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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의 공포와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 정신없이 또 한해가 흘러가고, 올해도 성탄절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성탄을 축하하는 이 절기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 활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분위기가 가라앉아저일까요? 정부에서는 예년에 없었던 캠페인을 기획하였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2월 1일(수)부터 25일(일)까지 '캐럴 활성화 캠페인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캐럴을 통해 코로나 19로 지쳐있는 국민들을 위로하고 따뜻한 연말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캠페인 취지에, 가톨릭과 개신교뿐 아니라, 방송계와 음악 관계자들이 적극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자주 찾는 커피전문점이나 음식점 등의 매장에서 캐럴을 가급적 많이 들려주고, 라디오방송사들도 채널별로 캐럴을 들려주는 기획 코너를 신설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회 일각에서 캐럴 켐페인 중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을 하였습니다. 특정 종교의 절기를 공공기관과 매체에서 공공연히 선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법원에서는 그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뜻밖의 반발에 놀란 행정당국은 이미 그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캐롤의 위로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 사회는 여유를 잃어버렸고, 삶의 현실은 더욱 각박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K-방역을 자랑하지만 그러나 그 이면에 가장 큰 타격을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일반 자영업자들입니다. 연말에 중소벤처기업부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소비를 촉진시키고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트는데 도움이 되고자 ‘크리스마스 마켓’ 행사를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이 행사가 시작된지 며칠 안되어, 정부는 또 다시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발표하였습니다.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감ㅁ염이 늘어나고, 확진자 수도 갑자기 급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시장이나 상가들은 ‘크리스마스 마켓’ 현수막만 민망하게 걸려있고 시장은 더욱 썰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저 대통령 선거 승리에 목숨을 거는 정치인들과 일부 시민들만 소란스러울 뿐, 처음 경험하는 팬더믹 상황이 벌써 2년째 이어지고,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고통 속에 숨죽여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밤에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며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려 나왔습니다. 그 옛날 처음 성탄절 때, 캄캄한 밤 빈 하늘에 울려 퍼졌던 천사들의 합창 소리를 다시 들으며 아기 예수를 뵙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베들레헴 말구유로 달려간 목자들처럼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내 모든 사람들이 다 호적 등록을 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호적'은 본래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작성하는, 공식기록부입니다. 이 황제의 칙령에 따라 모든 유대인들은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던 요셉도, 다윗 가문의 자손이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떠나갔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거리는 약 144Km로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가기에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작은 동네에는 때마침 여관이 다 차고 빈 방이 없었습니다. 방은 구할 수 없고,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요셉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주인의 호의로 여관에 딸려있는 마굿간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마리아는 아기를 낳았습니다. 첫아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첫아들'이라고 했으니, 그 후에 마리아는 다른 아들들을 또 낳았을 것입니다. 마굿간에는 아기를 뉠 만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구유는 나무를 깍아 만든 가축들의 밥 그릇입니다. 아기 예수가 마굿간에서 태어나고 구유에 뉘었다니,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에 가슴이 찡해 옵니다. 그런데 정작, 누가는 이 사실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날 어떤 기자나 문필가가 이 장면을 글로 옮겼다면, 사회적인 빈부격차 문제라든지,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개인주의 사회 풍조라든지, 안타까움이나 분노, 하다못해 짙은 연민이라도 담아서 이 장면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사실만 간결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누가는 그 날 밤 일어난 다른 일들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 날밤, 베들레헴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을 지새며 양 떼를 지키고 있었는데,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러더니 갑자기 수많은 천군이 나타나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천사들이 떠나서 하늘로 올라간 뒤에, 목자들이 서로 말하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 일어난 그 일을 봅시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는, 이 아기에 관하여 천사들이 들려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전해준 처음 성탄절 이야기입니다.
누가가 들려준 처음 성탄절 이야기 속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에게는 마굿간, 구유, 그리고 목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 처음 누우신 곳이 구유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궁전도 아니고 저택도 아니고, 안락한 침대도 아니고 요람도 아닌, 베들레헴 마굿간에 나셨고, 구유에 뉘셨습니다. 한 아기의 탄생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중 한 곳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치유하고 가르치실 때에도,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런 형벌이라고 하는 십자가, 그 가장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 구주 성탄을 찬양할 때 그 노래를 처음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가장 먼저 경배한 사람들이 목자였습니다. 목자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양을 몰고 목초지를 찾아 계속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여러 날, 혹은 여러 달을 들판에서 밤을 지새야 했습니다. 집을 떠나 오랜 기간을 들판에서 외롭게 양떼를 몰고 지내야 했습니다. 낮에는 태양이 뜨겁지만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쌀쌀하였습니다. 들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밤중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또 위험하기도 한 일이기도 했지만, 양떼를 돌보며 들판에서 살다보니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지키기도 어려웠습니다. 율법의 여러 규례들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시하였습니다. 비천한 신분이고 율법도 지키지 않는 죄인이라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던 날 가장 먼저 초대받고 그래서 아기 예수를 만나고 경배한 사람들은 바로 이 목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하고 지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탄의 의미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사들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평화로다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에게 평화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분의 인격, 그분의 사역, 그 모든 가르치심과 치유하심, 그리고 베푸신 수많은 은혜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확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낮아지심, 그분의 자기 희생과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땅에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는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흘리심으로 인하여 죄로 인해 막혀있던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죄인이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임하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평화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누리는 이 평화는 사람들 간의 화해와 평화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랑으로 이 땅에서 원수같았던 이웃과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 같았던 이웃! 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혹 있으십니까? 그 사람과 평화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며 그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교회의 사역은 언제나 이러한 성탄의 정신을 실천해야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베들레헴으로 가야 합니다. 크고 화려한 궁전도 아니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도 아니고, 베들레헴 작은 여관, 거기에 있는 마굿간입니다.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곳에 주님이 계시고 거기에 은혜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것은 편견이요 착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려고 한다면, 반드시 크고 화려한 집이나, 호화로운 장식을 갖춘 방, 안락한 침대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굿간 빈 구유에 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재물을 가졌거나 명예로운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작은 시골 베들레헴의 미굿간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강력한 힘과 권위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호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 평화를 만드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는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큰 꿈을 갖고, 큰 사명 콤플렉스에 빠지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모름지기 큰 인물이 되고 큰 일을 감당하는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높아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낮아질 줄 모르고 섬길 줄을 모릅니다. 자기 보다 더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을 보면 부러워 하거나 열등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쓰임받는 것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고, 그래서 사람들 눈에는 뜨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 아기 예수님은 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구유였지만, 그러나 이 구유는 참으로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다만 이 구유가 쓰임받기 위해 중요한 것은, 깨끗한 구유여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에 담겨졌던 가축들의 사료 찌꺼기나 모든 오물들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그 후에야 비로소 아기를 그 구유에 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유라도 좋았습니다. 그저 깨끗한 구유면 그것으로 쓰임받기에 충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눈에 주목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조금은 초라하다 할지라도, 깨끗한 영혼으로 스스로를 비우고 가꾼다면, 넉넉히 주님의 영광을 담을 수 있고, 이 땅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밤에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로 인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군천사는 노래하였습니다. 빈 구유같은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의 삶 역시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그 평화를 이 땅에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이 빈 구유가 되기를 원합니다. 온갖 탐욕과 교만과 정욕의 찌꺼기를 덜어내고, 순수한 빈 마음이 되어 새롭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번 영접하는 오늘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