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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06-1)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직역 ->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 기독교 성화론은 이러한 구절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인간의 행위와 결부시켜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하곤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주장을 ‘알미니언 주의’라고 한다. / 그렇다면 로마서의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롬 9:15-16)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해서 받을 수 있는 선물도 아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문자 그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 같은 성경 안에 이런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이 둘은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둘이 어떻게 화해가 되는지 잘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모네스, ἐλεήμονες]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함, רחם]과 [헤세드, חֶ֫סֶד]’이다. 그 단어들이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레오스, ἔλεος]로 번역되었다. 그 단어들은 원래 ‘슬픔, 애통, 자비, 은혜’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 ‘긍휼’은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고 그 상태를 함께 슬퍼해 주며 애통해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엘레오스’가 하나님의 가장 요소적인 성격(essential character, 필수적 특성)이라고 했다. (‘긍휼’이 단순히 국어사전에 있는 ‘불쌍히 여김’의 의만 갖고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이 구약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한 곳만 찾아보자.
(시 62: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서 ‘인자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헤세드, חֶ֫סֶד]이다. ‘자비, 긍휼, 은혜’ 등의 뜻을 담고 있다. / 이게 70인역에서 [엘레오스, ἔλεος, 긍휼]로 번역된다. / 인자함이 주께 속하였다. |=> 직역 ->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 -> (주님을 대표적으로 지칭하는 단어가 긍휼이라는 뜻.) / 긍휼이신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은 조금 앞뒤가 안 맞는 말 같다. /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가입하지 않을 시에는 살아날 수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긍휼은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긍휼은 인간이 생산해 내어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이 노력해서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발휘되는 것이다.) /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인간이 칭찬받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어서는 안 된다. (저 사람 참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다! 이렇게 사람이 칭찬받게 되는 것은 긍휼이 아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긍휼이 나왔을 때 하나님이 찬송되어야 한다.)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폭로되는 그런 긍휼이어야 한다. / 오늘 본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면 ->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 / 인간이 정의하고 합의한 그런 종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고 성도가 되어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을 설명해 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가 이 구절을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 행함으로 보게 되면 이 구절은 다른 이들도 행할 수 있는 선행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자기는 월세 살면서 100억 가까운 돈을 기부한 어떤 가수가 가장 긍휼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야 할 것이다. /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러한 종류의 긍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일이고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도 목숨을 걸고 행했던 일들이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 자산을 다 팔아서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긍휼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도 불쌍한 고아와 과부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런 자들을 두고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긍휼의 행위를 쓰레기라고 하셨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를 하고, 약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긍휼을 베푼다 할지라도 예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나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착해 보이는 일도 그게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다 죄이다.) /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긍휼’이라는 선한 행위를 독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호세아서이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라는 배우와 하나님의 백성 역할을 맡은 고멜이라는 창녀의 이야기이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이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에게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진다.
(호 1: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창녀 고멜과 호세아 사이에서 딸이 출생하는데 그 이름이 ‘로루하마’이다.이 단어는 ‘아니다’ 라는 뜻의 부정 불변사 ‘로’와 ‘긍휼’이라는 의미의 [라함, רחם]의 합성어로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이라는 고유명사이다. / 창녀 고멜의 자손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게 곧 그 창녀의 운명이기도 하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이다. 그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이다. 호세아서 2장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조금 더 확실하게 그려져 있다.
(호 2:2-5)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고멜의 이야기인데 ‘저희’는 이스라엘을 말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모든 은혜를 더러운 情夫의 것으로 알고 있는 패역한 창녀와 그녀의 자손,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情夫가 준 것으로 알고 있는 고멜. 그런 패역한 창녀와 그의 자손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게 바로 죽은 흙의 상태인 우리의 처음 자리의 현실이다. (그게 흙. dust, 죽은 흙이다.) 도저히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 존재일 수도 없는 상태, 당장 이혼하고 죽여 버려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음탕한 신부, 그게 우리의 처음 자리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해서 용서받을 수 없는 그 창녀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고, 거기에 부어진 것이 ‘라함, 긍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에 이러한 회복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대주제이다. 호세아서 11장에 그러한 하나님의 essential character로서의 긍휼이 잘 묘사되어 있다.
(호 11:7-8)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게 이스라엘이요 고멜이고, 이게 창녀의 모습이다. 그들이 뭘 잘해서가 아니라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부으신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걸 성경이 사랑이라고도 하고 인자, 자비, 자애, 인애 등 여러 가지 말로 번역하는데 그게 ‘라함’, ‘헤세드’이다. 그게 다 긍휼이다. 그 긍휼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멜이 뭘 잘해서 호세아(예수)의 신부가 된 것이 아니다.) 고멜은 끝까지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단물 다 빨리고 노예 시장에 팔려서 죽은 돼지고기처럼 노예 시장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여자를 보리 한 호멜 반과 은 열다섯(은 삼십) 즉, 신랑의 몸값을 내고 사오는 것이 긍휼이다. (푸줏간의 돼지고기가 무슨 긍휼을 베풀 수 있어? 그 시체에게 거저 부어지는 것이 긍휼이다. 예수님이 긍휼히 행하지 않으면 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하박국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 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 = ‘완전하게 살려내다’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 받을 일만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서 그들이 부흥케 된다.(살아난다.) (하나님의 심판 때 함께 타버릴 것들이 역사 속에서 잘려져 나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한다. ‘부흥케 해주세요’ 말하는 것은 ‘나 죽여주세요.’라는 뜻이다. -> 부흥회 그런 것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부흥회 강사로 간 교회는 다 깨졌다. 그것은 잘한 것이다. 부흥된 것이다.) /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이 기특한 일을 해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는 것이다. 미가 선지자는 긍휼을 이렇게 설명한다.
(미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인애=긍휼)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인애] = [긍휼] = [라함, 헤세드] /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죄를 발로 밟고 은혜로 부으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해서 반대급부로 부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긍휼의 조건’으로 인간 측에서 내어놓아야 하는 긍휼의 행위를 제자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성화론은 이 대목을 가지고 ‘긍휼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가르친다.) / 오늘 본문의 ‘긍휼히 여기다’라는 말은 ‘긍휼을 베풀다’라는 의미보다는 ‘긍휼이 있는 자, 긍휼을 아는 자’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구성된 어구이다. ->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여, 그대들은 긍휼을 알고 긍휼이 있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므로’ 이렇게 번역하면 된다.
긍휼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긍휼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오늘 본문의 긍휼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그대로 쓰인 곳이 있다.
(마 9:27-29) 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쌔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이 에피소드를 보면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른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소서’가 오늘 본문의 ‘긍휼’과 똑같은 단어이다. /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니 그들의 눈이 고쳐졌다. 그들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무엇을 했나? 어떤 긍휼을 베풀었나? 28절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가 나온다. ‘믿음이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하시며 예수님이 베푸신 긍휼의 근거는 소경들의 믿음인 것을 보여준다.
(마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방 여자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한다. / 22절: 불쌍히 여기소서=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가능성은 0%이다. 그런데 그녀가 긍휼을 입는다. 그녀가 뭘 했기에 긍휼히 여김을 받았는가? / 28절: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 ‘믿음’이 그 긍휼의 근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진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전제가 되었을 때 긍휼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서 이러한 믿음이 발휘된다. ‘믿음’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니까. / 결론부터 서둘러 말하자면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는 긍휼히 여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만 의지하는 믿음이다.
위의 두 경우 다 그들의 믿음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을 좀 베풀어 주세요.’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이 그걸 믿음이라고 하신다. / 생각해 보자.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마찬가지이다. 이방의 가나안 여인이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긍휼을 입을 방법은 전혀 없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부러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어먹을 만한 자격이 요만큼도 없는 개라는 걸 자기가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다. -> 하나님이 그걸 믿음이라 하시고 그에게 긍휼이 부어진다. ->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서 발휘되어야 하는 긍휼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존재일 수 없다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 그런 자들이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다. 거기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조금씩 부수어져 가게 된다. 그게 믿음의 삶이며 성도에게서 나와야 할 긍휼히 여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