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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함정에 빠진 단지흥
이노파가 대리국을 찬탈하려고 이렇듯 치밀하게 간계를 꾸며 왔다니……. 단지흥은 치받치는 분노에 사정없이 온몸을 떨어댔다.
'이 거친 산간벽지엔 미개한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줄 알았는데 이렇듯 간교한 계략이 꾸며지고 있었다니……. 내 도저히 묵과할수 없다!'
단지흥은 주먹을 부르쥐었다. 노파가 또 입을 열었다.
'내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까. 난 여기서, 저 사람과 혼사를 치르고 함께 궁궐로 갈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대리 황제 단지흥이 되고 난 어엿한 황후가 되는 거예요. 어때요? 볼 만하겠지요?"
단지흥은 치가 떨렸다. 이런 요망한 것이 어디 있으며 이런 악독한 음모가 어디 있는가? 단지홍은 하도 기가 막혀 차라리 실성한 사람마냥 흐흐흐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해 보란 말야!"
그런데 그 가짜 단지홍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퀭하니 단지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핏 보기엔 단지흥의 일거일동을 주시해 두었다가 궁궐에 가서 그 흉내를 내려는 심산 같기도 했다. 그러나 황제란 하늘이 내리는 법, 흉내를 내서 될 일인가? 어떻게 며칠은 버틴다고 해도 금세 들통이 날 터인즉 그때 가선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단지흥은 방안이 들썩거릴 정도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노파는 문득 생각이 난 듯 한들한들 단지흥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군. 그러니 진짜 황제께서 이리 시큰둥하시지. 황제께서 왜 이리 태연자약한지 이제 알았어요. 생김새만으로는 사람들 눈을 못 속인다 이 말이지요? 생김새가 아무리 똑같아도 일양지공을 쓸 줄 모르면 단씨 가문 사람이 아니요, 그렇다면 궁궐에 가도 조만간 꼭 들통이 난다, 그래서 우리 말에 코웃음만 치는 거군요."
"그러니 그런 수작일랑 싹 집어치우란 말이오. 대리 단씨 자손들은 모두 궁 안에서 일양지공을 익힌단 말이오. 일양지공이 뭔지도 모르는 이런 허깨비 같은 인간은 가 봤자 황제 자리는커녕 그 자리가 무덤이 될 거라는 걸 명심하시오!"
가짜 단지흥은 그 말에 대번에 남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단지흥은 기세등등하게 노파에게 빈정거렸다.
"거기다 뭐 황후가 된다구? 그런 까마귀 핑 잡아먹을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어느 정신 빠진 황제가 낯가죽이 쪼글쪼글한 노파를 황후로 삼겠소?"
그러나 노파는 그 말에 성을 내기는커녕 도리어 호호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나 같은 건 싫다? 그렇담 이젠 나도 마음을 고쳐 먹겠어요, 눈앞에 진짜 황제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짜를 만들어 보낼 게 뭐겠어요? 이봐라, 진짜 황제를 가져야겠으니 넌 썩 물러가거라."
노파는 가짜 단지흥에게 외쳤다.
가짜 단지흥은 희색이 만면하여 건들건들 걸어 나갔다. 노파는 말을 이었다.
"단황 나으리는 이미 독약을 먹었으니 황중에 가도 내 말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그러니 내가 황후가 되는 데 아무 지장도 없을 것인즉, 황제 생각은 어때요?"
노파는 단지흥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아찔한 향기가 풍겨 왔다. 사내들을 홀려 놓고도 남을 기막힌 향기였다.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향기는……."
노파는 후후후 웃음을 날리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
"황제도 궁녀들에게서 늘 이런 냄새를 맡았겠지요?"
단지홍은 정신을 차리려고 심하게 도리질을 했다.
"황제란 모름지기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는 줄로 아는데, 기실 황제의 말못할 고충은 아무도 모르오."
노파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휘파람을 한 번 길게 불었다. 그 소리에 뒤미처 처녀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중에는 처음에 보았던 국부만 살짝 가린 나체의 여자들과 뱀 굴로 그들을 끌어들인 조그마한 계집애도 있었다. 손톱이 너무 길어 매 발톱같이 끝구부러진 여자도 눈에 띄었다.
노파는 자못 위엄 있게 말했다.
"난 방금 새로운 생각을 하나 해 냈다. 난 지금 황제와 혼례를 치르련다. 그런 연후에 우리 모두 대리국으로 가서 부귀영화를 누려 보자. 한평생 이 침침한 산굴에 있는 것보다야 몇 십 배는 좋을 것이야."
그러자 여자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렸다.
"그런데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나는 이 황제에게 시집갈 생각이지만, 황제께선 날 싫다고 저 야단이구나. 하나 우격다짐을 해서 라도 일을 성사시켜야겠으니 너희들이 좀 도와다오."
노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톱이 매 발톱같이 구부러진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단지흥에게 바투 다가왔다.
"폐하, 우리 할머니를 황후로 맞아들이면 복이 저절로 굴러 드는 건데 뭐가 싫다는 거예요?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가는 재미없을걸요."
그리고는 매 발톱 같은 손톱 끝을 단지흥의 살에다 꾹 찔러 넣었다. 그러자 대번에 피가 쭉 흘러 나오고 그 아픔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단지홍은 튀어 나가려는 비명을 급히 삼키고는 낯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할머님, 이 사람이 정 싫다고 하면 아예 죽여 버려요. 그리고 할머님이 직접 대리국 황제 자리를 빼앗아서 차지하면 그만 아녜요?"
"저 사내만큼 잘난 사내도 찾아보기 어려워. 암, 그렇고말고. 그래 내 죽이기 아까워 그러는 것이니 황제도 너무 고집 피우지 마시오. 마냥 그러다간 우리 애들이 사정 안 둘걸요."
"황제께서 할머니한테 장가들겠다고 응낙만 하신다면야 우리가 얼마나 살뜰하게 보살펴 올리겠어요?"
이 여인들은 짐짓 들으라는 듯이 자기들끼리 쑥덕공론들을 해대더니 이내 단지흥에게 와락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꾹꾹 혈도를 눌러 놓았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금방 먹은 독약 기운이 발작하는지 온몸이 쑤시고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단지흥은 어쩔 수 없이 노파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내 귀비가 되는 게 소원이라면 귀비로 봉해 주겠소! 그러나 이런 몸으로야 어떻게 혼사를 치른단 말이오? 이러다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겠는걸."
그러자 여자들은 단지흥을 똑바로 쳐다보며 호들갑스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 할머니만 좋아한다면 그깟 고통쯤이야 삽시에 가셔지고 만사형통이라니까……. 그러니 우리 할머님이 시키는대로만 하세요."
그리고는 사지를 잡고 단지흥을 번쩍 들어올려 굴 안에 있는 작은 온천으로 들고 갔다.
그들은 단지흥의 옷을 훌렁훌렁 벗기고는 물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는데도 단지홍은 혈도를 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그녀들도 옷들을 홀랑홀랑 벗어 던지고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텀벙텀벙 물에 뛰어들어 단지흥의 몸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수치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껏 살아오면서 이런 치욕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엽사(艶事)는 처음이다. 여인들 여럿과 함께 홀랑 벗고 물에 들어서 목욕을 하다니 이 얼마나 남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폐인(廢人) 신세가 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여자들이 맘대로
문지르도록 내버려두고 있다니 낭패로다, 낭패야!'
수치심과 자괴감이 뒤범벅이 되어 단지홍은 목소리조차 떨려 나왔다.
"당신들도 너무 가혹하지 않소. 날더러 저런 노파를 맞이하라고 이 야단이니, 그래 내가 좋을 리 있겠소?"
그래도 여자들은 계속 같은 말만 했다.
"정말 모르는 말씀이네요. 우리 할머님만 얻으면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 온다는데도 자꾸 왜 이러세요. 송나라 천자(天子)도 이런 황후는 얻으려 해도 못 얻는다구요."
단지홍은 기가 막혀 아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정신나간 여자들에게 하소연하는 내가 바보지. 이 여자들과 그 악마 같은 노파가 다 한통속인데! 자기네 노파를 위해 나를 강박하며 히히덕거리고 있는 판에 더 말해 봐야 입만 닳는다, 에 잇.'
여자들은 팔을 문지른다 다리를 문지른다 한바탕 난리를 치더니 이윽고 단지흥을 온천에서 나오게 해 이번에는 목욕통 안에 넣고 또 한 차례 몸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앉혀 놓고 머리를 빗어 주었다. 그러자 단지홍은 대리국 황제라기보다는 꼭 남방 산골의 영준한 청년같이 보였다.
여자들은 단지흥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발그래져 수군거렸다.
"우리 할머님은 사람 고르는 재간이 남다르거든……."
"정말 이 황제는 옥으로 만든 사람같이 멀끔한걸. 그러니 할머님이 한사코 이 황제와 혼사를 치르려 하지……."
그들은 단지흥을 앉혀 놓고는 한동안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중독되어 도마 위에 오른 고기 꼴이 되었다 하나 이렇게 능욕을 당하고도 가만있다면 그건 사내도 아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러나 사대 시위마저 죽은 지금, 내 가 죽어 버리면 누가 천룡사 중들을 구한단 말인가.'
단지홍은 생각할수록 비애만 가슴 가득 차 올랐다.
여자들은 한참이 지나자 단지흥을 옹위하여 굴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밝은 달이 걸려 있었다. 이처럼 밝은 달은 처음 보는 성싶었다.
동굴 어귀에선 독수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졸고 있고, 불면의 야신(夜神) 같은 코끼리 몇 마리가 달빛 아래 거연히 서 있었다.
밤은 세인들이 모르는 무수한 비밀을 품고 교교히 흘러가고 있었다.
여인들은 단지흥을 한켠에 앉혀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그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아무리 들어도 알 수가 없었다. 뿐더러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둘 눈물을 짓자 더군다나 의아하기만 했다.
"무슨 노래지?"
단지홍은 개중 제일 다소곳해 보이는 여자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손등으로 턱을 괴고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단지흥의 말소리에 언뜻 고개를 들고 나직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옛날이야기를 엮은 노래예요. 옛날 한 총각이 한 처녀를 사랑했지요. 그런데 그 처녀가 그만 뱀에게 물려 갔어요. 총각은 매일매일 찾아가 뱀과 싸웠답니다. 그래서 끝내 뱀을 쳐죽였
지만 그 자신은 기진맥진하여 거의 죽게 됐지요. 그래도 총각은 안간힘을 쓰며 굴 안으로 들어가 처녀를 찾았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굴 안엔 처녀는 없고 백골만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어요. 어느 백골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총각은 백골 하나하나를 보며 일일이 물었다지 않아요? 네가 내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이냐? 네가 내 사랑하는 여인의 백골이냐?…… 그랬더니 어느 한 백골이 눈물을 뚝뚝 떨구더랍니다. 그제야 총각은 그
백골이 애인의 백골인 줄 알고 그걸 가슴에 왁 껴안더니 그예 숨을 거두고 말았대요."
단지홍은 그제야 이 여자들이 왜 비애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아름다운사연이 담긴 노래였다.
그는 잠자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일순, 이 여자들이 왜 등불을 켜지 않는지 단지홍은 그것이 또 궁금해졌다. 그는 좀전의 그 여자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아이 참, 그거야 우리가 켜기 싫으니까 안 켜는 거지요, 뭐. 하늘의 달만이 우리들의 혼사처럼 깨끗하고 신성한데 왜 등불을 켜요? 등불은 아무리 밝아도 깨끗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시집가 는 처녀들은 깨끗한 달빛이 흐르는 야밤에 결혼을 하기를 바란답니다."
단지흥은 그 말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낯가죽이 쪼글쪼글 한 노파가 그 주제에 처녀가 시집가는 흉내는 다 내 보겠다니 가소롭기 그지없는 노룻이었다.
여자들은 이번엔 코끼리를 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코끼리는 매우 유순한지, 처녀들의 춤에 맞춰 네 다리를 움직가렸다. 그걸 보고는 나무 위에 앉아 졸던 독수리들도 깨어나 날아 내려왔다. 그것들은 여자들 어깨에 내려앉아서 날갯죽지를 으쓱으쓱하더니 끼윽끼윽 소리를 내질렀다. 여자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코끼리를 몰고 야음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한 순간 어디에서인지 또 다른 여인들이 한 무리 단지흥에게로 다가왔다. 그 여자들은 그를 에워싸더니 언뜻 자장가 같은, 혹은 축복의 노래 같은 잔잔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나
씩 하나씩 다가와 그의 귀에다 입술을 대고 제각각 뭐라고 소곤거렸다.
한 여자는 단지흥 곁으로 바싹 다가오더니 그윽한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기만 하다가 방긋 웃으며 속살거렸다.
"오늘 밤 신혼의 쾌락을 축하드려요."
그녀의 눈길은 가을의 호수처럼 그윽했다. 단지흥은 마치 그녀의 눈길에 빨려 들 듯이 가슴이 몹시 설ㄹ다.
"노파의 용모가 그대 절반만 돼도 내 기분이 이렇지는 않을 텐데……."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가 새어 나갔다. 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말해 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동정 어린 눈길로 단지흥을 그윽이 바라보다가 이내 멀어져 갔다.
이윽고 다른 여자들도 차례차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 여자 둘만 남아서 엄청나게 큰 버섯 모양 장막 안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장막 안은 적이 교교했다. 밖에서 조그만 틈새를 뚫고 어슴푸레하니 달빛이 흘러 들고 있었다. 단지흥은 차라리 이 달빛마저 없으면 싶었다. 온통 어두워야 그 쪼글쪼글한 노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 얼굴을 맞대고 혼사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노파와 혼사를…… 실로 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일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단지흥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참! 혈도를 눌렸으니 죽으려도 죽을 수가 없게 됐구나, 이 노파는 충피보다 더 지독한 괴물이다. 충피는 단지 일양지 비본만 요구했을 뿐인데……. 오늘에 이르러 이 단지흥이 이런 곤경을 만나다니…….'
단지흥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넋 놓고 앉아 있기만 했다. 잠시 후 여자 둘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장막 한복판에다 털 담요를 깔고 거기에 그를 눕혔다. 그리고는 그의 아혈(兒穴)을 꾹 눌렀다.
"용연향(龍涎香)을 피울까?"
"너는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니? 할머님이 분부했잖아, 청향(淸香)을 피우라고. 이분은 용연향 향내를 좋아하지 않는대."
"우리 할머님같이 살뜰한 분을 어디서 얻어? 황제는 복이 터졌어."
단지홍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레 노기가 치받쳐 뭐라고 소리를치려 했으나 이젠 아혈마저 눌린지라 그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찍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장막의 휘장들을 모두 내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희미하게 흘러 들던 달빛도 이젠 가려져 온 장막 안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단지흥은 자못 긴장해서 새까만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누워 있었다.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쳐댔다. 그도 귀비들을 여럿 맞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귀비들은 모두 늘 시중들던 궁녀들 중에서 고른 여인들이라 단지흥과는 그전부터 익숙한 사이였다. 게다가 그는 신분이 신분인지라 황비를 맞아들여 첫날밤을 보냈을 때를 빼고는 긴장감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여인들과 즐기는 건 둘 사이의 사랑이 충만해서라기보다는 황제로서의 일방적인 요
구요, 여인들 측에선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한 일종의 안간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도저도 아니요, 남에게 혈도가 눌려 꼼짝을 못하면서 구역질 나는 노파에게 일방적으로 당해야 할 판이니 한시도 경계심을 늦출 수도 없고 그러자니 자연 전에 없이 긴장이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수치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노파는 대체 젊은 남자를 어떻게 다를 것인가…….
한 순간,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뒤미처 가벼운 숨소리도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침내 무당 할미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 노파야, 네 년이 나와 동방합환(洞房合歡)을 하자고 할진대 나를 그냥 이대로 놔두지는 못하겠지. 설마 벙어리로 놔두기야 하려구. 아혈만 풀리면 일단 단단히 따져 보자. 이런 강박이 어디 있는지, 여자가 남자를 강박하여 억지로 합판을 하는 법이 세상 천지 어디에 또 있는지.'
단지홍은 단단히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마침내 노파가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노파는 조심조심 손으로 더듬으며 다가오더니 손에 털 담요가 만져지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로군요."
노파는 단지흥을 지척에 두고 마주앉았다. 단지홍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노파는 한껏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난 이번이 처음이에요. 비록 이 숙녀동의 동주여서 할머니란 말은 듣지만 사내와 자리를 같이 하기는 이번이 정말 처음이라구요. 날 부드럽게 다뤄 줘요. 부탁이에요. 당신은 황제니까 여인들을 많이 다뤄 봤을 거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아실 테니 제발 살갑게 다뤄 주세요. 난 무서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악귀같이 굴더니 이제 와서는 이처럼 부드럽게 사정하듯 하자 단지흥은 오히려 덜컥 의심이 났다. 이 노파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런 요사를 떠는 것일까? 그 나이 먹도록 세상 무슨 일을 못 겪어 보았기에 남자와 같이 있기가 무섭다느니 어쩌느니 괴망을 떨까?
'옳거니, 네 년이 나하고 잠자릴 하려 하니 요런 요사를 떠는구나. 내 마음이 동해야 합환이 될 테니 그러는 게지? 내가 그냥 버티면 제가 무슨 수로 나와 살을 섞어. 두고 보자!'
어쨌든 깜깜해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 쪼글쪼글한 얼굴을 환히 들여다보고는 단둘이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 것만도 소름이 돋칠 지경 이리라.
단지흥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노파는 저 혼자 겨워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내가 만인임을 모르지 않지만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남자들은 착한 여인을 좋아하죠? 그럼 저를 가지세요. 저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충피를 죽이겠다면 제가 나서서 죽며 버리겠어요. 충피를 죽이는 것쯤은 여반장이니까요……."
'여반장이라구? 나를 죽이는 것도 여반장이겠지.'
노파는 한숨을 짓더니 또 말을 이었다.
"난 어려서부터 이 굴에서 자랐어요. 난 천하에서 이 굴이 제일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렸을 때, 한번은 할머님과 함께 성안에 들어갔다가 어느 날 황궁을 보고서야 세상에 이곳보다 더한 별
천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황궁은 얼마나 크고 아름다워요? 나도 저런 황궁에서 한번 살아 봤으면 하고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그 꿈이 오늘 이렇게 이루어지다니……. 나도 이젠 당신을 따라 황궁에 가 살게 되었으니……."
단지흥은 노파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몸까지 떨고 있는 듯하였다. 그 순간, 단지홍은 문득 깨달았다. 노파 말마따나 이 노파는 필시 처녀임에 틀림없다. 하기는 숙녀동 동주이니 의당 처녀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한 번도 남자와 살을 섞어 봤을 리 없고 그래서 긴장해서 저토록 떠는 모양이었다…….
노파는 노파 같지 않게 보드라운 손으로 단지흥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아혈을 눌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해 줄 텐데……."
노파는 단지흥에게서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 아혈을 풀어주려 했으나, 간신히 마음을 돌렸다. 그랬다가 단지흥이 성이 가라앉지 않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날엔 신혼 첫날밤부터 대판으로
싸웠다는 소릴 들을 게 아니겠는가? 그 수치를 어떻게 당해 낸단 말인가. 노파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단지흥은 아직도 노기가 가시지 않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여자고 네가 남자라면 능욕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지만 명색이 사내 몸으로 어찌 네 년을 무서워하겠느냐. 그냥 이렇게 꿈적않고 있기만 하면 네 년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한번 당해 봐라! 이런 일은 여자 혼자만으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는 것이야.'
단지흥은 배짱이 든든해졌다.
"여보, 낭군님, 날 사랑해 줘요. 파초 잎처럼 넓은 품으로 날 꼭안아 줘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번개가 차나 우레가 우나 변함없이 사랑해 주어요, 네?"
노파는 정답게 속삭이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잠시 있더니 단지흥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젖무덤 위에 올려 놓았다.
"여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만져 보아요."
단지흥은 노파가 하는 대로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낮에 목욕하고 나올 때 보았던 그 탱탱한 젖무덤을 그는 노파가 이끄는 대로 더듬게 되었다. 꼭 처녀의 것마냥 작고 딴딴한 젖꼭지에 손이 닿자 단지흥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정말 몸만은 견줄 데 없이 매혹적이었다. 낮에 얼굴을 보지 않고, 오늘 밤 이 깜깜한 방에서 몸만 만졌다면 이 여인이 노파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파의 젖무덤을 더듬으면서 그는 퍼뜩퍼뜩 노파의 얼
굴이 떠올라 그때마다 울컥울컥 치미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중독이 된데다가 혈도까지 눌려 일양지공도 못 쓰고 말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안간힘을 쓰면 그는 여인을 애무하는 정도는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늙은 노파와는 정녕 그러기가 싫었다.
노파는 다시금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꼭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나 대신 다른 동주를 뽑고 나면 난 당신을 따라 당장 여기를 떠날 수 있어요. 아까 방안에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모두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건 당신 들으라고 일부러 허세를 부린 거고 나 혼자서만 당신을 따라…… 당신, 날 데리고 갈 거지요? 그렇지요, 네?"
그러더니 노파는 부끄러움을 타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아아, 우리 이 산 굴의 일을 당신도 알겠지만…… 난 정말 남자들과 이런 일은…… 하지만 이 일을 모르지는……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어때요?"
그러더니 노파는 단지흥의 목을 텁석 끌어안았다.
"내가 당신을 안아 줄게요."
노파는 보드라운 살결을 찰싹 갖다붙이고 목을 꼭 끌어안은 채 한동안 무엇에 취한 듯 가만히 있었다.
"낭군님, 나하고…… 나하고 이러니 좋지요? 나하고 더……."
단지흥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노파의 얼굴을 더듬어 볼 요량으로 주춤 손을 들어올렸다. 애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쭈글쭈글 늙은 노파의 낯에 손이 닿으면 자기도 모르게 기겁을 해서는 저절로 아혈이 풀려 악 비명을 내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소리에 부끄러워서라도 이렇게 매달리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려 버렸다. 아무리 악귀라도 노파가 지금 한창 흥분되어 열이 올라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였다. 이 순간만큼은 그도 마음이 약해 졌다.
"낭군님!"
노파는 지겹도록 낭군님을 부르며 속삭여댔다.
"난 낭군님이 있기에 날이 새면 더는 이 숙녀동의 동주로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그냥 동주로 있는 게 좋아요, 아니면 당신 각시가 되는 게 좋아요?"
'흥, 별 꼴같잖은 걸 다 묻는구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라니. 너 같은 건 이 숙녀동의 무당 할미로 있는 것도 과분하다. 과분해!'
단지흥은 생각할수록 노파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 생각밖에 안 했다.
"날 꼭 데리고 가야 해요. 누가 목욕하는 걸 보라고 했어요? 내 몸을 본 이상, 당신이 나를 거두어야 해요. 여인이 목욕하는 걸 엿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내도 있지만 난 그런 건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다 보아 놓고선……."
이건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별별 구실을 다 끌어다 대며 자기를 옭아매려고 하니 단지흥은 속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노파는 시간이 갈수록 더 더욱 흥분되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떨리는가 하면 몸이 나른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사내와 단둘이 있는 것이 이다지도 좋은데 왜 이때껏 모르고 있었을까? 그녀는 감미로운 술에 흠뻑 취한 듯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문득 자기 혼자만 온 정을 쏟아 붓고 있지 상대는 아무 반응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순 마음이 상해 그녀는 단지흥의 어깨를 꽉 틀어 잡았으나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날이 새면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우리 아이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난 죽어요. 알아요?"
단지흥은 물론 알 도리가 없었다.
'이 숙녀동엔 괴이한 일도 많구나. 합환을 증명하라니,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날이 밝으면 여자들이 모여들어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소린가? 그런데 만약 오늘 밤 동침이 못 된 줄 알면 노파 를 처벌한다고? 그거야 정말 잘된 일이군. 오늘 밤만 잘 버터 내면 이 요망한 것이 여자들 손에 죽든지 자기 손으로 자결을 한다? 그럼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원수를 갚는 게 아닌가?'
단지흥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기뻐서 킁킁 코방귀를 뀌었다.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양 노파는 성깔을 부렸다.
"낭군님, 낭군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난 그걸 고려할 형편이 못돼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어요. 난 오늘 밤 당신과 꼭 일을 치러야겠어요."
그러더니 노파는 한 팔로 단지흥을 안아 반쯤 일으키고는 약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 약을 잡수세요. 잡숴야 해요. 잡숫고 나선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노파는 사정없이 약병을 들이밀면서도 웬일인지 한숨을 폭 내쉬 었다. 그 소린 적이 서글프게 들렸다.
단지흥은 먹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이 요괴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것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그를 꽉 그러안고 억지로 약을 먹였다. 단지흥은 토해 내려고 꺽꺽거리다가 숨을 들이켜는 바람에 그만 약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내 말을 들어요, 내 말을 들어. 낭군님, 낭군님이 일국의 황제인 줄 내 모르는 바 아닌데 내가 낭군님을 능욕하려고 이럴까.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요? 궁으로 다시 돌아갈 테야요, 안 갈 테야요? 돌아가서 천룡사 중도 구해 내야죠. 그 방법은 내가 알아요. 충피 그 놈도 내 앞에선 설설 긴다니까요! 내일이라도 가겠으면 당장 갑시다, 네?"
노파는 갖은 말로 단지흥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지흥도 귀가 솔깃해졌다. 정말 노파의 말대로 안전하게 대리국으로 돌아가 천룡사 중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기 싫어도 눈 딱 감고 노파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 다시금 이곳 숙녀동에서 비명횡사한 네 시위가 떠올랐다. 죽은 네 시위는 대리국의 고굉지신(設肱之隆)들이다. 그들이 죽은 것은 대리국의 네 기둥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거늘 이 원수를 아니 갚고는 설사 천룡사 중
들을 살려낸다 한들 그 한은 풀 길이 없는 것이다.
노파는 계속 속살거렸다.
"날 데리고 가요, 네? 난 당신을 도와 꼭 대리국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니깐요."
그 말에 단지흥은 번쩍 정신이 났다.
'그러면 그렇지, 네 년이 대리를 집어삼킬 야심으로 이 수작이로구나, 이 수작이! 그래 황후가 되어 대리국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겠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때였다. 갑자기 뱃속이 뜨끔뜨끔하더니 뜨거운 열기가 확확 솟구치며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삽시에 온몸이 화끈화끈 달아 올랐다. 신음 소리조차 비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 마구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노파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낭군님, 낭군님! 남녀의 연분과 인간의 명은 하늘이 정해 준다는데, 그러게 왜 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요? 공연히 이렇게 사서 고생할 게 뭐예요?"
단지흥은 혈도만 눌리지 않았더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일양지공으로 이 정욕의 불길을 능히 내리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기는커녕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조수같이 정욕이 밀려들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 순간, 단지흥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더욱이 어찌 된 영문인지 두 손이 거뜬해지며 자유자재로 움직여지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노파의 몸을 정신없이 매만졌다. 옥같이 하얗고 미끈한 몸뚱어리,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 소리…… 단지흥은 점점 노파에게 빨려 들어갔다.
'이 여인은 처녀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다. 이런 숙녀가 나를 원하는데 내가 왜 마다하겠는가…….'
온몸에 불을 지펴 놓은 듯 정욕에 불타 올라 단지흥은 연신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으스러지듯 노파를 껴안았다.
"그래요, 낭군님. 내 몸은 낭군님 것이에요. 가지세요. 어서 가지세요!"
노파도 눈물이 글썽해져 더욱 힘껏 단지흥을 끌어안았다. 일순 여인의 새된 신음 소리가 물결쳤다. 이윽고 단지흥과 노파는 한 몸이 되었다. 노파는 아리따운 목소리로 애간장을 녹이는 신음 소리를 연신 토해냈다.
날이 밝았다.
단지흥은 환한 빛을 느끼며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장막 안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몹시도 머리가 무겁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러다 차츰차츰 어젯밤 일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파는 갖은 소리로 애원을 했고 자기는 목석같이 버티다가, 그러다가, 그러다가 야, 약을 먹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절통하고 분해 죽을 일이었다. 또다시 그런 모욕을 당한다면
정말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리라.
드디어 해가 반짝 솟아오르고 햇빛이 장막 안으로 비껴 들었다.
햇빛은 여전했건만 단지흥의 심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불경에 이르기를, 크게 슬픈 자 그 슬픔을 모르노라 하였더니 내가 정녕 그 지경이 되었구나. 어젯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 또 그처럼 강박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내 오늘은 결단코 가만있지 않으리라.'
단지흥은 기실 아직도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불어 결코 그 일을 치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파가 자기를 껴안고 미친 듯이 달라붙은 것만으로도 미치도록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는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자기도 모르게 팔을 힘껏 내둘렀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팔이 시원스레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언뜻 환호성을 질렀다.
"야, 이거 봐!"
다리도 뜻대로 움직이고 몸에도 기운이 솟구쳤다. 말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싹 독 기운이 가시고 혈도도 풀린 것이었다. 단지흥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이빨을 사리물며 이제야 진정 복수를 하리라고 마음을 다졌다. 일국의 황제로서 참을 수 없는 능욕을 당하고서도 순순히 물러선다면 이는 자기만의 수치가 아니라 나아가 대리 전체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때 장막 밖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왔다. 신랑, 신부의 첫 아침을 축복하는 나팔 소리였다.
단지흥은 선뜻 장막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어느새 숙녀동 여인들이 아침 햇발 아래 다 나와 서 있었다. 그녀들은 가까운 일가 친척을 대하듯 반가운 눈길로 단지흥을 맞이했다.
그녀들의 얼굴을 대하자 단지흥은 욕지기가 날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싫었다. 불을 싸질러 하나도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 싶을 만큼 그는 자신을 욕보이고 사대 시위를 처치한 이곳, 이 산 굴, 이 여자들이 싫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다 거두시오. 당신들은 나와 내 시위들에게 그토록 못할 짓을 저지르고도 웃음이 나온단 말이오? 가증스럽게……."
그 말에 모여 선 여인들은 호호 웃더니 양 옆으로 짝 갈라섰다.
그 순간, 단지흥은 놀라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농부, 어부, 나무꾼, 선비…… 그렇게도 익숙한 네 얼굴이 빙긋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단지흥은 눈을 비비고 나서 또 한 번 바라보았다. 정녕 꿈은 아니었다. 그는 그래도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일순 확 달려나가 그들을 와락 부등켜안았다.
손톱이 긴 여인이 한켠에 서서 유심히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러자 단지흥은 네 시위를 붙잡았던 손을 놓고는 홱 돌아서며 호통을 쳤다. 사대 시위는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 그따위 소린 입에 담지도 마라!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느냐! 난 그 노파가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그 소리에 숙녀동 여인들은 놀라서 웃음을 싹 거두었다. 손톱이 긴 여자가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 혼례가 아이들 장난인 줄 아세요? 어젯밤 우리 동주님과 그래 도…… 동침을 하면서 그…… 그 일을……."
그녀는 그 다음 말은 더 잇지를 못했다. 처녀 몸으로 그 말을 더 하기가 웬지 부끄러워서였다.
"안 했소. 그런 일은 난 안 했소!"
단지흥은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했어요? 그렇담 어쩔 수 없군! 얘들아, 어서 가서 신부를 불러오너라!"
계집애 몇이 득달같이 고파를 끌고 왔다. 노파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한발 한발 다가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몹시 부끄럽다는 기색이었다. 단지흥은 보면 볼수록 실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얘, 영고(瑛姑)야, 이젠 네 몸이 분명 처녀 몸이 아니랬지?"
손톱이 긴 여자는 위엄 서린 목소리로 노파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끄러워 머리를 더욱 숙이며 모기 소리같이 다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내 말하잖았니, 난 이젠 숙녀동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자 여자들이 와 환성을 올렸다.
"얘, 영고야! 너도 알겠지, 숙녀동의 율(律)이 어떻다는 걸? 이제 검사해 봐서 네 말이 정말이라면 너희 부부는 가서 다시는 숙녀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하나, 만약 네 말이 거짓이면 율대로 넌 여기서 자결을 해야 해……."
손톱이 긴 여인이 다그치자 노파는 머리를 숙인 채 가만히 끄덕였다.
"그럼 좋다. 얘들아, 너희 몇 사람이 영고를 데리고 들어가 검사를 해 봐라.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일이 돼가는 형세를 보고 단지홍은 적이 불안해졌다. 어째서인지 노파에게 얼핏 연민의 정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처럼 떠받들더니 오늘은 저처럼 종 다루듯하다니. 게다가 진짜 처녀인가 가짜 처녀인가를 검사한다니, 뭐 이런 해괴망측한 율이 다 있어. 어쩌자고 숙녀 동에선 이따위 율을
다 만들어 냈을까. 그런데 정말 어젯밤 내가 저 노파와 일을 치렀는지 정녕 알수가 없군.'
단지흥은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취한이 어제 일을 회상해 보듯 불안한 심정으로 간밤의 일을 되살려 보았으나 아리송하기만 할 뿐,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일을 치른 것 같기도 하고 치르려다가 만 것 같기도 하고…….
여인들 몇이 노파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야 조그마한 계집애가 쪼르르 달려왔다. 여인들은 자못 잠잠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계집애는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사람들을
쭉 둘러보더니 해죽 웃었다. 그러자 여자들은 와 하고 환성을 올렸다.
이윽고 노파가 천천히 다가왔다.
손톱이 긴 여자는 노파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이제부터 영고는 이 숙녀동의 할머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겠지?"
노파는 이제까지의 위엄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안다니까. 이건 내 자의야."
"그렇다면 좋아. 어서 황제를 따라 여기를 떠나라.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숙녀 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처신하도록."
노파는 손톱 긴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지흥을 돌아보았다.
"낭군님, 이젠 떠나야지요?"
단지흥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지라 단호히 거절할 생각으로 노파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갈구하는 듯한 노파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찡해 그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어쩌겠소."
사대 시위는 그 동안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해 일순 어리등절해졌다. 그러나 곧 단지흥의 대답을 제 나름대로 해석했다.
'저건 순 완병지책(緩兵之策)이야. 숙녀 동에서는 저 노파를 해치우기가 거추장스러우니까 데리고 나가서 해 치우겠다는 거지. 아무렴 황제께서 저 노파를 황비로 데리고 가겠나.'
노파는 한걸음 물러서서 숙녀동을 향하여 무릎을 꿇더니 주문을 외우듯 뭐라 중얼거렸다. 단지흥과 사대 시위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엄숙하고 경건한 기색으로 보아 숙녀동과 작별을 고하는가 보다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노파는 몸을 일으켜 손톱 긴 여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작별 인사를 해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손톱 긴 여자가 노학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파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가 숙녀동의 할머님이다."
그리고는 노파는 자그마한 가위를 꺼내 그 여자의 긴 손톱을 싹둑싹둑 깎아 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인 듯했다. 손톱 긴 여자는 손톱을 다 깎자 이 숙녀동의 새로운 동주가 되었다.
노파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모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는 돌아섰다. 코끼리와 독수리들은 그 무슨 기미를 알아차린 듯 못내 섭섭해하며 노파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는 코끼리들을 쓰다듬어 주고 휘파람을 불어 독수리에게도 작별을 고하고는 앞장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지흥 일행도 이 지옥 같은 숙녀등을 뒤로 한 채 길을 떠났다.
차츰차츰 산 굴이 멀어지고 노파는 멀찌감치 앞서서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폐하! 정말 저 노파를 궁으로 데리고 갈 작정입니까?"
선비는 대리국 승상인지라 누구보다도 근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저 노파를 황비로 데리고 간다면 만조백관들과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골동품처럼 함 안에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새 황비가 왔다는 소문이 나면 얼굴을 내보이게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무슨 말들을 하겠는가.
"죽여 버려요, 자결을 시키든지! 폐하께서 명하기 불편하시면, 제가 말하리다."
성미 급한 농부는 한마디 불쑥 내뱉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 달려 내려가 어느새 노파를 따라잡았다. 그는 얼른 노파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노파는 의아한 눈길로 농부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잠깐! 내 할말이 있다!"
단지흥이 급히 외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노파에게 다가 왔다. 그러나 정작 노파 앞에 서자 단지흥은 주저주저하며 말을 못했다. 심경이 복잡했다. 죽이자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을 살려 준 은인인데 이렇게 죽인다면 그것은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노파를 데려가 황비로 봉할 수 도 없는 터, 그는 선뜻 단안을 내릴 수 없었다.
노파는 예의 그 까만 눈으로 단지흥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 아무말이 없었다.
다섯 사람은 하나같이 선뜻 말을 꺼내 놓지 못하고 멀뚱멀뚱 노파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선비가 불쑥 나섰다.
"노파께선 아무튼 지난밤 대리국의 황비가 되었다고 하니 대리국 승상의 말을 들으시오. 황제를 대신하여 사사(雌凉)를 내리거늘, 순종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오. 그 시신은 황비의 예로 후장 (厚葬)을 해 드리리다."
그 말에 노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단지흥에게서 눈길을 떼고 다른 세 시위를 돌아보며 힘없이 물었다.
"모두들 동감이겠군요?"
세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다.
노파는 매서운 눈길로 단지흥 일행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냉소를 치며 물었다.
"나 덕분에 환생했다는 걸 잊으셨군요?"
사대 시위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흥 역시 한숨을 지을 뿐 말을 못했다. 노파는 새까만 눈동자에 원망을 담고 단지흥을 노려보더니 꺼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 낭군님도 내가 자결할 것을 소망하고 있단 말이지요? 참말 그래요?"
단지홍은 언뜻 애원과 원망이 뒤섞인 노파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보지. 어젯밤 어쨌든 내가 바보 짓을 했어. 아무리 약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낭군님, 나를 데리고 가야 천룡사 중들을 구한다는데 도 내가 자결하기를 바라시나요?"
"천룡사 일은 내 나름으로 해결책이 있으니 염려 마시오."
단지흥은 대뜸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녕 날 버리겠단 말씀이세요?"
노파는 놀란 눈길로 단지흥을 쳐다보다가 그만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버리는 게 아니오. 난 애초부터 원치 않은 일이었소. 어젯밤의 그 일은 당신의 강박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내 자의는 추호도 없었소."
"낭군님, 그렇게도 내가 보기 싫단 말입니까? 낭군님 마음에 드는 데가 조금도 없다, 이 말씀이세요? 왜 그토록 날 미워하세요?"
노파는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이 그 동안 무슨 일을 했든 간에 우리는 다. 이해해 줄 수가 있소.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 같은 노파를 어떻게 우리 젊은 황제 폐하의 황후로 맞아들인 단 말이오? 이건 천만 불가한 일이라는 걸 왜 모르시오?"
어부가 답답하다는 투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그런 까닭이군요. 그런 이유라면…… 낭군님, 말해 보세요. 정말 그래서 내가 싫단 말이에요?"
노파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여 애처롭게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여하튼 이만 해 둡시다. 내 영고라는 이름은 잊지 않으리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 갈 데로 가시오."
그러자 노파는 그 말엔 대답도 않고 이번엔 선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대리국의 승상이랬죠? 장부일언 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이라 했으니 승상의 말씀이야 더 엄중하겠지요? 내가 노파이기에 황비로 봉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가령 내가 젊은 처녀라면 어쩔 셈이지요?"
선비는 머리를 끄덕이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신이 젊기만 하다면 우리가 이럴 이유가 어디에 있겠소? 황제 폐하가 다소 부족해하실지라도 우리가 받들어 황비로 모시겠소만, 사실이 그렇지 않으니 우리도 할 수 없지 않소."
이미 한번 늙어 버린 몸, 제가 어쩌랴 싶어 선비는 조금의 미련이라도 끊어 놓으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좋아요."
노파는 한숨을 짓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일행은 하나같이 머리들을 숙였다. 노파가 슬피 울면서 기운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기가 어쩐지 면구스러웠던 것이다. 그들은 노파가 어서 멀리 사라졌으면 했다.
그런데 문득 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자, 보세요. 이러면 되겠어요? 이러면 나도 대리국 황비가 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일행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다섯 사람은 너무나 놀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들 눈앞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절세 가인이 애련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열 예닐곱 살 꽃다운 소녀, 그녀는 대리국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누구 앞에서도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경국지색이었다!
"전 이제까지 우리 숙녀동의 규례에 따라 할머니 형상을 한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예요. 자, 이러면 됐나요?"
단지흥은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며 입이 헤벌어져서는 자기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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