우물터(井戶址)가 있다.
아막성(阿莫城) 돌로 쌓은 이 산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한 아막산 봉우리를 에워싼 것으로 둘레는 633m 가량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 격렬한 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 모산이라 불렀다. 성터는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동·서·북쪽 테두리에서 각각의 성문터를 찾아 볼 수 있다. 북쪽의 성벽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데, 네모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아 정교함을 보여준다. 북문터 부근에는 직경 1.5m의 돌로 쌓은 둥근 우물터가 있다. 성안에는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 백제시대의 도자기 조각 등이 쌓여 있다.
5월 13일 아침 06:30분에 갈마역 3번출구를 출발한 작은지기(조타지기) 승용차는 태평동에서 잠시 산내비를 탑승시키고는, 안영리 IC에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거쳐 대전-통영간 고속국도로 들어선다. 덕유산휴게소에서 준비해온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는 다시 고속도로로 육십령터널을 지나 서상 IC로 빠져나온다. 고속도로요금 4600원, 드라이브 길 삼아 나선 길 우측의 백전면(柏田面)으로 가는 길로 잡아든다.
도중에 은행나무 마을로 유명한 곳에는 노거수 은행나무가 둘러쳐진 돌담안에서 생육도 왕성하다.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에 있는 은행나무를 연상시킨다. 중요 교통로임을 증명해주는 노거수는 아닌지. 추측을 즐긴다.

은행나무 골에는 돌담장이 아름답다. 충남 부여 외산면의 반교리 돌담장을 떠올리게 한다.

운곡리의 은행마을에 있는 은행나무를 보고 고갯길을 내쳐 오르자 정상이 나타난다.
일명 빼빼재, 백운산 등산로 기점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의 능선상에 있는 백운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 준다. 예전에는 가야, 신라와 백제의 경계부근이었을 곳이다.
등산하고 픈 생각을 뒤로하고 가파른 고갯길을 내쳐 내려가야 한다

(백운과 동백 마을로 난 우회길을 거쳐 ) 급경사 고개 아래에 있는 (함양군) 백전면사무소 앞에서 잠시 쉰다.
이상하게 생긴 돌이 정문 왼쪽에 있다. 무슨 상징석일까?

천년사랑이야기를 담은 산책길을 돌고나오니 백전공원에는 물레방아도 있고, 연자방아도 있다. 연암 박지원이 함양 안의현감이었을 때 펼친 시책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충남) 당진 면천현감시 골정지에도 그의 실사구시적인 실학자의 면모가 보이는데...

물레방앗간 앞을 흐르는 위천가의 두 그루 노거수(느티나무) 사이에 지은 망월정(望月亭)은 흥취를 북돋운다.
'답사를 빙자한 나들이'라는 둥,' 나들이를 빙자한 답사'라는 둥 말장난하며 시간을 느긎하게 즐긴다.
간식도 하고 음료수도 들고. 한담에 세월을 잃어버린다.

조금 더 내려가니 노송으로 둘러 싸인 벽송정(碧松亭)이 나타난다.
당호에 알맞게 푸른 노송 여러그루가 위천가 정자옆에서 푸른하늘을 머리에 인채 위천 위로 멀리 백운산 줄기를 바라본다 .

우측으로 돌아서니 전북 아영면으로 가는 길은 88고속국도와 함께 해서 고개로 올라선다.
남원 아영고원지대로 들어선다.
성리로 가는 길에는 가로수로 층층나무를 심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성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성리(城里)이지만 지금은 흥부마을 이야기로 유명한 곳, 상성도 하성 마을도 있다

흥부 전시관 앞에 등산 안내도에서 찾아낸 아막(산)성 안내지도.
흥부의 성이 박씨던가, 연놀부라고 들었던 기억도 있고...

공구재 꼭대기에 망제단이 있다. 아막성으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왼쪽에 있다.
고개 위에는 당산나무가 있다. 서어나무를 당산나무로 삼고, 흥부제의 일환으로 동네에서 제를 지낸단다.


흥부의 묘로 알려지고 있는 박춘보 비석과 묘가 공구재 바로 넘어에 있다.

아막성 진입로를 따라 올라오면 만나는 북문지, 옆으로는 작은 실개천이 졸졸 흐르고,
성안으로 들어서자 복원한 성모습이 보인다.

수구터를 뒤로 미루고 왼쪽 시계반대방향으로 성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녹음짙어져가는 나뭇잎속에 숨듯이 들어나있는 성벽 외벽

중간중간에 허물어져서 성벽의 속살도 보여준다.

내벽도 보이고, 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서 보는 성벽과의 만남이다.
생강나무 이파리들은 오월의 햇볕을 즐기고 있고, 우리는 천년도 넘은 성벽과의 만남을 즐긴다.

이끼를 머금은 성돌의 모습들

성돌로 쌓은 돌탑 - 제자리에 있어야 할 성돌이 돌탑으로 변해 어떤 바람을 안고 있을까?

동벽쪽으로 돌아서도 여전한 성벽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남벽쪽에서 쉴 겸 그늘에서 성벽을 어루만져 본다.

동편쪽으로 아영면의 넓은 분지가 보인다. 낮은 곳으로는 경남 함양에서 올라온길도 보인다.
논에는 물잡아 놓고, 어떤 곳은 모를 심은 곳도 있다.
성벽 주변의 철쭉은 이미 진지 오래고 어쩌다 남은 한 두 송이 꽃만이 제철에는 장관을 이뤘을 모습을 그리워한다.

거대한 성돌군이 남문지에 널브러져 있고, 돌탑도 보인다.

산성 답사길에 뜻밖에 만난 두 외국인.
잠시 대화를 나눠본다. 프랑스인, 10여일간 중 서울에서 3박, 백두대간을 산행중이라는데, 손에는 여행안내 책자 하나들고 낯선 이국 오지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걷고 있었다. 한국의 푸른 산들이 너무나 이국적이고 아름답단다. 바쁜 사람들 붇들고 오래 이야기 할 수 도 없고, 사진만 한 장 찍어둔다. 여행 잘하고 파리까지 돌아갔을까?

산성 안에서 만난 산성 안내판
아아 이것을 보고 그 외국인들이 아막성을 알고 있었나보다.
영어 안내판이 제대로 된 것인지

북서쪽의 급경사쪽으로 내려오다 되돌아본 곳에 성벽이 숨어있다.

층층나무 가로수 길을 지난다. 방현고개를 넘어 황산대첩지를 찾아 간다.

방현(榜峴)고개에는 소나무당산이 있다.
방현정 앞에있는 소나무 한그루 . 두 갈래로 가지친 소나무의 위용은 대단한다. 예비군 훈련중인 일행과 잠시 만난다.

황산(荒山)대첩지 가기전에 황산자락에 있는 국악연수원 자리도 둘러본다.
성지기는 이곳에 토성 흔적이 있다고 둘러보고.

광천 너머로 황산대첩지

저 앞으로 황산이 보이고, 냇물(광천)을 사이에 두고 인월에서 운봉으로 이르는 곳에 협곡처럼 병목을 이룬다.
광천 위로 새로운 다리 공사가 한참이고, 물은 운봉들을 거쳐 이곳으로 모아서 인월을 지나 함양 마천을 거쳐 낙동강까지 이른단다. 왜구가 넘나들던 오충지 길목에서 전투는 벌어졋고, 길목을 지켜야 하는 성은 있어야 하고...


<파비각 안에 대첩비석>
황산대첩지에는 본래의 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조각조각 부숴지고, 글자는 파헤쳐져 알아볼길 없다.
문화재 파괴는 역사를 묻어버리고 싶은 침략자들의 본심 : 그 실물을 본다.

황산대첩지비라고 쓴 비석. 다시 세운 것이다.




동편제의 계보에서 송흥록은 그 첫자리를 차지한다. 황산대첩지 바로 이웃에 있다.

함양 가는길에 만난 실상사 돌장승 3기중에 첫들머리 하나 오른쪽 짝은 홍수로 유실되어 홀아비가 되어있었다.




마천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오도재 중간 휴게소에서 건너편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본다.

지리산 제1관문을 지나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쉰다. 수많은 시비들. 장승들이 상업적으로 관광화된 모습들이 어설프기만 하다.
청산경불환(靑山更不還: (한번 들어가면)청산에서 다시 돌아오지않으리니.)

산신각과 오방색으로 둘러쳐진 산신목들

잠시 쉰다.

무오사화의 실마리가 되었던 (함양초교 앞) 학사루에도 잠시 들린다.
수 많은 관아 건물들은 대부분 일제에 의해 헐려지고 , 그 자리에는 대신 초등학교가 들어서고...


새벽같이 나왔던 길을 달빛 속에 대전으로 돌아온다. 밤 8시가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